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보금자리를 넘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욥 29:3)

  땅의 보금자리를 넘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욥 29:3) “그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욥 29:3)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영적 친밀함,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정성을 다해 공의와 긍휼을 베풀었던 지도자로서의 삶을 감회 갚게 되짚어 보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결코 악행 행하지 아니함으로 정죄를 받을 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회상이다. “그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욥 29:5) 성도가 누리는 모든 외적 복과 평안의 근원이 하나님과 언약적 친밀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바른 믿음은 성도의 형통을 단순히 물질적 풍요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보살핌으로 중명이 되어야 한다. 참된 경건은 성전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공의와 긍휼을 실천함으로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로 나타내야 한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한계가 있다. 아무리 의롭고 휼륭한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의 형통함이나 스스로의 공로가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욥은 지도자로서 약자를 돌보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며,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였다. 또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왕 같았다.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욥 29:25) 그러나 사망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자들은 구원하지 못하였다. 즉 욥의 공의를 제한적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공의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욥은 의로움은 도덕적으로 매우 뛰어났으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는 흠이 있는 인간의 의이었다.  구속사적 복음은 우리에게 욥의 의보다 더 완벽한 옷,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은 자...

세상의 지혜를 넘어 오직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욥 28:3)

  세상의 지혜를 넘어 오직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욥 28:3)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욥 28:3) 욥은 인간은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보석과 광물을 온갖 기술을 동원하여 파낼 수 있지만, 정작 인생의 고난과 모순을 풀어낼 참된 지혜는 피조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지혜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지혜란 곧 주를 경외함임을 선포한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인간의 지혜와 기술은 놀라와 새나 맹수가 보지 못한 땅속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 은총이다. 그러나 인간의 탁월함으로 하나님의 통치 원리라는 지혜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대조한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욥 28:12) 그 지혜의 값은 금이나 보석으로 치눌 수 없고, 바다나 깊은 물 속에도 있지 않다. 이는 인간의 전적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참된 지혜의 결론은 바로 주를 경외하고 악을 떠남을 말한다. 지혜는 인간이 탐구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고전 1:24). 인간이 물질이나 기술로 찾아낼 수 없었던 영원한 생명의 지혜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혀졌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세상이 미령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를 통해 구원의 지혜를 나타내셨다(고전 1:18). 욥이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신비로운 지혜가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이다.  사랑...

십자가의 정절을 지키며 최종 승리를 소망하라(욥 27:6)

  십자가의 정절을 지키며 최종 승리를 소망하라 (욥 27:6)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욥 27:6) 욥은 세 친구들과 변론을 마친 후에, 자신의 무죄함과 정절을 지키겠다고 최종적인 입장 표명을 한다. 즉 악인의 참혹한 종말을 스스로 선포하는 반전이다. 그는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생명을 두고 맹세를 한다. 친구들의 요구대로 허위 회개를 하거나 거짓으로 죄를 인정하여 하나님 앞에서 위선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괴롭게 하실지라도 자신의 순전함과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이유는,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 무슨 소망이 있느냐는 것이다.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욥 27:8) 즉 참된 신앙과 기만적 신앙의 구별을 말한다. 위선자는 죽음 앞에서 완전히 소멸되며, 회개없는 불경건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것이다. 악인의 비참한 결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인하여 소유의 역전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던져 버릴 것이니 그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힘쓰리라”(욥 27:22) 욥의 주장은 하나님의 진정한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악인에게 임하는 것이지, 까닭 없이 연단받는 의인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센 압박과 거짓 정죄 속에서도 자신의 순전함과 의로움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즉 십자가의 길에서 순전함을 지키셨음을 말한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가장 엄히 꾸짖으셨다. 십자가의 길은 위선이 아닌 진실함으로, 우리 죄인들의 죄짐을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외로움과 고통을 친히 담당하신 것이다. 악인의 재물은 의인에게로 돌아간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승리와 역전을 말하는 것이다. 악인이 구축한 바벨탑은 무너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함을 지...

자격 없는 자를 건지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행 20:9)

  자격 없는 자를 건지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행 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않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행 20:9) 우리가 구원받고 고침받는 데에는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 근거가 전혀없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자비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주권으로 긍휼을 베푸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본질적인 이유는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고 떡과 물고기를 주셨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인간을 향한 깊은 긍휼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 11:33) 예수님께서도 사람으로 이 땅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시며 성도가 걸어갈 긍휼의 본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음으로 긍휼을 구하는 심령을 원하신다. 그래서 상한 심령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행 20:7)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행 20:7) “그 주간의 첫말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본문의 말씀은 드고아 공동체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삼층 창에 걸터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다. 바울 일행은 무교절(유월절) 절기를 지나 드로아에 도착했다. 유월절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이다. 즉 유두고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유두고라 하는 인물은 헬라 사회 하류층 계급인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이름이다. 그 이름의 뜻은 행복, 다행이라 한다. 그는 하루의 일을 마치고 바울의 설교를 들으러 와서 삼층 난간에 걸터 앉았다. 그런데 하루 일과가 힘든 노동이다가 보니 졸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죽었다.  죽은 유두고를 살리는 과정을 통하여 유월절에 임하였던 구원의 은혜를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행 20:10)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각 자의 소견대로 당황하며 수근 거리고 떠들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홍해 앞에서 애굽의 군대를 보고 각 자의 소견대로 말한 것과 같다. 본문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구원의 역사 앞에서 인간은 수군거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모세가 백성게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즉 구원은 인간의 소동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잔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며, 친히 이루시는 역사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출 14: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말씀 속에 인물의 이름, 절기, 지명들을...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거룩을 향한 거룩한 순종(살전 5:23)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거룩을 향한 거룩한 순종(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교회와 성도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신앙 삶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 안에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양육하고 보존하기 위해 교회의 질서와 직분자들을 은혜의 방편으로 세우셨다.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3) 그리고 택함을 받은 자들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온다. 기도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절대 의존의 고백이다. 범사의 감사는 삶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아래에 있음을 믿는 태도이다. 이 셋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인 것이다. 성령의 감화하셨던 역사와 선포되는 말씀을 따라 오직 성경의 기준을 따라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들의 거룩하심을 이루시는 주체는 신자 자신이 아니라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택하신 백성을 반드시 거룩하게 완성해 내실 것이라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명확히 보여 준다. 이것을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정리를 하면, 공동체 안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셨다. 섬김의 리더십을 친히 보여 주셨고, “너희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 명하셨다. 그리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은,...

정죄를 넘어 상한 영혼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욥 26:2)

  정죄를 넘어 상한 영혼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욥 26:2)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욥 26:2) 욥은 친구들이 하는 말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 피조 세계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 뒤에 숨겨진 신비를 웅장하게 찬양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그는 정죄만을 일삼았던 친구들에게 반어법을 사용하여, 너희들이 아는 지식은 영적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 뿐이라 한다.  이것은 바른 교리와 지식을 가졋을지라도 성령의 역사와 사랑이 없으면 상한 영혼을 살릴 수 없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지금도 우주 만물이 질서 가운데 운행되고 있음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말씀으로 지탱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와 보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이 듣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거대한 능력 중에 손 끝에 불과하며,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라 한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라”(욥 26:14) 인간은 하나님의 존전 앞에 벌레같은 존재인데,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 하였다(사 42:3). 주님은 율법의 정죄 아래 기력없이 죽어 가던 죄인들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온유와 겸손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또한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공중 권세 잡은 자이자 날렵한 뱀인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님의 권능은 십자가에서 사탄을 무찌르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완성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