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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 욘 4:3)   요나서로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이다 .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요나에게 박넝쿨을 예비하여 주신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 선지자 요나를 택하셨다 .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세상에 알리게 하기 위함이다 .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세상 나라들 앞에서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면서 오늘의 삶을 회개 하라는 것이다 .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고집으로 하나님께 투정을 한다 .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것이 싫은 것이다 . 이것은 선지자가 감당하여야할 책임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의 벌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더위를 피할 박넝쿨을 준비하여 주신다 . 그리고 니느웨에 있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십이만여명의 사람들과 가축까지도 자비를 베푸셔서 진노의 심판을 돌이키신다 .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품안에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구원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준비하셨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는 것은 예물이나 박수를 쳐서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올바로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정의를 세우고 공의를 시행하는 것이고 , 인자를 사랑하며 ,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 오늘 교회에 오실 때에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오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 요일 3:1)   사도요한이 서신을 보내는 교회에는 어떤 것이 부족하였을까 ? 생명이 없고 , 진리를 향한 방향이 없는 삶 , 공동체를 파괴를 하고 있었다 .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부족함이 지금 이 땅에 세워진 교회에도 있다 . 부활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명이 없고 ,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종말적인 삶이 없고 , 사랑의 공동체에 사랑을 없다 .   만일 찐빵에 앙꼬가 없으면 찐빵이 아니듯이 오늘의 교회들 가운데도 붙잡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잊고 있다 .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에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확인하게 한다 . 하늘 아버지로부터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죽으신 사랑이다 .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쁨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생명력이 넘치게 되고 , 하늘 소망이 생기고 ,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을 하며 섬기는 자리로 가게 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없이는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없다 . 그 크신 사랑을 얻은 자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 . 공동체에서 남 탓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   나약한 신자들은 이미 사랑이 성숙한 공동체를 찾아다닌다 .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받을 때보다 섬기며 줄 때에 더 크게 역사하신다 . 하나님께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게 되고 , 내 이웃을 위하여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하게 된다 .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가인을 소개하고 있다 .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 그 사랑이 없었던 가인은 그의 동생인 아벨을 살인하였다 . 아벨은 그의 형에게 잘못하지 않았다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 잠 25:5)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데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 “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 미 3: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지도자들을 세우신 것은 정의와 공의가 시행이 되어 모든 백성이 은혜를 입게 하기 위함이다 . 그런데 제사장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고 , 선지자들은 돈을 준 자에게는 평강이 있을 것이라 한다 .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왕은 왕다워야 하고 , 제사장은 제사장다워야 하며 , 선지자는 선지자답게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   지도자들이 하여야할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야하고 그것을 시행되는 공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은 맡은 직책을 통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였다 . 부자의 편을 들어주어 , 부자가 가난한 자의 재산을 빼앗고 종으로 팔아넘기는 것을 보고도 눈을 감아 주었다 . 그들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   그래서 미가 선지자가 외치고 있다 . 불의한 지도자들 앞에 서서 외치기 위해서는 “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 미 3:8) 한다 .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다 . 왕 앞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으면 제하라고 한다 . 그리고 진짜 선지자는 왕 앞에서 직언을 하는 자입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불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 성령을 받는다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 그러면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고 , 정의가 생각나며 , 담대히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 잠 24:28)   ‘ 거룩 ’ 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말한다 .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레 19:2 하 )   하나님께서 내 뜻과 생각이 이러하니 너희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는 이미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에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마 5:13) 하셨다 .   그렇다면 거룩과 소금으로 무엇을 말하려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떨어진 곡식과 밭 귀퉁이까지 거두지 말고 , 포도원의 열매도 다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   또한 이웃과의 삶속에서 도둑질 , 거짓말 , 거짓 맹세 , 폭력과 억압 , 공정한 재판 , 아는 사람이라고 봐주지 말고 ,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 판단을 하라는 것이다 .   그리고 거룩한 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레 19:16) 라며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이 한인교회라면 치를 떤다 . 왜 그럴까 ? 사람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비방할 권리가 없다 . 더 나아가 뒷조사를 해서는 안 된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그와 같은 권세를 준 적이 있는가 ?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노의 심판을 받고 포로로 잡혀 갔다 . 왜 잡혀갔을까요 ? 거룩하지 못하고 맛 잃은 소금이 되어서 짓 밟힌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이제 열린문장로교회 교인이라면 이웃에 대하여 비방하시면 안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 잠 23:4)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신자들은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은 부요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도 부요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 그러시면서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   너희가 애굽 땅에서 종으로 압제를 당하였고 , 가난으로 인하여 굶주렸다 . 그러니 가나안 땅에 살면서 종에게 압제 하지 말고 , 가난한 자를 굶주리게 하지 말고 ,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하셨다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 그들은 부자가 되어서 종을 압제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것도 빼앗는 자가 된 것이다 .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 이웃의 것을 빼앗거나 속이는 것에 대한 경계이다 . 가나안 땅에서는 내가 애를 써야 부자가 되는 곳이 아니다 .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청종하고 그렇게 행하면 복을 받는다 .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 ,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 신자가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 때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 이전에 너희도 죄악 가운데 있었었다 . 그러니 그러한 자들을 만나면 정죄하지 말고 나의 이전의 모습을 생각하여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 이 말씀을 생각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구원의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 잠 22;2)   세상은 사람을 판단할 때 돈과 출세로 따진다 .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에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   사람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함은 , 하나님의 뜻과 마음으로 채워졌는가를 보신다는 것이다 .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주셨다 .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가진 자가 되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사람이 돈을 손에 쥐게 되면 목이 굳어진다 . 다시 말하면 교만하여진다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도 목을 숙이지 않는다 .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도 자기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고 심지어는 고치기까지 하려 한다 .   교만한 자의 특징은 회개를 하지 않는다 . 자기가 하는 것이 다 옳기 때문이다 . 심지어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 외치기도 한다 .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위하여 심판을 준비하셨습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참 신자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지를 아셔야 합니다 .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 하나님의 뜻과 같은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그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 하나님의 소원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 미 6:11)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 하니깐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만 적용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 그러나 이 말씀을 양심의 저울추로 적용을 할 수 있다 .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할 상식이 있다 . 그런데 상식은 나도 아는 것이고 이웃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 만일 이 상식을 지키지 않으면 양심에 털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거짓 저울추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의 탐심 때문이다 . 이웃을 속여서라도 나의 이익을 챙겨서 나만 잘살아 보겠다는 욕심이다 .   내 마음에 탐심이 자리를 잡으면 이웃 사람들에 대한 양보나 배려가 없다 .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이다 .   이웃을 사랑한다면 거짓 저울추를 사용할 수 없다 . 오히려 기쁨을 주기 위하여 정한 저울추를 사용하고도 덤으로 더 주어야 한다 . 이렇게 하면 이웃은 기쁨을 얻고 살만한 세상이라 하며 콧노래를 부른다 .   정직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이 된다 . 나부터 시작을 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 그렇게 정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된다 .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것이 되어 정의를 세우고 공의를 실행하는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하나님은 나를 복의 선물로 사용하십니다 . 내가 하나님의 선물이 되어 이웃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존재입니다 . 그래서 우리를 열린문장로교회로 불러 모아 주신 것입니다 . 우리는 각각의 선물이 되어 공동체에 선물이 됩니다 .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 그래서 우리는 양심과 상식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 마음의 저울추를 속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 욘 3:10)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다시 니느웨로 간다 . 요나는 선지자이다 . 선지가 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 하나님의 뜻은 죄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에 도착을 하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외쳤다 . 그리고 사흘 길을 돌아야 할 길을 하루만 다녔는데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   왕이 조서를 내려 사람이나 짐승이나 음식이나 물도 마시지 말라고 금식을 선포하고 ,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 각기 악한 길과 손에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을 명령한다 . 그러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고 그 진노를 돌이켜서 니느웨 백성이 멸망하지 않게 하실 것이란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진노의 심판을 거두신다 .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들을 좋아하신다 . 죄악의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 죄악을 행하는 백성이라도 회개의 자리로만 나오면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는 것이다 .   그러나 요나는 회개받는 니느웨 백성들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 . 오히려 니느웨 백성이 구원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 이것은 선지자로서 하여야 할 일이 아니고 , 제사장 나라로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입니다 . 또한 택함을 받은 제사장 나라의 백성입니다 .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웃 나라에게 전하여 구원을 전하는 위함입니다 . 그러나 그는 맡은 책임을 감당하지도 못하며 불순종에 대한 회개도 없습니다 . 요나의 이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요일 2:27)   신자들이 이단을 만나면 괜히 겁을 먹거나 스스로 작아진다 . 성경에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한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셨다고 하는데 신자들은 왜 그럴까 ?   성경적인 신자와 이단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다 . 즉 ,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믿고 따르면 된다 . 그런데 이단들은 성경말씀에 더 하거나 뺀다 . 다시 말하면 사람의 생각을 더한 것이다 .   성경적인 신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 . 이것은 사람의 이성이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 그런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믿고 따르는 신비한 은혜인 것이다 .   성경적인 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 이단과 다름의 기준이 사도신경이 된다 . 사도신경의 신조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   이단이 자꾸만 시비를 거는데 그러한 것들은 사도신경의 고백을 넘어선 것들이다 . 그러므로 대화나 대꾸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 신자가 지켜야 할 것은 고백하는 대로 사도신경을 따르면 된다 . 그 이외의 것은 이단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 이단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우리들은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이고 저들은 사도신경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 그러므로 어떠한 대화가 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 혹시 이단이 찾아오시면 사도신경을 믿고 따르느냐 물으시고 아니라면 더 이상 대화를 안하셔도 됩니다 . 왜 그럴까요 ? 성경을 보는 방식과 해석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 잠 21;3)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나갈 때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들고 나가야 한다 . 그렇다면 제물을 좋아하실까요 ? 아니면 제물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하실까요 ?   신자라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경을 살펴서 찾아보아야 한다 . 성경에서는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삼상 15:22 하 ),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사 1:11) 고 하셨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미 6:8) 라 하셨다 . 즉 ,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정의와 공의를 시행되는 것을 더 좋아하심을 말하고 있다 .   무슨 말인가 하면 육일 동안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삶 속에서 저울이나 되를 속이지 말고 , 이웃에 대하여 비방하거나 ,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   더 적극적으로는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고 ,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 하신다 . 이와 같은 선행을 하는 것이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신자는 세상에서 소금이요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다가 오는 것입니다 . 그와 같은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