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오래 참음을 따르는 교회(행 17:6)

  십자가의 오래 참음을 따르는 교회 본문: 사도행전 17장 6절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1. 복음의 역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 정죄당하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지자, 영적 정결함을 시기한 유대인들의 복제되지 않은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야손의 집을 습격했고, 급기야 야손과 형제들을 관장들 앞에 끌고 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렀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직면한 이 박해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붕괴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악한 무리의 대적 앞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더욱 온전해지는 비결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대처하는 데 있습니다. 이 억울한 고발의 장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그대로 비추고 있습니다. 과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세우기 위해 거짓말과 거짓 증인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이라 하여 천하를 소란하게 한다’는 조작된 죄목을 씌워 정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 역시 주님과 똑같은 죄목으로 세상 법정에 고발당한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잠든 세상을 깨우는 것이기에, 어둠에 속한 세상은 복음을 향해 이토록 표독스러운 고발을 멈추지 않습니다. 2. 도수장의 어린 양과 같았던 그리스도의 성품 세상의 거센 압박과 목숨을 위협하는 핍박 앞에서 바울과 야손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은 세상의 칼을 빼 들지 않았습니다. 로마법이라는 권력의 힘을 의지해 맞서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무력해 보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공의로 변호할 하늘의 권...

미련한 전도와 오래 참음으로 세워지는 주권적 교회(행17:3)

  미련한 전도와 오래 참음으로 세워지는 주권적 교회 본문: 사도행전 17장 3절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1. 전도의 미련한 것과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3주) 동안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을 때, 수많은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놀라운 회심의 역사는 결코 바울과 실라의 탁월한 수사학이나 인간적인 설득력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택하신 백성을 유기적으로 부르시는 성령의 역사, 곧 ‘효과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복음을 역사하게 하시는 성령의 성격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비인격적인 어떤 거대한 파워나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인격과 성품’이 죄인의 심령에 부딪쳐오는 사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천군천사를 보내어 단 한 순간에 온 세상을 무릎 꿇릴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칠고 투박한 인간의 입술을 통한 ‘전도’라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이 미련해 보이는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격이 전달되고, 죄인이 변화되는 것—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진 신비이자 능력입니다. 2. 환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이 말씀의 살아서 역사하는 능력은 역설적이게도 극심한 핍박의 현장에서 증명됩니다. 바울의 선포로 교회가 세워지자, 시기가 가득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야손의 집을 습격하고 거센 박해를 가했습니다. 인간의 눈과 효율성의 잣대로 볼 때는 사역의 실패처럼 보이며, 지극히 비효율적인 상황으로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적인 믿음은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

복음 전도자의 성품, 오래 참음의 위대함(행 17장 1-9절)

  복음 전도자의 성품, 오래 참음의 위대함 본문: 사도행전 17장 1-9절 (2026년 6월 14일 설교) 1. 효율과 능력이 아닌, 인격과 성품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7장에는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전도 현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현장의 실상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유대 동족들로부터 극심한 핍박과 방해가 가해지고 있으며, 바울을 영접했던 야손과 형제들은 관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고초를 겪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바울이나 야손이 생각이 없거나 무능해서 이토록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입니까?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복음 전도의 현장에 하나님의 가공할 능력이 임하여 대적자들을 단번에 물리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사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세상의 효율이나 능력의 논리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실 때, 복음 전하는 자의 인격과 성품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신자가 나타내어야 할 본질은, 대적을 제압하는 힘이 아니라 사랑의 인격체로 서는 것입니다. 1.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과 오래 참음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 없으면 기독교의 그 어떤 위대한 행위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모든 것이자 구원의 도리를 요약한 결정체입니다. 바울은 그 사랑의 첫 번째 속성으로 '오래 참음'을 제시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성경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나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복수나 분노를 억제하고 참아내는 것입니다. '오래 견딤'은 비난에 맞서 즉각 변명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변명의 기회가 올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음과 견딤은 인간의 악물어 쥔 오기가 아닙니다. 내 안에 울분과 분노가 넘칠지라도, 나를...

환난 속에서 빛나는 성도의 견인과 교제의 은혜(살전 3:3)

  환난 속에서 빛나는 성도의 견인과 교제의 은혜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3장 3절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1. 환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견인 사도 바울은 극심한 박해와 환난 속에 놓인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전심으로 염려했습니다. 그리하여 영적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급히 파송했고, 마침내 그들이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울은 이 안도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감사와 기도를 쏟아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신학의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견인'을 발견합니다.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모든 환난과 고난은 어쩌다 마주친 불운이나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 속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두신 목적 있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며, 환난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끝내 믿음을 지키게 하십니다(성도의 견인). 2. 은혜의 방편: 교회와 성도의 영적 교제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견인하실 때 독단적으로 일하시기보다,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을 사용하십니다. 본문에서 돋보이는 구체적인 은혜의 방편은 바로 ‘교회와 성도의 신실한 교제’입니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살전 3:2) 성도의 견인은 고립된 개인의 의지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돌봄, 그리고 지체 간의 사랑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시험하여 시험에 빠진 자들을 정죄하고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려 하지만(살전 3:5), 교회는 영적 침체에 빠진 형제를 찾아가 위로하고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가 배반하기 전, 사탄의 밀 까부르듯 하는 시험이 있을 것을 ...

절망의 심연에서 부르는 중보자의 이름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욥 9:3)

절망의 심연에서 부르는 중보자의 이름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욥기 9:3) 1. 인간의 영적 세탁, 그 법정적 절망 욥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주권과 초월성 앞에서 인간이 겪는 근원적인 한계를 직시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서 법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변호할 수 없으며, 감히 죄 없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철저한 법정적 절망입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스스로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벽하려 애쓰고, ‘눈 녹은 물’과 ‘잿물’로 자신을 씻어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의 기준 앞에서는 그저 ‘더러운 웅덩이에 빠진 자’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틀에 갇혀 있던 빌닷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반박입니다. "정직하게 회개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인본주의적 위로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바울의 선언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율법의 행위로 그분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3:10, 20). 2. 욥의 비명, 중보자를 향한 구속사적 요청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대등하게 법적 공방을 벌일 수 없습니다. 이에 욥은 고통의 심연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재해 줄 제3의 판결자를 구하며 절규합니다.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기 9:33) 이 구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가장 강력하게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고, 그 의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 전, 욥이 고통 속에서 희미하게 비명을 지르며 그토록 찾았던 그 중보자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 3. 양손을 잡으신 유일한 판결자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손과 인간의 ...

인과응보의 정죄를 넘어선 대속의 은혜(욥 8:4)

인과응보의 정죄를 넘어선 대속의 은혜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으니” (욥기 8:4) 1. 빌닷의 인과응보, 그 종교적 정죄의 한계 수아 사람 빌닷은 앞서 말한 엘리바스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냉정하게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공격합니다. 자녀들이 주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다는 참혹한 정죄입니다. 그가 내세우는 판단의 근거는 조상들의 지혜와 오랜 전통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을 건냅니다. 그러나 빌닷의 철저한 인과응보적 판단은 고난받는 자를 향한 종교적인 정죄일 뿐입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학의 치명적인 한계는, 죄의 결과로 인한 파멸죽음 외에 하나님의 깊으신 신비나 은혜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2. 파멸의 자리에 대신 버려지신 예수 그리스도 빌닷은 ‘죄를 지었으므로 그 범죄에 버려두셨다’고 당연하게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난 신비한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으신 흠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영원한 심판과 참혹한 죽음의 자리에 그대로 버려두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을 당연한 파멸로만 보았던 빌닷의 시선과 달리, 구속사는 인간이 받아야 할 그 파멸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 외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뿌리째 뽑히는 마름을 당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버려지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 가운데 잠시 무성하다가 결국 뽑혀 나갈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영원한 생명수 시냇가에 다시 심긴 복된 가지가 된 것입니다. 3. 미약함과 낮아짐으로 성취된 진정한 창대함 또한, 회개하면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처음보다 더 큰 부자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빌닷의 제안은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

고달픈 인생의 뒤척임, 십자가의 안식을 만나다(욥 7:1)

  고달픈 인생의 뒤척임, 십자가의 안식을 만나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욥기 7:1) 1. 육체와 영혼의 탈진, 밤낮 없는 성도의 한계 욥은 밤낮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육체의 고통과 숨 막히는 영적 침묵 속에서 차라리 숨이 막혀 죽는 것이 낫겠다고 토로합니다. 인간의 삶을 자유가 없는 군인이나, 그저 하루치 삯을 받기 위해 종일 땀 흘려야 하는 품꾼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마침내 간절히 기다리던 밤이 찾아와도, 육신의 통증과 악몽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고 새벽을 기다리며 괴롭게 뒤척일 뿐입니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 7:4)라며 탄식합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탈진되어 한순간의 안식도 누리지 못하는 연약한 성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이토록 아침마다 간섭하시고 시험하시며 괴롭게 하시는가 하며, 하나님의 과도한 관심에 숨이 막힌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설령 자신에게 알지 못하는 죄가 있다 한들,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그것이 무슨 큰 손해가 되기에 나를 과녁 삼아 이토록 치시냐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2. 겟세마네의 뒤척임으로 인간의 수고를 담당하신 예수님 하나님은 욥이 겪은 이 깊은 절망과 수고의 문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해결하여 주십니다. 주님은 자유가 없이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부르고 계십니다. 인류의 죄짐이라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깊은 밤을 지새우며 뒤척이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밤새워 기도하심으로, 인간이 마주한 근원적인 공포와 고통을 친히 체휼하시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욥이 느꼈던 "하나님이 왜 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