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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이번 겨울은 무척 길게 느껴진다 . 아직도 아침이면 영하의 날씨이다 . 그러다보니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더 생긴다 . 그런데 사람만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고 있는 식물들도 있다 . 봄이 오면 개나리가 꽃을 피고 진달래가 존재감을 나타낸다 .   기다림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있다 . 겨울이 지나가야 봄이 있다 .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잘 버티어야 한다 .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까지 현실이라는 시간을 책임을 다하며 보내야 한다 .   농부가 씨를 뿌렸을 때는 열매를 바라며 심은 것이다 . 열매를 기다리는 과정 속에 기다리는 것이 있다 .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려야 한다 . 주님이 다시 오시지만 그 때까지 은혜를 받으며 책임을 살아야 한다 .   우리가 자연스럽게 쉽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다 . 원망은 ‘ 못 마땅히 여겨 탓하거나 분하게 여겨 미워함 ’ 이다 .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결과에 대한 불만이다 . 우리가 잘 안 되고 , 내가 잘못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 , 다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   나라가 잘못된 것은 대통령의 탓이라고 한다 . 아침저녁으로 출퇴근길에 교통체증이 있는 것도 대통령을 잘못 뽑았기 때문이라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 우리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 이것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때부터이다 .   요즘 교회나 기독교 인사들 가운데에서도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소리를 내고 있다 .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 공간에서는 저마다의 당당함을 외치고 있다 . 바른 소리를 외치는 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죄인들에게 외쳐서 깨우칠 것이라는 생각이 어리석은 것이다 .   우리가 개혁에 동참하는 것은 나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 일상의 삶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 내가 있는 곳에 거룩이 있고 , 죄가 지나가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 신자들 모두가 각 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한다면 , 그것이 개혁인 것이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뻔뻔해야 한다 .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도 할 수 있다 하고 맡겨만 달라고 해야 한다 . 그러다가 지도자로 선택을 받으면 그 때에는 오리발을 내밀면 된다 . 민도가 낮았을 때는 정의를 외치고 선동을 하면 따르는 자들이 함께 하였다 . 그러나 지금은 세대가 바뀌어서 선동이나 구호로만 되지 않는다 .   교회도 역시 옛날과 같지 않다 . 목사들의 설교도 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 예수 천당 , 불신 지옥 ’ 이라는 대명제 아래에 각론이 있어야 한다 . 목사의 설교가 총론과 주제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려 주셔야 한다 .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곧 정의의 시대가 올 것을 예상했었다 .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 아합 왕의 부인인 이사벨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엘리야에게 호령을 하였다 . 이에 놀란 엘리야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 실망과 좌절하였다 . 그래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간구한다 . 빨리 데려가 달라고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였다 .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간다 .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 그리고 하나님은 일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 천둥소리 바람 소리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 세미한 음성으로 일하심을 알게 한다 . 그리고 말씀하신다 . 엘리사를 택하여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고 ,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 하신다 .   엘리야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 남겨둔 칠천 명이 있었고 , 이방나라의 왕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 위에 서 있다 . 즉 세상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는 것이다 . 썩음과 사망이 있는 곳이다 .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셨다 . 오신 목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하우스 푸어 (House Poor) 는 집을 소유하고 있어도 생활에 곤란을 겪는 것이고 , 전세난민은 집을 살 돈도 있지만 집 값이 떨어 질까봐 집을 구매하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라 한다 . 그런데 전세 값에 조금만 더 보태면 집을 살 수 있다 . 전세 값이 이렇게 오르는 지역은 학교 주변이라 한다 .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서라면 금전의 손실만이 아니라 삶의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교회 주변의 집값이나 전세 값은 어떠할까 ? 반대로 집값이 떨어진다고 한다 .   그런데 만일 교회가 참다운 교회가 되어서 신자들이 빛과 소금의 존재가 된다면 그래도 교회 주변의 집값이 떨어질까 ? 이 모든 현상이 교회가 교회로서의 참 기능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다 . 그 당시에는 마을에서 큰 건물이며 중심이 되는 건물이 회당이었다 . 그러니 당연히 회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을 해 나간 것이다 .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 도심외곽이나 외진 곳에 교회가 있다 .   교회나 학교나 가르치는 곳이다 . 학교는 이미 나타난 결과를 갖고 역학적으로 가르치는 곳이고 , 교회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것들에 창조의 과정과 목적을 가르치는 곳이다 .   하나님께서 땅의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된 것이다 . 그래서 우주만물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있다 . 자연의 시작과 인간의 시작을 가르치는 곳이다 . 인류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뜻을 아는 것이다 . 그러니 인간이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이 자신의 뜻과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셨다 .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언제부터인지 애국가를 들으면 코끝이 찡해져 온다 . 태극기를 바라보면 친근감을 느낀다 . 외국생활을 하면 자연스럽게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 . 그렇게 되는 것 같다 . 외국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은 현재 살고 있는 곳을 제 2 의 고향이라 한다 .   이민자들의 삶이 모두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 낮이 설은 환경에서 언어와 문화에 적응을 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 그래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은 고국이 있기 때문이다 .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 나를 키워준 나라는 언제든지 내가 돌아가도 반겨줄 것이다 . 어느 누구도 내가 고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뭐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신자들에게도 본향이 있다 . 천국이다 . 신자들은 본향인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다 . 그런데 그 곳을 가는데 기대와 기다림은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는 것 같다 . 확인을 시키고 다짐을 하게 하여도 흔들리고 있다 . 천국이 있다는 것은 믿는데 어떤 곳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교회로 와 있다 . 그리고 천국의 모형이 교회라 한다 . 신자들이 천국을 빨리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 천국의 모형이 교회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 안에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 감정의 대립이 너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 그러니 이리저리 보아도 마음에 드는 구석은 하나도 없다 .   신자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하고 , 본향을 그리워하는 찬양을 불러도 감동이 없다 . 그러니 참 큰 일이다 . 어쩌면 좋으랴 한탄이 절로 나온다 . 애국가를 들으면 눈물이 나온다고 하면서도 천국을 기다리는 찬송에는 그저 담담할 뿐이다 .   아직도 천국보다는 이 땅에서의 삶이 좋기 때문이다 . 그 만큼 죄와 친숙하다는 것이다 . 육신의 정욕을 버리지 못한 증거이다 . 영원이라는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행복과 기쁨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 이 땅에서의 기름진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심정 ‘ 을 기대감이라 한다 . 결과를 얻기 전까지의 소망이라 할 수 있다 . 기다리던 일에 결과가 나타나면 평가를 한다 . 기대치 이상이다 , 또는 이하라 한다 . 그런데 기대치라는 것의 기준이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 각 사람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   그래서 지난 정부의 평가에서도 사람마다 다르다 . 평가의 기준이 다르고 기대감이 달랐기 때문이다 . 참 힘든 일이다 . 그러니 모든 사람을 기쁘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대감이 있다 . 당연히 있어야 한다 . 그런데 사람의 생각으로 기대감을 가지면 아니 된다 .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법에 따라야 한다 . 교회는 특별은총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 그러니 특별은총 가운데에서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   교회를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갖고 온다 . 그래서 내용과 사연을 보면 참 다양하다 . 그런데 곤란한 것들이 있다 .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게으름과 부지런함으로 얻을 수 있는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 굳이 예를 들자면 농부가 봄철에 씨를 뿌려야 하는 문제를 행함이 없이 기도로 씨를 뿌리려는 믿음이다 .   신자들의 믿음의 생활에서도 책임의 문제와 은혜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 신자가 되었지만 세상은 바뀐 것이 없다 . 옛날에 있었던 것들이 그대로 다 있다 . 그러나 신자들은 기도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 내 눈에 보기 싫은 것들 , 죄를 유혹하는 것들이 다 사라지게 해 달라 한다 .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 신자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 세상은 그대로 있지만 내가 달라지고 바뀌는 것이다 . 그 전에 있었던 왕대포집이 내가 신자가 되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 이제는 내가 달라져서 왕대포집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 이전에는 그런 것들과 가까웠지만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산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비록 제한적인 삶을 살지만 지루하다 . 또한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도 꼭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 때로는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하기도 한다 . 그러나 삶의 방향과 목적이 있다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다 .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 초대교회 교인들은 기쁨이 있었다 . 그런데 그 기쁨은 두려움 속에서도 기쁨이라 한다 .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죽음을 내어 놓고 믿어야 하는 형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과연 현대의 교회에서는 이러한 기쁨이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이 생긴다 .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기쁨을 누리고 싶다 .   교회 안에는 지금 본질과 방향이 실종된 것 같다 . 먼저 새생명을 얻은 기쁨이 없다 . 새생명을 얻은 감사가 없다 .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하여 정당하여 진 자들이 거룩을 향한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였다 . 또한 어느 곳에 있든지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하는 거룩성을 잃었다 .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영역이 있어야 하고 , 통치의 왕이 있고 통치의 대상이 증거되어야 한다 . 그리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일치성이 있어야 한다 .   교회의 본질과 속성이 실종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기쁨이 없다 . 그러다보니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있고 , 파벌 싸움이 있고 ,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 간에 싸움이 있는 것이다 . 갈등의 원인은 나아갈 방향과 목적이 다르다 보니 갈등과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   교회의 믿음의 본질은 십자가의 믿음의 비밀에서 시작이 된다 . 예루살렘 교회는 큰 교회 건물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 방송 시설을 탓하지 않았고 , 주차장 시설을 걱정하지 않았다 . 모일 수 있고 ,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면 만족하였다 .   교인들은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였지만 ,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세상을 살다가 보니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 뻔히 알면서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때를 쓰기도 한다 . 잘못한 것을 알면서 마지막 말 한마디 미안하다는 표현을 못 한다 . 머리로는 안 되는 줄을 알지만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 .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고급한 인격을 소유한 자이다 .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육체의 고행을 한다 . 육체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 육체가 고통 가운데 있으면 부정한 것이나 탐심이 사라진다고 믿고 있다 . 이 방법은 타 종교에서 쓰는 방법이다 .   그러나 신자들은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 악을 선으로 이기는 법이다 . 선을 알아야 악을 물리칠 수 있다 . 먼저 선을 알아야 한다 . 지혜 , 공의 , 정의 , 정직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 그런데 이것들의 시작이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   사람과 사람과의 싸움은 각 자의 고집의 충돌이라 하겠다 . 즉 가기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정의롭다는 것이다 . 상대방 역시 같은 생각이다 . 이 고집의 연장으로 질서를 세우기 위한 법원이 필요하다 . 잘잘못을 밝히고 옳은 것을 세우기 위함이다 .   이 충돌은 개인 , 집단 , 국가 , 연합 국가 간에도 똑 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 그래서 국제법이나 유엔이 정한 법이 있다 . 이러한 법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 힘있는 자들에 의해서 변경이 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정하신 법은 영원하다 . 변하지 않는다 . 그것은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다 .   그래서 의인으로서 악을 거부하고 물리치고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수고가 있다 .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한다 . 용사라 함은 전쟁에서 적군을 물리치는 용맹스러운 사람을 말한다 . 그 만큼 지략이 있고 자기의 몸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훈련된 자이다 .   분을 발하면 어떤 상황 ,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