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욥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욥 11:2) 욥의 세 친구들 중에 소발은 가장 직설적이고 자신의 신념이 강한 자이다. 그래서 욥을 말이 많은 자, 자랑하는 자라 하며 공격을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입을 여신다면 욥은 큰 벌을 받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이다.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관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욥 11:6) 소발은 하나님의 오묘함과 광대하심이 하늘보다 높고 스올보다 깊어서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고 한다. 범죄하고 허망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각을 알 수 없다고 무시하였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를 하면 고난이 물처럼 흘러가 버릴 것이지만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눈이 어두워져 길을 잃을 것이라 한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욥 11:14) 본문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를 특수한 고난자에게 적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율법주의가 복음을 만나지 못하였을 때에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 즉 소발이 알고 있는 신학은 죄인에게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논리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회개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협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복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회개는 조건부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고 마음과 행위를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의를 위대하고 주장을 하지만 자신의 생각 안에 가둔다. 즉 욥을 공격할 때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하고 논리를 펼 때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랑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바울이 돌에 맞은 사건을 보면서 함께 생각하여야 할 사건이 있다. 그것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 그런데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감독관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바울은 스데반이 죽는 것에 당연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신성모독죄에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같은 죄 항목으로 돌에 맞은 것이다. 즉 돌아 맞고 죽을 줄 알았는데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바울은 이 고난을 통하여 스데반의 믿음을 본 것이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스데반이 죽어가며 보여준 초월적인 평화와 용서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핍박과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하여 주심을 따른 것이다. 이제 바울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여기서 가시채라 함은 가축을 앞으로 나가게 하기 위한 뾰족한 막대기를 말한다. 즉 스데반이 죽어가며 보여준 것이 ‘가시채‘처럼 자신의 마음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따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랐던 것처럼 자신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이 정금과 같이 되었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는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 14:19)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어서게 하며 주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그런데 이고니온에서부터 쫓아온 자들에게 돌에 맞는다. 그래서 제자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한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난다. “제자들이 둘러셨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행 14:20) 바울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고 다시 수리아의 안다옥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하여야 한다고 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인간의 생사화복의 문제는 하나님 손에 있고, 환난을 통하여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다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간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명을 주신 자는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의 확증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한 필연적이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남은 자를 택하시는 방식이다. 바울이 교회에 장로들을 택한다는 것은, 개인의 카리스마나 열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세워짐을 말한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 안디옥으로 돌아온 사도들은 자신들의 수고와 헌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행 14:27) 즉 선교의 주체도,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믿...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과 부름을 받은 것을 인식하면서 행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의 믿음의 기초는 ‘주 안에서’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 아내의 복종은 열등함이 아닌 ‘주 안에서 마땅한 질서’이며,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과 같은 ‘희생적 통치’이다. 자녀의 순종도 부모 개인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신앙 행위’임을 말한다. 또한 부모는 자녀를 낙심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자녀의 소유권이 부모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일터에서 하나님의 경건을 드러내야 한다. 상전의 눈가림만 하지 말고 성실히 일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실질적인 주인이 바로 ‘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상전은 보수를 주지만, 진정한 기업의 상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노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공의롭게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일에 ‘주님께 하듯‘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을 나그네 또는 순례자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지 않아도, 보수가 적다고 할지라고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오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예수와 연합된 자로 그의 안에 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죽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 3: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죽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 3:6) 악의 실체와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있다. 유다 민족의 대적인 하만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만은 아말렉 아각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오래전부터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민족 간의 분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역사적 영적 전쟁으로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사탄은 하만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통로인 유다 민족을 멸살시키려는 것이다. 악인 하만이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은 당황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허용적 작정 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시지는 않으셨으나, 악의 도모를 사용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구원을 극적으로 드러내신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단순히 자존심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다. 즉 하나님 외에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인 경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믿음이다. 하만의 조서로 인하여 유다 민족은 ‘죽음의 날짜’를 받는다. 그러자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만의 음모가 절정에 달할 때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부활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 모르드개는 육신의 생명보다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를 더 중시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 10:28) 하만이 제비를 뽑아 날짜를 정한 것은 인간이 운명을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 결정은 하나님의 손이 있다는 것이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말의 작정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만이 세운 유다 학살 계획은 인간적으로는 절망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여러분! 우리가 아등바등하며 성공하려는 이유도, 그 끝에는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 '평안'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성공과 평안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봤습니다. 1. 성공은 '수단'이고, 평안은 '목적'입니다 많은 사람이 높은 지위나 부를 성공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들은 평안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 일 뿐이죠. 아무리 곳간이 가득 차도 마음속에 풍랑이 일면 그건 진정한 성공이라 부르기 어렵습니다. 결국 성공의 완성은 "내 마음이 지금 평안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2. 평안은 '환경'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돈이 많거나 일이 잘 풀릴 때만 평안하다면, 그건 외부 조건에 휘둘리는 연약한 평안이겠죠. 진짜 고수들의 성공은  폭풍우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 을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평소 추구하시는 깊이 있는 성찰이나 말씀도 결국 이 내면의 단단한 평안을 구축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네요. 3. '성취' 뒤에 오는 '안식'의 가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에너지와, 그 성취 끝에 얻는 평안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열심히 땀 흘린 뒤에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이 가장 달콤하듯,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 누리는 평안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보상이겠죠. 결국 인생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얼마나 평안하게 누릴 수 있느냐"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느끼시는 그 평안의 가치가 곧 성공의 척도가 아닐까요? *이 평안을 주시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에 1: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에 1:1)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가 얼마나 치밀하게 역사하는지를 보여 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구름 뒤에 숨으셔서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이 아닌 포로지(폐르시아)에 있고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을지라도, 아브라함과 다윗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볼 수 있다. 에스더는 죽음을 무릎쓰고 동족을 구원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참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127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다. 그래서 180일 동안 자신의 부귀와 위엄을 자랑을 한다.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에 1:4) 이는 스스로 ‘신’이 되려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 숭배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일시적임을 강조한다.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폐위되는 과정은 정치적인 갈등처럼 보이나, 신학적으로 볼 때는 에스더를 왕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자 섭리적 준비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분노와 실수조차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  왕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하다가 왕후에게 수치를 당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진정한 영광은 자기를 높이는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있다고 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마 23:12) 유다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하만의 음모가 시작되기 전에 구원의 통로인 에스더를 세울 환경을 조성하고 계셨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