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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해를 맞이하면서

새 해를 시작하면서 왜 1년은 365일 인가를 생각하여 본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만일 80년을 산다면 1년을 365로 계산을 하면 29,200날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날을 더 의미있게 다짐을 하며 살라고 1년 365일을 주신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29,200날 중에 365일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은 허망한 것이어서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공급받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이다호 한인 장로교회 교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2012년도에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이 예배시간이다. 그러므로 아이다호 한인 장로교회 교인들은 2012년도 계획 가운데 이미 하나님과 약속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약속의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복을 받는 것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한 해를 보내면서

가는 세월 잡을 수 없듯이 2011년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셨던 은혜를 생각하려 한다. 하나님은 올 해에도 나에게는 하늘 아버지이셨다. 아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날마다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적절한 때에 적당히 주셨다. 또한 말씀을 풍족하게 주심으로 인하여 생명수가 강같이 흐르게 하셨다. 생명있는 자가 생존을 위하여 갈급함같이 하나님께 나가면 마실 것을 주셨다. 또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가끔 작대기와 막대기도 사용하시며 따끔하게 정신을 차리게도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을 확인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궁극적인 승리가 무엇인지도 알게 하셨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아이다호 한인 장로교회로 부임케 하시고 귀한 주님의 양떼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이분들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커다란 기쁨이다. 내년에도 이와 같은 기쁨이 계속되며 넘치기를 바란다. 오늘 저녁에는 교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2011년을 보내려 한다. 오늘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증거를 기대한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우리의 삶에서 세월의 허망함을 달랠 길이 없고, 인생에서도 세월의 흔적인 얼굴주름과 흰머리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2011년은 유난히도 청년실업문제로 인하여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 정권이 바뀌고, 각 나라의 대통령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또한 서민들도 민생고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갚느라고 정신이 없을 정도이고 물가안정에 따른 정부의 대책도 오락가락하여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점점 삶이 어려워져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몸부림 쳤던 한 해였다. 이와 같은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은 인간의 탐심, 지도자들의 이기주의에서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부패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부패한 성품과 욕망과 욕심으로 인하여 결국은 패망의 길로 간다고 한다. 영지주의는 인간의 지혜로 신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문인데, 그리스 신화에 텔포이 신탁이 있는데, 그리스의 도성을 중심으로 하는 건설이나 사업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텔포이 신전에 나가서 아폴론 신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신전을 들어가는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 지나친 열정과 생각을 금하라.'라는 문구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지나친 열정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으로, 이것을 보아도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탐심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똑같이 현대의 석학들이 좋은 머리로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욕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말은 허무함, 허망이다 세상은 왜 허망할 수밖에 없는가? 성경의 말씀에 세상이라는 곳은 늘 풍랑과 파도가 이는 바다라 하였는데, 왜냐하면 바다 물은 진흙과 더러운 것들이 모이기 때문에 솟구치며 요동치는 바다와 같다고 하며, 또한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평강이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감각이 없는 자가 되어서 자신의 몸이나 생각을 방탕에 맡기어 모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고 하는

우리가 흔히 쓰는 위로의 말 가운데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고 하는 말은, 고통과 아픔이 주는 유익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평안하거나 배부르면 생각이나 행동을 게을리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려움이 닥쳐야 고민과 생각을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여러 군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으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당하나, 믿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말하며, 고난을 통한 결과가 있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알았다는 것이며, 그리고 고난 후에는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많은 어려움을 당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윗이 당한 고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 아들인 솔로몬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찌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찌어다 아멘 아멘 0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시 72:1, 19)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믿음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사용을 할 수 있고, 남을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들만을 위한 믿음이 아니라 남을 위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즉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 일이 오히려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한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도로 바울이 택함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들은 커다란 실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일을 통하여 복음에 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에 감옥에 가더라도 너희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올바로 안다면 앞으로 남은여생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의 몸에 채우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모진 핍박을 받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것도, 또한 교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교인들이 확인하였다고 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 하나만을 지킨 믿음이 아니라, 그의 몸에 나타난 여러 상처와 고통의 흔적으로 교인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믿음에 유익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드리겠다는 고백이다. 우리들의 믿음은 나 하나만을 지키는데 급급하다. 아니 아주 이기적인 믿음을 가지기도 한다. 교회생활에서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이다. 교인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좋은 말만 해주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믿음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소개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신자는 나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교인들이 나를 놀려서 기쁨이 있고 재미있다면 바보가 되어 주면 된다. 믿음이 크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자칭 믿음이 좋다고 하는 자들이

보이는 것은 잠깐에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세상에서 사는 신자들의 삶이 고통과 환난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최신의 무기로 우리를 공격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대응을 하여야 한다. 세상은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세상을 속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처녀가 아들을 낳았고, 죽은 자가 살아나서 승천하여 하늘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그들이 자랑하는 과학으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들이 때가 되어 성취되었음을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 아닌 참말을 하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떠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떠나신 인간은 죄인이 된 것이다. 죄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세상이다.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창조주를 모르는 피조물들을 심판하시려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든 피조물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즉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계획을 알므로 인하여 넉넉하고 부요한 자가 된 것이다. 또한 세상이 우리를 공격하여 고통과 징계를 당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영생을 얻는 자가 된다. 비록 가진 물질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니 모든 것을 가진 부요한 자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계시는데 이것을 거부하고 신자들을 핍박하는 곳이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이 이러한 고통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장차 우리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며 아주 경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쇠를 단단하게 위하여 쓰는 방법이 연단이라 한다. 풀무불 속에 쇠를 넣었다가 다시 꺼내어 만들고자 하는 모양대로 두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은 동작을 수천 번 이상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단단해져서 쇠라는 강한 힘을 자랑하게 된다. 하나님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신자들을 연단하신다고 한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서 천국시민으로서 자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신자들의 삶의 내용이 매일 좋은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의 삶은 고달프다.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세상에서 악인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들은 악인들의 속임수와 궤략을 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악의 악함을 보게 하시며 그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심판을 확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악함을 보고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하고 찬양을 하여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의 공의가 악인들에게 실행이 됨으로 인하여 의인들은 기뻐하게 된다. 의인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가 약속대로 실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었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고, 또한 악인의 공격으로 인하여 죄의 공격의 무서움과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신자는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적이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는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고통과 핍박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신자로서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즉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성탄절이다. 그런데 성탄절을 모든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알고 즐기고 또 어떤 이들은 생각 없이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이 기쁨의 평화이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가?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일들은 천사들에 의하여 들판에 있는 목자들에게 알려 졌다. 천사들이 이 땅에 구주가 나셨음을 목자들에게 알리었고, 너희가 찾아가서 직접 확인하라고 하였다. 그 표적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가 예수 그리스도이라 한 것이다. 천사들이 이 말을 할 때에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리고 천사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목자들은 빨리 구유에 뉘인 아기를 찾기로 하였다.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뉘인 아기를 찾아서 천사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전하니 마리아는 이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목자들은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하며 돌아갔다. 유대 사회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한 직업이었다. 그것은 소작농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낮은 신분으로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기쁨을 얻을 수 없었던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에 이들을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확연하게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또는 수동적인 것으로 인하여 얻는 기쁨과 행복이 있다. 능동적으로 성취한 기쁨과 행복은 곧 자기의 자랑과 기쁨이 되는 것이다. 또한 주변 환경이 주는 안락과 편안함이 있다. 들판에서 살던 목자들에게는 많은 좌절과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기쁨을 주었다. 그들이 얻은 기쁨은 신분이 변하거나 물질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얻은 기쁨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되돌아간 것이다. 그

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시는가?

예수님이 보통, 일반 출생 법으로 태어나시면, 아담의 후손이 되어서 인간의 원죄를 갖게 되시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반드시 흠이나 티가 없는 온전한 것으로 드리게 되어 있다. 십자가의 온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죄가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의 출생법이 아닌 동정녀의 출생을 하셨다. 부정한 것이나, 죄가 있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제물로 사용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것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난다. 구약에서도 우리의 죄를 사함을 받을 때에 우리의 피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피를 드림으로 사함을 받았고, 신약에서도 우리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동정녀의 탄생을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기독교 신자로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근면하고 사치와 허영과 목표가 없는 허망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서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이다. 진리의 내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따르는 자들이 진실되게 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상실이 되는 것이며, 또한 진리를 담고 있는 형식이나 그릇이 깨끗하여야 그 안의 내용물이 더욱 돋보이고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 영향으로 인하여 세상이 혼란한 가운데, 교회 또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교회가 성장을 하였지만, 기독교의 본질과 신앙인의 기본적인 자세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부요함으로 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세상의 자랑과 눈의 안목의 자랑을 배제하고 성장을 하였다면, 어떠한 환경과 조건이 밀려온다고 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오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도 성탄절이 다가오는데도 기쁨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자들의 생활은 년 말을 맞이하여 각종모임이 있어서 분주하며 성탄절의 진정한 기쁨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찬양대 모임, 부별모임, 전도회, 선교회모임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와서 약속하시고, 다윗에게 네 씨를 통하여 견고한 터 위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하셨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들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 시작이 예수님이 아기로 오는 것으로부터이다. 마리아에게 찾아 오셨던 그 하나님이 나에게도 찾아 오셨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약속하신 내게도 임하였다는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한다.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 옛날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게 하신 큰 손과 펴신 팔로 일하시는 능력의 분이며, 교만한 자들을 흩어지게 하시고, 권세있는 자들을 내려 앉히시는 분이며, 비천하고 낮은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다. 또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잊으시는 분이 아니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내용 가운데 자랑거리는 신비적인 연합의 교리이다. 그래서 얼굴색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을 영적인 연합, 성령의 연합이라고 한다. 세상에 흩어져 나그네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으면서 일을 하지만 모든 사람 속에서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각 각의 은사가 다르지만 은사를 주신 분은 같은 성령님이시고, 교회 안에서 직분은 다르지만 다 같이 예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합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유지되고 계속되며 보전할 수 있는 것인데,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구체적으로 밝히시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의지이며,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루신 은혜의 공로를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연합의 사역이다.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영적인 연합은 영혼들의 연합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철저하게 진리에 기초하고 있는 연합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교리, 중생과 거듭남, 성령을 받는 것,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궁극적으로 의존하여야 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된 중생한 사람들의 연합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서로 처음 만나더라도 친밀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타국 만리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은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목격하심으로, 사역현장의 소식을 은혜롭게 전하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셨던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광은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었다. 그

이 평안을 너희들에게 주노라

요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거칠고 매우 사납습니다. 이웃의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할 수도 없으며, 운전 중에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정말로 참을 수 없어서 상스러운 단어를 막 뱉어 냅니다. 그러한 이유는 우리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마음의 평안을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히 살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을 하여 성실하게 살면서 집도 장만하고 더 많은 물질이 있으면 행복이 더 클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신문이나, TV를 통하여 들려오는 뉴스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을 사시면서 겪으셨던 일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데, 그 환경과 조건은 평안을 주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안해 하셨고, 진정한 평안을 전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평안을 너희들에게 주노라'하셨습니다. 이 평안을 주시면서 가서 나누어 주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생명의 떡은 진정한 평안을 얻는 것이요,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이 인간미를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꼭 먹어야 할 양식인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따라다니던 자들도 있었고, 심지어 왕으로 추대하려는 자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을 주러 왔다고 하자 그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나는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라고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본능적인 욕심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문의 정치 사회면을 보면 오늘도 차지한 철밥통을 지키기 위하여 불법을 서슴없이 행하고 또 철밥통을 빼앗기 위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동안은 이성적이고 과학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자랑이었고 또한 든든한 자원이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서 어떤 짓을 하다라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깊숙이 들어와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교회도 철밥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프로그램으로 택하고 있다. 교회는 철밥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이 떴다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배우려고 정신들이 없는 상황인데, 이와 같은 행위로 인하여 교인들은 피곤해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목회철학에 의하여 정책과 방향이 정하여 지는데, 목회자의 흔들리는 정책이나 각 종 프로그램 채택에 의하여 교인들은 헷갈리며 신뢰를 의심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은 장로교의 장로들의 권위마저 인정하지 않고 또 전통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그들의 믿음마저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는 약속 하에 시작하므로 기존의 교인들과 심한 갈등 속에서도 목회자는 자기의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험을 감수하더라도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이지, 어떤 프로그램에 의하여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교회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것으로 교회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을 충만하게 베푸시기로 약속이 되어있다는 것이므로 이 약속을 믿고 순종하므로 믿음의 선조들과 선배들이 이어진 것이지 어떠한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이 땅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다양한 문화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다양함을 허락하시고 그런 다양함에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획일적이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려는 실수를 하곤 한다. 아름다운 꽃을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로 바라보며 표현을 할 때에 그 꽃의 오묘함을 느끼는 감정이나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근원이나 동기는 같지만 표현은 인종과 문화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다양함에서 계획하신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창 10장 25절을 보면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민족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신실하게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 다양함에 통일성이 있으며 하나의 목표가 있기에, 교회들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민족을 향하여 선교를 간다. 즉 하나님은 이 땅에 다양하게 민족으로 나누시고 민족이나, 개인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도 다양함이 있는데, 같은 언어와 같은 피부의 색을 가지고는 있지만 문화와 풍습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일하심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공산주의자나 독재자처럼 강압적으로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유의지나 감정, 이성 양심을 주셔서 각기 다른 방법이나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안다면 다른 사람이 나와 다름이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의 인격이나 존재를 인정하고 겸손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의 지식은 피부의 색을 따라서 저주를 받았다든가, 복을 받은 민족이라고 판단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 나타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다름은 당연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기독교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약에서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하나님께 제사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건 이후에는 이방인들도 이방인의 땅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단이 공중의 권세를 쥐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죽으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겼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 이상 마귀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장소와 예배를 드리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분의 법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신령과 진정의 원리로 예배를 드리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예배에 질서와 절제를 지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초대교회의 예배에는 기도의 시간이 있어서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도를 드렸는데, 이 가운데에 큰소리를 외치며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기도하는 자들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은 신령한 사람이라 하면서 절제할 줄을 몰랐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들로 인하여 예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다. 순서에 따라서 방언의 기도를 하고 또한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통역을 세워서 기도를 하라하면서,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큰 소리로 기도를 하였던 자들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자랑을 하고 인정을 받으려 하였던 것이다. 또 만일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나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너희를 미쳤다고 할 것이니 예배로 모일 때에는 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기독교가 다원주의로 인하여 점점 진리와 의의 가치를 잃어 가는데 있어서 신자들의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선택 받은 자들에게 약속하심을 믿으면 본인의 것이 되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된다는 것으로, 이 약속이 결코 취소되지 아니함으로 구원의 안전함을 또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이 약속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의 안전함을 확보한 자로서 더 이상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기독교의 믿음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신자로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때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죽어서 구원을 얻었을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와 의는 점점 세상에서 자리를 잃어 간다는 것입니다. 1859년 찰스 다윈은 진화론이라는 학설을 발표하였습니다. 내용은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가 된다는 것으로 그 당시의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1860년 옥스퍼드대학에서 다윈의 동료인 토마스 헉슬리와 성공회의 사제 새무얼 윌버포스 주교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윌버포스 주교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헉슬리의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인정하겠다는 한마디에 토론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과가 나왔는데도 어떻게 다윈의 진화론의 학설이 150년이라는 세월까지 이어져 올 수 있는가에 궁금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고급스러운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무종교의 사람들은 아주 하급계층의 급진주의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하급계층이나 급진주의자들에게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싸움이라는 것은 폭력성을 갖고 있어서 끝의 결과는 상처와 피 멍이 드는 것이어서 싸움이 시작되면 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싸움을 권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싸움이다. 그런데 이 영적인 싸움은 내 안에서 진리와 거짓과의 싸움이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자만이 이웃과의 대인관계에서 관용과 사랑과 용서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영적인 전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먼저 진리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거짓이 교묘하게 방해하며 유혹을 한다. 마귀의 공중권세의 힘은 파멸의 길, 죽음의 길로 몰고 가는데 있다. 즉 파멸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 수 있거나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진리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요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다. 가지인 우리가 줄기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리이다. 즉 열매의 내용물은 줄기를 통하여 공급받은 수액과 생명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은 열매는 줄기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액과 생명을 공급받느냐의 싸움이 된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포도열매끼리의 싸움이 되고만 것이다. 내 포도열매의 크기가 이러한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의 싸움이 교회 안에서와 기독교인이 모인 곳이라면 어김없이 난다. 기독교인들끼리 싸움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와 같다. 열매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수고하거나 노력해서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가지인 내가 줄기에 붙어만 있었더니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자랑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을 하여야 한다. 또한 기독교인은 영적싸움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심한 욕설과 인신공격을 하더라도 분을 발하거나 그에 대응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만일 분을 발하면 하루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우호적이고 평화의 상태를 유지할 때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런 친구의 관계가 나중에는 적대적으로 또는 상대로 할 수 없는 원수의 관계로까지 비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까이서 교제하며 지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약 천 명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결국에는 경조사에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정리가 되어서 친구의 관계라 하더라도 계산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주변에 친구가 있는데, 자기중심적으로 사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실 때에 친구가 있고, 낚시나 골프를 갈 때에 필요한 친구가 있고, 여행을 떠날 때는 먼저 알아서 굿은 일을 척 척하는 사람을 택하여 함께 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기중심적으로 친구를 상대한다는 것을 친구에게 속마음을 들켰을 때에는 친구의 관계가 멀어지고 때로는 분노를 발하는 일도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민생활에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을 정말 어렵다고 합니다. 한 때는 우호적인 관계이어서 편안하게 대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불화살로 돌아와 많은 심적인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는 친구를 사귄다는 것도 일종의 모험을 하는 것과 같아서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더불어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평화적인 관계는 양쪽이 함께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를 평화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우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평화적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평화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호적이고 평화의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같은 편이 되어서 같은 목적,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같이 나갈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같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사람이 살면서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흠이나 주름이나 티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향하여 행군을 할 때에 진의 뒤쪽에 있었던 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으시고 불을 살랐던 일이나, 하나님을 원망하던 소리마저도 다 들으셔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광야에서 죽게 하였던 사건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러한 모양으로 저러한 모양으로 죽었던 자들을 보았던 모세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줄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자연의 것들에 비유하여 표현을 하였는데, 아침에 핀 이슬이 금방 사라지듯이, 들에 솟아난 풀들이 어느새 시들어 버린 것이라든지,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빠른 속도로 과녁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가버리는 세월 동안에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는 하나님께 미워하는 것들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날 수 만큼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며, 또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행한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었으며,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며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는데, 배가 고파서 고기나 참외나 부추를 기억한 것이 아니라, 애굽을 생각을 하였기에 음식이 그리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애굽을 그리워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을 발견하여 마셨는데 쓴맛이 나자, 곧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단물을 공급하여 주실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든 것입니다.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배가 고픈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요즘은 교회 안이나 세상이나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관이 흐트러져 있다. 교회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것이 신정정치이다. 즉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곳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분부한 것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과 분부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렇다면 그곳의 통치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흘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법은 윤리와 도덕이 기준이 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가난한 과부와 어린아이가 보호를 받을 수 있게끔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수확 철에 추수를 하게 되면 밭의 네 귀퉁이에 있는 것이나, 과실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들은 그들의 것이라 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고생하여 얻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그 땅에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는 곧 말씀인데, 만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심판이 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아야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순종하였을 때와 불순종하였을 때의 약속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여 심판을 받았는데 받았던 징벌은 이미 말씀하셨던 것들이다. 즉 앗수르나 바벨론에게 수치와 포로로 잡혀간 내용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실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으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민족에게 당하였던 수모가 재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던 백성들이 당하였던 수모가 오늘에도 교회를 향하여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니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하는 가운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는 세상에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지혜와 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겸손해야 하고 양보를 하면 남는 것도 없고 돌아오는 것은 이용만 당한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결국에는 승리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의 내용은 십자가의 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모든 것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을 하신 것이다. 그 순종이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까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에 따라 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죽음을 이기시기 위함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권세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사망의 권세 앞에 신음하며 두려워하고 고통을 받는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즉 사망을 이기셔야 사망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인간들을 구하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망은 모든 것이 끝이다. 그 사망 속에서 이겨야 한다.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부활의 능력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겸손과 섬김으로 산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 낮은 자의 지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땅 위에서 당당하고 즐겁고 기쁘게 삶의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다. 기독교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을 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피흘리시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시기와 탐심으로 세워진 인본주의 나라와 하나님의 사상과 뜻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는 것이다. 힘과 권력으로 세워지고 유지하는 세상이지만, 희생과 섬김으로 세워가는 교회이다. 세상은 일을 하면 당연히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오히려 물질을 드리기도 하고 헌신적으로 봉사도 한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보면 그들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곳이다.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신비한 곳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교회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고 늘 비판적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들이 다루기는 하지만 바라보는 초점이 다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하여 모인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인격이 변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일들을 보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회가 잘못된 일이 있으면 벌떼같이 달려들어 공격을 한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 안에도 자칭 신자라 하는 사람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많다. 모든 것을 세상의 눈으로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다. 교회는 죄인들이 죄 씻음을 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따라 가기를 소원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실수가 있고 부족함이 있다. 신자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그런데도 끝까지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지만 패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그냥 보고만 계시냐는 것이다. 저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신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저들의 핍박과 공격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 기도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믿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의인들에게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성탄절이 되면 선물을 주고받는다. 선물이라는 것은 남에게 인사로나 정을 나타내는 뜻으로 물건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선물을 받을 때에 겉 포장지도 예뻐야 하지만 속에 있는 내용물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받았다면 아주 기분이 좋은 추억이 된다. 매년 12월이 되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이가 더 해 가면서 흥분이 된다거나 기다려지는 마음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다고 한다. 우리에게 선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하기에 주신 것이다. 마치 우리는 선물을 받고 관심이 없어서 한 쪽 구석에 방치하여 놓은 선물상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았지만 우리에게 유익한 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성의가 부족한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죄인들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다. 죄인들은 죄를 지어서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 죄 값은 사망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신다. 그런데 이 일을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에게 주시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물이라 한다. 우리들은 죄인으로서 반드시 죄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그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고 주신 것이기에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선물의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어서 더 이상의 죄의 책임을 지지 않게 되어서 마지막 날에 죄의 형벌의 자리에 서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됨은 물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의 시작이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되는 것이다. 매년 맞는 성탄절이 은혜와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랑의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점점 커져 간다면 은혜의 기쁨의 크기도 더 할 것이다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이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용서가 생각보다 쉬지 않다는 것이다. 용서를 했다고 했는데 생각만하면 또 다시 분노가 치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주인이 일만 달란트 빛진 자를 불쌍히 여기고 탕감을 하여 주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는 자기에게 백 데라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주인이 그를 다시 불러다가 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의 종이 빚진 일만 달란트를 탕감하여 주었다. 탕감이라는 뜻은 빚을 다 감하여 주었다는 뜻이다. 채무자로서 채무이행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 일에 대하여 부담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여 줄 때에도 탕감이라는 의미의 용서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다시 그 문제에 대하여 다시 거론하지 않고 또한 잘못을 한 자도 부담감을 갖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탕감이라는 용서의 의미는 지나간 것은 다시 기억하지 않고 거론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탕감을 하여준 주인도 또 다시 거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빚을 탕감 받은 자도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기독교의 용서는 이런 것이다. 그 의미를 잘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생활과 이웃과의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 시험문제에는 진화론이 맞는다고 동그라미를 쳐야 하고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믿으며 살아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였다고 믿지를 않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을 어두움이라 한다. 어두움이라는 것은 좌우 앞뒤를 분간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혼동과 무질서만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빛을 밝히시는데 이 길이 참된 인간이 가야 할 길인 것이다. 인간이 본래의 목적대로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즉 창조주 앞으로 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어두움과 빛이 같이 공존할 수 없듯이,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한쪽에서는 창조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결과를 가지고 거슬러 올라가기 진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빛의 아들로서의 삶은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의 순종을 통하여 길과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즉 우리의 삶이 표본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영생을 가진 자의 삶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적인 기능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창조된 자는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뜻대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즉 창조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며, 그분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이문제가 현실에서 만만치 않음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진화론을 인정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자존심을 세워드리기 위해서는 창조론을 주장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의 시작은 나를 위하여 살 것

능히 모든 성도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찬송가 가사에 보면 작사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글로써 표현을 하는데,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찬양이 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고백은 불과 몇 장의 감사로 끝을 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하여 할 말이 참 많다. 자기들이 경험한 첫 사랑, 짝 사랑, 배우자를 만난 사랑, 부모님의 사랑에 어떠함을 말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울고 웃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곤 한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사랑 타령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은 묘한 것이라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도 않고 영원한 사랑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사랑이기에 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조주요,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 크신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으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셨다.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아들로 삼으시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의 일을 같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십자가의 사랑이라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이 있다. 우리도 찬송가의 작사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기록하며 찬양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느끼는 감성적인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삼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루신 뜻을, 이 땅위에 이루시기 위한 계획이나 일하시는 비밀을 알므로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동굴 속으로 피하였는데, 사울이 동굴 밖에 까지 추격을 해왔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여러 곳에서 외치고 있다. 문서선교를 통하여 이미 위기에 처한 교회들을 진단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라 생각을 한다. 경제 이론인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교회도 운영을 하였기 때문이다. 한 동안은 설교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해서 정말로 웃기는 설교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설교자들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정통적인 설교는 교인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에서이다. 일주일의 삶이 어렵고 힘든데 주일날 교회에서까지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 웃기는 설교를 들었는데 삶이 기쁘게 변했는가를 생각하여 보자는 것이다. 들을 때에 잠시 기뻤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영원한 기쁨을 전하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생명이 있는 자가 생존하기 위하여 생명수를 얻는 곳이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나아와 생명을 얻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들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받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을 위하여 성경 속의 인물들을 동원하여 교훈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앞에서 무지하여 자기의 고집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여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피조물이며, 이것을 창조하신 분이 있다, 그래서 피조물은 창조주의 섭리를 따라야 하며, 명령과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타락한 피조물들을 창조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공연장이 되었고, 연예인들의 장기 자랑을 하는 곳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유행하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이러한 것들을 거부하고 외면을 하니 사람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의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민교회에 있는 청소년,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더 일찍 떠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가정과 교회에 교육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좋은 청소년 지도자를 찾으면 된다고 하여 아우성을 쳤으나 문제의 답에 대한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침은 세상의 힘을 키워한다고 하는 것이다. 시험기간이 오면 주일 예배도 빠질 수 있다고 한다. 즉 세상은 하나님의 힘이 아닌, 좋은 대학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세상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교회에 가도 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또 교회에서도 교인들 간에 싸움이 시작이 되면 끝장을 보는데, 그곳이 세상의 법정에서의 판결을 따른다. 교인들이 싸우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경찰이 오면 순하게 응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이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 결국 서로의 의견이 대립이 되어 세상의 법정으로 가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지도 못하고 개입하실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현재 이민교회에 있는 1세대들은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우리의 부모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을 과연 그들이 두려워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들이 보여준 모습은 경찰을 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고도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청소년,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찾거나 계발을 하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하여야 할 일이 1세대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회개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들에게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땅의 토속신인 바알을 섬기고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구원을 시작을 하시고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다. 우리 인간들은 행위로나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여기서의 순종도 자의로서의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분부에 따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미쁘신 뜻을 이루시는데 그것을 우리들을 통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이루시려하는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즉 흠이 없고 순전하게 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에서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하면서 너희의 믿음을 위해서라면 전제의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가 감옥에 있음으로 인하여 복음의 내용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확인을 시키려 하는 것이 내가 감옥에 있어도 복음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너희의 믿음이 더 확실하게 되기 위하여 내가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바울이 죽으면 복음의 전파가, 복음의 사역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즉 내가 죽어도 복음이 계속 전해지고 있는 것을 확인시킴으로 인하여, 그 일을 하나님이 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다. 지금도 하나님이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일하고 계심을 믿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우리도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것은 구원의 완성이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에 안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양의 음성을 듣고 가지만 주변에 보이는 유혹적인 독이든 풀이나 실족할 수 있는 험한 길을 살피며 가야 하는 것이다. 신자들도 이와 같은 길을 가게 된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이라 하지만 삶의 의미는 날마다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세월은 참 빠른 것 같다. 벌써 2011년 12월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계신다. 봄에는 파릇파릇 새싹을 돋게 하시고 여름에는 잎이 푸르고 무성하게, 가을에는 오색단풍으로, 이제 겨울에는 바람을 불게 하셔서 나뭇잎이 떨어지게 하였다가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신다. 12월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이지만, 다른 어느 달보다도 더 바쁜 달이다. 세상 사람들은 산타를 기다리며 막연하고 허망한 것에 희망을 걸고 기다리지만, 그러나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웅장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는 12월은 어쩌면 정리를 하는 시기가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고 준비하는 달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시작되며 성취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기로 오심으로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었던 그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조명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공의와 사랑이 있다. 그렇다고 구약의 제사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사법을 완성시키시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움이다. 세상 사람은 12월에는 분주하고 흥분되어 있는 상태에서 보낸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볼 때에 기쁜 일보다는 괴로운 일이 많기에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임을 갖고 흥청망청 마셔서 괴로움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평안과 영광의 찬양이 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9)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서 분명하게 다름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과 모시지 않은 사람과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는 이유와 그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는 선행을 하여야 한다. 선행을 함으로서 예수님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선행을 보상의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말하는 선이라는 것은 도덕과 윤리가 기준이 됨으로 인하여 올바르고 틀림으로 가지만, 예수님 안에서의 선하심은 이해와 용서로 간다는 것이다. 즉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용서까지 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죄인들에게 임하였는데, 죄인들이 하나님을 몰랐을 때이다. 하나님을 알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구원하여 주시고 친히 아들이라 불러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와 같은 사랑을 이웃에게 행하는 자라고 한다. 즉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죄와 비판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이해의 차원에서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죄와 비판하는 일에 아주 익숙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람의 의로 정한 것이고, 사람들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직도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다면 세상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인이 정죄와 비판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낸다면 하나님의 의는 설 곳이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먼저 의롭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도 의롭다 하셨다. 즉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찬양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과 용서는 사람을 살리는, 즉 생명을 살리는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생명을 공급한다는 것은 생기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람이 생동감있게, 사람답게 사는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정치라는 것은 묘한 것이라,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많이 들으려 한다. 자기의 생각과 달라도 국민의 표를 의식한다면 양심도 변하고 도덕 윤리는 물론이고 진리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인 것은 표를 주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정치가를 통하여 이용한다. 정치가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정치인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사울 왕이 있었다, 사울 왕은 전쟁에 나가서 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첫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면서 왕의 자리에 오르려 할 때에 반대하였던 자들을 죽이려 하였고,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백성들이 환호하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외침을 듣고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사울의 결정적으로 지은 죄는 사람들은 의식하였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이 의식은 사무엘이 하여야 한다. 그런데 사무엘이 조금 늦게 도착을 하자, 사울은 자기가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사울이 서둘러서 제사를 드린 이유는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모였던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결정을 한 것이다. 즉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사울 왕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 말씀은 목회자들에게 목양에 지침이 되는 말씀이다.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서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변하여서 목사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지 않는다. 오히려 가르치려 한다. 그런데 가르치려 하는 내용이 세속적인 것들이다. 경제성장의 이론, 심리학, 상담학을 근거로 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오늘까지 이어온 하나님의 교회는 이러한 것들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러한 것들은 없었다. 그들은 오직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그대로 삶으로 옮긴 것이다. 저는 어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돈을 쉽게 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유명 상표를 도용하는 것이다. 상품의 재질이나 디자인이 뒤떨어지면서 세련미도 없지만 유명 상표를 붙여서 사람들을 속이고 쉽게 이익을 챙기는 방법이다. 즉 가치가 없는 것인데 유명상표를 붙이므로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거룩함을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경우가 있다.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기독교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볼 수 있다. 학교교육과 병원시설, 복지시설 등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또한 성경공부와 읽기를 통하여 한글을 깨우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는 기독교는 이상한 집단이라고 놀림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거룩함을 지키거나 세울 수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곳이나 잘난 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믿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의 생활 가운데서도 이와 같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 구제, 금식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것들을 누구 앞에서 하는가에 따라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다고 하지만 실수를 한다. 하나님 앞에 나간다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들고 가는 것과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경우이다.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만 자랑스럽게 드렸고,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자랑을 열거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나 반면에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하며 자랑할 것이 없어 하나님의 것을 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으로 드리는 것을 원하셨고, 제물만 자랑하며 드렸던 제사는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어머니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자신을 잉태하였기 때문에 죄인으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사람들은 돈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도 돈을 좋아한다. 돈의 출처는 모르지만 교회만 통하면 거룩한 돈이 된다. 그러면서 쓰이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까지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분별된 것으로 드려야 하는데, 이 분별이라는 것이 새로운 지폐로 만든 새돈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는 출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교회의 헌금은 돈세탁하는 것으로 되고 만다. 우리가 생각하여야할 것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 가운데에서 만일 카지노에서 행운으로 얻은 돈이나, 나라에 낼 세금을 탈세하여 만든 돈, 또는 종업원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얻은 돈의 일부를 드리는 헌금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에 대한 고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것이 근거가 되어 드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감사하여, 그 감사를 기억하며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도박장에서도, 탈세의 현장에서도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일을 도왔냐는 것이다. 곁단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분별력이 없이 받은 것으로 인하여 목사나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즉 요즘 교회가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개같이 벌어서 정성껏 바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돈으로 먹고 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기억하며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신다. 교회가 아무런 돈이나 다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예물에 속지 않으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말씀하셨다. 나는 공의의 재판장이다. 내가 너희를 심판을 할 것인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너희가 내 앞에 나와서 재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물이 마치 네 것 인양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편의 말씀 가운데 구원은 그 값이 엄청나서 돈으로 살수가 없고, 돈으로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만들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도 그들의 재물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데, 저들의 생각에는 저들이 이룬 기업과 거처가 영원히 이를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하였다. 어리석은 자들이 생각은 이 땅 위에 집을 짓고 영원히 대를 이을 것이라고 하고, 그 땅을 자기의 이름으로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여,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한 임무를 부여 받은 자들이다. 책임을 부여 받은 자들이 그 땅을 자기의 이름으로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짐승과 같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다가 떠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것을 잠시 빌려 쓰고 떠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원리를 모르고 사는 자들이 가는 길은, 구원 받은 자들이 기뻐하는 진노의 심판인 멸망의 길이라 한다. 저들은 마치 사망이라는 목자를 따라가는 양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저들의 집에 영광이 더하여 질 때에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떠나갈 때에 가져가는 것도 없고 가는 길이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다. 즉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서 감사하고, 가족이 있어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있어서, 따스한 집이 있어서,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어서 기쁜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의 이름에 영광을 더하며 사람들로부터 축하받는 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례요한의 태어남부터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기도하다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당시 제사장은 24반열이 있었는데 사가랴는 아비야의 반열에 속하여서, 그 해의 대속죄일에 드리는 제사의식 가운데 향단에 분향을 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분향을 한 후에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것이다.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와야 하는데 그 엘리야를 보내달라는 기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엘리야를 너의 아내인 엘리사벳이 낳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일은 너의 기쁨도 되고 모든 백성의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운 백성들을 세우는 일을 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가랴는 이 일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는 이 일을 사가랴에게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냈다 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 일의 증거로 사가랴를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고, 그 증거로 벙어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벙어리가 되었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면 이 일을 당한 사가랴는 어떻게 기쁨으로 감당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가랴는 구약의 말씀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는 기쁨으로 감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일하는데서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시는 일을 믿는 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을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사가랴 뿐만이 아니라,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도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이 임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우리가 식사기도를 할 때 보면,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이란 단어가 등장을 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육의 양식은 날마다 세 번씩 먹어야 하지만, 영의 양식은 가끔씩 먹어도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배가 고파서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없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며 시험을 하였다. 배가 부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가나안까지 순종하는가를 시험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죽은 것이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데 걸린 시간이 40년이 걸린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없이 육의 양식만을 먹은 사람들의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배가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로 행하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죽은 것이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이 말씀은 영의 양식, 육의 양식을 나누며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영의 양식의 중요성이 더 큰 것임을 강조하려 한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마귀의 요구는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확인시키는 사건이 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으로 지나가실 때에 우물가에 여인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는 동안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을 다녀오게 된다. 제자들은 구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니 예수님은 내게는 다른 양식이 있다고 하여 제자들을 놀라게 하셨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양식을 먹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인데, 썩어져가는 육을 위한 양식과 영생을 위한 양식인데 어떤 것에 우선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보면 구원 받은 백성들이 시온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장면은 너무도 감격적이고 영광스럽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그 기쁨이 우리의 현실의 삶까지 연결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즉 신앙인에게는 현실의 문제와 현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현실은 늘 기쁘고 평안한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구원의 영광의 자리인 시온산까지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하나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택하시고 하시려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를 거룩하게 세우려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거룩하고 흠이나 티나 주름이 없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우리도 거룩하게 만드려 하신다. 그런데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에 환난과 박해를 동원하여 사용하신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예수를 믿음으로 인한 핍박과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말씀에 환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 자랑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환난과 핍박이 이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환난과 핍박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환난과 핍박이 옴으로 인하여 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에 안식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러고 환난과 핍박을 주었던 자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으로 갚아 주신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환난과 핍박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 환난과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우리의 지혜와 판단력 부족과 욕심으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허영과 허망된 것을 위하여 무리한 투자와 은행 대출 할부금 상환으로 오는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분명히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속이려 한다. 나의 허망된 욕심에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다. 무엇보다도 감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감사를 찬양하는데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다. 이러한 찬양은 구원을 받은 자라면 당연한 것인데, 이것이 혼자 있을 때는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여러 명이 함께 있을 때는 가능한데, 혼자 있을 때는 기쁨이 솟아오르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것일까 생각해 보려 한다. 구원이 내게 어떻게 임하였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시편의 기자들처럼 손뼉을 치며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임한다. 이와 같은 선택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을 로마서 9장에서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 자들을 야곱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음으로 인한 것이다. 야곱은 그의 형인 에서와 쌍둥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선택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인 리브가에게도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셨다.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하여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대로 피조물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또한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이었던 바로에게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셨다. 이 일을 통하여 그 당시 주변에 있는 국가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셨다. 즉 교만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임하여 야곱의 후손으로서 야곱의 영광에 참예한 자가 되었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우리가 기도나 찬양을 하면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방문하셔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61장의 1-2절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대로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의 뜻과 성취하시는 방법을 모르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는 예수님이 어느 동네에서 어떻게 태어나실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어느 지방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할 것인가도 계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예수를 믿은 것이다. 즉 성경해석에 있어서 사람의 생각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서 읽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제 감사절 절기가 성탄절 절기로 이어지게 된다. 거리의 상점들이나 백화점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고 케롤이 울려 퍼지게 된다. 이때에 누구보다도 가슴이 설레 이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견고하고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는데, 이 나라가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면서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이 예수님이 아기로 오시면서 시작이 되면서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선지자들의 계시와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증명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성육신하시기 위하여 유대민족을 사용하신 것이다. 유대민족을 사용하셨다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인류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심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의 여러 민족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삼으시고 그의 나라를 세워 가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한 자가 된 것이고,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구약성경을 읽다가 보면, 조금은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들이 있는데, 전쟁에 나가서 포로로 잡아온 여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더 읽어보면 포로 된 여인의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의 의복을 벗기고 집에 살게 하면서 한 달 동안 시간을 주라는 것이다. 한 달 동안 시간을 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복을 보고 듣게 하여 지난날 삶이 어리석음을 깨달아 백성들과 아버지를 위하여 애곡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시간으로 준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들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왕들은 아내를 맞이하면서 여인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함께 가져와 섬길 수 있는 산당을 만들어 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었다. 그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임한다는 예표가 있는 것이다. 유대왕국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지만, 그러나 그들이 섬기던 신이나 또는 세상의 자랑과 힘은 연속적인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로서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상을 가진 가치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 하던 자들에게 나를 따르기 전에 먼저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다. 즉 구원을 받기 이전의 가치관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세상의 가치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하려 하는 것이다. 그 가치관의 다름은 세상 사람들은 장례식에 참여하여 슬픔에 잠겨 곡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오히려 부활신앙에 의지하여 더 기뻐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미래를 위하여 땅에 쌓아두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하늘에 쌓는 것이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보든 이방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면서, 또한 과거 삶의 가치관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며 얼마만큼의 믿음인가를 생각하고 확인을 해 보아야 한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현현하시는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펴신 팔과 크신 손으로 역사하시고, 가나안 땅에 살던 여러 부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곳에 살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부족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 손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음을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오심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현현하심이 자주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음은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지시한 말씀을 불순종하여 사랑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앗수르와 바벨론이었다. 저들에 의하여 도시가 멸망을 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믿음이 좋은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근거로 하여 간절한 외침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찾아와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의 내용은 너의 자손과 씨를 통하여 견고한 터 위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되지 않음을 믿은 것이다. 그러니 주의 얼굴을 비추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

너희는 먼저

너희는 먼저 아이다호에 와서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이다. 2011년은 나 개인적으로나 목회적으로나 가정으로나 여러 가지 일들이 참 많았다. 신앙인으로서 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감사의 내용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화로움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세상의 자랑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감사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근거가 되어,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확증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따라 심고 거두고,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심으로 인하여 농작물이 자라고 결실을 맺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누구보다도 더 열심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부지런하여야 한다. 게으른 자에게는 풍요로움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씨를 준비하고 동녘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열심히 사는 자에게는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이제 다가올 내년에는 무엇을 뿌릴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경에서 말씀하셨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 안에는 영원한 생명과 거룩한 의가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창조의 본래의 목적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의존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아야 산다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