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 11:19)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 11:1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이방 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자들이 환난을 당하고 있다. 왜 환난을 당하는 것일까? 구원을 받게 되면 점진적으로 성장을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생명이 자라나서 장년에 이르는 것과 같다. 오늘 본문에서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방 땅인 안디옥은 로마의 행정과 헬라의 문화가 섞인 거대 도시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박카스(술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즉 쾌락적이고 정신적으로 타락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도덕적인 우월감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로 충만한 예수쟁이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만나매 안데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죄성을 벗어내기 위함이다. 천국은 고난을 요리조리 피하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자가 가는 곳이라. 고난은 우리를 의와 진리와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는 필수 과정이 된다. 그래서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오시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내 죄성을 버리고 거룩해질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정결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빛의 열매를 맺으며 거룩함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환난을 면한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자가 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고난을 어떻게 통과 하여야 합니까? 서로 돕고, 덕을 세우며 십시일반으로 어려움을 함께 짊...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https://youtu.be/rIMOXLW_q3M?si=VelZinVqa3tYWIH6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 교회 내의 갈등이 유오디아와 순두게로 시작되었는데, 성도의 성화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인 평강으로 끝을 맺는다. 두 여인은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훌륭한 일꾼이었으나, 결국 자기주장과 교만으로 인해 교회에 분열을 일으켰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언제든 육체의 소욕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 해결책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다. 인간의 도덕성이나 타협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때만이, 내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래야만 비로소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는 구원론적 권면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신앙이 있을 때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라는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상황을 통제하려 들 때에 염려와 근심이 생긴다. 그러나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엎드릴 때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 즉 평강은 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구원받은 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거룩한 것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본 바를 행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칭의는 오직 은혜로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 안...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 36:23) https://youtu.be/hAG7axIRVs4?si=qRFfzCBlJYBK1PEQ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과 손자가 왕 위에 오른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멸망을 행하여 곤두박질치는 절망으로 향한다. 그런데 대하 36장은 멸망의 장이 아니라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의 입술을 통하여 선포되는 회복과 은혜의 칙령이 선포된다. 즉 철저한 심판과 압도적인 은혜가 교차하는 구속사의 장면이다. 유다의 마지막 네 왕은 애굽과 바벨론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철저히 악을 행한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피를 토하며 경고하였지만, 백성과 제사장들은 성전을 더럽히며 끝까지 목을 곧게 세웠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이 헐리고 성전이 불탔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 갔다. 그리고 토지는 안식년을 누림 같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었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대하 36:21) 이스라엘은 수 백 년간 안식일 지키지 않았다. 인간의 탐욕으로 율법이 명한 안식년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땅을 강제로 쉬게 하신 것이다.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주릴 것이라 그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레 26:34) 포로기 칠십 년이 찼을 때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칙령을 내리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회복을 위하여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왕의 마음을 주도적으로 움직이신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임을 말한다. 고레스의 칙령...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십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대하 35:7) #어린양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십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대하 35:7) https://youtu.be/_wMk9RNBf-o?si=G77QwenJyVu1DHCM 요시야 왕은 율법책을 발견하고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유월절을 지킨다. 그런데 왕이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다.  왕은 1월 14일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데 사무엘 이후에 이와 같은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직분을 세우고 다윗이 정한 규례를 따라 질서 있게 예배를 드린다. 즉 성경이 명령한 규례대로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있은 후에 므깃도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애굽 왕인 느고가 갈그미스 전투를 하러 올라가는데 이를 막고자 하다가 활 쏘는 자의 활에 중상을 당한다. 그런데 느고가 이르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셔서 전쟁에 나가는 것이니 막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고집을 부리다가 죽게 되는 것이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대하 35:22) 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난한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준비할 능력이 없었다. 그 때에 왕과 지도자들이 자신의 재산(수 만 마리의 양과 소)를 백성에게 거져 주어 값없이 유월절을 지킨 것이다. 이것은 죄인이 구원받는 개혁주의 구원의 은혜이다. 즉 죄인들은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어린 양을 스스로 준비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요시야 왕의 죽음으로 확인하는 것은 인간 영웅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중에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도 흠없는 완전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왕의 죽음은 율법적인 개혁의 한계를 드러낸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빌닷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말하였다. 그러자 욥은 원론적인 신학에 동의하지만 그 거대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겪는 실존적인 무력감과 두려움을 토로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는 공포와 절망으로 다가옴을 고백한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 9:4) 설령 자신이 의로울지라도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고 오히려 긍휼을 빌어야 할 뿐이라고 한탄을 한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욥 9:15) 욥의 한탄과 탄식에는 개혁주의 구원론과 기독론의 핵심 주제가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판결자를 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의로워지는데 눈 녹은 물로 씻는다고 해서 정결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욥 9:30) 이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함을 말한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간격을 메워줄 중재자가 있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0) 이것은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한 분이시니 그리스도 예수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욥은 깊은 절망에 빠져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주권을 알기 위해서는 중보자가 필요함을 고백한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두려우십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싶으십니까? 그것에 대한 답은 오직 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욥 8:1-2)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욥 8:1-2)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점잖게 말하였다면, 빌닷은 전통과 역사를 근거로 훨씬 더 직설적이고 날카롭게 정죄한다. 빌닷의 주장은 여호와 하나님은 정대로 정의를 굽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욥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한다. 욥의 자녀들이 죄를 범하였기에 그 죄에 버려둔 것이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음으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 8:4) 그러니 다시 정직하고 청결한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 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빌닷의 주장은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옛적부터 내려오는 검증된 지혜라는 것이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욥 8:8) 그는 비유를 통하여 말한다. 왕골(갈대)이 물이 없이 자랄 수 없듯이 하나님을 잊은 자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욥 8:13) 그리고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니 회개하고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욥 8:20) 빌닷의 신앙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공의를 결과적인 인과응보로만 해석을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인 자유를 가지신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신앙은 율법주의적 신앙으로서 ‘네가 만일 청결하고 정직하면’ 이라는 전제 조건을 단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느 인간도 완벽하지 않다는 개혁주의 신학과 대치가 된다. 그리고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즉 그의 전통적인 지혜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맞지만 욥의 특수한 고난(계시적 사건)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의 말씀(율법)을 전...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영생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연합이 된 자들이 누리는 은혜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서 버려진 고아처럼 살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충만한 은혜를 받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신 일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룩과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이제 하나 된 것을 세상이 알게 하여야 한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그들로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즉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세상에 하나 됨을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 간의 연합으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 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