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주민이 여호람의 막내 아들 아하시야에게 욍위를 계승하게 하셨으니 이는 전에 아라비아 사람들과 함께 와서 진을 쳤던 부대가 그의 모든 형들을 죽였음이라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더라”(대하 22:1)#한사람을 남기다

  “예루살렘 주민이 여호람의 막내 아들 아하시야에게 욍위를 계승하게 하셨으니 이는 전에 아라비아 사람들과 함께 와서 진을 쳤던 부대가 그의 모든 형들을 죽였음이라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더라”(대하 22:1) https://youtu.be/ELYFBENkOhc?si=HgzPrOoCD3HBA4Q_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하시는 분이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 고백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피면 그 기도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악한 여호람은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딸인 아달랴를 아내로 맞이 했다. 그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이 전에 아라비아가 쳐들어왔을 때에 죽었다. 그래서 막내 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된다. 어머니의 꾀에 빠져 그도 악한 왕의 길을 걸었다.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대하 22:3)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 요람 왕과 함께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우러 갔다가 패한다. 이 전쟁에서 요람이 부상을 당하여 아하시야가 병문안을 간다.  그곳에서 아합의 가문을 심판하였던 예후를 만나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입엇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대하 22:7상) 이 소식을 들은 아달랴는 다윗의 가문을 죽여서 씨를 말리려 한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대하 22:10) 즉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파기를 시도한다. 그래서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다 죽인다. 그녀의 손자들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딸인 여호사브앗이 젖먹는 어린아이를 유모와 함께 숨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요아스이다. 요아스가 크는 동안 아달랴가 남 유다를 통치한다. 사탄인 아달랴는 메시야가 오실 통로인 다윗의 씨를 끊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단...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대하 21:4)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대하 21:4) 여호람 왕은 여호사밧의 아들로서 아주 악한 왕이다. 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통치를 하였다. 악한 왕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언약의 불변성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이다. 사악한 왕은 권력을 잡자 모든 아우들과 방백들을 칼로 죽인다.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대하 21:4) 그가 악한 왕으로서 통치를 하였던 것은,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인 아합의 딸(아달랴)을 아내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으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왕하 8:18) 그리하여 유다 산들에 산당을 세워 우상숭배를 하게 한다.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록하게 하였으므로”(대하 21:11) 그리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아합의 집을 따른 죄와 형제들을 죽인 죄를 책망한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격동시켜 침공하여 왕궁의 재물과 아내들, 아들들이 다 잡혀가고 막내(여호아하스)만 남는다. 여호람은 창자에 불치병이 들어 2년 만에 창자가 빠져나와 죽는다.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대하 21:19) 하나님의 언약의 불멸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람은 죽였지만 다윗의 집은 멸하지 않았다.  이 등불이 결국 꺼지지 않고 이어져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이 된다. 그리고...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9)#하나님의 주권과 #전적부패, #기도 응답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9) https://youtu.be/RmokNM30EwM?si=LIGI111t4ZQmEGcN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중심으로 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여호사밧 왕은 거대한 연합군이 엔게디까지 쳐들어오자 여호사밧 왕은 여호와께로 낯을 행하고, 온 유다에 금식을 공포한다. 왕의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 주는 모든 이방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남 유다를 지켜달라고 한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대하 20:7) 그러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며, 대적할 능력도 없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 20:12) 그러자 하나님의 응답이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선포한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하) 그래서 여호사밧 왕은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찬양하게 하였다. 찬양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적군이 서로 살육하게 한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폐하였으니”(대하 20:22) 그러므로 유다 백성...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https://www.youtube.com/@kapc8033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거듭남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으나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였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9) 이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 아닌 육신의 떡을 주는 자로만 이해하였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막 8:14) 이러한 제자들에게 맹인을 고쳐 주시면서 교육하셨다. 이 기적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가 어떠함을 말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셨다. 벳세다에서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즉 구원은 개인 구원임을 말한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막 8:23) 즉 첫 번 째 안수를 하시고 맹인에게 묻기를 무엇이 보이느냐? 맹인의 대답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아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 8:24) 그러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신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 8:2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시고 하는 것은 눈은 떴으나 진리를 왜곡되게 보는 상태인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모든 것을 밝히 보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안수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감정이 아닌 지식으로 알고 믿음을 세워야 함을 말한다. 새 생명인 어린 아이는 눈을 뜨고 있지만 사물을 정...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 9:8) https://www.youtube.com/@kapc8033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바울은 자신의 열심과 철학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영적 소경이었다. 본문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진리(교리)가 있다. 그것은 중생의 은혜를 받고 성화의 과정을 다루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즉 단순히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바른 지식(교리)를 통해 영적 시력을 온전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육적인 눈은 멀고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된다. 이것을 중생이라 한다. 눈을 떴다고 해서 신앙의 완성이 아니다. 구원은 단회적 사건이 칭의로 시작이 되면서, 온전한 진리를 보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나(눈은 떴으나), 진리를 근거로 한 믿음은 정립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 갈 수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영안의 눈을 뜬 바울은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는다. 그 때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볼 수 있게 된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구원은 신분의 변화인 동시에 시력의 교정 과정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자들은 영안이 흐린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게 되면 자기 생각을 혼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이 문제가 오늘날 가장 심각하다. 이것을 혼합주의라 하며 또한 우상숭배라고 한다. 성경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이론 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1) 빌립보 교회는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다. 그래서 한 마음과 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전한다. 전하는 내용은 단순히 도덕이나 윤리적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와 같은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즉 인간의 본성과 타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성육신의 신비를 소개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빌 2:6)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수동적 순종이라 한다. 그리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지키신 것은 능동적인 순종이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은 삼위일체 구원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죽기까기 순종을 하심으로 인하여 공의로운 보상을 받으신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왕위에 왕이 되심을 말한다.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만물을 통치자가 되심을 말한다. 이렇게 되심으로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기쁨이요, 불택자들에게는 심판의 두려움이 된다.  예수님처럼 ‘착하게 살자‘라고 하면 율법주의가 된다. 바른 믿음은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으니 그분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삶의 주권을 그분에게 양도함을 말한다.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 간에 다툼을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심각한 죄로 보았습니다. 성도들은 개인의 취향이나 이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고 없으시니라 하니라”(대하 19: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고 없으시니라 하니라”(대하 19:7) 아합과 잘못된 동맹으로 죽을 뻔했던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겸손히 회개하고 국가 사법 제도를 말씀 위에 세우는 제2의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그의 아버지 아사 왕은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옥에 가두었지만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한다. 왕이 악한 왕인 아합을 도왔지만 선한 일을(우상 제거) 한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음으로 은혜를 받게 된다. 그는 다시 북쪽 이스라엘로 가지 않고 각 견고한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고 엄중히 명한다.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대하 19:6) 즉 예루살렘에 레위 사람, 제사장, 족장들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인 종교 재판을 맡기고, 민사와 형사 재판은 왕에게 맡기고, 최고 재판소의 원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심으로 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참된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지적 받았을 때에 회개하며 돌이키는 자이다. 이것이 택함을 받은 자들의 증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성도가 완전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신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재판관은 왕의 대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다.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즉 여호와께 속한 일은 대제사장 관할이고 왕에게 속한 일을 구분하였다. 둘 다 하나님의 법 아래 있으면서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교회권은 말씀과 치리이며, 국가권력은 칼에 있다. 이것을 서로 혼동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법 아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