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네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이루었다. 이제부터는 성벽 안에 채워야 할 것들을 세운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릴 지도자로 자신의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를 세우는데, 그들이 발탁된 이유는 세상적인 스펙이나 정치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충성스러웠기 때문이다. “네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교회의 지도자와 일꾼을 세우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충성됨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성벽이 견고해도 그 안을 지키는 자들이 타락하면 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충성하심으로(빌 2:8),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가장 완벽하고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다. 느 7장의 대부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명단으로 채워졌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동하사 이 명단을 꼼꼼히 살피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시고 생명책에 기록하신다. 이 명단은 환난과 포로 생활 속에서도 남은 자를 보존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이다. 예수님께서도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낸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에 제사장이다.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다. “총독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느 7:65) 즉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할 완벽한 ‘우림...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느 6: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느 6:1)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문짝만 달면 되는 막바지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대적들은 무력의 위협에서 교묘한 속임수와 영적 흔들기로 완전히 바뀐다. 대적들은 느헤미야에게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4번이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룩한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내려 갈 수 없다고 한다. 타협을 통하여 암살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중단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존재 하지만, 세상과 영적 타합을 하거나 야합을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같은 시험이 다가 온다. 교회를 위한 타협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기준이 되어 판단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된다면 교회에 세속적인 것들이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그러자 대적들은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 반역을 꾀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느 6:9) 이번에는 예언으로 유혹을 하여 느헤미야를 죽이고자 한다. 대적들은 거짓 선지자를 보내어 협박을 하여 성소 안으로 숨으라고 한다. 그러나 제사장이 아닌 느헤미야가 성전 안을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게 됨을 이용하려던 것이다. 온갖 집요한 방해 속에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완성한다.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두 두려워하고 크게 낙담을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 우리의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느 5: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느 5:11) 성벽 재건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 언약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치명적인 위기를 맞는다. 백성들이 기근과 과도한 세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귀족들과 지도자들이 동족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고 심지어 어린 자녀들을 노예로 삼는 참담한 현실이 고발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와, 어떻게 다시 세워지는지를 살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외할 때에 공동체(교회)가 올바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핍박 속에서도 한 손에 병기를 들고 성벽을 쌓았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 완전 부패를 직시한다. 달리 말하면 외부의 적보다 언약의 백성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이기심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성벽을 세우는 자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할 때에 공동체가 무너진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지기 못한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자 느헤미야는 동족을 착취하는 귀족들을 행해 크게 노하여 꾸짖으며 즉시 돌려주고 노예를 해방하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느 5:13)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신 23:19) 이것은 언약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된 것이다. 귀족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본문은 개혁주의 예정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이방인들 스스로의 지혜나 자유의지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은혜가 임하였기 때문이고,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임하여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행위나 율법 준수로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의로운 상태가 될 수 없다. 즉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의로워 질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될 수 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하게 하신 의를 전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랑을 한다. 자신의 의를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의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라 복음을 전도하고 있다. 배척 앞에서 당당하여 발의 먼지를 떨고 다른 도시로 옮겨 간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세상이 복음 전하는 자를 배척할 수 있다. 그러나 상처를 받거나 타협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담대하게 진리만을 선포하면 된다.  예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3) #하나님의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23)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에 말씀을 전한다. 즉 애굽부터 다윗 왕에 이르는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면서, 이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성취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모세의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지만,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 다음 안식일에 온 시민이 복음을 듣고자 모인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바울을 비방한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행 13:44)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하여야 하지만 너희가 거부하므로, 우리는 담대히‘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를 외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다. 즉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노니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이 말씀을 듣고 기뻐한 이방인들 중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은 다 구원을 받는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그러자 유대인들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그 지역에서 쫓아낸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핍박 중에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더라”(행 13:52) 이것은 바울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영지주의, 율법주의 들)들은 예수님으로만 부족하니 천사 숭배나 철학적 지식이 더 필요하다고 미혹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행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 충분함을 전하는 것이다. 그 분에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가 감추어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단번의 완전한 속죄를 해 주셨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함은 구원론적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적(교회론적) 고난을 말한다. 머리 되신 예수님과 그분의 몸인 교회가 영적으로 완벽하게 연합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을 행하여 복음을 전하며 당하는 모든 핍박과 환난은 곧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특권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가 당하는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그래서 나의 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의만이 힘이며 소망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책임을 요구한다. 즉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오는 은혜가 100%와 성도의 순종 100%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대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철저히 붙어 있어야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세상은 자꾸만 우리들에게 교묘한 말로 속삭인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나간다. “예수께서 이르시...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느 4:4) #영적전쟁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느 4:4)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아름답게 본격화 되자, 대적들의 거센 조롱과 살해 위협이라는 심각한 외부적 방해와 시험이 찾아 온다. 마치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영적 전투의 현실과, 그 속에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책임을 다하는 성도의 마땅한 태도를 보여 준다. 대적자들은 유다 사람들을 향해 미약한 자들,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 하며 맹렬히 조롱한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3) 타락한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빛과 그분의 나를 미워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언약 공동체의 회복을 막으려는 영적 공격을 한다. 이러한 영적인 공격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계실 때도 있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그러므로 교회가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생명력이 있는 참된 교회임을 증명하는 표지가 된다. 대적들의 조롱 앞에서 느헤미야는 사람과 논쟁하거나 싸우지 않고, 즉시 하나님께 엎드려 우리 하나님은 들으시라고 탄원한다. 그리고 저들의 죄를 갚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멸시하는 악에 대한 분노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로서 심판해 달라는 것이다. 즉 공의로우신 재판장에게 맡김을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가장 두렵고 어두운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이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