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0) 그 일에 대하여 본문의 말씀이 증거한다. 바울과 실라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다. 이 여종은 점을 쳐서 번 돈을 주인에게 바치는 자였다. 그러던 어느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종 안에 있는 귀신을 내어 좇았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 16:18) 이 일로 인하여 바울과 실라는 고발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고, 발에 차꼬를 차게 되었다. 그 때에 그들은 한밤 중에 기도하며 찬송을 하였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 보고 계시는 것이다. 즉 한밤 중에도 주무시도 않고 그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옥터가 흔들리고 몸에 매였던 것이 다 풀리게 되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6) 감옥은 인간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자리’이며, ‘죽음의 문턱’을 상징한다. 사도들은 고발은 여종의 주인들을 두려워 하여 재판도 없이 관원들에게 매질을 당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로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행 16:27) 즉 옥문이 얼리고 죄수들의 매인 것들이 다 풀렸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맏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맏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교회와 성도들이 이단으로부터 고난을 받을 때에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본문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의 절대성,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이 고안해 내거나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위탁에 의해 주어졌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따라서 신앙의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맏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참된 교회는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을 겪는다고 본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도 성도가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성도의 견인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가정, 직장,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라는 탐심을 버려야 한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하는 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위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그리고 주님의 양이라면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아니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듣는다. 예수...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회개하면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 한다. 그의 말은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그러나 이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인간의 종교적 도덕주의가 가진 한계와 함께 참된 치유와 회복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아프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철저히 상하게 하셨다. 이 말씀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에서 일어났다.  또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고난 앞에서 쉽게 분노하고,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다가 영적으로 파멸에 이른다. 이러한 죄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된다. 예수님은 침 뱉음과 모욕, 채찍질을 당하셨으나 “욕을 당하시되 맞되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 하셨다”(벧전 2:23) 즉 사탄의 충동질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 우는 자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안전한 곳에 두시느니라”(욥 5:11) 이 고백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스스로 높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꾸짖으셨고, 스스로 낮아져 울고 있던 세리와 죄인, 창기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안전한 곳으로 영접해 주셨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손으로, 죄로 인해 상하고 찢긴 우리 인생들을 싸매시고 고치시는 참된 치유의 역사를 행하신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때에 인간의 조언보다 ‘예수님의 온유함...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8) 욥의 처절한 탄식을 들은 친구 엘리바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변론을 시작한다. 그의 말을 언뜻 들으면 매우 경건하고 정통적인 신학을 말하는 것 같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7절)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의 원리이다. 하지만 구속사적 관점으로 조명하면, 인간 지혜의 한계와 율법주의의 치명적인 맹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참된 의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네가 지금 망하고 고난받는 것을 보니, 네가 숨겨둔 죄가 있어서 그대로 거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주의적 정죄이며,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욥의 고난은 죄의 결과여야만 한다.  그의 질문에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7절)를 묻고 있다. 그런데 죄없이 고난받고 죽임당한 유일한 한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아무런 악을 갈지도, 잔해를 심지도 않으셨지만, 십자가에서 철저히 끊어지고 망하셨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심은 죄의 악한 열매를 예수님이 대신 거두어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교는 인과응보를 대변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의인이 죄인을 위해 망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대속 은혜의 원리를 보여 준다.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그렇기에 인간에게는 외부로부터 오는 의,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새로운 한 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천사도, 종도 온전히 믿지 못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큼은 온전히 받으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엘리바스가 주장한 인간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라는 질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음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음을 구속사로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한 은혜는 공포와 정죄가 아니라 평안할지어다 라는...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욥 3: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욥 3:3) 욥은 고난을 견더 내던 육체와 정신의 극한 고통 앞에서 철저히 무너져 내리며 탄식을 쏟아낸다. 즉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고통이 없이 영원한 안식을 누렸을 것이라 하며 절규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라기 보다는 피조물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실전적 절망의 표현이다. 이 고통을 받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와 저주를 온몸에 짊어지시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죽음과 저주의 자리로 가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맏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욥의 탄식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놓인 모든 인류의 비참함을 대변하며, 이 비참한 저주를 끊기 위해 친히 저주받은 바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욥의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늘 자신을 비추던 하나님의 얼굴빛이 사라지고 흑암과 단절만 남은 듯한 영적 어두움이다. 예수님도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겪으셨다. 욥이 겪었던 어두움의 고통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할 때에, 예수님의 울부짖음으로 온전히 성취된다.  빛이신 예수님이 영원한 흑암 속으로 들어가셨고, 하나님께 완벽하게 둘러싸여 심판의 잔을 받으셨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어둠을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그 아득한 침묵과 단절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가셨다. 욥의 고통과 절규에서 평온이 없고 다만 두려움만 있다고 한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두려움만 있구나”(욥 3:26) 욥이 그토록 갈망했던 평안과 안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가 극심한 고통 중에 던지는 탄식과 울부...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 2: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 2:7)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아서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자신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하였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존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이 마귀에게 당하는 고난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친 종기로 인한 것이다. 질병과 고통으로 인해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완전히 무너진 비참한 상태에 처해졌다. 이렇게 당하는 고통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며 돌아서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그의 앞에 온전한 자가 아닌 것이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며 온몸이 상하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로 향하시는 모습을 생각하여야 한다. 만일 악인들이 때리고 조롱하며 모욕을 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신다면 구속사의 은혜는 성취되지 못하게 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이제 하나님의 구속사적 은혜를 믿는다면, 주님께서 이미 내 고난의 자리에 와 계신다는 것이다. 성육신하셔서 친히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으로 우리를 찾아와 위로를 주신다. 내가 고통과 외로움을 느낄 때, 나보다 더 철저하게 버림받으셨던 예수님이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다. 구속사의 은혜는 언제나 낮아짐(비하) 후에 높아짐(숭귀)이 있다. 즉 고난 후에 영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처참한 죽음 이후에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가 되셨듯이, 성도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결코 실패나 저주가 ...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아디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아디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루디아가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따르게 된 것은 바울이 설교를 잘 해서가 아니라, 주의 성령이 그녀의 마음을 열어 열매를 맺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의 복음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며,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유효적인 부르심의 열매는 즉각적인 행실인데 동역과 섬김으로 나타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와 같은 열매가 없다면 일시적 부름을 받은 자가 된다. 즉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늘 나라는, 땅에 심겨진 작은 겨자씨와 가루 속에 스며드는 누룩과 같다고 하셨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 빌립보 강가에서 이름 없는 여인 한 사람의 마음이 열린 사건은 세상이 보기엔 미미하였다. 그러나 이 작은 겨자씨가 자라 유럽을 뒤덮는 거목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정리를 하면,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마음을 열어주심)이나, 그 구원의 완성은 성도의 거룩한 열매(사랑의 순종)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나를 선택해 주신 사랑에 감격하여 자원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에 참석하여 찬양하며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