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우상을 넘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행 19:24)

  허망한 우상을 넘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행 19: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행 19:24)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그 도시의 사람들이 이전에 섬기던 아데미 신상을 섬기지 않으므로 영업에 손실이 났기 때문이다. 데메드리오라는 세공업자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 모형 관광기념품을 만들어 큰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는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진리가 밝혀지자, 여신의 신상을 만드는 자들과 팔던 자들이 난리를 친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을 그들의 자존심이 상하였다고 하여 소동이 일자 서기장까지 출동을 하였다.  왜 불신자들은 우상숭배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이어서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에 빠진 것이다. “그들이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들은 목적이 없는 허망한 인생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집대로 사느라 썩어져 갈 허무한 것을 좇으며 허망한 인생을 한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그들의 허무함이란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생명이 없는 우상에게 말을 하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입에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시 115:5)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자의 실상은, 그 우상처럼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생명이 없는 어리석음과 허망함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이것에 대한 증명이 데메드리오라 하는 자들과 우상을 팔고 섬기는 자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즉 썩어질 경제적 이익과 허망한 우상을 지키려는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졌다. ...

빛의 자녀답게, 깨어 준비하는 삶(살전 5:5)

  빛의 자녀답게, 깨어 준비하는 삶(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니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성도들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 자들에게 그 날이 언제, 어떻게 임하는지와 그날을 기다리는 성도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언약의 신실함으로 이루시는 것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확인할 수 있다.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시대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날과 때를 계산하는 호기심에 빠지게 된다. 우리들은 이미 얻은 영적 신분에 기반하여 아직 다가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작정하신 주권적 시간표에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임하는 심판의 날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이미 구원이 작정된 영광의 날이다.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주권 아래로 옮겨진 자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빛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출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거룩한 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살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세속적인 안일함에 속아 영적으로 영면해서는 안되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되 마음의 중심은 늘 하나님을 향해 깨어 있는 영적 경각심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 말씀을 하시며 열처녀의 비유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등불뿐만 아니라 기름을 함께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웃과의 삶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라 한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살전 5: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말씀은 종말에 대하여 막연한 ...

참된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은혜의 화목(욥 22:2)

  참된 보물이신 그리스도와 은혜의 화목(욥 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욥 22:2) 엘리바스는 이전보다 더 과격하고 노골적인 인신 공격을 한다. 욥의 무죄함을 부정하고, 욥이 당하는 고난은 전적으로 그가 저지른 구체적인 악행 때문이라고 허위 사실을 단정 지으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은 완전히 자족하시는 분으로서 인간의 의로움이나 경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네가 의로운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욥 22:3) 따라서 하나님이 욥을 벌하시는 것은 욥의 경건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죄 때문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엘리바스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족성과 초월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조물의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과 언약적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의 경건과 고난에 깊이 인격적으로 반응하시는 임재와 언약적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신학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욥의 인격을 말살하고 거짓 정죄를 서슴지 않는 율법주의 비정함과 한계를 폭로한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5) 그의 주장에서 하나님와 화목하고 율법을 마음에 두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고 보물이 되어 주실 것이라는 억지를 부린다. 이것은 기복주의적 공로 사상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과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훼손하는 인간 중심적 종교관임을 말한다.  욥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온갖 사회적 악행의 죄목을 덮어씌워 정죄한 것은, 예수님이 평생 가난한 자를 돌보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완벽한 의를 행하셨으나, 종교 지도자들과 세속 법정은 주님에게 신성모독죄와 반역죄라는 거짓 죄목을 덮어씌웠다(마 26:59-60). 하나님과의 화목은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지는 ...

악인의 형통을 넘어 십자가와 최후 승리를 바라보라(욥 21:9)

  악인의 형통을 넘어 십자가와 최후 승리를 바라보라(욥 21:9) “그들의 집이 평안하며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욥 21:9) 욥은 소발의 잔인한 율법주의적 정죄에 대한 반박을 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 즉 악인이 도리어 득세하고 평안히 묵는 현실을 증거로 들이밀며 기계적 인과응보론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일반 은총의 신비와 악인의 형통이라는 난제를 다룬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해와 비를 주시며 이 땅에서 번영을 누리게 하신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그러므로 눈 앞에 보이는 외적인 번영이 곧 하나님의 영적인 기뻐하심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외적인 고난이 곧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분명히 구별한다. 욥은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기운이 충족하고 평안하며,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복을 맛보지 못한 채 죽지만, 결국 둘 다 똑같이 흙 속에 눕고 구더기에 덮인다는 것이다. 또한 악인이 이 땅에서 아무리 당당하게 살고 화려한 무덤에 묻힐지라도, 결국 그들은 ‘최종적인 진노의 날’을 위해 남겨진 존재일 뿐이라 선언한다. 즉 악인의 심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향해 유보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욥이 고뇌했던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다. 즉 인류 역사상 가장 불공평했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다. 죄가 하나도 없으시고 유일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비참하고 억울한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깊은 구속의 지혜(십자가)는 세상의 인과응보적 지혜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신비이다. 악인이 이 땅에서 심판을 면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인 진노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다. 지금 당장은 평안해 보일지라도 주님이 ...

율법의 정죄를 넘어 십자가의 속량으로(욥 20:29)

  율법의 정죄를 넘어 십자가의 속량으로(욥 20: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욥 20:29) 소발은 욥의 위대한 부활과 대속자의 신앙을 완전히 묵살하고, 더욱 거칠고 잔인한 어조로 악인의 비참한 종말을 선포한다. 그는 역사의 경험과 전통을 근거로 악인은 반드시 속히 망한다고 주장한다. 악인이 아무리 하늘 높이 부유해질지라도 결국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며, 그 자녀들까지 가난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며 욥을 저주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인과응보적 율법주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통치하시는 일반적인 법칙(악인의 심판)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고난의 신비(특별한 섭리)를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즉각 심판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그는 죄의 일시적 달콤함과 필연적 부패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여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욥 20:14) 하지만 고난 당하는 의인인 욥에게 무차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문제이다. 또한 악인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만족함이 없고, 결국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불이 그를 삼킬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모두 그 악인의 죄를 폭로할 것이라 하며 변론을 마친다. 소발의 잔인한 독설은 복음이 없는 율법의 정죄 기능만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저주 아래 놓인 악인이라는 점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할 뿐, 스스로 그 진노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진노를 대신 받아줄 구속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 소발의 저주를 당당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시려 십자가에 자기 생명을 통째로 쏟아내며 대속의 값을 치르셨다(갈 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인과응보적 종교 행위를 벗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라는...

나의 산 구속자, 살아 계신 고엘을 바라보라(욥 19:6)

  나의 산 구속자, 살아 계신 고엘을 바라보라(욥 19: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욥 19:6) 욥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립, 그리고 친구들의 무자비한 정죄 속에서 신앙의 가장 깊은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이 절망 가운데 구속사적 빛이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모든 상황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고난을 우연이나 사탄의 일방적인 승리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여 억울하다고 토로하고 있지만, 이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로서 그대로의 기도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비참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은 이러하다.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이로구나”(욥 19:20) 철저한 영적, 육적 파산 상채를 말하는 것이다. 율법의 사상은 고엘이다. 고엘은 친족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거나, 기업을 물러주거나, 억울함을 풀어주는 가까운 친족을 뜻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설령 자신의 가죽이 벗겨지고 육체가 썩어 없어질지라도, 육체 밖에서(새 몸을 입고), 자신을 변호하시고 신원해 주실 구속자를 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미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계시된 부활 신앙이자,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확신이다. 즉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 줄 또 다른 신적 중보자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고, 종교 지도자들과 군병들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라’는 조롱을 당하셨다. 욥은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속적 작정 속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 역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귀신의 지식을 넘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행 19:16)

  귀신의 지식을 넘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행 19:16)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세상적 강함이나 교만한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철저한 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법칙을 알았기에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0) 고백하며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반면, 바울의 겉모습만 흉내 내며 예수의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했던 마술사들은 결국 악귀에게 짓밟혀 상하고 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수치를 당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귀신의 지식과 참된 믿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엄중하게 묻고 있습니다. 1. 행함이 없는 귀신의 지식과 진짜 믿음의 분별 본문에서 악귀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귀신에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의 앎에는 온전한 순종과 행함이 결코 따르지 않습니다. 약 2장 17절 말씀처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하셨기에, 행함이 없는 지식적 동의는 귀신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가짜 신앙에 불과합니다. 진짜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온전한 순종과 행함의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2. 귀신에게는 없는 영적 소망과 사랑의 부재 귀신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결정적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이 없고, 둘째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내어주는 ‘사랑’의 실천이 없다는 점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 속에 소망이 없고 손과 발에 사랑의 행함이 없는 상태를 성경은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고전 3:1)이라 부릅니다. 진짜 믿음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지나, 마침내 사랑의 실천인 순종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는 장성한 성도의 삶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