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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세계의 회복과 말씀과 기도로 이루는 참된 경건(딤전 4:5)

  창조 세계의 회복과 말씀과 기도로 이루는 참된 경건(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5) 딤전 4장은 말세의 영적 전쟁 속에서 일어나는 거짓 금욕주의적 배교를 경고하고, 창조 세계의 선함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참된 경건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 선언하였다. 이 배교의 세력은 영지주의로서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한다. 저들의 사상은 영은 선하고 육체와 물질은 악하다는 이교 철학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 제도와 식물을 부정하였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죄로 왜곡된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회목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타락은 피조물 자체의 본질적 악함이 아니라 죄의 오염 때문이므로, 창조 세계 자체를 거부하는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창조 세계를 폐기하지 않고 은혜로 회복하신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타락한 인간이나 피조물이 거룩해지는 방식은 인간적 고행이나 금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말씀과 감사를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이다. 즉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아래에서 거룩을 강조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는 소망은 자기 공로나 의를 쌓는 것이 아니다. 특별 은총으로 택한 백성을 구속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고 순종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목회적 권면을 한다. 말세의 배교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일이라 것이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신 공의의 재판장과 영원한 승리(시 9:4)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신 공의의 재판장과 영원한 승리(시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 9:4) 본 시는 죽음과 심판의 엄중한 현실 속에서 원수가 멸망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가 세워지는 구원의 승리를 노래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사망 권세를 잡은 원수(사탄)를 파하시고 영원한 보좌에서 열방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 승리를 계시하는 것이다. 다윗은 원수가 무너짐과 악인의 이름이 영원히 지워지는 것을 보고 여호와를 찬양한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성경에서 가장 기이한 일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 사역이다.“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 사탄의 영원한 패배가 확정되었으며, 저들의 이름과 권세는 흔적도 없이 소멸된 것이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세상의 통치자들은 사라지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영원히 살아계셔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하게 만민에게 판결하신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왜곡된 법정이 아닌, 흠 없는 공의와 진리로 온 우주를 온전히 다스리신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전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실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어 그를 의지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 그래서 시인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를 찬양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시 9: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파산하여 스스로 구...

어린아이의 찬송으로 세우신 권능과 마지막 아담의 영광(시 8:2)

  어린아이의 찬송으로 세우신 권능과 마지막 아담의 영광(시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탄식과 고난의 밤을 지나 터져 나오는 창조와 구속의 장엄한 찬양시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함께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만유의 통치권을 회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웅장하게 예표한다.  온 땅에 아름다운 주의 이름과 어린아이의 권능이란, 하나님께서는 영광이 하늘 위에 가득하며,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 권능을 세우사 원수와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했으나 어린아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쳤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마 21:15) 주님은 세상의 지혜롭고 강한 자들이 아닌 연약한 자들의 찬양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입증하셨다.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 21:16) 인간은 광활한 우주 앞에서 먼지와 같은 존재이다. 그와 같은 존재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다. 이 구절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사 ‘천사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되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손의 모든 것(가축, 들짐숭,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을 인간의 다스림 아래에 두셨다. 첫 아담의 타락으로 피조세계 전체가 죄와 허무의 굴레에 갇혔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자신의 발아래 복종시킴으로 참된 우주적 회복을 완성하셨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

피 흘림의 비극 속에 보존된 은혜의 언약과 더 나은 그리스도의 보혈(창 4:8)

  피 흘림의 비극 속에 보존된 은혜의 언약과 더 나은 그리스도의 보혈(창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에덴 밖으로 쫓겨난 인류 역사 속에서 타락한 본성이 구체적인 죄의 열매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죽인 것이다. 하지만 그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은 창 3:15절의 언약(언약의 후손)을 보존하기 위해 어떻게 은혜의 계통을 보여 주신다.  먼저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두 제사의 차이는 제물의 물질적 종류(농산물 vs 동물)의 차이가 아니라 예배자의 언약적 믿음과 인격에 둔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히 11:4) 무슨 말인가 하면, 아벨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 예배자로 살았지만, 가인은 형식적인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조종하려 한 것이다.  가인의 타락한 본성은 스스로 죄를 통제하지 못하고,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이는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탄 나고, 필연적으로 이웃과의 관계 파탄으로 이어진다. 가인의 후예는 하나님 앞을 떠나(놋 땅) 세속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발전시키지만, 자기 우상화와 폭력, 일부다처제로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 ‘셋’을 통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것은 기술이나 군사력이 아닌 오직 은혜의 언약과 예배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도성’의 사람들이다. 아벨이 뱀의 후손(가인)에 의해 의인이 박해 받고 피 흘려 죽임을 당하자, 의인의 핏소리는 땅에서 원한과 공의의 보복을 호소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죄인을 향한 용서와 화평, 영원한 구속을 선포한다. 또한 죄인이라도 즉각적인 파멸로 끝나지 않도록 하시며 궁극적인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

억울한 모함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 법정과 십자가의 공의(시 7:1)

  억울한 모함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 법정과 십자가의 공의(시 7: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시 7:1) 다윗은 근거 없는 모함과 억울한 공격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 자신을 세우며 호소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아무런 죄 없이 억울하게 고난 받으셨으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한다. 그는 영혼을 찢으려는 원수들 앞에서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시 7:4) 원수가 내 생명을 짓밟아도 좋다고 하나님 앞에 결백을 토로한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 티나 흠이 없이 완전히 결백하셨던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다윗은 인간 재판정이 아닌, 하늘의 최고 법정이신 하나님의 법정에서 판결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시 7:8)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의 억울한 모욕과 불법 재판 앞에서도 욕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 그분이 참된 의인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 우주 앞에 공의로 선언하셨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하나님은 칼을 가시고 불화살을 메우신다. 악인은 죄악을 낳고 재난을 잉태하여 결국 자신이 판 웅덩이에 스스로 빠지는 자멸의 심판을 맞이한다.  사탄은 죄와 사망의 덫을 놓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승리했다고 생각했으나, 바로 그 십자가가 사탄 자신의 머리를 깨뜨리고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지혜이자 심판의 덫이 되었다. 다윗의 극심한 억울함과 고통...

층대 위에 선 온유함과 성령 안에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행 21:40)

  층대 위에 선 온유함과 성령 안에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행 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행 21:40)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설교자로 섰다. 무엇을 들고 섰을까? 복음을 맡은 전도자의 거룩한 신앙 인격으로 선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 돌을 던지고 폭력을 행하였던 자들을 용서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저들을 마주한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고난과 수난을 당하실 때에 악행하는 자들을 용서하여 주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또한 스데반 집사도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하였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해 저지르는 무지임을 알기에,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않고 구원의 기회를 전하는 것이다.“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고의적으로 반항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마지막 날에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에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신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인격자들이다. 인격이신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인격적인 순종과 사랑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공격 앞에서도 원한을 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품은 성숙한 인격으로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는 것이 참된 전도이자 선교이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드러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외적인 것에 이유와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내 문턱에서 전한 복음과 거룩한 신앙 인격(행 21:37)

  영내 문턱에서 전한 복음과 거룩한 신앙 인격(행 21: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행 21:37) 하나님께서 이루시려 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그리고 말씀 전하는 자를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심을 확인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면 저들은 돌을 들고 치려 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천부장과 군인들의 보호 하에 안전하게 말씀을 다섯 번이나 전하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개인의 억울함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주님께 받았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말은? 유대인들아 선민 사상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의 생각은,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의 회복이요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의 재현이 있을 것이라는 믿었던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은 두려움과 종교심이 가득하여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들을 섬겼다. 그래서 신이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 17:24) 그래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계획을 알아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심이다. 그뿐 아니라 죄로 인해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고 탄식하므로 창조 질서 회복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8) 예수님의 초림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러 오셨지만, 재림의 주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완성자로 오신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