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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혼합을 심판하시는 공의와 유일한 구원의 방주 그리스도(창 6:2)

  세속의 혼합을 심판하시는 공의와 유일한 구원의 방주 그리스도(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자들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언약 신앙을 전수하던 경건한 계열이었다.   반면에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속 도시 문명과 육체적 쾌락, 폭력을 따르던 가인 계통의 여성들이다. 셋의 계열이 영적 거룩함과 언약적 순결을 버리고 오직 외모와 육체적 정욕에 이끌려 무분별하게 불신 결혼(혼합)을 행했다.  거룩한 백성이 세상과 동화됨으로써 지상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순수한 언약 공동체가 전멸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세속 가인 문화의 힘 숭배와 셋 계열의 타락이 결합하여 낳은 결과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폭력과 권력으로 명성을 떨친 자들이 생긴 것이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11) 그러므로 인간의 전 인격적(생각, 계획, 의지)이 철저하게 죄로 물든 전적 부패를 가장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하나님의 한탄은 변덕이나 후회가 아니라, 거룩하신 공의의 하나님이 인간의 파멸적인 반역을 보시며 느끼시는 언약적 거룩한 분노와 의로운 진노를 인간의 언어로 나타내셨다. 여기에 무조건적인 은혜가 임한다.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불린 것은 그의 선천적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그에게 먼저 임했기 때문이다. 즉 이신칭의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노아의 방주는 단순한 나무 배가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방식을 예표하는 완전한 모형론적 실체이다. 방주 옆면에 오직 하나의 출입문만 존재한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

사망의 행렬 속에서 이어지는 은혜의 계보와 영원한 생명의 빛(창 5:1)

  사망의 행렬 속에서 이어지는 은혜의 계보와 영원한 생명의 빛(창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 5:1)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온 인류를 덮친 사망의 현실 속에서도 여자의 후손을 신실하게 보존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사를 보여주는 핵심 본문이다. 창 4장에서 가인의 족보는 문명과 폭력의 계열이지만, 창 5장에서는 은혜의 계통(하나님의 도성)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를 밝힌다. 그래서 아담이 셋을 낳고,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이는 죄로 인해 부패한 본성(원죄와 전적 타락)이 후손에게 유전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무조건적 선택을 통해 이 타락한 계열 속에서 구속의 씨앗이 보존하심을 드러낸다. 가인의 계열은 도시 건설, 목축, 음악, 금속 제련 등 세속 문명의 화려함과 힘을 자랑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없는 죽음과 살인의 노래로 끝난다. 그러나 셋의 계열은 눈에 띄는 세속적 업적은 기록되지 않으나, ‘낳고, 살고, 죽었더라’는 일상 속에서 신앙의 유산을 전수하며 언약의 계통을 이어간다. ‘죽었더라’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행위 언약의 경고로 인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더라도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결국 죽음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5) 그런데 모든 인물이 ‘죽었더라’로 끝나는 장례 행렬 속에 오직 에녹만이 다른 결말을 맞는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에녹의 승천은 아담의 저주가 사망으로 끝이 아님을 선포하는 구속사의 부활이다. 이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

부활 신앙의 거룩한 분별과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사명(행 23:7)

  부활 신앙의 거룩한 분별과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사명(행 23: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행 23:7)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히게 된 것은 부활의 신앙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자들만이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존폐가 걸린 핵심 교리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거짓이며, 하나님을 거짓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고전 15:1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란?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 6:10) 이것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육체적 소생이 아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단번에 영원히 심판하시고, 택하신 백성을 하나님께 대하여 영원히 살아 있는 자로 삼으신 승리의 확증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동일한 은혜와 능력을 얻은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그렇다면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이루시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속의 일을 밝히 깨우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만을 드러내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인 것이다. 이 일을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다. 성령은 신자를 자기 도취로 이끌지 않고,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충만함 앞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왜 그런가 하면 모든 구원의 비밀과 영광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 머리가 되신다. 그래...

육신의 열심을 넘어 성령으로 고백하는 참된 신앙(행 23:1)

  육신의 열심을 넘어 성령으로 고백하는 참된 신앙(행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행 23:1)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증언을 하고 있다. 자신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었노라고 한다. 그러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치라 명령을 한다. 여기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유대인들이나 바울이나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갈등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즉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문제의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육신적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의 참뜻을 결코 판단할 수 없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벡했을 때, 주님께서는 “바요나 시문에 이를 에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의 말로 알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어리석게 보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령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자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믿는 자이다.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믿는“자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는 곳이 고린도전서의 말씀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방언과 신비로운 은사를 소유하면 자기 수준이 높고 영적으로 신령하여 ‘성령의 도장’을 받았다고 착각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본래 종자가 다르고 실력이 뛰어나 은사를 받았다는 교만한 엘리트주의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성령의 도장’을 받은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야 한다. 즉 나에게는 자주권이 없고 주님을 주라 시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

피로 맺어진 언약적 가족과 교회의 거룩한 질서(딤전 5:1)

  피로 맺어진 언약적 가족과 교회의 거룩한 질서(딤전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딤전 5: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적 가족이다. 그래서 구속의 은혜로 세워진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맺어진 새 언약의 혈육적 친밀함과 거룩한 경계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이에게는 아버지에게 하듯 하고,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늙은 여자를 어머니에게 하듯, 젊은 여자를 온전한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대하라고 명령한다. 구약의 율법에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으로 계시 되며, 이들을 돌보는 것은 언약의 백성의 표지였다. 그런즉 과부를 돌보는 것에 1차적 책임은 육적 가정의 언약적 의무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그러나 의지할 친족이 전혀 없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간구와 기도를 드리며, 나그네를 대접하고 성도들의 발을 씻긴 삶의 열매가 입증된 60세 이상 된 ‘참 과부’를 교회의 공적 구제 명부에 올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복지 수혜를 넘어, 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긍휼을 제도화하여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사역자로 품는 언약적 돌봄의 실행이다.  말씀 사역자에 대한 생활 보장은 인간적 고용 계약이 아니라, 구속사의 복음 진리가 오류 없이 선포되고 교회가 생명의 꼴을 풍성히 공급받도록 사역자는 세상 염려로부터 성별하는 언약 공동체의 수호 장치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장로에 대한 고발을 받을 때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되, 범죄한 자는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경각심을 갖게 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안수받은 자가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안수를 행한 자에게도 시비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딤전 5장에...

어느 때까지니이까’의 비통한 탄식을 찬양으로 바꾸신 언약적 사랑(시 13:5)

  ‘어느 때까지니이까’의 비통한 탄식을 찬양으로 바꾸신 언약적 사랑(시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시편 13편은 비통한 절규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구원의 감격으로 충만한 찬양으로 끝이 난다. 이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버림받으심과 사망의 잠에서 부활하사 언약적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계시한다. 다윗은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숨기시나이까’, ‘영혼이 번민하고 마음에 근심하기를’,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때 까지 하겠느냐며 네 번에 걸쳐 한계에 다다른 고통을 토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 영원한 잊힘과 버림을 겪으셨다. “제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죄로 인해 영원히 하나님의 낯을 피래야 했던 인류를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주의 얼굴을 숨기시는’ 지옥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다. 그리고 사망의 잠을 통과하여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깨어나신 분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 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이러한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헤세드)이다. 이 은혜를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아버지의 신실하신 언약을 의지하셨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그리스도의 성취는 십자가의 수치 뒤에 주어진 지극히 높은 승귀와 영광이다. 하나님은 고난받은 아들에게 만유의 이름을 주심으로 넘치도록 갚아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모든 죄책을 넘어서는 측량할 수 없는 ...

거짓된 세상을 이기는 순결한 말씀과 영원히 안전한 지대(시 12:5)

  거짓된 세상을 이기는 순결한 말씀과 영원히 안전한 지대(시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시 12:5) 시편 12편은 사람의 거짓과 아첨이 세상을 뒤덮은 영적 파탄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은 자의 시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거짓과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에 참된 진리와 언약의 성취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사람들은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며, 스스로 왕인체 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나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시 12:4) 이것은 타락한 세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주한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저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아첨하고, 뒤로는 속임수를 썼다. 사람의 혀와 권세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속한 자들의 헛된 자랑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압제받는 자기 백성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역사 한가운데로 직접오셨다. 그것이 성육신이며,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마귀의 압제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서, 죄와 사망의 억압 속에 탄식하던 가련한 우리를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안전한 지대(예수 안으로) 옮기셨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성취된다. 즉 구약의 모든 언약과 약속을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성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어떠한 영적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도와 보호하심의 은혜를 주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