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9) #하나님의 간섭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9) 욥은 6장에서 친구들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7장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탄식과 호소를 한다. 그는 인생의 허무함을 논하며, 자신을 과도하게 주목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그만 좀 놓아달라고 한다. “네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욥 7:7) 그는 하나님께 대놓고 따진다. 왜 나를 바다처럼 대하냐는 것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욥 7:12) 자신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 놓아 달라고 애원한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 7:19)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지었던들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있냐는 것이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을 되게 하셨나이까”(욥 7:20)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은 하나님이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그 복이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심판으로 느낄 수 있다. 그는 보호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감시하시는 하나님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자비는 보지 못하고 엄위하신 재판장의 얼굴만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죄가 없다고 친구들에게 항변을 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욥 7: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난 가운데 계십니까? 그 아픔을 하나님 아버지께 토로하셔야 합니다. 욥처럼 따지셔도 됩니다. 그리고 주무시...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2.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3.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합니다. 4.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으로 전합니다. 5.모든 신학은 교회론을 향하고 있습니다. 6.교회에 모든 것은 주일을 준비하는데 있습니다. 7.주일날은 예배에 집중을 합니다. 8.예배의 꽃은 설교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삼위일체의 구원론을 따라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 9:41-42) #하나님의성품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 9:41-42)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자신의 일에 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을 이루는데 베드로는 중풍 병자와 죽은 자를 살리면서 확인하게 된다. 즉 능력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고 베드로는 쓰임을 받는다. 그래서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이나 광경을 본 자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 9:42) 예수의 생명이 나를 통하여 룻다와 욥바 사람들에게 전해지니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베드로는 자신에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담대히 복음 전파를 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베드로의 성품을 변화시키셨다. 성질이 급하였던 베드로에게 신성한 성품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여 하셨느니라”(벧후 1:4) 하나님은 택한 자들에게 믿음과 성품을 주신다. 베드로, 바울, 모세가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애굽에 가서 히브리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 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갑니까? 하면 항변한다. 그를 인격자로 만들어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중보자로 쓰임을 받았다. 모세가 쓰임 받은 것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품이 변할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래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가 된 것이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흠이 없고 거룩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행 9: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행 9:34) https://youtu.be/bKTPhdOol7E?si=-QO3tm1aupWqYR2p 베드로 사도가 중풍병자와 죽은 자를 살린다. 이 사건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역의 본질이다. 즉 기적을 행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는 베드로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일’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중풍병자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그런데 왜 베드로를 쓰시는가? 이것에 대한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는 룻다라는 지역에 이르렀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이전에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학식이 부족하고 성질이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가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다. 그가 병든 자를 고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낫게 하시니 곧 일어나라 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행 9:34) 그러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요 베드로는 쓰임을 받는 것이 된다. 그래서 룻다의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온다.“룻다와 시돈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행 9:35) 베드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한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믿음이 작은 자들은 병이 낫는 기적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성숙한 자들은 주님이 베드로와 함께 하심으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심을 믿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베드로를 통하여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의자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https://youtu.be/tN0BjA3Fx4E?si=xVfV8P9JdIHO3fex 개혁주의 구원론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인간의 책임을 요구한다. 즉 수동적인 순종이 있고 능동적인 순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룰 수 없다. 능동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로서 책임을 다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자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구원을 받은 자가 순종하는 것은 지옥에 갈까봐 두려워 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신중함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조종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셔서 중생한 의지를 새롭게 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신다. 이것을 은혜의 주권적 역사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려 주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하나님을 원망하셨던 광야의 백성들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들의 결국은 광야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내 안에 선한 소원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나는 그 소원을 따라 힘써 순종하겠다는 태도를 말한다.  반면에 원망과 시비는 단순히 성격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의 표현이 된다. 그리고 신자의 책임은 세상에서 빛을 밝히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진리를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자의 영광은 누군가의 믿음을 세우는데 있다. 바울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빌립보 교인들이 바른 믿음을 갖는 것에 전제물이 되겠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 100%와 인간의 순종 100%가 되어야...

“무리가 왕자를 인도해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세워 왕으로 삼을새 여호야다와 그의 아들들이 그에게 기름을 붓고 이르기를 왕이여 만세수를 누리소서 하니라”(대하 23:11)

  “무리가 왕자를 인도해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세워 왕으로 삼을새 여호야다와 그의 아들들이 그에게 기름을 붓고 이르기를 왕이여 만세수를 누리소서 하니라”(대하 23:11) https://youtu.be/svvvCzeme8Q?si=E2tqu4yAUQ9FkAuD 남 유다는 엉망이 되고 6년이나 어두움이 지배했다. 그러나 제사장 여호야다는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제칠 년에 여호야다가 용기를 내어 백부장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와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와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와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 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매“(대하 23:1) 여호야다의 사명은 숨겨진 왕 요아스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었다. 가짜 왕인 아달랴에게 눌려 있는 백성들에게 진짜 왕인 요아스를 선포하고 면류관을 씌우고 왕권을 선포하였다. 죽어서 끊어진 줄 알았던 왕의 아들이 성전에서 나와 왕으로 등극한다. 이것은 마치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시사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과 같다. 사탄의 세력은 마침내 멸망을 당한다. 아달랴가 공의의 심판을 받아 칼에 죽었다.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대하 23:2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다. 승리의 결과가 부활이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잠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니“(히 2:14하) 남 유다 백성들은 요아스에게 면류관을 씌우고 율법 책을 주고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고 만세수를 누리라고 찬양하였다. 우리들은 이미 즉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왕 만세’를 부르는 천국 백성들이다. 그리고 우상을 철폐하고 종교개혁을 한다. 종교개혁이란, 여호야다의 생각이 아니라 다윗의 정해준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또 모세가 전해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된다. ”여호야다가 자기와 모든 백성과 왕 사이에 언약...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여야 할지니”(대하 23:3)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여야 할지니”(대하 23:3) 아달랴의 암흑기 6년 동안의 통치를 끝내고, 다윗의 언약을 붙든 제사장 여호야다의 주도하에 왕권 회복과 종교 개혁이 일어난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용기를 내어 백부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으고 언약을 세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대로 다윗의 자손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여야 할지니”(대하 23:3) 그리하여 안식일에 당번인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을 배치하여 성전을 철통같이 방어를 한다. 백성들은 무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였고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인도하여 면류관과 율법책을 주며 기름을 붓는다. 온 백성은 요아스 왕 만세를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아달랴가 성전에 들어와 반역이라고 외친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성전 안에서 죽이지 말라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왕궁 말문 어귀에서 칼에 맞아 죽는다.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대하 23:21)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하여 다윗의 언약을 체결하여 여호와의 백성이 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우상타파와 다윗에 정한 규례대로 번제를 드리고 찬양하게 한다. 그렇게 한 결과는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해진다. 여호야다의 혁명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철저히 말씀 성취였다. 즉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세상의 왕은 법 위에 군림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은 말씀(율법) 아래 있다. 그래서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청지기가 될 뿐이다. 종교개혁은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행하면 된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다윗에 정한 규례대로이고, 모세가 기록한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