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자유와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양보(행 21:24)

  복음의 자유와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양보(행 21: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여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난다. 장로들이 바울의 사역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로서, 그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버리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왜곡된 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안을 한다. 나실인의 결례를 앞둔 서원자 네 사람의 정결 예식 비용(번제, 속죄제, 화목제물, 소제, 전제)을 바울이 대신 지불하게 한다.  나실인의 서원 규례는 서원자가 일정 기간(7일~한 달)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멀리하고, 기간 만료 후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머리털을 화목제물 밑 불에 태운다(민 6:13-20). 유대인 사회에나 나실인의 비용을 대신 내주는 것은 매우 경건한 율법 준수의 행위로 여겨졌기에, 바울은 이를 행함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풀고 평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한다는 표시가 됨으로 그들이 갖고 있던 오해를 벗게 된 것이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 그렇다면 바울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간 것일까? 즉 말과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구원은 할례를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율법의 참된 용도와 죄인의 괴수를 살리신 은혜(딤전 1:7)

  율법의 참된 용도와 죄인의 괴수를 살리신 은혜(딤전 1: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율법의 적법한 사용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주권적 은혜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완성되는지를 명확히 보여 준다.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경고하는 것이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거짓 교사들은 구약의 역사가 오직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흘러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 무익한 변론으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구속사의 중심축에서 이탈했다는 것이다. 즉 거짓 교사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했지만, 그 본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이라 한다. 율법이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고발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명확히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은 우리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오직 은혜의 복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는 구속사적 도구로 사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자격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적인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극악한 훼방자였던 바울을 구원하심으로써, 앞으로 주를 믿어 영생 얻을 자들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의 본을 삼으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눈으로 뵙는 신앙과 십자가의 용서, 그리고 영광스러운 회복(욥 42:2)

  눈으로 뵙는 신앙과 십자가의 용서, 그리고 영광스러운 회복(욥 42:2)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노니”(욥 42:2) 욥기 전체의 위대한 최종 결론이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와 계시 앞에 선 욥의 진정한 회개와 신앙 고백, 그리고 친구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과 욥의 기도와 마침내 임하는 욥의 갑절의 회복과 평안한 종말을 다룬다.  욥은 마침내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불변하시는 주권적 작정을 온전히 인정한다. 이제 폭풍우 가운데 계시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눈으로 뵙는 신앙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했던 항변과 자의적 주장을 완전히 철회하고, 티끌과 재 위에서 참된 회개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참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감정을 넘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면을 통해 자신의 전적 무지함과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번제물을 준비하게 하시고, 내 종 욥의 용서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우매함을 용서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욥은 자신을 저주하였던 친구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므로, 하나님은 욥의 억울함과 결박을 푸시고(곤경을 돌이키사) 모든 소유를 이전보다 갑절로 채워주신다. 그가 받은 갑절의 복은 단순한 기복적 보상이 아니라, 고난을 끝까지 통과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최후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을 가리킨다. 구약의 욥은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신약의 구속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친히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 곧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셨다. 그가 친구들을 위하여 용서하며 기도하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을 용서하여 주신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

리워야단을 꺾으신 십자가의 권능과 무조건적 은혜(욥 41:34)

  리워야단을 꺾으신 십자가의 권능과 무조건적 은혜(욥 41:34)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는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욥 41:34) 욥 41장에서는 바다에서 가장 두렵고 저항할 수 없는 절대 괴수 리워야단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리워야단의 압도적인 신체 구조와 맹렬한 힘, 인간의 무기(창, 칼, 화살)를 비웃는 무적의 위용을 상세히 열거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혼돈과 악의 세력조차 하나님의 완벽한 통제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함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이 무시무시한 존재를 다루시는 분이신데,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맞서며 은혜를 빚진 것처럼 따질 수 있겠느냐고 선언하신다. 개혁주의는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한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피조된 것들을 들고 하나님께 드려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된 세계를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적 잣대로 존재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없다. 창조의 다양성과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 아래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무기인 칼, 창, 투창, 화살, 맷돌도 리워야단 앞에서는 지푸라기나 썩은 나무에 불과하다. 깊은 바다를 물처럼 끓어오르게 만드는 리워야단은 두려움이 없이 지음을 받아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으로 군림한다. 십자가의 구속사에서는 리워야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다 괴물, 곧 사탄과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교만의 왕인 사탄 아래 종노릇하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었던 리워야단을 제압하신 분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물꼬물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

자기 의를 내려놓고 구원의 능력 있는 오른손을 보라(욥 40:8)

  자기 의를 내려놓고 구원의 능력 있는 오른손을 보라(욥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8) 욥은 자신의 의를 들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다. 만나 주시지 않고 자신을 악인으로 취급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다. 하나님은 땅 위에 가장 악한 것을 짓 밟을 수 있다면 욥의 구원의 능력을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14)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창조 세계의 거대한 피조물인 베헤못을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다시 한 번 확증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서 우주 만물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굴복을 한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다물 뿐이로소이다”(욥 40:4) 즉 하나님을 대면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합당한 반응은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입을 닫는 겸손이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다시 허리를 묶고 대답하라고 명하신다. 왜 그런가 하면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무능력한 존재이다. 그래서 자력 구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 40:9) 사람의 무능함을 베헤못(하마)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비유한다. 인간은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없으나, 오직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칼을 댈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나 인간의 도덕적 의로움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오직 은혜’의 구속사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오른손은 무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 있는 오른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강력한 오른손의 권능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우리의 구원...

피조 세계의 광대한 섭리와 십자가의 역설적 지혜(욥 39:5)

  피조 세계의 광대한 섭리와 십자가의 역설적 지혜(욥 39: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욥 39:5) 욥 39장에서는 인간의 손길과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거친 야생동물들의 세계를 생생하게 조명한다.  하나님은 산염소, 암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매와 독수리에 이르기까지 야생 동물들의 번식, 자유, 습성, 용맹함을 일일이 열거하신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좁은 시야와 유용성 중심의 사고를 깨뜨리시고,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피조 셰계 전체를 세밀하게 먹이시고 다스리시는 관대한 주권과 지혜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인간은 흔히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 길들여진 것만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관리 영역 밖에 있는 야생의 생명들까지도 주권적으로 돌보시고 보존하신다. 오직 창조주의 다스림 아래에만 복종하는 동물들이 있다. 즉 인간은 피조 세계의 작은 야생 짐승 하나도 자기 뜻대로 온전히 굴복시키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욥 39:9) 하나님은 역설적인 창조의 신비를 보여 주시므로 인간의 획일적인 잣대나 인과응보의 공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것으로, 타조는 알을 땅에 방치할 만큼 지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달릴 때에는 날쌘 군마(말) 조차 비웃을 정도의 속력을 낸다. 또한 생명의 죽음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신다. 매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본능과 독수리가 낭떠러지 바위산에 둥지를 틀고 먹이를 사냥하는 것은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능적 설계에 의한 것이라 한다. 즉 피를 흘리고 시체를 찾는 맹금류의 본능마저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의 거대한 망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철저한 인간 중심적인 인과응보의 틀에 갇혀있는 것을 깨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성도 ...

자원하는 종의 기쁨과 왕 같은 제사장의 영광(행 21:14)

  자원하는 종의 기쁨과 왕 같은 제사장의 영광(행 21: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함으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4)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확고함은, 자신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책임이 있는 자이다. 종은 주인의 인격적으로 알고,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인의 기쁨과 즐거움이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을 한다. 교회 안에 믿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들이다. 바울이 말하는 ‘나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은, 내가 주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기업을 보살피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 때이다. 그래서 주인을 빛나게 하는 일이, 내 생활에서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하여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이 있다. 종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계약 기간이 다 되어서 떠나는 종이 있고, 계약 기간이 다 되었지만 그 주인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종이 있다.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출 21:5)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귀에 구멍이 뚫리고, 자원하여 들어간 사람이 된다.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출 21:6) 그리고 사도라 함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달리 말하면 주인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가 됨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을 ‘왕같은 제사장’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