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내 문턱에서 전한 복음과 거룩한 신앙 인격(행 21:37)

  영내 문턱에서 전한 복음과 거룩한 신앙 인격(행 21: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행 21:37) 하나님께서 이루시려 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그리고 말씀 전하는 자를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심을 확인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면 저들은 돌을 들고 치려 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천부장과 군인들의 보호 하에 안전하게 말씀을 다섯 번이나 전하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개인의 억울함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주님께 받았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말은? 유대인들아 선민 사상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생각은,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의 회복이요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의 재현이 있을 것이라는 믿었던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은 두려움과 종교심이 가득하여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들을 섬겼다. 그래서 신이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 17:24) 그래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계획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심이다. 그뿐 아니라 죄로 인해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고 탄식하므로 창조 질서 회복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8) 예수님의 초림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러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완성자로 오신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직분의 거룩한 청지기직과 진리의 기둥 된 교회의 비밀(딤전 3:16)

  직분의 거룩한 청지기직과 진리의 기둥 된 교회의 비밀(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딤전 3장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장로와 권사 그리고 집사를 세우는데 기준점을 정해 주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도덕적 체크 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론에서 직분은 인간의 권력이나 계급이 아닌,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주신 은사적 섬김이다. 감독과 장로는 선지자적 왕적 사역의 반영이다. 그래서 책망할 것이 없고, 가르치기를 잘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를 택하여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말씀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런데 평소에 거짓말을 잘하는 자이면 전하는 말씀에 신뢰를 더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성도들을 바른 진리로 먹이고 이단적 오류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사명을 감당하여야 한다. 집사들은 제사장적 긍휼 사역이다. 그래서 단정하고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 물질적 구제와 성도들의 실제적 필요를 돌보는 직무를 위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섬김과 긍휼(제사장직)을 교회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 장로와 집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으로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책임과 사명을 다 하여야 하는지를 말씀 하였다면, 이제는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교회의 정체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진리를 세우고 수호하는 언약적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직분자의 세움의 목표는 바로 이 진리의 기둥을 견고히 ...

눈물의 탄식 속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의 확신(시 6:4)

  눈물의 탄식 속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의 확신(시 6: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참회의 시이다. 극심한 육에적 질병과 영혼의 고통 속에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계시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분노 앞에서 뼈가 떨리고(육체의 쇠약) 영혼이 심히 떨리는 (영적 절망) 극심한 고통 중에 은혜를 간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시며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 잔을 온몸으로 받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죄의 삯인 영원한 사망(스올)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사망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심으로 우리를 건져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음부의 침묵을 깨뜨리고 영원한 찬양과 감사를 회복하신 구속사건이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 밤마다 눈물로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우며, 대적의 핍박과 죄책감으로 인해 눈이 쇠하여졌음을 고백한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죄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자리에서 쏟으신 그 대속의 눈물과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한 사죄의 은총을 입은 것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신 이에게 심한 통록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탄식의 기도가 확신으로 변한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간구를 들으셨기에 모든 행악자는 물러가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과 부활의 승리를 주신다. 사탄의 모든 대적의 정죄는 무력화 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기도를 들으심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성도의...

아침 예배에 올리는 기도와 언약적 자비의 성소(시 5:3)

  아침 예배에 올리는 기도와 언약적 자비의 성소(시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다윗의 아침기도로서, 거짓과 악이 판치는 세상의 아침을 맞이하며 오직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헤세드)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의를 의지하여 성전에 나아가는 참된 예배자의 길을 보여준다. 아침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자신을 온전한 번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기도 사역을 통하여 매일 아침 단번에 영원한 제물이 되신 어린 양 그리스도를 힘입어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거짓과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을 멸망시킨다. 저들의 입에는 신실함이 없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아 혀로 아첨한다. 이것은 첫째 아담 이후에 전 인류의 철저한 부패와 죄성인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열린 무덤 같은 악인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진노와 심판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그 정죄에서 건져내셨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들어갈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의가 아니라 언약적 자비이다.  즉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그 인자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휘장)을 찢으심으로, 우리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성전)로 당당히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힙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의인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신다. 그래서 그 안에서 영원히 기뻐하며 친히 방패가 되어 주시어 호위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완벽한 구원의 보증이다. 어떠한 환경과 조건에서도 우리의 기쁨...

영적 반역의 비극과 원시 복음으로 비춘 대속의 은혜(창 3:15)

  영적 반역의 비극과 원시 복음으로 비춘 대속의 은혜(창 3:15) “내가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은 단순한 한 인간의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영적 파산과 언약적 반역,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역사 속으로 개입하게 되는 구속사의 결정적 분기점이다. 사탄의 유혹과 아담 하와의 범죄 과정은 죄가 작동하는 본질적 구조를 보여 준다.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의심하게 만들고, 하와는 말씀을 임의로 감하여 ‘죽을까 하노라’ 하며 언약적 경계를 약화 시킨다. 즉 사탄은 하나님을 악한 분으로 인식을 시키고, 하와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자율적으로 판단하게 하고 하나님과 같아 지려는 습성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그러므로 죄의 핵심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스스로 선악의 입법자, 심판관이 되려는 교만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복시킨 영적 반역이다. 그 결과로 인하여 관계가 파탄이 나고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언약적 교제가 깨져서 나무 뒤에 숨고, 부부간의 관계도 금이 가서 책임을 전가하고, 뱀에게 책임을 돌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뱀(사탄)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임을 약속하셨다. 즉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부활로 사탄의 권세(죄와 사망)를 완전히 짓밟으실 것을 예고한 최초의 복음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무화과나무 잎 치마로는 수치를 가릴 수 없다. 그래서 무죄한 짐승을 잡아 피를...

첫 아담의 행위 언약과 마지막 아담이 완성하신 은혜 언약(창 2:17)

  첫 아담의 행위 언약과 마지막 아담이 완성하신 은혜 언약(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맺어진 첫 번째 언약이 ‘행위 언약‘이다. 또는 생명 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의 당사자는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언약적 머리(대표)인 아담이다. 언약의 조건은 완전한 순종이다. ’먹지 말라‘는 금령은 겉으로는 단순한 음식 규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자발적 굴복과 사랑의 순종을 시험이라는 시금석이었다. 순종의 시험을 통과한 경우는 단순히 아덴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하고 영화로운 생명으로 승격되는 복이 약속된 것이다. 만약 불순종시에는 형벌(사망)이 약속되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것은 영적 사망(하나님과의 단절), 육적 사망(육체의 분리), 영원한 사망(지옥 심판)이 선고된 것이다. 대표성의 원리로 아담은 개인으로 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언약적 대표로 섰기 때문에, 아담의 실패는 곧 모든 인류의 죄책과 오염으로 전가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이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하여 알게 하는 것은, 피조물 됨의 한계선과 순종의 시금석 선악의 기준과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는 표지이다. 인간이 이를 범한 것은 스스로 선악의 입법자와 판단자가 되려는 교만이자 반역이 된다.  또한 생명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을 때 주어질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교제를 확증하는 은혜를 말한다.  첫 번 째 아담의 실패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와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켰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

두 쇠사슬의 결박 속에 감추인 가장 안전한 섭리(행 21:33)

  두 쇠사슬의 결박 속에 감추인 가장 안전한 섭리(행 21: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행 21:33)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여야 하고, 로마를 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로마를 가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로마 군인들과 함께 로마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설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이 유익하다.  이것은 마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거짓 충동질로 군인들에게 잡힌다.  유대인들이 더 난리를 치고 발광을 하면 할수록 바울은 더 안전하게 보호를 받게 된다. 유대인들의 암살 위협 속에서 바울을 살리기 위해 동원된 병력이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으로 총 470이다. 그리고 바울을 태워 보내기 위한 짐승도 준비가 된다. 바울은 죄인의 몸으로 체포되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정예 군대의 완벽한 경호 속에서 가장 안전하게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최고 권력층을 향한 5번의 담대한 십자가의 복음이 있었다. 이것 또한 로마 군대의 보호 아래서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얼마나 안전하고 세심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이러한 신비로운 구원의 역사가 바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펼쳐지고 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는 베드로, 바울, 바나바와 같은 이들을 통하여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