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간증을 통해 개혁주의의 핵심인 이신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율법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시작하여, 바울 자신의 가치관의 대전환 그리고 끊임없이 달여가는 신앙의 경주를 묘사한다. 육체적 할례와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교사들을 개들과 행악하는 자로 경계한다. 오직 성령으로 봉사하며 예수만 자랑하는 자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할례당)임을 말한다. 자신의 화려한 과거와 육체의 자랑으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의 스펙을 열거하였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의 모든 과거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긴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이전에는 율법에서 난 의를 신뢰하였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얻어내는 자력 구원이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흠이 없어 보이나,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본성 안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를 만족 시킬 수 없는 배설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알게 되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볍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그것은 바울 자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고 무죄와 의로움을 선언 받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신칭의를 가장 큰 자랑과 기쁨으로 삼았다. 이제 의롭게 된 것만으로 구원이 완성되었거나 온전해졌다고 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행하여 달려가는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얻을 수 있...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대하 30:1) #여호와께돌아오라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대하 30:1) 히스기야 왕은 닫힌 성전 문을 열고 예배를 회복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까지 초청하여 역사적인 유월절을 지킨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넘어서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 준다. 왕은 보발꾼(전령)들을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에게 보내어 함께 유월절을 지키자고 초청한다. 에브라임 사람들과 므낫세 사람들은 전령들을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이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한 마음을 주어 왕의 명령을 따르게 한다. “하나님의 손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그들에게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한 마음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대하 30:12) 유월절은 1월 14일로 정해졌다. “그들이 첫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행하였더라”(민 9:5) 그런데 예외 규정이 있다. 그때에 부정한 것들을 접촉한 자들은 한 달 뒤인 2월 14일에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다.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민 9:11) 그래서 둘째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였다. “둘째 달에 백성이 무교절을 지키려 하여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니 매우 큰 모임이라”(대하 30:13) 그때에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절기를 지키러 나왔는데 혹시 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결례를 하지 못하였더라도 용서하여 달라는 것이다.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하게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대하 30:19)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왕의...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대하 29:2)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대하 29:2) 히스기야 왕은 유다의 가장 위대한 개혁 군주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성전 정화와 예배를 회복한다. 그의 아버지가 굳게 닫아버린 성전 문을 즉위하자마자 열어 놓는다.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대하 29:3)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 사함의 속죄 제사와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 조상들이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려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대하 29:6) 레위인들은 16일 동안 성전 정화를 한다. 성전 안팎의 모든 더러운 것들, 우상의 제단들을 기드론 시내에 버린다. 그리고 아하스 왕이 버린 모든 기구들을 다시 정돈하여 제단 앞에 둔다. 왕은 일찍이 일어나 성전에 올라가서 수송아지, 숫양, 어린 양, 숫염소를 각각 7마리씩 가져다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물로 삼는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그 피를 제단에 뿌려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한다. 번제가 시작되는 순간 여호와의 노래와 나팔 소리도 함께 시작이 된다. 이는 다윗에 정한 예배제도이다. 백성들은 자원하여 엄청난 양의 제물을 가져와 기쁨이 넘치므로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대하 29:36) 여기에서 히스기야의 놀라운 믿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는 왕 위에 오르자 군사력을 정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단절을 복원하는데 힘을 다 하였다.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오직 예배가 최우선적으로 회복될 때에 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배는 성경에서 규정한 대로 드려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정하신 방법대로만 받으시기 때문이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대하 28:1) #하나님의긍휼 #엘파소 #한인교회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대하 28:1) 남 유다 왕 아하스는 역사상 가장 악하고 영적으로 어두웠던 통치를 하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 주는 전적 부패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볼 수 있다. 아하스는 20세에 즉위하여 다윗의 길을 버리고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든다.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자녀들을 불사는 인신 제사를 드리는 악행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인 베가에게 남 유다를 넘긴다. 그래서 하루 동안에 유다의 용사 12만 명이 죽고, 20만 명의 포로로 끌려간다.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대하 28:6)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임하여 선지자 오뎃을 보내어 유다 포로를 돌려 보낸다. 그뿐만 아니라 에브라임 지도자들이 포로를 환대하여 옷을 입히고, 기름을 바르고, 나귀에 태워 종려나무 성 여리고로 데려다 준다.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 않는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의지한다. 에돔과 블레셋이 침공하자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성전과 왕궁의 재물을 바치며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앗수르 왕은 아하스를 돕지 아니하고 오히려 공격하고 괴롭힌다. 어리석고 미련한 아하스는 자신을 친 앗수르의 신을 의지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의 문들을 닫아버리고 예루살렘 구석구석에 제단을 쌓아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면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악행을 한 것이다. 아하스는 자신의 아들을 불에 태워 죽였지만, 남 유다 백성들은 포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굶주리지 않고 안전하게 돌아온다. 앗수르는 구원자가 아니라 약탈자이었다. 즉 우상은 우리를 돕는 자가 아니라 파멸하게 함을 기억하여야 한다. ...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대하 27:2) #바른길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대하 27:2) https://youtu.be/Zcae8756dJk?si=UOK7a06tUzgHudjT 유다 왕 요담은 16년 동안 통치를 하였다. 역대기의 많은 왕들은 시작은 성령으로 하였지만 마지막은 육체로 마치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나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왕은 화려한 업적은 없었지만 말씀을 꾸준히 지키었고 거룩함을 지키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선조들의 실패를 반면 교사로 삼았다. 왕이지만 성전에 들어가 거룩함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대하 27:2) 그의 아버지는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이 하는 분향을 하다가 이마에 나병을 얻은 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하였다.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고 성읍을 세우고 견고한 진영과 망대를 세웠다. 즉 나라의 국방을 튼튼하게 한 것이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므로 인하여 3년 연속으로 조공을 받았다.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행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 년과 제삼 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대하 27:5) 그가 강대한 나라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대하 27:6) 아버지의 업적은 그대로 물려 받았지만 아버지의 교만은 물려 받지 않았다. 즉 아무리 강해져도 하나님이 정하신 직분의 선을 넘지 않는 겸손을 유지한 것이다. 그는 일시적인 종교적 열광을 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행 10:23)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행 10:23) https://youtu.be/vISVALTd8cU?si=Lb3WXFfPR4P_nlTo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교리로 해석이 되고 가능한 이유는 이러하다. 십자가를 통하여 거듭난 자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리고 이웃과도 화평을 누리게 된다. 즉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들은 이웃과 화평을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십자가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었다. 새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된다.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구원받은 자들은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서 순종과 화평을 이룰 수 없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믿음의 원리를 모른다는 것이다. 머리로부터 지식과 영양분과 힘을 공급받는다.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력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다. 그 피를 공유한 영적 가족이 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 믿음의 고백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하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교회의 법은 세상의 법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된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을 집으로 들여 유숙하는 것은 단순한 환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진짜 형제가 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한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 화평과 기쁨을 누리는 곳이 교회이다. 또한 세상을 향해서는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5) #새사람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5)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환상을 보게 된다. 내용은 사람을 보내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또한 베드로도 기도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된다. 부정한 짐승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정하게 하셨으므로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을 찾아 온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내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행 10:17) 그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백부장인 고넬료를 말하며 가이사야로 올라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방인들이 베드료가 머무는 집으로 들어가 함께 유숙을 한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행 10:23) 본문의 말씀을 개혁주의 교회론으로 정리를 하면 십자가로 창조된 새 사람을 통하여 세워짐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여서 적당히 양보하며 교제하며 지내는 곳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머리가 되시는 몸의 지체로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 오게된 사람들은 전적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자가 되시는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며, 주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과 원리를 따라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물과 기름 같아서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식사는 물론이고 더 더욱이 한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유숙하는 곳에 이방인들이 들어 왔다. 또한 베드로도 가이사랴로 올라가 고넬료의 집에 유숙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구원도 하나님이 이루시고 교회도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진리를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이방인을 거룩하게 하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