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아디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아디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루디아가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따르게 된 것은 바울이 설교를 잘 해서가 아니라, 주의 성령이 그녀의 마음을 열어 열매를 맺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의 복음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며, 유효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유효적인 부르심의 열매는 즉각적인 행실인데 동역과 섬김으로 나타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와 같은 열매가 없다면 일시적 부름을 받은 자가 된다. 즉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늘 나라는, 땅에 심겨진 작은 겨자씨와 가루 속에 스며드는 누룩과 같다고 하셨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 빌립보 강가에서 이름 없는 여인 한 사람의 마음이 열린 사건은 세상이 보기엔 미미하였다. 그러나 이 작은 겨자씨가 자라 유럽을 뒤덮는 거목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택하신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정리를 하면,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마음을 열어주심)이나, 그 구원의 완성은 성도의 거룩한 열매(사랑의 순종)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나를 선택해 주신 사랑에 감격하여 자원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에 참석하여 찬양하며 기도...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 하시는지라”(행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 하시는지라”(행 16:7) 바울과 디모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힌다. 바울 일행은 원래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성령이 막으셨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 하시는지라”(행 16:7)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 빌립보로 오게 되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 16:9)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두아디라 출신 옷감 장사 루디아가 있었다. 바울 일행이 루디아를 만난 것은 준비된 만남인 것이다. 빌립보 강가에 있던 루디아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주의 성령이 그녀의 마음을 열게 하였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구원의 결정적 순간에 주어는 루디아가 아니라, ‘주께서‘이다. 즉 주님이 성령으로 하여금 그녀의 닫힌 마음에 찾아오셔서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복음이 믿어진 것이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며 유효적 부르심이다. 유효적 부름을 받은 자는 즉시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에게, 나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며 강권한다. 즉 구원받은 증거가 즉각적인 선한 행실로서 동역과 섬김으로 나타난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 16:15) 개혁주의 구원의 교리가 뿌리(하나님의 주권)를 견고히 해 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구원을 받은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제자도)를 가르쳐 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삶의 변화가 없다면 ...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장과 그들의 참된 신앙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특히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를 강조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무조건적인 선택 그리고 유효한 부르심으로 된 것이라 한다.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나 예견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창세 전에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된 것이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이란, 단순이 귀로 듣는 외적 부르심을 넘어,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사 복음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드시는 것이다.  즉 복음이 힘을 발휘한 이유는 바울의 웅변술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과 확신 때문이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만,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고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온 회개,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닌 행동하는 믿음의 역사,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는 필연적인 반응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하는 것인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교회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열매가 맺힌 것은 그들이 예수님이라는 좋은 나무에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즉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욥의 고난과 의로움은 단순히 인내의 모범을 넘어 장차 오실 참된 의인이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하게 예표하고 있음을 말한다. 흠 없고 온전한 의인의 고난이 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은 당대에 온전하고 정직한 자였으나, 인간이기에 완전한 무죄자는 아니다. 그의 의로움은 조건적이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까닭 없이, 조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참된 의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욥의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 경륜 속에서 허락된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 역시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고발)하는 자로 등장한다. 인간의 믿음을 가치 없는 것으로 깎아내리며, 소유물과 환경을 흔들면 하나님을 배반을 할 것이라 장담한다. 이와 같은 시험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동일한 방식을 썼다. 떡과 명예, 권력을 미끼로 하나님을 배반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탄의 모든 참소 권세는 영원히 박살났다. 욥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자녀들을 위한 중보자, 즉 제사장적 사역이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욥 1:5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

“왕의 능력 있는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에 10:2)

  “왕의 능력 있는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에 10:2) 하나님의 손이 붙들려 참된 지도자로 우뚝 산 모르드개의 영광과 그가 가져온 평화로 에스더서는 끝이 난다. 성문 앞에 주저앉아 하만에게 죽임당할 위기에 처했던 포로 출신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제국의 2인자(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권세를 누린다.  이것은 인간의 야망이 이룬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낮은 자를 높이시고 당신의 사람을 신실하게 세우시는 은혜이다. 이 사건이 페르시아 왕국에 왕들의 일기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이다. “왕의 능력 있는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에 10:2) 모르드개가 얻은 승리의 성취는 개인의 권세와 압제와 군림이 아닌,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평화)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대행자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될 때 나타나는 공의와 평화의 성격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 후 지극히 높아지셔서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는 사역을 완벽하게 예표한다. 모르드개는 민족의 위기 앞에 베옷을 입고 가장 먼저 낮아져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 섬기는 자를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셨다. 인간이 주는 평화는 일시적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인 것이다. 그의 통치 아래에 있을 때만 우리는 죄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모르드개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왕의 목숨을 구했고, 민족의 위기 앞에 묵묵히 헌신했다. 그의 수고와 헌신은 영광이 된 것처럼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성도가 받게 될 칭찬과 상급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왕들은 술에 취해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 ...

“아달 월 십삼 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 일에 쉬며 그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에 9:17)

  “아달 월 십삼 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 일에 쉬며 그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에 9:17)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려 했던 아달월 13일이 다가와 도리어 유다인들이 대적들을 제어하고 승리를 거두는 대역전의 승리를 한다. 이 기쁜 날을 대대로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제정한다. 이와 같은 역사와 은혜는 하나님의 언약적 보응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즉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가 역사 속에 가시화된 사건이다. 그 당시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전리품을 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으나, 유다인들은 이 싸움이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임을 인식했다. “아달 월 십사 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에 9:15) 부림절은 부르(제비)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악인이 제비를 뽑아(에 3:7) 인간의 운명을 정하려 했으나 하나님이 그 제비를 바꾸어 구원을 주셨음을 대대로 기억하는 절기이다. 대적들이 유다인을 치려 했던 바로 그날에 오히려 유다인이 대적을 치게 되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임으로 교회를 진멸하려 했으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 십자가로 사망 권세를 잡은 자 사탄을 멸하셨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유다인들이 승리 후에도 탈취물에 손을 대지 않은 태도는 이 땅의 소유보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데 있다. 성도들의 진짜 승리는 원수를 이기는 것을 넘어, 내 안의 탐욕과 세속적 본성을 이겨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날을 매년 부림절을 지키며, 서로 예물을 보내고 가난한 자를 구제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구원의 날을 기억하도록 성찬을 주셨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와 성찬은 영적 부림절의 성취이며...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라 하니라”(에 8:8)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라 하니라”(에 8:8) 하만의 죽음 이후 유다 민족에게 닥친 위기가 완전히 반전된다. 하만의 재산은 에스더에게 넘어가고 모르드개가 반지를 위임받아 유다 민족이 스스로 방어하고 대적을 멸할 수 있는 새로운 조서가 전국에 반포된다. 악인 하나님의 집과 권세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넘어 간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주권과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며, 결국에는 주님의 교회의 유업으로 회복될 것을 말한다. 아하수에로 왕의 첫 번째 조서(유다인을 죽이라는 하만의 조서)는 취소될 수 없는 페르시아의 법이었다.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라 하니라”(에 8:8) 그래서 두번 째 조서를 내리게 된다. 그 조서에는 유다인들이 대적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새로은 것이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 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에 8:11) 즉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도록 선포한 날에 오히려 대적 자들이 진멸을 당한다. 이 일로 유다인들은 기뻐하였고 이방인 가운데 두려워 하여 유다인이 되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율법의 요구를 폐하지 않으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새 법을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지혜를 예표한다. 에스더 8장에서 선포된 기쁜 소식과 역전의 법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깊이 맞닿아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폐르시아 왕이 법을 어길 수 없어 첫 조서를 그대로 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