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느 2:4) #하나님의작정과섭리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느 2:4)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행한 언약적인 기도하였다. 이제 2장에서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두려움 속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 나아가 예루살렘의 참상을 전한다. 그러자 왕은 오히려 호의를 베풀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내어 준다. 이 모든 과정을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다고 고백을 한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느 2:8하) 개혁주의 신앙은 우연을 믿지 않고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는다. 즉 세상의 왕들 마저도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 역시 세상의 눈에는 로마 제국과 종교 지도자들의 승리 같았으나, 실상은 창세 전부토 계획된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 섭리의 완성이었다. 그는 왕궁의 모든 특권과 안락함을 뒤로한 채,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이것은 하늘의 영광을 뒤로하시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무너진 영적 상태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 참된 제자의 길은 세상의 영광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이웃의 아픔 속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는 왕이 소원을 물었을 때에 짧은 순간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매우 치밀하고 구체적인 계획(기한 설정, 통행증, 건축 자재 요구)을 왕에게 요구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인간의 책임 또한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 해주시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하여야 한다. 성벽 재건이 시작되자 산발랏과 도비야 등 대적들의 조롱과 방해가 시작된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인간적인 변명이나 두려움 대신에 하늘의 하나님이 도와 주심을 선포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성벽재건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느헤미야 서의 단순한 오해가 있다. 그것은 느헤미야의 리더십이나 성공적인 건축 프로젝트에 관한 책이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재건이 된다. 즉 구속사의 중요한 장면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에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분도, 수많은 대적들의 위협과 방해 속에서도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완성하게 하신 것이다. 성벽은 단순이 군사적 방어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상과 언약의 백성을 구별하는 거룩한 경계선이자 보호막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거룩성을 유지해야 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무너진 성벽과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사역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고 무너진 우리 영혼을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자신은 페르시아 궁권에서 안락한 고위직(술 맡은 관원)을 누리고 있지만, 동족의 고난과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된 예루살렘의 현실 때문에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였다. 그는 공동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속적 연대를 하며 죄에 대하여 애통해 한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사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느 1:6) 이것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으셨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막연하게 도와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주셨던 신 30장의 하나님의 약속을 정확히 기억하고 붙잡았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쫒긴...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은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 13:8) #말씀의능력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은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 13:8) 안디옥 교회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선교사를 세우고 보내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교회의 사역과 선교는 인간의 기획이나 얄팍한 열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철저히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부르심에 엎드려 순종하는 수동적인 믿음의 자세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르보 섬에 도착하여 바보라는 곳이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난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행 13:6) 거짓 선지자 엘루마(바예수)가 총독 서기오는 믿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대적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마귀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고 굽게 만드는 영적 맹인의 상태이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0) 하지만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엘루마의 눈을 멀게 하자, 총독이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총독이 기적 자체에 놀란 것이 아니라, 주의 가르치심(말씀)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행 13:12) 이는 세상의 권력과 사탄의 방해물이 아무리 거세도,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그 안에서 택하신 자를 기어이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오직 말씀을 통해 반드시 승리한다. 엘루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영적인 무덤에 계속 가두어 두려 했다. 그러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사도 바울을 통해 나타났을 때, 거짓의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부활의첫열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부활절 새벽,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나신 주님의 승리를 찬양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와 새 창조의 관점에서 부활의 기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개인의 소생이 아니다. 그는 ‘먼저 나신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시간적 순서와 통치권을 의미한다.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죽었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머리가 되셔서 잠자던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개혁주의 구원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 한정하지 않는다. 부활로 인해 저주 받았던 피조물들이 우주적 질서의 회복을 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심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머리가 살아났으니 몸인 우리들도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 이제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시고자 하신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 즉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고 함은 내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으뜸 되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주님은 단순히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끄집어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영원히 이주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법 아래에 살지 않고, 부활하신 생명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에 우리들의 두려움과 근심을 무덤에 남겨두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십자가죽음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의를 만족시키며, 성령님께서 은혜를 적용시키므로 죄인들에게 임하였다.  이것을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중심성이라 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바울이 전하고 있는 구원은 지적 동의를 넘어 성령의 조명에 의한 인격적인 변화임을 강조한다. 즉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통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은 자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은혜가 전적 타락한 죄인들에게 강권적으로 나타났다. 그 강권적인 은혜로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것이다. 오직 그의 아들의 피, 즉 구속 곧 죄 사함이 있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며, 보존자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신다. 단지 개인의 구원을 넘어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우주적 화해의 사건이다.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이다. 이 날을 통하여 우리가 과거에 죄의 노예였고,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 흑암의 권세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깨뜨리셨다. 그리고 ‘다 이루셨다’는 말씀은 우리를 흑암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기 위한 모든 법적, 영적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 죽으신 날로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그 구속의 은혜로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그 다음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함이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 한다...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스 10:5) #말씀재건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스 10:5) 회개의 기도는 참된 회개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즉 실제적인 삶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회개를 통하여 거룩한 공동체를 보존하여 하기 때문이다. 지, 정, 의가 함께 작동이 되어야 한다. 지-죄의 깨달음, 정-예스라의 눈물, 의-단호한 결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감정적 후회를 넘어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를 참된 것으로 본다. 그래야 공동체의 거룩함을 해치는 죄에 대해 엄격하게 하는 것이 표지이기 때문이다. 에스라에 성전 앞에서 울며 기도할 때에, ‘스가냐‘라는 인물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방 아내들을 내보기로 언약을 세웠다.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 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스 10:2) 에스라는 금식하며 근심하는 가운데 유다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소집을 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이방 여인과 결혼 자들의 실태를 파악한다. 여기서 이방 여인이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여인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방 여인과 결혼했던 자들의 명단이 나온다. 여기에는 제사장, 레위인, 일반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름을 공개한 것은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수치를 무릎쓰고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방 아내를 내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결단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자기의 생각을 부인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 하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가족 관계가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보다 앞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스 9: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스 9:14)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돌아온 기쁨을 잠시 누렸지만, 예루살렘의 영적 타락상을 보고 처절한 회개와 중보기도를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다. 그래서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 여인과 통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언약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음을 말하는 것으로 영적 간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것이다.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보고하기를, 유다 백성과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이 이방 민족들과 섞여 살며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방백들과 우두머리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스 9:3)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분이다.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이 에스라 곁으로 모여 듬으로 인하여 회개의 불씨가 된다. 그는 낯이 뜨거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여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한다. 에스라는 자기의 죄가 아님에도 옷을 찢으며 회개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서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고후 5:21) 그의 기도는 우리는 범죄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서지 못하겠다 하며 철저한 항복의 기도를 드린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스 9: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방 여인과 통혼을 금한 목적은 거룩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