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1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처럼 , 죄에 오염된 성품에서는 악한 생활과 악한 구조가 나왔다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품으로 인하여 선한 성품과 선한 구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은 새롭게 된 성품으로 시작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된다 . 그렇다면 성화의 삶을 통하여 무엇을 채워야 하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다 .   하나님의 형상이란 ?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다 . 이것을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또한 그분께서는 몸소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다 . 죽기까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셨다 .   아버지는 죽기까지 순종한 아들을 권능으로 살리셨다 .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 .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계신다 .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그분이 가신 그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 즉 ,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왕의 명령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된다 .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다 .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 나라는 선한 성품과 사회구조로 되어 있다 .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낮은 자 ,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인정을 받는 곳이다 . 그러한 성품과 사회구조가 이 땅에 교회로 세워진 것이다 .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새롭게 된 자로서 , 온유한 성품을 닮고자 하며 ,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로 모인 곳이 된다 .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 라는 말이 있다 . 한마디로 폭력 사회 속에서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마음과 뜻을 아는 자가 시행한다 . 그의 나라와 의를 드러내는 방식은 신자들이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는데만 나타난다 .   그래서 우리를 먼저 거룩하게 하셨고 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다 . 마음이라는 곳은 지정의가 함께 하는 곳이다 .   마음에 주의 계명을 새기므로 인하여 당연히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된다 . 그러므로 말씀을 지키며 사는 자가 법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   사도바울은 신자의 삶을 통하여 생명의 냄새와 사망의 냄새를 나타내라는 것이다 . 신자의 삶은 천국 나라의 법을 지키며 사는 삶이다 . 그러므로 자연인들과 선명하게 구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신자들은 정직과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 거짓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정직한 삶이다 . 신자가 정직과 진실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신자의 삶을 통하여 법은 가깝고 주먹은 멀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 거짓을 대항하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시고 의롭게 하셨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   “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 고후 2:16)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 그래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자를 좋아하신다 .   하나님은 그의 성품을 닮은 자를 좋아하신다 . 그리고 그 성품대로 사는 자를 보고 기뻐하신다 . 이것이 하나님이 복 주시는 방식이다 . 그러므로 의인이나 선행을 행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복이 임하는 것이다 .   교계의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 있다 . 교회가 어려워도 선교와 구제하는 일을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렇게 하면 축복의 통로가 막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신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은혜를 베푸셔야 한다 . 그렇게 하시면 그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아가 신뢰 고백의 찬양을 드리게 된다 .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기도한다 .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셔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 그러니 지체하지 마시고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 그러면 이 종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외치겠습니다 .   다윗도 이와 같은 기도하였다 . “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 시 41:10) 즉 , 악인들을 행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선포하여 저들을 부끄럽게 깨닫게 하겠다는 것이다 .   이것이 의인을 택하여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사역이시다 .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분에게 의존적이어야 한다 . 매 순간마다 은혜를 내려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   신자들이나 목사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를 하다가 보면 자기 자랑을 많이 한다 . 그런데 그 자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랑이 아니라 세상의 자랑일 경우가 허다하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 그 영광을 구원받은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   바리새인과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 차이는 분명하다 .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로 율법을 지킬 수 있음을 자랑하고 , 바울은 오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라는 것이다 .   신자들의 모임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라고 함은 그 약속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들의 자랑은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고 있다 . 학벌 , 돈 , 명예를 자랑하고 있다 . 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약속의 범위 안에서 오셨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은혜이다 .   정녕 알아야할 약속은 알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을 자랑하는 신자가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므로 인하여 징계를 받아 이방나라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있다 . 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하는가 ?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결과를 알게 하기 위하여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   이것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 하셨다 . 즉 ,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생각과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   “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마 6:2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

운전교습을 하다가 부부싸움도 하고 심지어는 이혼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생명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의 신경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   운전학원 강사에게 배울 때에는 기분이 상하지 않는데 , 남편이 하는 말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므로 성질이 폭발을 하는 것이다 . 단지 당신에게서만 이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   한국교회나 이민교회가 이와 같은 형편에 있다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리이다 .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믿음의 시작이요 전부이다 .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의 직분자가 되어 오랜 시간이 흘렀다 . 이제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리를 다시 배우자니 속으로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   그래서 담임목사는 알면서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이것을 건드렸다가는 마치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 그러므로 담임목사는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외부강사를 통하여 해결을 하여야 한다 .   십자가의 도를 잃었던 고린도교회가 있었다 .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 십자가의 도를 모르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자기의 욕심을 구하는 자가 되므로 결국에는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이다 .   번영신학과 극단주의의 종말론을 물들어 있는 교인들에게 다시 십자가의 도를 가르쳐야 한다 . 그래야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신다 . 그러면 회개부흥운동과 말씀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고전 1:18)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가끔씩 들어서 놀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는 이야기가 있다 . 유명정치인들 옆에는 점쟁이가 있다고 한다 .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고 애가 타면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의지하고 있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여야할 정치가가 점쟁이에게 미래를 묻는다면 차라리 점쟁이가 정치를 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농담이 나오는 현실이다 .   점쟁이의 처방은 부적이나 고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 이들의 주장은 사람마다 각 자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한다 . 그러니 운명을 바꾸면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고 한다 .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 사람마다 운명을 타고 났다면 그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 .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런데 부적이나 고사를 지내면 운명이 바뀐다고 한다 . 그렇다면 몸이 부적을 지니고 다니고나 고사를 지내면 바뀌는 운명은 가짜를 말하는 것이 된다 .   사람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가득차 있다 . 그래서 그것들로부터 안도감을 얻으려고 거짓으로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   거짓이 거짓을 속이니 오래가지 못한다 . 반복적인 지속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 그래서 더 세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수소문해서 찾아다니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 그분 안에 들어오면 두려움과 불안한 것들이 사라지게 된다 . 즉 ,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분의 약속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약속이다 . 이 약속을 십자가에서 피를 뿌리시며 행하셨다 . 그러므로 신자들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   “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 딤전 3:1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요즘 TV 를 보면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이다 . 가수가 아니라도 다들 노래를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 말속에 있는 내용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게 한다 .   신자들은 찬송가를 부른다 . 하나님을 경외하며 곡조를 붙여서 찬양을 한다 .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대중가요는 자기 마음을 위로하거나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 즉 , 노랫말을 부르고 있지만 그 가사의 내용을 따라서 행하는 의지적인 면은 없다는 것이다 .   신자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다르다 . 믿음의 고백이면서 그 길에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며 부르는 것이다 . 신뢰의 고백과 감사와 의지적인 믿음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   젊은 청년들이 좋아하는 찬양집회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 무슨 말인가 하면 대중가요처럼 감정의 호소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행함을 수반하는 믿음의 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교회와 신자들은 이 세대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미 교회 안에는 이 세대를 따르는 풍조가 많이 들어와 있다 .   찬양대의 찬양도 음악성을 강조하다가 보니 믿음과는 상관이 없이 전문가를 초빙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   신자들의 찬양은 내가 신뢰하는 고백이 삶의 목표이며 내용이 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반드시 의지적인 행함이 함께 하여야만 한다 .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입술로만 부르는 거짓 고백이 되는 것이다 .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롬 12:2)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올해 초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 차 산업혁명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 3 차 산업을 토대로 이어지는 과학기술 혁명이다 . 당연히 새로운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   그런데 목사들 가운데서 4 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상황에 따라 교회가 변하여야 한다고 떠벌이는 자들이 있다 .   그러나 그렇지 않다 . 세상이 변하여 빨라지고 혼잡해 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신자들은 고난이 와도 즐거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   우리는 그 동안 편향적인 믿음의 생활을 하였다 . 슬픔과 고난이 닥치면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다가 삶이 편안해 지면 주님을 멀리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그의 나라와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4 차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함이 당연한 것이 된다 .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 그의 말씀과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 그러므로 오늘도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되면 형통의 길로 가게 됨을 기억하여야 한다 .   “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레 18: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번 주에 교단 총회에 참석하였다 . 많은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 목회자도 지쳐있고 신자들도 지쳐있다는 것이다 .   교회의 성장이 예전만 못하고 또한 신자들의 헌신과 봉사도 이전만 못하다고 한다 .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날까 하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   생각의 결론은 이렇다 . 신학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겪는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 특히 번영신학이나 종말론에 집착하는 신학을 따랐던 목회자나 교회가 많았다 .   이들의 특징은 이 땅에서의 삶이 풍성하여야 하고 또는 내세에 깊이 빠져 현재의 삶을 무시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개혁주의의 신학은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에 있을 죄에 심판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삶을 말씀으로 기준을 삼아 산다는 것이다 .   즉 , 현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을 말한다 . 내 육체가 영생의 영혼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   마치 그릇에 내용물을 담듯이 우리의 몸이 성령으로 채워져 성령충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의 영혼이 풍성하지 못하다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학의 빈곤함 때문이다 . 지금이라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의 성경을 통하여 가르치고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그래서 칼빈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 오직 성격을 성경전체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   칼빈 선생의 가르침의 전통을 이어가는 개혁주의 신학이다 .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성경의 범위 안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   “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눅 24: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세상이 변한다고 한다 . 이 말은 사람들이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있음을 말한다 .   재미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승려가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미 YouTube 동영상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   이 일에 대하여 교인이나 목회자들까지도 동조하고 있다 . 그렇다면 올바른 산상수훈의 해석은 무엇인가 ?   구약성경을 통하여 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 왜냐하면 구약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만나서 성경의 모든 글이 자신에 대하여 기록되었음을 친히 말씀하셨다 .   달리 말하면 구약의 모든 글이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 글의 말씀이 성취하게 하셨고 , 성취된 말씀을 친히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   구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완성이 되었고 성취된 신약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을 통하여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성경해석의 기분이 되어야 한다 .   만일 이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성령을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   우리의 얕은 성경 지식과 교리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있다 . 특히 개혁주의 신학을 따른다고 하면서 성경을 성경의 전체로 해석하지 못함은 정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 눅 24:4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섬기던 교회를 떠난 지 16 년 만에 방문을 하여 수요예배 설교를 하였다 . 감회가 남달랐다 . 교회 주일학교를 열정적으로 섬겼던 추억이 생각났었다 .   그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음으로 인하여 교인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 이것은 이민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   목사들의 부적적한 언행으로 교인들과 신뢰를 잃었고 , 교인들 간에서는 서로를 행한 신뢰가 무너졌다 .   이 모든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이요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   왜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가하면 마지막 때에 심판을 하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는 것을 망각하는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다 .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도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신 분이다 . 즉 ,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는 징계를 하시는 분이시다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없으면 무질서가 자리를 잡게 된다 . 그것에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렇게 되면 서로 상석을 앉으려 싸움이 시작된다 . 이것이 분쟁이 있는 교회의 특징이다 .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모임이다 .   그리고 교회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성령이 충만한 자들을 세워서 역사하신다 . 성령이 충만하다함은 성경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이다 . 즉 ,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목사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전적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하여 달려갈 길이다 .   “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 전 12:14)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딸 아이 대학원 졸업식이 있어서 뉴욕에 갑니다 . 아이다호에서 직항이 없어서 시애틀을 경유하여 가고 있습니다 .   보이시에서 시애틀까지 예정된 시간보다 약 25 분 정도 빨리 랜딩을 하였습니다 . 그런데 무려 35 분을 활주로에서 기다리다가 게이트에 들어왔습니다 .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 출발이 빠른 자가 결승선에 먼저 들어온다는 보장이 없고 , 건강한 자가 반드시 장수한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   신자들의 믿음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 모태신앙이라 하여 다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 왜냐하면 구원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입니다 .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세상의 삶이 그렇습니다 .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 구약의 다니엘서에서는 강대국을 무너뜨리고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손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결국에는 뜨인 돌 ( 모퉁이 ) 이 로마를 무너뜨린다는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 우리는 하루하루를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살면 됩니다 . 그것이 사람이 행하여야할 본분입니다 .   “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 전 9:11 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