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결박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행 21:28)

  억울한 결박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행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들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행 21:28)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들에게 잡힐 것을 알고 있었다. 본문에서 바울이 어떻게 잡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 안에 있음을 보고 외쳐 이르기를, 할례를 받지 아니한 부정한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여 밖으로 끌어내라고 한다.  성전 밖으로 끌려나온 바울을 그들이 죽이려 할, 그때에 군대의 천부장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행 21:31) 그래서 천부장이 백부장과 군인들을 거느리고 바울에게로 가는 바울을 치는 일을 멈춘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행 21:32) 천부장은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고 신원을 묻는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죽이라고 외치며 따라간다.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행 21:36)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주님의 뜻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함으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치노라”(행 21:14) 왜 하나님은 이러한 고난과 체포의 방법을 택하셨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즉 인간의 눈에는 억울한 결박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로마 군대를 경호원으로 삼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하고, 로마 정권의 심장부인 로마로 가는 가장 지혜롭고 완벽한 섭리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와 교회의 거룩한 언약적 질서(딤전 2:5)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와 교회의 거룩한 언약적 질서(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딤전 2장의 말씀은 공예배와 질서와 기도를 다루면서, 특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는 구절로 인해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 사역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구약 시대의 구원의 은혜는 주로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에게 국한되었다. 그러나 신약 구속사는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 그리고 평민뿐만 아니라 왕들과 통치자들을 포함한 모든 종류와 계층의 사람들에게로 확장이 된다. 즉 복음의 외적 초청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선포되지만, 주권적 구원의 효력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개혁주의 기독론의 핵심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5-6)이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하게 할 중보자는 오직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과 계층 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완전한 값을 치르셨다. 이것은 구속사의 약속의 성취이다. 그래서 바울인 이제 구속사의 복음을 들고 이방인들을 향한 일에 사도로 세움을 받은 것이다. 이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로 모이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전통과 문화족인 습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경륜과 구속의 은혜에 뿌리를 두고 질서를 세워야 함을 전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의 말을 들으라 하는 것은, 창조 타락과 구속사적 회고를 따른 것이다. 창조의 순서는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꾀임을 받아 타락에 빠진 역사적 사실을 들어 교회의 영...

삼위일체의 장엄한 창조와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창 1:26)

  삼위일체의 장엄한 창조와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창세기 1장은 단순한 자연과학적 설명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우주 창조와 언약적 질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 창조의 기초로 해석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무에서의 창조를 통하여, 창조 세계와 창조주 사이의 절대적 구별을 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빛이 있으라’는 영원한 말씀(로고스, 성자 그리스도), 그리고 수면 위에 운행하시며 생명을 부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동역으로 창조가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혼돈과 공허가 6일 동안의 창조 구역을 통해 완벽한 질서와 풍요로 변화가 된다. 1-3일 동안은 공간과 영역(빛/어둠, 하늘/바다,땅)을 형성하시고, 4-6일은 그 영역을 다스릴 피조물(광명체, 조류/어류, 동물/인간)로 채우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왕적 대리자이자 청지기로 지음받아 피조 세계를 돌보고 번성하게 할 언약적 사명을 받았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적용을 하여야 한다. ‘빛이 있으라’ 어둠과 혼돈 가운데 비추인 첫 말씀은 영적 재창조의 빛으로 죄로 어두워진 성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시는 복음 사역의 원형이 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참된 의와 지식과 거룩함의 청지기인데, 첫 아담의 실패로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한 순종으로 회복하시고 성도를 자신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것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만물이 회복을 말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타락으로 탄식하는 피조 세계 전체를 종말론적으로 회복시킨다. 창조 사역...

귀로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뵈옵는 인격적 신앙으로(욥 42:5)

  귀로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뵈옵는 인격적 신앙으로(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폭풍우 속에서 창조주를 만난 욥은 마침내 입을 다물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진정한 회개를 드린다. 그리고 욥을 정죄했던 친구들을 꾸짖으시며, 욥의 기도를 통해 모두를 용서하시고,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욥은 그동안 자신이 귀로 들었던 것을 갖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었다. 그런데 말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알게 된 이후에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즉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어른이 되어 깨닫게 됨을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욥은 말씀을 통하여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희미하게 알던 것을 확실하게 눈으로 보는 것같이 선명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회개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하나님은 세 친구를 향한 책망을 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한 말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송아지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신다.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친구들이 순종했고,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받으셨다. 그래서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다. 떠났던 형제와 자매, 지인들이 돌아...

리워야단의 공포를 꺾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욥 41:1)

  리워야단의 공포를 꺾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욥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욥 41:1) 하나님께서 욥에게 보여 주는 것은 모든 악의 세력을 발아래 두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승리를 장엄하게 선포한다. 육지의 괴물은 베헤못이고, 죽음의 바다를 상징하는 가장 두려운 괴물 리워야단을 등장시켜, 모든 고난과 악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를 안겨주는 리워야단의 압도적인 힘을 묘사하시어, 이 끔찍한 피조물조차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 있음을 선언하신다. 인간의 통제를 거부하는 리워야단이다. 만약 사람이 그에게 손을 대면 끔찍한 싸움이 되고 다시는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짐승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그것은 목에는 엄청난 힘이 뭉쳐 있고, 마음(심장)은 맷돌의 아래짝처럼 단단하여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욥 41:7) 리워야단은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으로 묘사를 한다. 하나님은 그가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라고 명령을 하신다.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욥 41:34) 개혁주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주권으로, 그 모든 악조차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리워야단은 단순히 커다란 악어나 고래가 아니라,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죽음의 세력, 사탄,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악을 상장함을 말한다. 그것은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라 부른다(34절).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지혜와 의로움으로 교만하게 목을 세워도, 죽음과 사탄의 권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리워야단 앞에서 인간의 모든 논리, 철학, 종교적무기는 짚검불이 된다. 인간은 철저...

전능자와의 다툼을 멈추고 구원의 오른손을 바라보라(욥 40:2)

  전능자와의 다툼을 멈추고 구원의 오른손을 바라보라(욥 40: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폭풍우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의 압도적인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가장 깊은 교만을 다루고 있다. 오직 창조주만이 통제할 수 있는 거대한 짐승 ‘베헤못(Behemoth)’을 등장시킨다.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 40:15) 하나님은 욥의 불평에 쐐기를 박으시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압도적인 통치권을 보여 주시므로, 욥은 자신이 더 이상 하나님께 따져 묻거나 변론할 자격이 없는 티끌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침묵을 선언한다.  만일 욥이 하나님처럼 우레 소리를 내며, 세상의 교만한 자를 낮추고 악인을 짓밟을 능력이 있다면, 그때에는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14) 욥의 잘못은 무엇인가? 자신의 결백(의로움)을 증명하는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은연 중에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부당하시다’고 선을 넘은 것이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순간,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고 그분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게 된다. 구원은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불의함을 십자가 앞에 온전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 땅의 그 어떤 도덕적 영웅(욥을 포함하여)도 자신의 오른손(행위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베헤못을 통제할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그것을 다스리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즉 고난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만이 해결하실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하셨다. 마치...

야생의 섭리가 깨뜨리는 인간 중심주의와 그리스도의 승리(욥 39:1)

  야생의 섭리가 깨뜨리는 인간 중심주의와 그리스도의 승리(욥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욥 39:1) 하나님은 창조주의 섭리는 우주적 기상 현상에서 야생동물의 세계로 말씀한다. 즉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야생의 섭리를 아느냐는 것이다. 욥에게 질문하시기를 네가 그들이 새끼 치는 때를 아느냐? 그 기간을 셀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이것은 사람의 도움 없이도 광야에서 강건하게 자라나 제 길로 감을 알게 한다.  들나귀와 들소의 자유를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칠지라도, 그 소리를 비웃으며 산을 누빈다는 것이다.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욥 39:7) 타조의 기이함을 말씀하신다. 모성애가 부족함으로 알을 모래에 버려 두어 어리석게 보이지만 날개를 펴고 달릴 때면 말과 기수조차 비웃을 정도로 속도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뀌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욥 39:18) 전투마의 용맹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말의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입히고, 나팔 소리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기를 행해 돌진하는 용맹함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독수리가 까마득하게 높은 낭떠러지 끝에 집을 지으며 먹이를 찾아내는 시력은 인간의 지혜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의 본성적 부여하심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욥과 세 친구들이 갖고 있는 인간 중심주의를 철저히 박살 내고, 타락한 이성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주권을 선포하신다.  인간 중심적인 생각은, 주변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들나귀와 들소를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타조는 지혜는 없지만 말보다 빠른 발을 가졌다. 이것은 인과응보적인 지혜를 무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