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뵈옵는 인격적 신앙으로(욥 42:5)

  귀로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뵈옵는 인격적 신앙으로(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폭풍우 속에서 창조주를 만난 욥은 마침내 입을 다물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진정한 회개를 드린다. 그리고 욥을 정죄했던 친구들을 꾸짖으시며, 욥의 기도를 통해 모두를 용서하시고,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욥은 그동안 자신이 귀로 들었던 것을 갖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었다. 그런데 말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알게 된 이후에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즉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어른이 되어 깨닫게 됨을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욥은 말씀을 통하여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희미하게 알던 것을 확실하게 눈으로 보는 것같이 선명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회개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하나님은 세 친구를 향한 책망을 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한 말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송아지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신다.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들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친구들이 순종했고,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받으셨다. 그래서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다. 떠났던 형제와 자매, 지인들이 돌아...

리워야단의 공포를 꺾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욥 41:1)

  리워야단의 공포를 꺾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욥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욥 41:1) 하나님께서 욥에게 보여 주는 것은 모든 악의 세력을 발아래 두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승리를 장엄하게 선포한다. 육지의 괴물은 베헤못이고, 죽음의 바다를 상징하는 가장 두려운 괴물 리워야단을 등장시켜, 모든 고난과 악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를 안겨주는 리워야단의 압도적인 힘을 묘사하시어, 이 끔찍한 피조물조차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 있음을 선언하신다. 인간의 통제를 거부하는 리워야단이다. 만약 사람이 그에게 손을 대면 끔찍한 싸움이 되고 다시는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짐승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그것은 목에는 엄청난 힘이 뭉쳐 있고, 마음(심장)은 맷돌의 아래짝처럼 단단하여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욥 41:7) 리워야단은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으로 묘사를 한다. 하나님은 그가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라고 명령을 하신다.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욥 41:34) 개혁주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주권으로, 그 모든 악조차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리워야단은 단순히 커다란 악어나 고래가 아니라,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죽음의 세력, 사탄,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악을 상장함을 말한다. 그것은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라 부른다(34절).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지혜와 의로움으로 교만하게 목을 세워도, 죽음과 사탄의 권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리워야단 앞에서 인간의 모든 논리, 철학, 종교적무기는 짚검불이 된다. 인간은 철저...

전능자와의 다툼을 멈추고 구원의 오른손을 바라보라(욥 40:2)

  전능자와의 다툼을 멈추고 구원의 오른손을 바라보라(욥 40: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폭풍우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의 압도적인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가장 깊은 교만을 다루고 있다. 오직 창조주만이 통제할 수 있는 거대한 짐승 ‘베헤못(Behemoth)’을 등장시킨다.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 40:15) 하나님은 욥의 불평에 쐐기를 박으시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압도적인 통치권을 보여 주시므로, 욥은 자신이 더 이상 하나님께 따져 묻거나 변론할 자격이 없는 티끌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고 침묵을 선언한다.  만일 욥이 하나님처럼 우레 소리를 내며, 세상의 교만한 자를 낮추고 악인을 짓밟을 능력이 있다면, 그때에는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인정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14) 욥의 잘못은 무엇인가? 자신의 결백(의로움)을 증명하는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은연 중에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부당하시다’고 선을 넘은 것이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순간,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고 그분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게 된다. 구원은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불의함을 십자가 앞에 온전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 땅의 그 어떤 도덕적 영웅(욥을 포함하여)도 자신의 오른손(행위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베헤못을 통제할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그것을 다스리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즉 고난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만이 해결하실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하셨다. 마치...

야생의 섭리가 깨뜨리는 인간 중심주의와 그리스도의 승리(욥 39:1)

  야생의 섭리가 깨뜨리는 인간 중심주의와 그리스도의 승리(욥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욥 39:1) 하나님은 창조주의 섭리는 우주적 기상 현상에서 야생동물의 세계로 말씀한다. 즉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야생의 섭리를 아느냐는 것이다. 욥에게 질문하시기를 네가 그들이 새끼 치는 때를 아느냐? 그 기간을 셀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이것은 사람의 도움 없이도 광야에서 강건하게 자라나 제 길로 감을 알게 한다.  들나귀와 들소의 자유를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칠지라도, 그 소리를 비웃으며 산을 누빈다는 것이다.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욥 39:7) 타조의 기이함을 말씀하신다. 모성애가 부족함으로 알을 모래에 버려 두어 어리석게 보이지만 날개를 펴고 달릴 때면 말과 기수조차 비웃을 정도로 속도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뀌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욥 39:18) 전투마의 용맹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말의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입히고, 나팔 소리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기를 행해 돌진하는 용맹함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독수리가 까마득하게 높은 낭떠러지 끝에 집을 지으며 먹이를 찾아내는 시력은 인간의 지혜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의 본성적 부여하심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욥과 세 친구들이 갖고 있는 인간 중심주의를 철저히 박살 내고, 타락한 이성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주권을 선포하신다.  인간 중심적인 생각은, 주변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들나귀와 들소를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타조는 지혜는 없지만 말보다 빠른 발을 가졌다. 이것은 인과응보적인 지혜를 무너트...

무지의 말을 멈추고 창조주의 거룩한 섭리 앞에 서라(욥 38:2)

  무지의 말을 멈추고 창조주의 거룩한 섭리 앞에 서라(욥 38: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욥기 38장은 욥기 전체의 가장 극적인 절정이자 대전환점이다.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로 이어지던 모든 인간의 긴 침묵과 논쟁이 끝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폭풍우(회오리바람) 가운데서 친히 나타나사 욥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욥이 즐기차게 요구했던 고난의 이유나 인과응보의 잘잘못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신다. 대신 창조 세계의 광대한 신비와 섭리에 관한 일련의 질문들을 쏟아부으심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됨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주권 앞에 무릎 꿇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 등장하신다 함은, 하나님의 현현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가시적인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욥의 항변을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시며, 재판관 행세를 하려던 욥에게 허리를 묶고(도전자의 자세를 갖추고) 창조주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절대 주권자이자 최종 재판장이시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청종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심을 보여 주심으로 인하여, 온 우주는 정교한 설계와 하나님의 지혜로 기초가 놓였으며, 무질서와 혼돈(바다, 흑암)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선 아래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보심을 알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한 광야에도 비를 내려 풀을 돋아나게 하신다. 사자에게 먹이를 사냥해 주시고, 버림받아 울부짖는 까마귀 새끼에게까지 먹이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보살핌을 보여 주신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물며 택함을 받은 백성들을 살피시고 지켜 주심을 말하기 위함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폭풍 속에서 듣는 주님의 음성과 은혜로운 멈춤(욥 37:2)

  폭풍 속에서 듣는 주님의 음성과 은혜로운 멈춤(욥 37:2)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욥 37:2) 엘리후의 기나긴 변론이 끝을 맺는 절정이자, 폭풍우 가운데 친히 강림하실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한 웅장한 서곡이 펼쳐진다. 거대한 폭풍 속에 등장하시는, 창조주의 압도적인 위엄 앞에 인간이 위해야 할 유일한 태도인 경외를 촉구한다. 그는 천둥소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번개를 땅끝까지 비추는 빛으로 묘사를 하며, 하나님은 당신의 기이한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보라는 것이다. 또한 눈과 비를 명하여 내리게도 하시며 멈추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자연의 현상을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 하여 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욥 37:7) 즉 명렬한 추위와 폭풍을 보내어 사람들의 모든 노동(손의 일)을 멈추게 하심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힘을 의지하지 않고 창조주의 일하심을 묵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으라 하면서, 가만히 서서 보라한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욥 37:14)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을 버릴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의 폭풍 속에서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 “바다를 향하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폭풍을 통하여 사람의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을 보개 하신다는 엘리후의 주장이다. 예수님은 친히 인생의 지혜로 수고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안식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을 당할 때에 바라보아야 할 시선과 방향을 주셨다. 즉 가난과 ...

곤란 중에 비추시는 은혜의 얼굴과 참된 평안의 안식(시 4:8)

  곤란 중에 비추시는 은혜의 얼굴과 참된 평안의 안식(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시편 3편의 기도가 아침의 기도이며, 시편 4편의 기도는 저녁의 기도이다. 하루 동안을 살며 억울함 모함과 영적 곤고함 속에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비밀을 노래한다.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하며 기도한다. 자신의 행위가 아닌 자신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곤란 중에 있는 자를 건져내실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온전한 의를 완성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넓은 터로 옮기신 것이다(롬 3;24).  세상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절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다. 그러나 세상의 조롱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유일하게 온전히 순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은혜로 구별된 자로 세우셨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3) 분노와 억울함에 휩쓸려 범죄하지 말고 침상에서 잠잠히 자신을 돌아보며 형식적인 제사가 아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 4:5) 구약의 불완전한 제사는 단번에 의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로 완성이 되었다. 즉 자기 의를 내세우는 제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출때에 기쁨이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기쁘다고 한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