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2)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2) 욥은 친구들과의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고 하나님과 담판을 짓는다. 친구들을 향하여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이요, 다 쓸모없는 돌팔이 의사들이라 한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욥 13:4)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는데 입을 다무는 것이 곧 지혜라고 한다.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 13:5)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당당히 앞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즉 죽도라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죽겠다는 일사각오의 믿음이다. 즉 자신의 경건하지 않은 자라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기에,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재판정에 들어 간다. 친구들을 물리친 욥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한다. 먼저 두 가지 탄원을 올린다. 첫째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지금 겪고 있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잠시 거두어 주셔야 편안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진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실 것으로, 압도적인 임재와 공포로 나를 찍어 누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 조건이 수락되면 주께서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며, 혹 내가 말씀하게 해주셔서 주는 내게 대답하여 주시길 아뢴다. 그러면서 기도하기를 나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기소장을 보여달라고 한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3:23) 그리고 전에 그토록 친밀하셨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원수로 대하시냐고 묻는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 욥은 자신을 낙엽으로 비유하며, 하나님께서 낙엽을 잡으려고 이렇게 전력으로 질주하신다고 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 12:2)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 12:2) 욥은 친구들의 오만함에 조소한다. 즉 나도 너희들 만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너희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욥 12:3) 일반 계시로 호소를 한다. 짐승, 새, 땅, 물고기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모든 생명과 호흡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을 짐승들도 안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하셨다’는 뻔한 말로 나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나열한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 12:13)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은 새운 것을 허무시고, 갇힌 자를 놓지 않으시며, 재판장들을 어리석게 하시고, 왕들의 허리띠를 푸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지도자들의 총명을 빼앗아 비틀거리게 하신다고 묘사한다.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기도 하시며”(욥 12:23) 욥과 세 친구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차이가 있다. 세 친구들은 단순한 도덕적 하나님,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욥은 자연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고, 파괴도 하시고, 허물기도 하시고, 어둡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세상의 부조리와 혼돈까지도 통치하심을 믿는다. 즉 허용적 작정이 있다는 것이다. 욥이 붙들고 있는 신학은 주권자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늙은 자의 지혜나 권력자의 명철을 빼앗는다고 한다.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욥 12:24) 지혜는 하나님에게 있고 인간의 지식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폐하실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지혜...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욥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욥 11:2) 욥의 세 친구들 중에 소발은 가장 직설적이고 자신의 신념이 강한 자이다. 그래서 욥을 말이 많은 자, 자랑하는 자라 하며 공격을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입을 여신다면 욥은 큰 벌을 받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이다.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관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욥 11:6) 소발은 하나님의 오묘함과 광대하심이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어서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고 한다. 범죄하고 허망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각을 알 수 없다고 무시하였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를 하면 고난이 물처럼 흘러가 버릴 것이지만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눈이 어두워져 길을 잃을 것이라 한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욥 11:14) 본문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를 특수한 고난자에게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율법주의가 복음을 만나지 못하였을 때에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 즉 소발이 알고 있는 신학은 죄인에게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논리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회개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협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복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회개는 조건부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고 마음과 행위를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의를 위대하고 주장을 하지만 자신의 생각 안에 가둔다. 즉 욥을 공격할 때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하고 논리를 펼 때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랑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바울이 돌에 맞은 사건을 보면서 함께 생각하여야 할 사건이 있다. 그것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 그런데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감독관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바울은 스데반이 죽는 것에 당연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신성모독죄에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같은 죄 항목으로 돌에 맞은 것이다. 즉 돌아 맞고 죽을 줄 알았는데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바울은 이 고난을 통하여 스데반의 믿음을 본 것이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스데반이 죽어가며 보여준 초월적인 평화와 용서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핍박과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하여 주심을 따른 것이다. 이제 바울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여기서 가시채라 함은 가축을 앞으로 나가게 하기 위한 뾰족한 막대기를 말한다. 즉 스데반이 죽어가며 보여준 것이 ‘가시채‘처럼 자신의 마음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따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랐던 것처럼 자신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이 정금과 같이 되었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는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어서게 하며 주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그런데 이고니온에서부터 쫓아온 자들에게 돌에 맞는다. 그래서 제자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한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난다. “제자들이 둘러셨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행 14:20) 바울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고 다시 수리아의 안다옥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하여야 한다고 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인간의 생사화복의 문제는 하나님 손에 있고, 환난을 통하여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다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간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명을 주신 자는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의 확증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한 필연적이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남은 자를 택하시는 방식이다. 바울이 교회에 장로들을 택한다는 것은, 개인의 카리스마나 열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세워짐을 말한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 안디옥으로 돌아온 사도들은 자신들의 수고와 헌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행 14:27) 즉 선교의 주체도,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믿...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과 부름을 받은 것을 인식하면서 행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의 믿음의 기초는 ‘주 안에서’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 아내의 복종은 열등함이 아닌 ‘주 안에서 마땅한 질서’이며,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과 같은 ‘희생적 통치’이다. 자녀의 순종도 부모 개인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신앙 행위’임을 말한다. 또한 부모는 자녀를 낙심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자녀의 소유권이 부모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일터에서 하나님의 경건을 드러내야 한다. 상전의 눈가림만 하지 말고 성실히 일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실질적인 주인이 바로 ‘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상전은 보수를 주지만, 진정한 기업의 상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노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공의롭게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일에 ‘주님께 하듯‘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을 나그네 또는 순례자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지 않아도, 보수가 적다고 할지라고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오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예수와 연합된 자로 그의 안에 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죽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 3: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죽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 3:6) 악의 실체와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있다. 유다 민족의 대적인 하만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만은 아말렉 아각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오래전부터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민족 간의 분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역사적 영적 전쟁으로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사탄은 하만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통로인 유다 민족을 멸살시키려는 것이다. 악인 하만이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은 당황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허용적 작정 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시지는 않으셨으나, 악의 도모를 사용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구원을 극적으로 드러내신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단순히 자존심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다. 즉 하나님 외에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인 경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믿음이다. 하만의 조서로 인하여 유다 민족은 ‘죽음의 날짜’를 받는다. 그러자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만의 음모가 절정에 달할 때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부활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 모르드개는 육신의 생명보다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를 더 중시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 10:28) 하만이 제비를 뽑아 날짜를 정한 것은 인간이 운명을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 결정은 하나님의 손이 있다는 것이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말의 작정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만이 세운 유다 학살 계획은 인간적으로는 절망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