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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삼하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악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교훈한다. 육체의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이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윗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것을 감추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장에서 불러 그의 집으로가 발을 씻게 한다. 그러나 다윗의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 그러자 요압에게 명령하여 우리아를 적군의 성벽 밑으로 가게 한다. 우리아는 적군의 활 쏘는 자에 활에 맞아 죽는다. 다윗의 거짓으로 인하여 충성된 신하도 몇 명을 잃게 된다. 다윗의 범죄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아의 장례가 끝나자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온다. 그 이유는 그녀가 아이를 낳기 전에 아내로 삼으려는 속임수이다. 이와 같은 장면을 하나님은 다 보셨다. 그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범죄 사실을 알리고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 12:10),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삼하 12:14). 이 일로 다윗은 죄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확인하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가 우리들의 마음에 들어와 잉태를 하면 결국에는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죄는 사망의 자리에 이르기 전에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가 무섭습니다. 한 번 마음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삼하 10:12) 삼하 10장에서는 다윗이 이웃 나라 암몬에게 먼저 화친을 청한다. 그러나 화친을 거부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벌을 받게 된다. 다윗에 암몬 왕 하눈의 아버지 나아스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아스가 죽어서 다윗은 조문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선의를 거짓으로 바꾸어 악을 조장하는 신하들로 인하여 조문단이 망신을 당한다. 하눈은 조문단을 잡아 수염을 반을 자르고 바지를 엉덩이가 보이는 수치를 준 것이다. 그 당시 풍습으로는 수염은 명예와 권위를 나타낸다. 즉 자유인이란 상징이 된다. 그런데 수염을 잘랐다고 함은 노예이며 종으로 내려가는 수치를 준 것이다.   다윗이 마음이 상한 줄을 알고 암몬이 먼저 전쟁 준비를 한다. 암몬은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아람 지방에 있는 나라들을 돈을 주고 용병을 구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군대는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선발된 군사로 대적을 한다. 즉 정예의 군사와 수만 명의 용사가 싸웠지만 다윗의 군대가 승리를 한다. 이렇게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삼하 7:1). 모든 원수에게 벗어나 편히 쉬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다.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 몸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곳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 많은 군대를 동원하고 사람의 지혜로 계략을 짜서 하나님의 군대를 공격하지만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따르는 백성에게는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함이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해 마다 드리는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으로 드리는 제사는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적인 행위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드리는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몸으로 드리는 인격적인 순종의 제사이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드리므로 그분에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의 것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하게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 언약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함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데 구원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입니다. 나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시편 40편은 다윗의 시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수많은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7). 무슨 말인가 하면 구약성경에서 나를 가리켜 하신 말씀을 내가 이루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하셨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의 아들에게는 기쁨이 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에 말씀을 새기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즉 율법의 제사로는 드리는 자들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드리는 제사는 의식적이며 외적인 것만으로 드리고, 제사를 드릴적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고,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서서 드려야 하고 매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드릴 수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희생제물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인격적으로 순종하여 몸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말씀을 기뻐하였고 자발적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 번에 드린 희생제사의 능력이 큼으로 더 드리지 않아도 되며, 매년 제사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유대인들에게는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한 궁금함이 있다. 그런데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법에서는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게 했다. 그 이유는 온전한 제사의 그림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그 효력은 일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즉 죄를 제거하는데 효력이 없음을 말한다. 그 증거로 매년 대속죄일에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죄를 사하는 능력이 단번에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우리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 하셨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택한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데 주저함이 없게 된 것이다.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 앞에는 중보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살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 그래서 그분의 보혈로 우리들의 양심을 새롭게 해 주시며 말씀을 씻어 주시는 은혜가 임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예배를 드리려 모일 때에 형식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데 감옥에 갇힌 자와 심지어는 재산을 빼앗긴 자들도 있었다. 빼앗겨 굶주리고 있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옥에 갇힌 자에게 면회가 돌보아 주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불에 타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으면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이다. 또한 의인은 믿음을 지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삼하 9:9) 삼하 9장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 전하는 내용이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에 유모의 손에 떨어져 다리를 저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소외된 자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황무지에 숨어 살던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땅을 찾아주고 다윗의 밥상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 사람이 다리를 절고 있다는 것은 절망적인 것이다. 그 당시는 농경사회로서 그 몸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다윗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잃었던 기쁨을 찾게 된다. 이제 메시야가 오면 다리 저는 자가 일어서게 된다.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6) 하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를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그곳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하며 물으신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8-9). 다리 저는 사람이 이제 성한 몸을 가진 자가 되었다. 병을 고치는 기적에 믿음의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몸이 성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몸이 불편한 자는 성전 출입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낙심과 절망이 가득하다. 그런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구원하여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게 하여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의 백성으로 자녀로 설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잃었던 기쁨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설 수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에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에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6) 삼하 8장에서는 다윗이 통일 왕국을 이룬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하셨던 것이 성취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경험하여 보지 못한 종주국이 된다. 주변에 있는 나라를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아 불가침 조약을 맺고 조공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복을 받은 것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삼하 8:15).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는 공의로움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미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뛰어난 민족이 된다는 약속이다. 다윗 왕국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신 28:13), 행하였더니 종주국이 되어 속국에게 조공을 받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들이 다윗을 통하여 이루신다. 다윗 왕국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질 하나님의 그림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의와 공의가 시행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있는 곳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함으로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삼하 6:17) 삼하 6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무지한 자와 교만한 자가 저주를 받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다윗은 이스라엘에 왕이 되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 한다.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웃사가 죽는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으나 옳은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명령한 말씀을 몰랐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로 옮긴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 줄 때에 사용했던 방식이다. 다윗이 그 방식을 따라서 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율법에 없는 사람들이라서 저주를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 4:15), 무슨 말인가 하면 고핫 자손만이 법궤를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핫 자손이라도 만지지 말라고 하였다. 만일 만지게 되면 죽게 됨으로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고”(출 25:15), 고리를 만들어 채를 붙잡고 옮기라 하신 것이다. 그리고 법궤 안에도 들여다보지 말라 하셨다. 이것을 교훈으로 삼은 다윗은 다시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는 모세의 글을 따라서 행한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셨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대상 15:13) 여호와의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린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삼하 6:13), 이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지 않은 것이 감사하므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6) 삼하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다윗 언약이 있다. 그런데 다윗 언약 안에는 메시야를 통하여 세워질 영원한 나라가 있다. 다윗 언약은 이전에 모세를 통한 시내산 언약보다 더 점진적인 내용으로 되었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제 막 구원한 상태에서 맺은 것이다.   그래서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이스라엘이 범죄를 하였을 때는 반드시 형벌을 받는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다윗 약속에는 주변의 모든 나라를 물리치고 통일 국가이며 신정국가 되었을 때에 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범죄 할지라도 용서하여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하) 이 약속은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린다는 고백을 하자 주신 은혜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이 집은 건축물로서의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집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에 의해서 지어질 성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영원히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질 교회와 그의 영원한 나라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다윗 왕국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 같이 탄생한 나라이다. 그 나라는 아버지와 아들인 사랑으로 연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하더라도 사랑의 매로 다스리며 상속하고 상속받는 관계가 됨으로 영원히 지속된다. 그리고 그 나라는 사람에 의해서 망하거나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존속된다는 것이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성경을 많이 읽고 믿음의 지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면 헛것이 된다. 즉 성경의 모든 지식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위하여 쓰여야 한다. 왜 예배가 중요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만나서 언약을 갱신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언약을 맺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됨을 확인하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며 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환난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시고 지켜 주실 수 있다. 예배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그 약속의 말씀에 ‘아멘‘함으로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동안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한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드리는 자들의 정성과 열심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 또한 예배드리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았다. 기도는 하나님께 간절함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였고, 찬양 역시 하나님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들으려 하였다. 그런데 코비디-19 사태로 예배의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오로지 예배에 전념을 다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것이다. 하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모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 말씀에 대한 증거로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에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리라”(계 21:4).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를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를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다윗은 고난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있어서 말하고 있다. 악인들의 악함을 보고 하나님께 일일이 고하는 것도 악인들이 볼 때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입을 다물고 잠잠하기로 한다. 반면에 악인들의 악행을 보고 잠잠하였더니 속에서 분노가 솟아올라 입에 재갈을 물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였는데, 그 방법이 자기를 돌아봄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생의 날 수가 짧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한 뼘의 길이며, 그 사는 날 동안에 자랑거리도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러한 불확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가올 날들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다윗은 어떻게 이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었는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지만 약속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도에는 자신도 택한 백성이오니 구원하여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용서하여 주셔야 하고 나를 즐겁게 살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히 39: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간절히 간구하였던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은혜로 이미 다 주셨습니다. 그는 삶을 살 동안에 기쁨과 즐거움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며, 기도하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 9:11) 히브리서 9장에서는 손으로 지은 성소와 온전한 성소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다. 먼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뉜다. 성소에는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과 금향로가 있고 지성소에는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으며 그 언약궤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다. 성소에서는 제사장들이 촛불을 밝히는 것과 일주일 한 번 진설병을 새 것으로 바꾸는 일과 향로의 꺼지지 않게 하는 일을 매일 한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사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 금향로와 동물의 피를 들고 들어간다. 손으로 세워진 장막은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육체의 예법으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된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다. 왜 아론의 후손이 아닌 유다 지파에서 대제사장이 나올 수 있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는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성전 안에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제사장들의 범죄와, 제물로 드리는 동물에도 흠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하늘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나 흠이 없으신 분이시고,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피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가 되고, 하나님께서 흡족하신다. 이것을 새언약이라 한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하여 준 옛 언약을 붙잡고 있다. 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무슨 말인가? 이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새 언약을 붙잡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삼하 5:5)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과 언약을 맺고 왕위에 오른다. 왕과 그의 부하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그 땅을 차지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다. 그 이유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이 있고, 천연적인 요새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어서 다리 저는 자나 맹인들도 다윗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을 하였다. 다윗은 그곳을 다윗성이라 하며 살았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화친을 하기 위하여 찾아오기도 하였다. “두로와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삼하 5:11) 블레셋 군대가 다윗이 왕이 되었다 함을 듣고 전쟁에 나온다. 저들이 다윗을 살려 두었던 이유는 사울 왕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왕이 되었다함을 듣고 올라오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할 수 없다.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는 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훌륭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승리를 주신다. 또한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하는데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을 얻는 것이다(창 15:18-21). 이것에 대하여 다윗이 증거하고 있다. 그가 왕의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에 되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이스라엘을 높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삼하 5:12) 본문에서 무엇을 전하려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시고 그분에게 쓰임을 받을 때에 누리는 은혜가 더 큼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전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