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과 부름을 받은 것을 인식하면서 행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의 믿음의 기초는 ‘주 안에서’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이 된다.  그래서 아내의 복종은 열등함이 아닌 ‘주 안에서 마땅한 질서’이며,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과 같은 ‘희생적 통치’이다. 자녀의 순종도 부모 개인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신앙 행위’임을 말한다. 또한 부모는 자녀를 낙심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자녀의 소유권이 부모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일터에서 하나님의 경건을 드러내야 한다. 상전의 눈가림만 하지 말고 성실히 일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실질적인 주인이 바로 ‘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상전은 보수를 주지만, 진정한 기업의 상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노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공의롭게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일에 ‘주님께 하듯‘하라는 것이다. 성도들을 나그네 또는 순례자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지 않아도, 보수가 적다고 할지라고 실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오는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예수와 연합된 자로 그의 안에 거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죽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 3: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죽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 3:6) 악의 실체와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있다. 유다 민족의 대적인 하만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만은 아말렉 아각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오래전부터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민족 간의 분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역사적 영적 전쟁으로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사탄은 하만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통로인 유다 민족을 멸살시키려는 것이다. 악인 하만이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은 당황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허용적 작정 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시지는 않으셨으나, 악의 도모를 사용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구원을 극적으로 드러내신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단순히 자존심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다. 즉 하나님 외에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인 경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믿음이다. 하만의 조서로 인하여 유다 민족은 ‘죽음의 날짜’를 받는다. 그러자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만의 음모가 절정에 달할 때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부활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 모르드개는 육신의 생명보다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를 더 중시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 10:28) 하만이 제비를 뽑아 날짜를 정한 것은 인간이 운명을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 결정은 하나님의 손이 있다는 것이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말의 작정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만이 세운 유다 학살 계획은 인간적으로는 절망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여러분! 우리가 아등바등하며 성공하려는 이유도, 그 끝에는 마음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 '평안'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성공과 평안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봤습니다. 1. 성공은 '수단'이고, 평안은 '목적'입니다 많은 사람이 높은 지위나 부를 성공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들은 평안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 일 뿐이죠. 아무리 곳간이 가득 차도 마음속에 풍랑이 일면 그건 진정한 성공이라 부르기 어렵습니다. 결국 성공의 완성은 "내 마음이 지금 평안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2. 평안은 '환경'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돈이 많거나 일이 잘 풀릴 때만 평안하다면, 그건 외부 조건에 휘둘리는 연약한 평안이겠죠. 진짜 고수들의 성공은  폭풍우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 을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평소 추구하시는 깊이 있는 성찰이나 말씀도 결국 이 내면의 단단한 평안을 구축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네요. 3. '성취' 뒤에 오는 '안식'의 가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에너지와, 그 성취 끝에 얻는 평안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열심히 땀 흘린 뒤에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이 가장 달콤하듯,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 누리는 평안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보상이겠죠. 결국 인생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얼마나 평안하게 누릴 수 있느냐"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느끼시는 그 평안의 가치가 곧 성공의 척도가 아닐까요? *이 평안을 주시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에 1: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에 1:1)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가 얼마나 치밀하게 역사하는지를 보여 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구름 뒤에 숨으셔서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이 아닌 포로지(폐르시아)에 있고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을지라도, 아브라함과 다윗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볼 수 있다. 에스더는 죽음을 무릎쓰고 동족을 구원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참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127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다. 그래서 180일 동안 자신의 부귀와 위엄을 자랑을 한다.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에 1:4) 이는 스스로 ‘신’이 되려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 숭배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일시적임을 강조한다. 왕후 와스디가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폐위되는 과정은 정치적인 갈등처럼 보이나, 신학적으로 볼 때는 에스더를 왕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자 섭리적 준비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분노와 실수조차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  왕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하다가 왕후에게 수치를 당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진정한 영광은 자기를 높이는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있다고 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마 23:12) 유다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하만의 음모가 시작되기 전에 구원의 통로인 에스더를 세울 환경을 조성하고 계셨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느 13: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느 13:29) 느 13장은 느헤미야가 바사 왕국으로 잠시 돌아간 사이,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깨뜨리고 과거로 희귀해 버린다.  느헤미야의 영광스러운 부흥과 눈물의 헌신은 충격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함으로 인하여 약속하고 맹세한 것을 지킬 수 없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성벽 재건을 악랄하게 방해했던 대적 도비야에게 십일조와 제물을 두는 성전의 큰 방을 내어주는 영적 간음을 저지른다.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느 13:4)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크게 분노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모두 밖으로 던져버리고 방을 정결하게 한다.  아무리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다고 했을지라도 지도자의 영적 분별력이 흐려지면 성전 중심부까지 사탄의 세력이 침투한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한 번 은혜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회개와 순종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밭으로 도망쳤고, 이로 인해 예배가 무너진 것이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느 13:10) 설상가상으로 백성들은 인식일에도 포도주를 짜고 장사를 하며 세상의 경제 논리에 매몰되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인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날에 내가 경계하였고”(느 13:15) 그러자 느헤미야는 성문을 닫아걸고 상인들을 엄히 꾸짖어 안식을 사수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그래서 또 다시 ...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우리 목사님이 교회를 섬기는 ‘참된 목회자‘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자‘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죄사함이 필요하다. 왜 그런가 하면 죄있는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즉시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들의 죄를 속량하여 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중보자 되시며, 대제사장이 되신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면 설교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림을 주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주님 앞으로 나가게 하여야 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27) 회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빚어내는 전인격적인 재창조의 과정이다. 마음으로 돌이키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거룩한 자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참된 목사의 설교에는 말씀의 찔림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고, 돌이킴의 지혜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영적 중매쟁이가 되어서 성도들에게 영원한 신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을 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지라”(행 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지라”(행 14:8) 사도들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다. 그 기적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한다. 본문의 말씀은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였을 때에,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과 제자들이 취하여야 할 올바를 태도를 전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지금도 예수님의 권능으로 기적이 일어나면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따라는 자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걷지 못하는 자가 걷게 되자 주변 사람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 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외치고 있다. 즉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찬양을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사도들 앞에서 소를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 이것은 타락한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 소리를 친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영광을 철저히 거부하고, 군중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로 돌렸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 14:18)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떠한 믿음과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설교자는 영적 중매쟁이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