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 중에 비추시는 은혜의 얼굴과 참된 평안의 안식(시 4:8)

  곤란 중에 비추시는 은혜의 얼굴과 참된 평안의 안식(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시편 3편의 기도가 아침의 기도이며, 시편 4편의 기도는 저녁의 기도이다. 하루 동안을 살며 억울함 모함과 영적 곤고함 속에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비밀을 노래한다.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하며 기도한다. 자신의 행위가 아닌 자신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곤란 중에 있는 자를 건져내실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온전한 의를 완성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넓은 터로 옮기신 것이다(롬 3;24).  세상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절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다. 그러나 세상의 조롱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유일하게 온전히 순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은혜로 구별된 자로 세우셨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3) 분노와 억울함에 휩쓸려 범죄하지 말고 침상에서 잠잠히 자신을 돌아보며 형식적인 제사가 아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 4:5) 구약의 불완전한 제사는 단번에 의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로 완성이 되었다. 즉 자기 의를 내세우는 제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출때에 기쁨이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기쁘다고 한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과 십자가 뒤에 밝아온 부활의 아침(시 3:3)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과 십자가 뒤에 밝아온 부활의 아침(시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다윗의 탄식시이다. 그의 아들 암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로서, 배신과 절망의 극치 속에서 개인적인 억울함 토로에 머물지 않고 구원의 승리를 전하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아들과 신뢰하던 신하(아히도벨)의 배신으로 쫓겨나는 다윗을 향해 사람들은 ‘하나님도 저를 버리셨다’며 조롱하였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시 3:2) 이와 같은 조롱을 예수님도 당하셨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바로 그 조롱이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마 27:43) 이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장 참혹하게 버림받는 자리까지 낮아지셨음을 예표하는 것이다.  절망 가운데 다윗은 환경을 보지 않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의 말씀을 붙든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즉 자신의 머리를 다시 들려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뿐임을 고백한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의탁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그분을 다시 살리셔서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반전을 이루셨다(빌 2:8-11). 다윗은 수만명이 포위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평안히 잠들고 다시 일어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 ‘누움과 깨어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무덤에 묻히심)과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신 부활의 아침을 예표하는 것이다. 생명과 승리의 보증은 ...

세상의 헛된 반역을 넘어 영원한 왕께 입맞추라(시 2:2)

  세상의 헛된 반역을 넘어 영원한 왕께 입맞추라(시 2:2) “세상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신약 성경에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를 증언할 때 가장 빈번하게 인용한 본문 중 하나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반역 속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속사역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세상의 헛된 반역과 하나님의 비웃음이란,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들을 방해하지만 저들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말한다. 즉 헤롯,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데 인간의 극단적 반역으로 십자가의 처형을 하였지만, 그것 조차도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는 도구가 된 것이다. 시온의 거룩한 왕과 영원한 아들이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온 우주의 왕으로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결정적 승리이며, 초림을 통한 영적 통치와 재림을 통한 원수들의 최종적 심판을 의미한다.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7)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자들에게 심판을 피하고 영원한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입맞춤)하라는 것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2)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도덕적 노력에 있지 않고, 오직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통치권 앞에 굴복하여, 그분을 피난처로 삼는 것뿐이다. 역사의 주관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한다고 할지라도, 환경과 시대의 혼란에 낙심하지 말고 ...

참된 복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생명(시 1:2)

  참된 복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생명(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도다”(시 1:2) 시편 1편은 단순한 개인 윤리나 권선징악의 교훈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구속의 원리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다. 참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담 이후 타락한 모든 인류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리에 앉은 자들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런데 율법의 모든 요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순종하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주야로 즐거워 하며 성취하신 참된 의인은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네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옮겨 심겨진 나무를 뜻한다. 죄로 인해 마르고 메마른 광야 같던 성도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푸른 나무가 된 것은, 스스로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은혜 때문이다. 반면에 악인의 본질과 운명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을 넘어, 하나님의 언약과 생명에서 단절된 채 자기 의를 의지하는 자를 의미한다.  생명의 무게와 알맹이가 없기에 환난과 심판의 바람이 불 때 날아가는 겨와 같은 것이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 의인의 회중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 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할례와 전인격적 순종으로(행 21:26)

  자기 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할례와 전인격적 순종으로(행 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행 21:26)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저들의 잘못은 사람의 의와 자랑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려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전가시키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리스도를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할례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인 징표이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1) 그러나 할례의 참된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이다.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그리스도의 할례란?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 곧 육적 몸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영적 연합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마음의 할례란? 마음의 완악함을 잘라내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세속적 욕망을 제거하여 청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은 청결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마음은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담아 두는 중심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과 십자가 진리를 바르게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선포된 말씀 앞에...

복음의 자유와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양보(행 21:24)

  복음의 자유와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양보(행 21: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여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난다. 장로들이 바울의 사역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로서, 그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버리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왜곡된 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안을 한다. 나실인의 결례를 앞둔 서원자 네 사람의 정결 예식 비용(번제, 속죄제, 화목제물, 소제, 전제)을 바울이 대신 지불하게 한다.  나실인의 서원 규례는 서원자가 일정 기간(7일~한 달)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멀리하고, 기간 만료 후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머리털을 화목제물 밑 불에 태운다(민 6:13-20). 유대인 사회에나 나실인의 비용을 대신 내주는 것은 매우 경건한 율법 준수의 행위로 여겨졌기에, 바울은 이를 행함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풀고 평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한다는 표시가 됨으로 그들이 갖고 있던 오해를 벗게 된 것이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 그렇다면 바울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간 것일까? 즉 말과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구원은 할례를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율법의 참된 용도와 죄인의 괴수를 살리신 은혜(딤전 1:7)

  율법의 참된 용도와 죄인의 괴수를 살리신 은혜(딤전 1: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율법의 적법한 사용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주권적 은혜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완성되는지를 명확히 보여 준다.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경고하는 것이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거짓 교사들은 구약의 역사가 오직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흘러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 무익한 변론으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구속사의 중심축에서 이탈했다는 것이다. 즉 거짓 교사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했지만, 그 본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이라 한다. 율법이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고발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명확히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은 우리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오직 은혜의 복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는 구속사적 도구로 사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자격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적인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극악한 훼방자였던 바울을 구원하심으로써, 앞으로 주를 믿어 영생 얻을 자들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의 본을 삼으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