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섭리가 깨뜨리는 인간 중심주의와 그리스도의 승리(욥 39:1)

  야생의 섭리가 깨뜨리는 인간 중심주의와 그리스도의 승리(욥 39: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욥 39:1) 하나님은 창조주의 섭리는 우주적 기상 현상에서 야생동물의 세계로 말씀한다. 즉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야생의 섭리를 아느냐는 것이다. 욥에게 질문하시기를 네가 그들이 새끼 치는 때를 아느냐? 그 기간을 셀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이것은 사람의 도움 없이도 광야에서 강건하게 자라나 제 길로 감을 알게 한다.  들나귀와 들소의 자유를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칠지라도, 그 소리를 비웃으며 산을 누빈다는 것이다.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욥 39:7) 타조의 기이함을 말씀하신다. 모성애가 부족함으로 알을 모래에 버려 두어 어리석게 보이지만 날개를 펴고 달릴 때면 말과 기수조차 비웃을 정도로 속도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뀌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욥 39:18) 전투마의 용맹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말의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입히고, 나팔 소리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기를 행해 돌진하는 용맹함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독수리가 까마득하게 높은 낭떠러지 끝에 집을 지으며 먹이를 찾아내는 시력은 인간의 지혜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의 본성적 부여하심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욥과 세 친구들이 갖고 있는 인간 중심주의를 철저히 박살 내고, 타락한 이성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주권을 선포하신다.  인간 중심적인 생각은, 주변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들나귀와 들소를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타조는 지혜는 없지만 말보다 빠른 발을 가졌다. 이것은 인과응보적인 지혜를 무너트...

무지의 말을 멈추고 창조주의 거룩한 섭리 앞에 서라(욥 38:2)

  무지의 말을 멈추고 창조주의 거룩한 섭리 앞에 서라(욥 38: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욥기 38장은 욥기 전체의 가장 극적인 절정이자 대전환점이다.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로 이어지던 모든 인간의 긴 침묵과 논쟁이 끝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폭풍우(회오리바람) 가운데서 친히 나타나사 욥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욥이 즐기차게 요구했던 고난의 이유나 인과응보의 잘잘못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신다. 대신 창조 세계의 광대한 신비와 섭리에 관한 일련의 질문들을 쏟아부으심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됨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주권 앞에 무릎 꿇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 등장하신다 함은, 하나님의 현현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가시적인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욥의 항변을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시며, 재판관 행세를 하려던 욥에게 허리를 묶고(도전자의 자세를 갖추고) 창조주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절대 주권자이자 최종 재판장이시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청종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심을 보여 주심으로 인하여, 온 우주는 정교한 설계와 하나님의 지혜로 기초가 놓였으며, 무질서와 혼돈(바다, 흑암)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선 아래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보심을 알게 하기 위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한 광야에도 비를 내려 풀을 돋아나게 하신다. 사자에게 먹이를 사냥해 주시고, 버림받아 울부짖는 까마귀 새끼에게까지 먹이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보살핌을 보여 주신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하물며 택함을 받은 백성들을 살피시고 지켜 주심을 말하기 위함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폭풍 속에서 듣는 주님의 음성과 은혜로운 멈춤(욥 37:2)

  폭풍 속에서 듣는 주님의 음성과 은혜로운 멈춤(욥 37:2)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욥 37:2) 엘리후의 기나긴 변론이 끝을 맺는 절정이자, 폭풍우 가운데 친히 강림하실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한 웅장한 서곡이 펼쳐진다. 거대한 폭풍 속에 등장하시는, 창조주의 압도적인 위엄 앞에 인간이 위해야 할 유일한 태도인 경외를 촉구한다. 그는 천둥소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번개를 땅끝까지 비추는 빛으로 묘사를 하며, 하나님은 당신의 기이한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보라는 것이다. 또한 눈과 비를 명하여 내리게도 하시며 멈추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자연의 현상을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 하여 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욥 37:7) 즉 명렬한 추위와 폭풍을 보내어 사람들의 모든 노동(손의 일)을 멈추게 하심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힘을 의지하지 않고 창조주의 일하심을 묵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으라 하면서, 가만히 서서 보라한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욥 37:14)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을 버릴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다.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의 폭풍 속에서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 “바다를 향하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폭풍을 통하여 사람의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을 보개 하신다는 엘리후의 주장이다. 예수님은 친히 인생의 지혜로 수고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안식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을 당할 때에 바라보아야 할 시선과 방향을 주셨다. 즉 가난과 ...

곤란 중에 비추시는 은혜의 얼굴과 참된 평안의 안식(시 4:8)

  곤란 중에 비추시는 은혜의 얼굴과 참된 평안의 안식(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시편 3편의 기도가 아침의 기도이며, 시편 4편의 기도는 저녁의 기도이다. 하루 동안을 살며 억울함 모함과 영적 곤고함 속에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비밀을 노래한다.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하며 기도한다. 자신의 행위가 아닌 자신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곤란 중에 있는 자를 건져내실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온전한 의를 완성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넓은 터로 옮기신 것이다(롬 3;24).  세상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절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다. 그러나 세상의 조롱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유일하게 온전히 순종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은혜로 구별된 자로 세우셨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3) 분노와 억울함에 휩쓸려 범죄하지 말고 침상에서 잠잠히 자신을 돌아보며 형식적인 제사가 아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의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 4:5) 구약의 불완전한 제사는 단번에 의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로 완성이 되었다. 즉 자기 의를 내세우는 제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출때에 기쁨이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기쁘다고 한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과 십자가 뒤에 밝아온 부활의 아침(시 3:3)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과 십자가 뒤에 밝아온 부활의 아침(시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다윗의 탄식시이다. 그의 아들 암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로서, 배신과 절망의 극치 속에서 개인적인 억울함 토로에 머물지 않고 구원의 승리를 전하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아들과 신뢰하던 신하(아히도벨)의 배신으로 쫓겨나는 다윗을 향해 사람들은 ‘하나님도 저를 버리셨다’며 조롱하였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시 3:2) 이와 같은 조롱을 예수님도 당하셨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바로 그 조롱이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마 27:43) 이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장 참혹하게 버림받는 자리까지 낮아지셨음을 예표하는 것이다.  절망 가운데 다윗은 환경을 보지 않고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의 말씀을 붙든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즉 자신의 머리를 다시 들려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뿐임을 고백한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의탁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그분을 다시 살리셔서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반전을 이루셨다(빌 2:8-11). 다윗은 수만명이 포위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평안히 잠들고 다시 일어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 ‘누움과 깨어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무덤에 묻히심)과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신 부활의 아침을 예표하는 것이다. 생명과 승리의 보증은 ...

세상의 헛된 반역을 넘어 영원한 왕께 입맞추라(시 2:2)

  세상의 헛된 반역을 넘어 영원한 왕께 입맞추라(시 2:2) “세상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신약 성경에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를 증언할 때 가장 빈번하게 인용한 본문 중 하나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반역 속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속사역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세상의 헛된 반역과 하나님의 비웃음이란,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들을 방해하지만 저들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말한다. 즉 헤롯,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데 인간의 극단적 반역으로 십자가의 처형을 하였지만, 그것 조차도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는 도구가 된 것이다. 시온의 거룩한 왕과 영원한 아들이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온 우주의 왕으로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결정적 승리이며, 초림을 통한 영적 통치와 재림을 통한 원수들의 최종적 심판을 의미한다.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7)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자들에게 심판을 피하고 영원한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입맞춤)하라는 것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2)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도덕적 노력에 있지 않고, 오직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통치권 앞에 굴복하여, 그분을 피난처로 삼는 것뿐이다. 역사의 주관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한다고 할지라도, 환경과 시대의 혼란에 낙심하지 말고 ...

참된 복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생명(시 1:2)

  참된 복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생명(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도다”(시 1:2) 시편 1편은 단순한 개인 윤리나 권선징악의 교훈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구속의 원리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다. 참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담 이후 타락한 모든 인류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리에 앉은 자들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런데 율법의 모든 요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순종하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주야로 즐거워 하며 성취하신 참된 의인은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네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옮겨 심겨진 나무를 뜻한다. 죄로 인해 마르고 메마른 광야 같던 성도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푸른 나무가 된 것은, 스스로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은혜 때문이다. 반면에 악인의 본질과 운명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을 넘어, 하나님의 언약과 생명에서 단절된 채 자기 의를 의지하는 자를 의미한다.  생명의 무게와 알맹이가 없기에 환난과 심판의 바람이 불 때 날아가는 겨와 같은 것이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 의인의 회중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하나님 아버지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