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느 13: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느 13:29) 느 13장은 느헤미야가 바사 왕국으로 잠시 돌아간 사이,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깨뜨리고 과거로 희귀해 버린다.  느헤미야의 영광스러운 부흥과 눈물의 헌신은 충격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함으로 인하여 약속하고 맹세한 것을 지킬 수 없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성벽 재건을 악랄하게 방해했던 대적 도비야에게 십일조와 제물을 두는 성전의 큰 방을 내어주는 영적 간음을 저지른다.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느 13:4)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크게 분노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모두 밖으로 던져버리고 방을 정결하게 한다.  아무리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다고 했을지라도 지도자의 영적 분별력이 흐려지면 성전 중심부까지 사탄의 세력이 침투한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한 번 은혜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회개와 순종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아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밭으로 도망쳤고, 이로 인해 예배가 무너진 것이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느 13:10) 설상가상으로 백성들은 인식일에도 포도주를 짜고 장사를 하며 세상의 경제 논리에 매몰되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인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날에 내가 경계하였고”(느 13:15) 그러자 느헤미야는 성문을 닫아걸고 상인들을 엄히 꾸짖어 안식을 사수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그래서 또 다시 ...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우리 목사님이 교회를 섬기는 ‘참된 목회자‘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자‘인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죄사함이 필요하다. 왜 그런가 하면 죄있는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즉시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들의 죄를 속량하여 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중보자 되시며, 대제사장이 되신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면 설교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림을 주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주님 앞으로 나가게 하여야 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27) 회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빚어내는 전인격적인 재창조의 과정이다. 마음으로 돌이키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거룩한 자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참된 목사의 설교에는 말씀의 찔림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고, 돌이킴의 지혜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영적 중매쟁이가 되어서 성도들에게 영원한 신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을 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지라”(행 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지라”(행 14:8) 사도들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다. 그 기적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한다. 본문의 말씀은 사도들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였을 때에,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과 제자들이 취하여야 할 올바를 태도를 전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지금도 예수님의 권능으로 기적이 일어나면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따라는 자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걷지 못하는 자가 걷게 되자 주변 사람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 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외치고 있다. 즉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찬양을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사도들 앞에서 소를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 이것은 타락한 인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려는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 소리를 친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15)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영광을 철저히 거부하고, 군중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로 돌렸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 14:18)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어떠한 믿음과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설교자는 영적 중매쟁이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존재임으로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의 본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의나 금욕주의적 고행으로 거룩해 질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23)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함으로 인하여 율법의 정욕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새 생명력으로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땅의 습관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제는 땅에 습관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함을 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삶 전체를 통치하는 영역 주권을 중시한다. 그래서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입술에는 구원에 대한 찬양이, 모든 행위에는 주 예수의 이름이라는 권위를 드러낸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마음에 중심을 강조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외식적인 정결 예법을 주장하였다. 즉 겉모양을 다스리는 규율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속사람이 변화되는 본질을 추구하셨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늘의 통치를 바라보게 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가 되어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뉘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느 12: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뉘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느 12:31) 느 12장에서는 포로 귀환자들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명단이 있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거행하는 가슴 벅찬 축제의 현장이다. 두 무리의 찬양대가 성벽 위를 행진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장엄한 예배가 드려진다. 봉헌식은 넘치는 기쁨이었다.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였음이라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 즉 봉헌식은 인간의 성취를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신 하나님을 최고로 즐거워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참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영광을 알고 감사하며 기쁘게 드리는 것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 대적한 자들이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고 조롱하였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3) 그 조롱 위에 하나님의 승리를 온 천하에 선포한다. 즉 성벽 위를 두 무리의 찬양대가 한 곳으로 행하는데 그 뒤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따르고 있다. 이는 제사장(에스라)의 말씀과 느헤미야가 뒤를 따르는 것으로 영적, 육적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통일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성벽은 훗날 다시 무너졌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을 보여 준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10)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성벽이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성벽은 완성되었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폐허의 흔적이 남아있고 대적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위험하고 불편한 곳이었다. 즉 백성들은 인프라가 잘 갖춰진 외곽에 자신의 집에서 살기를 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솔선수범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 1/10을 거룩한 성에 거주하게 한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과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넓고 안전한 곳을 택한다. 그러다 보니 페르시아에 주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언약의 백성들은 좁고 험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머무는 거룩한 성(교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다.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은 억지로 하거나 율법주의가 아니다.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예수님도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뒤로 하시고, 폐허와 같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우리들에게 부탁하시기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래서 자발적인 헌신과 제비 뽑기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단은 오늘날 교회에 택함을 받거나 자발적인 헌신과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각 교회마다 교회 연혁이 있다. 즉 교회를 위하여 헌신과 희생으로 역사를 이룬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함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설립 날짜가 있고, 담임 목사...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느 10:28)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느 10:28) 진정한 회개는 통곡하며 감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약속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굳은 언약을 세우고 문서에 도장을 찍는다.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느 10:1) 그들이 서약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이러하다. 이방인들과 통혼을 금지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의 성전을 버려두지 않기 위해 십일조 및 첫 열매를 드리겠다고 다짐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율법폐기론자가 아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은 수단이 아님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그러므로 본 장에서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구원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자 거룩한 삶을 위하여 다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며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죽 사랑은 순종을 통하여 증명이 되어야 한다.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면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백성들이 통곡하며 회개하고 다짐을 하였지만 다시 우상숭배와 범죄의 자리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맺은 언약을 깨질 수 밖에 없고 새 약속이 필요하다. 새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