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스 2: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스 2:2) 성경에서 읽기 힘든 명단의 나열이다. 하지만 개혁주의에서는 단순한 이름의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보존을 보여주는 보석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신다. 이는 창세 전에 작정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오게 하는 성도의 견인이다. 그리고 그들을 성전(교회)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성전의 질서를 따라 제사장, 레위 사람, 느디님 사람등을 직분별로 계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교회의 직분적 책임을 강조한다. 온 회중의 수가 42,360명이고, 남종과 여종의 수가 7,337명이고,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이다. 그래서 귀환자의 총수는 49,897명이다.  이 가운데는 자신들의 종족이나 계보를 입증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구별되었다.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스 2:62) 예루살렘에 정착한 백성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린다. 그리고 무너진 삶의 터전 위에서 예배 중심의 공동체가 재건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본 장에서 기록된 이름들은 세상 권력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들의 명단이다. 신약의 성도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로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3) #하나님의신실성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3) 에스라서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로에서 회복시키시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과정을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핵심으로 한다. 즉 인간의 정치적 변화나 바사 왕 고레스의 자비가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계획을 성취해 가시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으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 70년의 기한을 잊지 않으시고 정확한 때에 이루신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대하 36:21) 하나님의 전능적인 섭리는 이방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모습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바사 왕 마음을 감동 시키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온 세상에 조서를 내려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자들이 돌아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감동된 자들, 즉 남은 자들이 일어나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제이의 출애굽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탈취하여 자기 신들의 신전에 두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들이 다시 돌아온다. “그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어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스 1:7) 이것은 단순히 물건의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가 회복될 것임을 상징하는 가시적인 증거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러 가듯이, 신약에서는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8)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8) https://youtu.be/LlKXwQ4dwJM?si=lnZpaPdN79wsYBlr 땅 위에 흉년이 들면 신자나 불신자나 똑같이 고난을 겪는다. 고난을 견디기 위하여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과 빛의 자녀는 다르게 반응을 한다.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은 정욕과 정신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었다. 그곳에 안디옥 교회가 새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즉 고난을 견디기 위하여 술과 정욕을 채우고 맘껏 즐기다가 오늘 죽자는 사상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자들이다. 왜 이러한 소개를 하는 것인가? 세상의 정신과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비교하기 위함이다. 즉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재림과 천국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반면에 빛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들을 밝히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내 권리를 주장하거나 보복을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 나그네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통과하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 것처럼 따라야 한다. 천국은 도피처가 아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면 신자나 불신자가 똑같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 고난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함이 신자의 책임이다.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붙잡고 견디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점진적으로 성장을 합니다. 고난을 견디는 것으로 만족하...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 11:19)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 11:1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이방 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자들이 환난을 당하고 있다. 왜 환난을 당하는 것일까? 구원을 받게 되면 점진적으로 성장을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생명이 자라나서 장년에 이르는 것과 같다. 오늘 본문에서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방 땅인 안디옥은 로마의 행정과 헬라의 문화가 섞인 거대 도시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박카스(술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즉 쾌락적이고 정신적으로 타락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도덕적인 우월감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로 충만한 예수쟁이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만나매 안데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죄성을 벗어내기 위함이다. 천국은 고난을 요리조리 피하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자가 가는 곳이라. 고난은 우리를 의와 진리와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는 필수 과정이 된다. 그래서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오시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내 죄성을 버리고 거룩해질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정결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빛의 열매를 맺으며 거룩함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환난을 면한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자가 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고난을 어떻게 통과 하여야 합니까? 서로 돕고, 덕을 세우며 십시일반으로 어려움을 함께 짊...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https://youtu.be/rIMOXLW_q3M?si=VelZinVqa3tYWIH6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 교회 내의 갈등이 유오디아와 순두게로 시작되었는데, 성도의 성화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인 평강으로 끝을 맺는다. 두 여인은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훌륭한 일꾼이었으나, 결국 자기주장과 교만으로 인해 교회에 분열을 일으켰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언제든 육체의 소욕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 해결책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다. 인간의 도덕성이나 타협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때만이, 내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래야만 비로소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는 구원론적 권면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신앙이 있을 때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는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상황을 통제하려 들 때에 염려와 근심이 생긴다. 그러나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엎드릴 때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 즉 평강은 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구원받은 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거룩한 것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본 바를 행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칭의는 오직 은혜로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 안...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3) https://youtu.be/hAG7axIRVs4?si=qRFfzCBlJYBK1PEQ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과 손자가 왕 위에 오른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멸망을 행하여 곤두박질치는 절망으로 향한다. 그런데 대하 36장은 멸망의 장이 아니라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의 입술을 통하여 선포되는 회복과 은혜의 칙령이 선포된다. 즉 철저한 심판과 압도적인 은혜가 교차하는 구속사의 장면이다. 유다의 마지막 네 왕은 애굽과 바벨론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철저히 악을 행한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피를 토하며 경고하였지만, 백성과 제사장들은 성전을 더럽히며 끝까지 목을 곧게 세웠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이 헐리고 성전이 불탔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 갔다. 그리고 토지는 안식년을 누림 같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었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대하 36:21) 이스라엘은 수 백 년간 안식일 지키지 않았다. 인간의 탐욕으로 율법이 명한 안식년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땅을 강제로 쉬게 하신 것이다.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주릴 것이라 그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레 26:34) 포로기 칠십 년이 찼을 때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칙령을 내리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회복을 위하여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왕의 마음을 주도적으로 움직이신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임을 말한다. 고레스의 칙령...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십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대하 35:7) #어린양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십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대하 35:7) https://youtu.be/_wMk9RNBf-o?si=G77QwenJyVu1DHCM 요시야 왕은 율법책을 발견하고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유월절을 지킨다. 그런데 왕이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다.  왕은 1월 14일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데 사무엘 이후에 이와 같은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직분을 세우고 다윗이 정한 규례를 따라 질서 있게 예배를 드린다. 즉 성경이 명령한 규례대로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 므깃도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애굽 왕인 느고가 갈그미스 전투를 하러 올라가는데 이를 막고자 하다가 활 쏘는 자의 활에 중상을 당한다. 그런데 느고가 이르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셔서 전쟁에 나가는 것이니 막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고집을 부리다가 죽게 되는 것이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대하 35:22) 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난한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준비할 능력이 없었다. 그 때에 왕과 지도자들이 자신의 재산(수 만 마리의 양과 소)를 백성에게 거져 주어 값없이 유월절을 지킨 것이다. 이것은 죄인이 구원받는 개혁주의 구원의 은혜이다. 즉 죄인들은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어린 양을 스스로 준비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요시야 왕의 죽음으로 확인하는 것은 인간 영웅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중에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도 흠없는 완전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왕의 죽음은 율법적인 개혁의 한계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