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행 14: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행 14:4) 개혁주의의 핵심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말씀의 능력, 그리고 인간의 전적 타락이다.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은 교리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복음이 선포될 때에 ‘수 많은 무리가 믿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동시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저항과 선동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은혜를 입은 자와 완악한 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 속에서 미음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주어짐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행하는 표적과 기사는 핵심이 아니라, 오직 ‘그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기 위한 도구이자 보증 수단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하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어떠한 것으로 막을 수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사도들을 돌로 치려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핍박이 발생한다.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행 14:6) 그러나 이 환난은 사도들의 사역을 막을 수 없다.  오히려 핍박이 더 심한 도시로 옮겨가 복음을 전한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7) 즉 인간의 악독한 핍박마저도 복음의 지경을 넓히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서 진행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어디서나, 언제든지 네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전도 중이다. 그런데 복음 전하는데 반대하는 세력이 점점 늘어 나고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랐었다. 이제 이고니온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전하니 유대와 헬라의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 14:1)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사도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행 14:2) 그러자 두 사도가 오래 참는 가운데,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한다. 즉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주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셔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신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무슨 말인가 하면, 두 사도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오직 ‘그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기 위한 도구이자 보증 수단이다. 개혁주의는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철저한 말씀 중심을 지향하는데,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표적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사역의 중심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왜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하는가? 주님을 따라 가는 길에 능력과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은 반대 세력을 능히 물리 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자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찬양을 한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사망과 죽음이 있는곳, 죄악과 타락이 있는 곳에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바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있고, 우월성이 있기 때문이다. 골로새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행하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그 안에서 행하라’함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방식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단순한 도덕적인 스승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예수님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조문에 쓴 증서(율법)로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로 사탄의 세력을 이기셨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그러므로 율법의 절기, 안식일, 천사 숭배, 금욕주의는 구원의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은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된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즉 구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구원의 완성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수 안에 거하...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느 8: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느 8:8) 성벽이라는 외적 건물이 교회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성벽은 하나님 거룩한 공동체와 세상이 나누어지는 경계선임을 말한다. 일곱째 달 초하루(나팔절)에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한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손으로 대제사장의 계열로 하나님의 율법에 뛰어난 자이었다. 그러니 그가 율법을 일고 해석을 하니 백성들이 쉽게 은혜롭게 말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느 8:9) 참된 부흥은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거나 프로그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고 바르게 선포될 때에,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난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달을 능력이 없다. 오직 말씀이 선포될 때, 율법은 우리의 전적 타락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우리를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백성들이 계속해서 슬퍼하자,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우는 것을 멈추게 하고, 선포하기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즉 회개는 반드시 복음이 주는 참된 기쁨과 자유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던 백성들은 율법에 기록된 초막절 규례를 발견하고, 즉시 산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 지붕과 뜰에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절기를 지킨다. 이는 광야 시대에 그들을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순종이다.  그 백성들 지키시고 돌보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네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네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이루었다. 이제부터는 성벽 안에 채워야 할 것들을 세운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릴 지도자로 자신의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를 세우는데, 그들이 발탁된 이유는 세상적인 스펙이나 정치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충성스러웠기 때문이다. “네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교회의 지도자와 일꾼을 세우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충성됨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성벽이 견고해도 그 안을 지키는 자들이 타락하면 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충성하심으로(빌 2:8),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가장 완벽하고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다. 느 7장의 대부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명단으로 채워졌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동하사 이 명단을 꼼꼼히 살피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시고 생명책에 기록하신다. 이 명단은 환난과 포로 생활 속에서도 남은 자를 보존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이다. 예수님께서도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낸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에 제사장이다.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다. “총독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느 7:65) 즉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할 완벽한 ‘우림...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느 6: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느 6:1)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문짝만 달면 되는 막바지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대적들은 무력의 위협에서 교묘한 속임수와 영적 흔들기로 완전히 바뀐다. 대적들은 느헤미야에게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4번이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룩한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내려 갈 수 없다고 한다. 타협을 통하여 암살을 하고자 하는 것이며, 중단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존재 하지만, 세상과 영적 타합을 하거나 야합을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같은 시험이 다가 온다. 교회를 위한 타협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기준이 되어 판단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된다면 교회에 세속적인 것들이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그러자 대적들은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 반역을 꾀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느 6:9) 이번에는 예언으로 유혹을 하여 느헤미야를 죽이고자 한다. 대적들은 거짓 선지자를 보내어 협박을 하여 성소 안으로 숨으라고 한다. 그러나 제사장이 아닌 느헤미야가 성전 안을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게 됨을 이용하려던 것이다. 온갖 집요한 방해 속에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완성한다.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두 두려워하고 크게 낙담을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 우리의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느 5: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느 5:11) 성벽 재건을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 언약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치명적인 위기를 맞는다. 백성들이 기근과 과도한 세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귀족들과 지도자들이 동족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고 심지어 어린 자녀들을 노예로 삼는 참담한 현실이 고발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와, 어떻게 다시 세워지는지를 살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외할 때에 공동체(교회)가 올바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핍박 속에서도 한 손에 병기를 들고 성벽을 쌓았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 완전 부패를 직시한다. 달리 말하면 외부의 적보다 언약의 백성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이기심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성벽을 세우는 자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할 때에 공동체가 무너진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지기 못한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자 느헤미야는 동족을 착취하는 귀족들을 행해 크게 노하여 꾸짖으며 즉시 돌려주고 노예를 해방하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느 5:13)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신 23:19) 이것은 언약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된 것이다. 귀족들은 회개하고 돌이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