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공평한 저울 앞에서(욥 31:6)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 앞에서(욥 31: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 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욥 31:6)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두고 걸었던 최후 진술이자 결백을 선언한다. 눈의 순결부터 타인과의 관계, 물질, 우상숭배, 사회적 약자에게 대한 책임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들추어내며 만약에 죄가 있다면 어떠한 저주도 받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겉으로 드러나는 죄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음란함과 마음의 속임수까지 통제하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걸음을 세시고 살피시는 분임을 알았기에 은밀한 죄조차 경계하였다. 진정한 거룩은 외적인 율법 준수에 머물지 않고, 마음의 중심과 은밀한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남종이나 여종이 쟁론을 제기할 때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을 모태에서 만드신 하나님이 그 종들도 동일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신분제였던 구약 시대에 그가 종과 약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모든 인간이 단 한 분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라는 개혁주의적 창조론이 있었다. 또한 재물의 풍부함이나 해와 달 같은 피조물을 마음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물질과 피조물을 마음으로 섬기는 것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은밀한 우상숭배임을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다. 즉 율법의 요구를 행동에서 마음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욥은 인간적으로 최선의 거룩을 고백했지만, 인간인 이상 결코 완전할 수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음과 생각과 삶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참된 의인이시다. 그는 만약 자신이 죄를 지었으면 저주와 심판을 받겠다거 자청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 앞에서 스스로의 행위로 합격할 수 있는 인생은 ...

타협 없는 진리 선포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행 20:27)

  타협 없는 진리 선포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행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리 말씀을 바로 전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거짓 복음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요, 전달하는 자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즉 목사가 전하는 말을 듣고 성도들을 대신 깨우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한다. 그런데 만일 전하지 않게 되어 성도들이 죄를 범하게 되면 그들의 죄값을 목사의 손에 묻겠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8) 그런데 충성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자에게는 죄인들의 피값을 묻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 3:19)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을 깨닫고 복음을 전한 자가 사도 바울이다. 그래서 장도들 앞에서 나는 너희의 죄값에 대해서 나는 깨끗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행 20:26) 성경의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독된 책이다. “모든 성경...

모든 겸손과 눈물로 감당한 사역의 진실성(행 20:20)

  모든 겸손과 눈물로 감당한 사역의 진실성(행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올라가는 길에 에베소를 직접 들르지 못하고, 밀레도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마지막 목회적 권면과 작별 인사를 한다. 그의 작별 인사에는 사역에 대한 회고, 왜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사명에 대한 다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사도인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일이 있었다. 병든 자와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면 사람으로서 대중 앞에 설 때에 자랑과 교만으로 설 수 있다. 그가 복음을 어떻게 전하였는지, 그리고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교훈을 준다. 복음을 전하였던 현장과 교육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 앞에서 확인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만일 거짓이라면 장로들이 반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당당하게 그의 사역을 확인 받고 있다. 복음을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즉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복음 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거리낌이 없이 전했음을 말한다.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을 가려서 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하였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1)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해주고 로마로 전도 여행을 떠나기 위함이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그런데 성령에 매여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의 주체는 우리 주 예수 ...

환난을 넘어 장차 누릴 영원한 영광으로(살후 1:3)

  환난을 넘어 장차 누릴 영원한 영광으로(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살후 1:3) 사도 바울은 극심한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고, 장차 임할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성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본문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고난 속에서도 교회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명확히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해질 수 있었던 원인은 그들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성도의 견인 은혜 덕분임을 말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불운이 아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로 빚어가시는 은혜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들에게 임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하는 심판이다. 하나님은 재림의 날에 공의의 저울로 완벽하게 정산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2)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성도들이 받는 환난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로 맞추어지는 것이며,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하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세상의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보상하시는 최종 주권자가 예수님이심을 믿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주님의 공의를 신뢰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급함이과 불평을 버리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말씀과 기도 안에 거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신앙의 정절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수치와 침묵을 넘어 십자가의 위로와 안식으로(욥 30:9)

  수치와 침묵을 넘어 십자가의 위로와 안식으로(욥 30: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욥 30:9) 욥은 과거의 찬란한 영광과 복락을 누렸던 것을 회상했고, 한 순간에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한 이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형편에 처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냉정함 침묵과 무자비해 보이는 손길 속에서 육체적, 영적 절망의 극치를 통과하여야 한다.  그의 명예와 존엄성은 완전히 바닥에 추락하였는데, 이것은 인간 타락의 비참함과 세상 영광의 가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이 누리는 세상의 지위, 명예, 존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지면 한순간에 수치와 모욕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욥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육신의 고통이나 사람들의 조롱보다 하나님의 가혹함과 침묵에 있었다.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고 가혹하게 치시는 하나님 앞에 욥은 죽음을 예감하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침묵과 고난의 신비를 믿는다. 이는 하나님이 욥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깊은 구속적 작정 속에서 믿음을 연단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성도가 경험할 수 있는 영혼의 어두운 밤의 절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땅에서는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를 통과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욥이 당한 고난과 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치와 조롱을 예표한다. 욥은 억울하게 수치를 당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할 영원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욥 30:20) 욥이 탄식했던 하나님의 가혹한 침묵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겪으신 단절의 고통에 극치에 달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아들에게 철저히 침묵하시고 진노의 잔을 쏟으셨...

땅의 보금자리를 넘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욥 29:3)

  땅의 보금자리를 넘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로(욥 29:3) “그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욥 29:3)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영적 친밀함,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정성을 다해 공의와 긍휼을 베풀었던 지도자로서의 삶을 감회 갚게 되짚어 보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결코 악행 행하지 아니함으로 정죄를 받을 자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회상이다. “그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욥 29:5) 성도가 누리는 모든 외적 복과 평안의 근원이 하나님과 언약적 친밀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바른 믿음은 성도의 형통을 단순히 물질적 풍요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보살핌으로 중명이 되어야 한다. 참된 경건은 성전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공의와 긍휼을 실천함으로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로 나타내야 한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한계가 있다. 아무리 의롭고 휼륭한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의 형통함이나 스스로의 공로가 영원한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욥은 지도자로서 약자를 돌보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며,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였다. 또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왕 같았다.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욥 29:25) 그러나 사망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자들은 구원하지 못하였다. 즉 욥의 공의를 제한적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공의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욥은 의로움은 도덕적으로 매우 뛰어났으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는 흠이 있는 인간의 의이었다.  구속사적 복음은 우리에게 욥의 의보다 더 완벽한 옷,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은 자...

세상의 지혜를 넘어 오직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욥 28:3)

  세상의 지혜를 넘어 오직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욥 28:3)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욥 28:3) 욥은 인간은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보석과 광물을 온갖 기술을 동원하여 파낼 수 있지만, 정작 인생의 고난과 모순을 풀어낼 참된 지혜는 피조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지혜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지혜란 곧 주를 경외함임을 선포한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인간의 지혜와 기술은 놀라와 새나 맹수가 보지 못한 땅속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일반 은총이다. 그러나 인간의 탁월함으로 하나님의 통치 원리라는 지혜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대조한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욥 28:12) 그 지혜의 값은 금이나 보석으로 치눌 수 없고, 바다나 깊은 물 속에도 있지 않다. 이는 인간의 전적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참된 지혜의 결론은 바로 주를 경외하고 악을 떠남을 말한다. 지혜는 인간이 탐구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고전 1:24). 인간이 물질이나 기술로 찾아낼 수 없었던 영원한 생명의 지혜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혀졌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세상이 미령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를 통해 구원의 지혜를 나타내셨다(고전 1:18). 욥이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신비로운 지혜가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이다.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