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형통을 넘어 십자가와 최후 승리를 바라보라(욥 21:9)

  악인의 형통을 넘어 십자가와 최후 승리를 바라보라(욥 21:9) “그들의 집이 평안하며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욥 21:9) 욥은 소발의 잔인한 율법주의적 정죄에 대한 반박을 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 즉 악인이 도리어 득세하고 평안히 묵는 현실을 증거로 들이밀며 기계적 인과응보론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일반 은총의 신비와 악인의 형통이라는 난제를 다룬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해와 비를 주시며 이 땅에서 번영을 누리게 하신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그러므로 눈 앞에 보이는 외적인 번영이 곧 하나님의 영적인 기뻐하심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외적인 고난이 곧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분명히 구별한다. 욥은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기운이 충족하고 평안하며,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복을 맛보지 못한 채 죽지만, 결국 둘 다 똑같이 흙 속에 눕고 구더기에 덮인다는 것이다. 또한 악인이 이 땅에서 아무리 당당하게 살고 화려한 무덤에 묻힐지라도, 결국 그들은 ‘최종적인 진노의 날’을 위해 남겨진 존재일 뿐이라 선언한다. 즉 악인의 심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향해 유보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욥이 고뇌했던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다. 즉 인류 역사상 가장 불공평했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다. 죄가 하나도 없으시고 유일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비참하고 억울한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깊은 구속의 지혜(십자가)는 세상의 인과응보적 지혜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신비이다. 악인이 이 땅에서 심판을 면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인 진노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다. 지금 당장은 평안해 보일지라도 주님이 ...

율법의 정죄를 넘어 십자가의 속량으로(욥 20:29)

  율법의 정죄를 넘어 십자가의 속량으로(욥 20: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욥 20:29) 소발은 욥의 위대한 부활과 대속자의 신앙을 완전히 묵살하고, 더욱 거칠고 잔인한 어조로 악인의 비참한 종말을 선포한다. 그는 역사의 경험과 전통을 근거로 악인은 반드시 속히 망한다고 주장한다. 악인이 아무리 하늘 높이 부유해질지라도 결국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며, 그 자녀들까지 가난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며 욥을 저주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인과응보적 율법주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통치하시는 일반적인 법칙(악인의 심판)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고난의 신비(특별한 섭리)를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즉각 심판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한다. 그는 죄의 일시적 달콤함과 필연적 부패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여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욥 20:14) 하지만 고난 당하는 의인인 욥에게 무차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문제이다. 또한 악인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만족함이 없고, 결국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불이 그를 삼킬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모두 그 악인의 죄를 폭로할 것이라 하며 변론을 마친다. 소발의 잔인한 독설은 복음이 없는 율법의 정죄 기능만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저주 아래 놓인 악인이라는 점이다. 율법은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할 뿐, 스스로 그 진노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진노를 대신 받아줄 구속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 소발의 저주를 당당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시려 십자가에 자기 생명을 통째로 쏟아내며 대속의 값을 치르셨다(갈 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인과응보적 종교 행위를 벗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라는...

나의 산 구속자, 살아 계신 고엘을 바라보라(욥 19:6)

  나의 산 구속자, 살아 계신 고엘을 바라보라(욥 19: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욥 19:6) 욥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립, 그리고 친구들의 무자비한 정죄 속에서 신앙의 가장 깊은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이 절망 가운데 구속사적 빛이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모든 상황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고난을 우연이나 사탄의 일방적인 승리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여 억울하다고 토로하고 있지만, 이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로서 그대로의 기도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비참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은 이러하다.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이로구나”(욥 19:20) 철저한 영적, 육적 파산 상채를 말하는 것이다. 율법의 사상은 고엘이다. 고엘은 친족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거나, 기업을 물러주거나, 억울함을 풀어주는 가까운 친족을 뜻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설령 자신의 가죽이 벗겨지고 육체가 썩어 없어질지라도, 육체 밖에서(새 몸을 입고), 자신을 변호하시고 신원해 주실 구속자를 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미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계시된 부활 신앙이자,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확신이다. 즉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 줄 또 다른 신적 중보자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고, 종교 지도자들과 군병들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라’는 조롱을 당하셨다. 욥은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속적 작정 속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 역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귀신의 지식을 넘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행 19:16)

  귀신의 지식을 넘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행 19:16)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세상적 강함이나 교만한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철저한 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법칙을 알았기에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0) 고백하며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반면, 바울의 겉모습만 흉내 내며 예수의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했던 마술사들은 결국 악귀에게 짓밟혀 상하고 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수치를 당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귀신의 지식과 참된 믿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엄중하게 묻고 있습니다. 1. 행함이 없는 귀신의 지식과 진짜 믿음의 분별 본문에서 악귀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귀신에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의 앎에는 온전한 순종과 행함이 결코 따르지 않습니다. 약 2장 17절 말씀처럼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하셨기에, 행함이 없는 지식적 동의는 귀신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가짜 신앙에 불과합니다. 진짜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의 자리에서 온전한 순종과 행함의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2. 귀신에게는 없는 영적 소망과 사랑의 부재 귀신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결정적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이 없고, 둘째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내어주는 ‘사랑’의 실천이 없다는 점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 속에 소망이 없고 손과 발에 사랑의 행함이 없는 상태를 성경은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고전 3:1)이라 부릅니다. 진짜 믿음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지나, 마침내 사랑의 실천인 순종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는 장성한 성도의 삶 참...

귀신도 아는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행 19:13)

  귀신도 아는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행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행 19:13)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버지의 기업을 잇기 위함임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 동의를 넘어, 아버지가 행하시는 구속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강론할 때(행 19:8), 하나님은 그의 손을 통해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가는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행 19:11-12). 그러나 이 이적을 겉모습만 보고 흉내 내려던 자들은 도리어 악귀에게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1. 지식적 흉내와 능력을 구별치 못한 자들의 수치 바울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권능을 목격한 유대인 마술사들은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명하노라” 외쳤습니다. 그러자 악귀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행 19:15)라며 그들을 짓밟았고, 그들은 옷이 벗겨진 채 상처를 입고 도망쳤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술적 주문이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을 뿐, 그 이름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2. 귀신의 앎과 성도가 누리는 참된 신앙의 본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귀신조차도 예수님을 알고 바울을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앎’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의 본질은 단순히 대상의 존재를 지식적으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7)라고 기도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귀며 그분의 깊은 영광을 누리는 친밀함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았으...

환난의 밧줄을 넘어 넓은 곳으로 이끄시는 은혜(욥 36:2)

  환난의 밧줄을 넘어 넓은 곳으로 이끄시는 은혜(욥 36:2) “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 ( 욥  36:2) 엘리후는 하나님의 거룩한 대변자가 되어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 목적과 자연 만물에 나타난 창조주의 위엄을 선포합니다. 그는 욥이 겪는 고통이 단순한 파멸의 징벌이 아니라, 영혼을 죄악에서 돌이켜 더 넓고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역설하며 우리를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합니다. 1. 고통을 통해 귀를 여시고 죄에서 돌이키시는 하나님 엘리후가 전하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결코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시며, 지혜가 무궁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늘 의인을 감찰하시고 높이시지만, 만일 그들이 교만하여 환난의 밧줄에 얽히게 되면 그 고통을 통해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십니다(욥 36:10). 즉, 성도의 고난은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경고입니다. 만일 그 징계에 순종하면 형통함과 즐거운 해를 보낼 것이나, 고집을 부리고 끝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불경건한 자들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욥 36:11). 2. 환난의 턱에서 넉넉한 곳으로 옮기시는 창조주의 절대 주권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을 바라보지 못하고, 악인의 심판에만 집착하며 분노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욥을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시며, 그 상에 기름진 것을 놓아주기를 원하셨습니다(욥 36:16). 이어 엘리후는 욥의 시선을 거대한 우주로 향하게 하여, 물방울을 끌어올려 안개가 되게 하시고 비로 내리게 하시는 창조주의 섭리를 선포합니다(욥 36:27).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기도 하고 풍성한 식물을 주시기도 ...

개혁주의 신학은, 말 장난하지 않으며 사랑과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말 장난하지 않으며 사랑과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목회자들은, 그 어떤 학문적 논쟁이나 교리적 지식보다, "아는 만큼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실천과 경건이 본질"이라는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야 합니다. 1. ‘조잘거리는 지식’은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아무리 칼뱅을 논하고, 5대 교리를 줄줄 외우며, 신학자들의 정교한 논리를 머리로 복습한다 한들, 그것이 내 삶의 고백이 되지 못하면 그저 종교적인 말장난(말 구유)에 불과합니다.  신학자들의 현학적인 말잔치에 머무는 지식은 영혼을 살리지 못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신학자들의 이론을 외우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만큼   내   삶을   그분께   굴복시키는   생명입니다. 2. 칼뱅이 말한 진정한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놓은 존 칼뱅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이 말은 학문적 연구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직면하여 알게 되면, 그 찬란한 빛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죄인인지 깨닫고 그분   앞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지식을 자랑하며 조잘거리지 않고,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 앞에 바로 서기를 힘씁니다. 3. 지식의 종착지는 ‘행함과 경건’입니다 개혁주의의 핵심 모토는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입니다. 이 개혁은 교리의 개혁을 넘어, ‘예배자 개인의 삶의 개혁’을 의미합니다.  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