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응답된 입술의 간구와 영원한 승리의 관을 쓰신 만왕의 왕(시 2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셀라)”(시 21:2) 시편 21편은 20편에서 백성들이 간구하였던 기도가 마침내 완전히 응답되었음을 선포한다. 역사적으로는 다윗 왕의 승리를 찬양하지만, 긍극적으로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사 영원한 영광의 관을 쓰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승리를 찬양하는 것이다. 왕이 여호와의 힘과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나아가시며 품으셨던 유일한 소원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조롱과 가시관을 쓰셨던 주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화와 존귀의 영원한 면류관을 쓰시고 만유의 주가 되셨다.  왕이 생명을 구하며 하나님이 영원무궁한 장수를 주셨다. 그런데 인간 다윗은 죽어 무덤에 묻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시고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는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가 된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성취시킨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메시아의 승리는 자신의 군사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불변하시는 언약적 사랑(헤세드)에 대한 적적인 신뢰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무덤 속에 계실 때에도 아버지의 신실하신 언약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인하여 부활하시고 영원한 왕국을 세우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꺾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재림의 날에 복음에 불순종하고 끝까지 대적하는 원수들을 향해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신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예수 ...

병거와 말을 꺾으신 십자가의 승리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시 20:7)

  병거와 말을 꺾으신 십자가의 승리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시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시편 20편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왕을 위해 백성과 제사장이 성소에서 함께 드리는 시이다. 즉 출전 전의 왕을 위한 기도시라는 것이다.  이 시는 궁극적으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죄와 사망의 세력을 멸하기 위해 영적 전쟁터인 골고다 언덕으로 나아가시는 참된 기름 부음 받은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백성들은 전쟁이라는 환난 날에 직면한 왕을 향해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주시기를 원하노라”하며 축복을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환난 날’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이었다.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겟세마네의 눈물의 기도와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흠 없이 온전한 영원한 번제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예수님의 유일한 마음의 소원과 영원한 계획은 택하신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해 내시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아버지의 구속 계획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 구원을 받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찬양하며 믿음의 승전 깃발을 높이 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 손의 권능으로 사흘만에 살리사 하늘 보좌 우편에 높이 올리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부활은 아들의 순종에 대한 아버지의 공식적인 구원 응답...

의로운 해로 떠오르신 말씀과 영원한 구속자 그리스도(시 19:14)

  의로운 해로 떠오르신 말씀과 영원한 구속자 그리스도(시 19:14)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시편 19편은 우주 만물에 깃들인 일반계시에서 시작하여 영혼을 소생시키는 기록된 말씀인 특별계시를 거쳐, 구속주를 향한 참회와 신앙고백으로 나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 소리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한다. 하나님이 태양을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으며,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용사와 같다고 한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펴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즉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은 자기 신부(교회)를 맞이하러 오시는 참된 신랑이자 어둠을 물리치는 의로운 해(의의 태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2)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지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율법의 참된 마침이자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니라”(롬 10:4) 친히 살아 숨 쉬는 말씀(로고스)이 되사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죄로 죽었던 우리 영혼을 진정으로 소생시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다윗은 스스로 죄를 깨달을 수 없고, 스스로 용서의 자리에 이를 수 없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죄로 타락한 인간의 전적 무능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빛이 강하게 비출수록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뿐이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

사망의 결박을 찢으신 부르짖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구원의 승전가(시 18:3)

  사망의 결박을 찢으신 부르짖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구원의 승전가(시 18: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 18:3) 시편 18편은 장엄한 구원과 승리의 승전가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신 날에 부른 노래로 기록되어 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은 여호와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 믿음의 고백에는 긍휼과 애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여호와를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산성으로 찬양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만을 힘과 피난처로 삼아 순종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도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다윗이 사망의 줄이 두르고 불의의 창수가 덮치며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가 엄습할 때에 여호와께 아뢰고 성전에 들리게 하였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인류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사망 앞에 있을 때에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셨다. 주님의 부르짖음은 하늘의 참 성전에 상달되었다.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노로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드리워지며, 빽빽한 구름과 흑암, 번개와 우박 가운데 하나님이 강림하신다. 즉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다윗을 건져내시고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지진이 일어나며 바위가 터졌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마 27:51-52) 그리고 사흘 만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권...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처세술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복음의 사명(행 24:22)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처세술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복음의 사명(행 24: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행 24:22) 자신의 출세와 탐욕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준 자가 있다. 그 이름은 본디오 빌라도이다. 그는 체세술의 달인이었다. 통상 총독의 임기가 4~5년인데 10년이나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큰 죄는 두려움의 대상을 잘못 선택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백성과 폭동과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염려해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넘겼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빌라도의 종말은 사마리아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기병과 보병 부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 학살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결국에는 자살로 죽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존재는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변덕스러운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다. 며칠 전에는 겉옷을 펴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졌던 무리가 순식간에 ‘예수를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소리쳤다.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마 27:21) 사명자의 기준은 어떤 것인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택하여야 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러므로 강단에서 전하여야 할 복음은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진노와 두려운 심판을 가감 없이 선포하여야 한다.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

벨릭스의 탐욕과 어떠한 처지에도 변치 않는 복음의 증인(행 24:10)

  벨릭스의 탐욕과 어떠한 처지에도 변치 않는 복음의 증인(행 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행 24:10) 바울은 로마 군대 보호 하에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에 도착을 하였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한다. 즉 일을 방해하는 자들은 끝까지 따라 다니며, 거짓 증인을 세워 악행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바뀌었고, 총독이 바뀌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변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이 있다. 자신의 유익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이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총독 벨릭스가 그러하다. 특히 이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무서워하고 돈을 좋아 했던 것이다.  바울이 고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때문이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는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자이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행 24:22) 부활에 대해서 자세히 잘 알고 있는데 재판을 미루고 천부장 루시아에게 미루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총독은 돈을 좋아하여 혹시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 24:26) 뇌물과 돈을 좋아하는 자가 벨릭스이다. 돈을 좋아하기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

경건의 참된 이익과 만왕의 왕을 바라보는 거룩한 청지기직(딤전 6:1)

  경건의 참된 이익과 만왕의 왕을 바라보는 거룩한 청지기직(딤전 6: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 6: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마무리 하면서 경건을 세속적 번영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배교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자족과 청지기직을 대조시킨다. 먼저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에게 상전을 공경할 것을 명한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적 불의나 노예제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다.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내적 자유을 얻은 자들은, 믿는 상전을 섬길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사랑을 받는 자로 대함으로써, 지상 사회의 계급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연합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바른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떠나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물질적 번영, 사회적 성공, 자기 확장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가장 치명적인 배교이다. 개혁주의 물질관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종말론적 무소유 의식이다. 즉 생명과 호흡, 모든 일용할 양식은 창조주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의 산물임을 믿는다. 그래서 참된 경건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자족하는 자족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왜 그런가 하면.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탐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뢰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하나님 대신 맘몬을 궁극적 안전과 위로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영혼은 근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