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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알곡과 타작마당의 거룩한 연단(딤후 1:15)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알곡과 타작마당의 거룩한 연단(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딤후 1:15) 구속사 전체에서 드러나듯, 위기의 순간마다 가라지와 알곡이 분리되는 배교의 아픔이 교회 안에 늘 있어 왔다. 본문에 등장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고, 교회에 어려움이 닥쳐 오자 교회를 버리고 떠났다. 반면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이르러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위로했고, 사도의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메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딤후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에 수난과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이 일에 골고다 언덕 위에 있었던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당하셨던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부끄러워하여 떠난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딤후 1:15)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통하여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이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섬긴 오네시보로처럼, 진리 때문에 고난을 받는 형제와 교회를 긍휼로 돌아보고 복음과 함께 기꺼이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바울은 주께서 그 날(최후 심판의 날)에 그 집안과 오네시보로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간구하였다.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 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

부끄러움을 씻어내신 십자가의 길과 영원히 기억지 않으시는 은혜(시 25:4)

  부끄러움을 씻어내신 십자가의 길과 영원히 기억지 않으시는 은혜(시 25: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4) 시편 25편은 다윗의 시로서, 대적의 조롱과 젊은 시절의 죄책 그리고 외로움과 환난이라는 수치 속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극심한 모욕과 멸시 앞에서도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온 영혼을 성부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세상은 거짓으로 예수님을 모욕을 주고 벌거벗겨 나무에 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사 결코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다윗은 주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므로 죄인들에게 길을 교훈하시며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4) 그리스도는 단순한 도덕적 스승이 아니라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 이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헤세드)과 진리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입 맞추고 성취되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시 85:10) 이와 같은 은혜를 성령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주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과거에 수치스러운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주의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젊은 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말 것을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과거의 수치를 묻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7) 왜 그런가 하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

영원한 문을 여신 개선 용사와 하늘 보좌로 입성하신 영광의 왕(시 24:9)

  영원한 문을 여신 개선 용사와 하늘 보좌로 입성하신 영광의 왕(시 24: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9) 시편 24편은 역사적으로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시온산 장막으로 메어 올릴 때에 불린 찬송이지만, 구속사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 권세를 꺾으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사 영원한 하늘 성소로 입성하시는 대관식을 계시한다.  만유의 주권자이신 창조주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예수님은 혼돈과 흑암의 바다를 밟으시고 잠잠케 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또한 십자가 승리를 통해 타락으로 훼손된 만유의 주재권과 소유권을 확증하신 만물의 참된 통치자이시다.  누가 주의 성산에 설 것인가? 타락한 아담의 후손 중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통과하여 하늘 성산에 오를 자가 전무하다. 오직 죄가 전혀 없으시고 흠 없는 순종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홀로 주의 성산에 오르실 자격을 갖춘 참된 의인이시다. 주님이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그분을 믿는 자들, 곧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세워진다. 성문의 문지기들은 묻는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시인은 외친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시 24:8)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선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다. 십자가에서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무장 해제시키고 승리하신 전쟁에 능하신 용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하...

십자가 수난과 영광의 보좌 사이에 선 참된 목자 예수 그리스도(시 23:1)

  십자가 수난과 영광의 보좌 사이에 선 참된 목자 예수 그리스도(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시편 23편은 성도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사랑받는 시이다. 올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 22편(십자가 수난의 목자)과 24편(영광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목자)의 말씀 사이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의 생명 잔치를 계시하는 구속사의 핵심 본문이다. 양들은 스스로 맹수를 피할 능력이나 풀밭을 찾을 수 없는 전적 무능한 존재이다. 그런데 목자가 있으므로 인하여 결핍과 부족함이 사라진다. 즉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영혼을 소생시키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며 영적 굶주림이 영원히 해결된다. 그리고 목자의 언약과 명예를 걸고 자기 백성을 결코 멸망하지 않는 의의 길로 끝까지 인도하신다. 성도의 견인이 약속된 것이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걸어야 할 가장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친히 먼저 통과하셨다. 그분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 되셨기에, 이제 양 된 성도가 사망의 그늘을 지날 때도 고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목자의 막대기는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결박하고, 지팡이는 실족하는 성도를 붙들어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한다. 목자는 대적들이 보는 가운데 식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잔이 넘치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탄과 세상 권세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 승리의 축복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로 새 언약의 성찬(생명의 떡과 잔)을 제정하시고, 성령 기름 부으심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예수님의 대속 사역의 최종 완성은 성도를 영원한 하...

골고다의 흑암을 뚫은 부르짖음과 부활로 세우신 거룩한 교회(시 22:1)

  골고다의 흑암을 뚫은 부르짖음과 부활로 세우신 거룩한 교회(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완전한 단절을 겪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거룩하신 분으로 인정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전 외치시던 제4언(가상칠언)의 직접적인 성취이다. “제 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예수님은 벌레 취급을 받으며 비방과 멸시를 당한다. 대적들은 입술을 삐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것’이라 조롱을 한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허리에 창에 찔린다. 뼈가 다 어그러지며,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는다. 그리고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눈다. 이와 같은 고통 속에 간절히 기도하시며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러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하였다.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 22:21)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대속 제사를 받으시고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시는 부활의 승리를 주신다. 즉 사망의 세력들이 그리스도를 영원히 가둘 수 없었으며,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응답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승리하신 기쁨을 성령을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교회를 통하여 유대인을 넘어 온 열방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세계 복음화가 열렸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선...

사슬에 매인 자의 당당함과 꺾이지 않는 부활의 생명(행 25:19)

  사슬에 매인 자의 당당함과 꺾이지 않는 부활의 생명(행 25: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행 25:19) 바울은 죽음과 권력자들 앞에서 부활의 은혜로 살았다. 오히려 부활의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즉 부활의 기쁨은 세상이 말하는 가벼운 유쾌함이 아니라, 고난의 한복판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남으로써 어떤 환난과 슬픔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죄수의 몸으로 사슬이 묶여 있으면서도, 화려한 왕관을 쓴 아그립바 왕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영혼 구원을 염려하는 당당함이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부활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죽음과 고난을 통과하는 생명의 능력이다. 부활의 기쁨과 영생은 십자가의 고난과 자아의 죽음을 통과할 때 비로소 주어진다.  부활의 능력은 죄와 어둠, 사망의 결박을 완전히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는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것이다. 즉 죽은 자가 살아난 기쁨으로, 더 이상 죽음과 어두움과 상관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그러므로 부활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죽음과 고난을 통과하여야 한다. 그 때에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오늘날도 그때와 마찬가지이다. 부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 하는 자들이 더 많아 졌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핍박하는 자들이 우리들의 주변에 있습니다. 이 ...

부활에 무관심한 세상과 온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행 25:14)

  부활에 무관심한 세상과 온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행 25: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행 25:14) 바울이 가이사야에 도착한 지 이 년이 지났다. 그래서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었고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등장한다. 하지만 백성들은 아직도 바울을 죽이려 하고, 권력자들은 바울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을 알지만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즉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부이고, 세상은 권력자가 바뀌어도 부활에는 관심이 없고, 반대하는 자들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행 25:19) 저들에게는 예수가 죽고 부활하는 문제보다 세상에서 권력과 돈에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바울이 이 년 동안 가이사랴에 있었지만, 세상은 변한 것이 없고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벨릭스, 베스도처럼 살지 말라고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사는 것이 산 제사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런데 부활의 열매가 있어야 산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착함은, 모든 관대한 정신으로 온유한 성품이다. 그리고 의로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