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워야단을 꺾으신 십자가의 권능과 무조건적 은혜(욥 41:34)

  리워야단을 꺾으신 십자가의 권능과 무조건적 은혜(욥 41:34)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는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욥 41:34) 욥 41장에서는 바다에서 가장 두렵고 저항할 수 없는 절대 괴수 리워야단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리워야단의 압도적인 신체 구조와 맹렬한 힘, 인간의 무기(창, 칼, 화살)를 비웃는 무적의 위용을 상세히 열거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혼돈과 악의 세력조차 하나님의 완벽한 통제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함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이 무시무시한 존재를 다루시는 분이신데,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맞서며 은혜를 빚진 것처럼 따질 수 있겠느냐고 선언하신다. 개혁주의는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한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피조된 것들을 들고 하나님께 드려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된 세계를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적 잣대로 존재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없다. 창조의 다양성과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 아래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무기인 칼, 창, 투창, 화살, 맷돌도 리워야단 앞에서는 지푸라기나 썩은 나무에 불과하다. 깊은 바다를 물처럼 끓어오르게 만드는 리워야단은 두려움이 없이 지음을 받아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으로 군림한다. 십자가의 구속사에서는 리워야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다 괴물, 곧 사탄과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교만의 왕인 사탄 아래 종노릇하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었던 리워야단을 제압하신 분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물꼬물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

자기 의를 내려놓고 구원의 능력 있는 오른손을 보라(욥 40:8)

  자기 의를 내려놓고 구원의 능력 있는 오른손을 보라(욥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8) 욥은 자신의 의를 들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다. 만나 주시지 않고 자신을 악인으로 취급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다. 하나님은 땅 위에 가장 악한 것을 짓 밟을 수 있다면 욥의 구원의 능력을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14)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창조 세계의 거대한 피조물인 베헤못을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다시 한 번 확증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서 우주 만물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굴복을 한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다물 뿐이로소이다”(욥 40:4) 즉 하나님을 대면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합당한 반응은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입을 닫는 겸손이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다시 허리를 묶고 대답하라고 명하신다. 왜 그런가 하면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무능력한 존재이다. 그래서 자력 구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 40:9) 사람의 무능함을 베헤못(하마)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비유한다. 인간은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없으나, 오직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칼을 댈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나 인간의 도덕적 의로움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오직 은혜’의 구속사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오른손은 무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 있는 오른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강력한 오른손의 권능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우리의 구원...

피조 세계의 광대한 섭리와 십자가의 역설적 지혜(욥 39:5)

  피조 세계의 광대한 섭리와 십자가의 역설적 지혜(욥 39: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욥 39:5) 욥 39장에서는 인간의 손길과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거친 야생동물들의 세계를 생생하게 조명한다.  하나님은 산염소, 암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매와 독수리에 이르기까지 야생 동물들의 번식, 자유, 습성, 용맹함을 일일이 열거하신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좁은 시야와 유용성 중심의 사고를 깨뜨리시고,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피조 셰계 전체를 세밀하게 먹이시고 다스리시는 관대한 주권과 지혜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인간은 흔히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 길들여진 것만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관리 영역 밖에 있는 야생의 생명들까지도 주권적으로 돌보시고 보존하신다. 오직 창조주의 다스림 아래에만 복종하는 동물들이 있다. 즉 인간은 피조 세계의 작은 야생 짐승 하나도 자기 뜻대로 온전히 굴복시키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욥 39:9) 하나님은 역설적인 창조의 신비를 보여 주시므로 인간의 획일적인 잣대나 인과응보의 공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것으로, 타조는 알을 땅에 방치할 만큼 지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달릴 때에는 날쌘 군마(말) 조차 비웃을 정도의 속력을 낸다. 또한 생명의 죽음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신다. 매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본능과 독수리가 낭떠러지 바위산에 둥지를 틀고 먹이를 사냥하는 것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능적 설계에 의한 것이라 한다. 즉 피를 흘리고 시체를 찾는 맹금류의 본능마저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의 거대한 망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철저한 인간 중심적인 인과응보의 틀에 갇혀있는 것을 깨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성도 ...

자원하는 종의 기쁨과 왕 같은 제사장의 영광(행 21:14)

  자원하는 종의 기쁨과 왕 같은 제사장의 영광(행 21: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함으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4)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확고함은, 자신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책임이 있는 자이다. 종은 주인의 인격적으로 알고,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인의 기쁨과 즐거움이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을 한다. 교회 안에 믿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들이다. 바울이 말하는 ‘나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은, 내가 주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기업을 보살피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 때이다. 그래서 주인을 빛나게 하는 일이, 내 생활에서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하여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이 있다. 종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계약 기간이 다 되어서 떠나는 종이 있고, 계약 기간이 다 되었지만 그 주인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종이 있다.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출 21:5)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귀에 구멍이 뚫리고, 자원하여 들어간 사람이 된다.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출 21:6) 그리고 사도라 함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달리 말하면 주인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가 됨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을 ‘왕같은 제사장’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생명보다 귀한 사명과 의의 종 된 삶(행 21:11)

  생명보다 귀한 사명과 의의 종 된 삶(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행 21:11) 사도바울은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빌립 집사의 집에 들어간다. 그곳에 유대로부터 내려온 선지자 아가보가 온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다고 하니 적극적으로 반대를 한다. 선지자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수족을 묶으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모습으로 결박을 당하여 로마 정권에 넘겨질 것이라 하였다. 그곳에 모인 모든 자들이 적극적으로 만류를 하고 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 21:12) 그러자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결박을 당하는 것도 주의 일이라 한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의 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명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의 본질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뜻이 아닌 오직 보내신 주인의 뜻과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다. 그래서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시 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만류를 하는데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다. 공동체는 바울의 확고한 뜻을 꺾지 못하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을 한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함으로 우리가 주의 뜻 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4)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는데는 바울의 확고한 복음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이전에는 두려움의 종으...

신실하신 주를 의지하여 일상을 거룩하게(살후 3:3)

  신실하신 주를 의지하여 일상을 거룩하게(살후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약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살후 3장은 종말을 앞둔 성도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이 땅의 일상을 어떻게 성실하고 거룩하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그릇된 종말론이 빠져 생업을 내팽개치고 게으름을 피우며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직업 소명관, 교회의 권징을 강조하고 있다. 즉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노동, 공동체 질서)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거룩한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인 성도의 견인의 근거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과 신실하심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과 악한 자들이 교회를 흔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택한 백성들을 둩드시고 끝까지 보호하신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약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성실한 노동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에 동참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 3:10)  즉 재림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일상을 방임하고 무질서하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성화의 의무를 저버리는 태만이 된다는 것이다. 권징의 궁극적 목적은 죄인을 배척하고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성을 보존하고 범죄한 형제를 회개시켜 회복시키는 사랑의 사역이다. 성도들은 세상의 세속적 유혹과 악한 영의 공격 앞에서도, 나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며 날마다 기도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한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즉 가르쳐주신 말씀을 따라 순종함을 말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돠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내...

폭풍우 속에서 만나는 창조주 하나님(욥 38:1)

  폭풍우 속에서 만나는 창조주 하나님(욥 38:1)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욥 38:1) 인간들의 길고 지루했고, 때로는 교만하고 처절했던 모든 논쟁이 일순간에 멈춘다. 그리고 그토록 욥이 만나기를 갈망했던 하나님께서 마침내 폭풍우 가운데서 친히 강림하신다. 하나님은 욥이 던진,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질문에 논리적인 해명을 주시는 대신, 창조의 신비를 묻는 질문을 하신다.  즉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 세우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고 계심을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우주 만물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없는 신비가 있다는 것이다.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욥 38:29)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창조주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무능력을 대조하려 하신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하나님이 말씀하려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창조주를 이해할 수 없으며, 다시 피조물의 질서 화목을 장엄하게 보여 주신다. 욥은 줄곧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달라’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의 원인(사탄과 내기)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 이성을 만족시키는 논리적 설명을 주시는 대신, 폭풍우 가운데 자신을 내어주심(현현)으로 응답해 주셨다. 즉 고난의 최종 해답은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니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네가 어디 있었느냐’라는 질문은, 욥이 고난 속에 있을 때에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하나님의 재판석에 앉으려 하는 교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 세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이 없는 땅에, 사람이 없는 비를 내리신다. “누가 사람 없는 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