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도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 신약성경 중 주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그리고 소위 ‘휴거’라고 불리는 종말론적 사건을 가장 명확하게 계시해 주는 본문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먼저 죽은 성도들(잠자는 자들)이 어떻게 될지 몰라 깊은 슬픔과 두려움에 잠겨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결코 소외되지 않으며, 오히려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것을 선포합니다. 1.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단번의 승리와 우주적 재림의 확실성을 중심에 둡니다. 그 이유는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도의 영적 연합’이 우리 신앙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몸 된 성도의 부활 역시 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잠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의 날에, 먼저 떠난 성도들의 영혼과 육신은 온전히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2. 비밀스러운 도피가 아닌, 영광스럽고 공개적인 환영식 일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주님이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오셔서 믿는 자들만 쏙 빼 가신다는 이른바 ‘비밀 휴거’를 주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주님의 재림은 결코 은밀한 사건이 아닙니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온 우주가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이고 공개적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끌어 올려(휴거)’라는 말의 본질은 고대 사회의 문화적 배경에서 잘 드러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이 도성에 입성할 때, 시민들은 성문 밖 광장(공중)까지 나아가 왕을 열렬히 영접...

절망의 심연에서 찾은 영원한 보증, 예수 그리스도(욥기 17:3)

  절망의 심연에서 찾은 영원한 보증, 예수 그리스도(욥기 17: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욥기 17:3) 1. 조롱의 심연 속에서 터져 나온 절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욥이 쏟아내는 마지막 비장한 탄식의 기도입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도리어 죄인이라 조롱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의 비웃음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자신을 향한 적대감과 차가운 시선뿐인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철저한 조롱의 현장을 예표합니다. 좌우의 강도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습니다. 그 조롱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라”며 끊임없이 충동질하던 영적인 공격이었습니다(마 27:39-44). 욥이 겪은 외로움과 고통은 곧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의 그림자였습니다. 2. 인간의 무력함과 법정적 보증의 요청 욥은 이 깊은 어둠의 심연 속에서 낙심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법정적 언어를 사용하여 부르짖습니다.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이는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죗값을 치러야 하는 무력한 자신을 대신하여, 기꺼이 담보를 서줄 ‘보증인’을 지정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나의 손을 잡고 내 대속자가 되어줄 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라는 욥의 절규는, 인간 중에는 그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한 보증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자가 던지는 영적인 고백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내놓을 담보물이 전혀 없는 파산 상태의 존재들입니다. 욥이 죽음의 문턱에서 피를 토하듯 찾았던 그 담보물과 보증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7:22) 3. 십자가, 최고의 보증 사건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흠 없는 몸과 생명을...

찢긴 마음을 안고, 하늘의 위로자를 바라보라(욥기 16:11)

  찢긴 마음을 안고, 하늘의 위로자를 바라보라(욥기 16: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욥기 16:11) 인생의 깊은 수렁 속에서 욥은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을 향해 환멸 섞인 탄식을 뱉어냅니다.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구나.” 위로하겠노라 찾아온 친구들이었지만, 그들이 내뱉은 인간적인 신학과 철학, 그리고 율법주의적인 충고는 고난 당하는 욥의 영혼을 만져주기는커녕 오히려 날카로운 정죄의 덫이 되어 그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악인의 손에 던지셨으며, 자신을 과녁 삼아 사방에서 사정없이 화살을 쏘아 온몸과 장기를 꿰뚫고 찢으셨다고 통곡합니다. 대적들의 조롱 속에서 온몸이 찢기는 이 처절한 비참함은, 역설적이게도 수천 년 뒤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예표하고 있습니다. 1. 나를 위해 악인의 손에 넘겨지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 즉 악인의 손에 넘겨지셨습니다(마 20:19). 군병들은 주님의 옷을 찢고, 채찍으로 온몸을 부수었으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옆구리를 창으로 꿰뚫으셨습니다. 욥이 고백했던 그 처절한 찢김을, 우리 주님은 친히 온몸으로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대가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고난으로 우리의 삶이 찢길 때, 우리는 나를 위해 먼저 찢기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2. 사람의 위로가 아닌, '또 다른 보혜사'를 구하라 인간의 얄팍한 위로는 결코 영혼의 심연에 있는 슬픔을 치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마치고 떠나시며 낙심한 제자들을 향해 우리 영혼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곁에서 지켜줄 ‘다른 위로자’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참된 위로자, 곧 성령 하나님(보혜사)이 선...

죄의 고발자 앞에 선 영원한 변호자(욥기 15:5)

  죄의 고발자 앞에 선 영원한 변호자(욥기 15: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욥기 15:5) 1.거칠어진 세상의 입술, 위로자가 아닌 고발자가 된 친구 욥을 향한 친구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전보다 훨씬 거칠고 잔인해졌습니다. 자신의 조언과 충고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욥을 아예 무식한 자이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으로 단정 지어 버립니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욥 15:4) 엘리바스는 욥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쏟아낸 정직한 탄식들을 꼬투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듯 “네 입술이 스스로 죄인임을 증언하고 있다”며 모질게 정죄합니다. 위로자로 찾아온 친구가 오히려 사탄의 역할을 대행하며 고발자가 되어버린 이 비극적인 장면은, 사실 죄인인 우리들이 공의의 법정에서 당해야 할 마땅한 처지였습니다. 2.사탄의 참소와 우리의 영원한 대언자(변호사) 사탄은 밤낮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죄의 고백들을 붙잡아 우리를 고발합니다. 살아가면서 큰 실수를 하거나 영적 침체에 빠질 때, 사탄은 엘리바스처럼 우리 마음속에 찾아와 사정없이 속삭입니다. “네가 그러고도 성도냐? 네 꼴을 보아라.”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처절한 정죄의 자리에 우리의 영원한 변호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그리스도 예수라” (요한일서 2:1) 세상의 엘리바스들은 내 입술의 허물을 잡아 정죄하지만, 예수님은 친히 입을 열어 이렇게 변호해 주십니다. “내가 이 사람의 죄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렸나니, 이 사람은 무죄이다!” 3.우리가 받을 ‘악인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이어지는 변론에서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의 종말을 풍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악인은 결코 흑암을 벗어나지 못하고, 불꽃에 그 가지가 마르며, 열매가 익기도 전...

인생의 유한함과 십자가의 영원한 피난처(욥 14:1)

  인생의 유한함과 십자가의 영원한 피난처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욥 14:1) 1. 여인에게서 난 인생의 탄식과 유한성 욥은 지금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 앞에서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인간의 날은 지극히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꽃처럼 피었다가 시들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 14:2) 이 탄식은 비단 욥 개인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죄와 사망의 법 아래 갇혀 신음하는 모든 인류가 겪고 있는 본질적인 고통이자 실존입니다. 2. 여인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의 소망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절망적인 탄식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욥이 탄식한 대로, 여인에게서 난 연약한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 4:4)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꽃처럼 시들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실패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3. 잘린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새 생명의 실체 욥은 인간의 죽음이 차라리 나무보다 못하다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나무는 비록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않지만,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대로 소멸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욥 14:7)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구원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행 17:31)

  구원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1) 1. 전도와 구원의 절대적 주권자, 성령 하나님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그 짧은 순간, 인간의 유창한 웅변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셔야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인간의 백 마디 말은 사람의 감정을 잠시 움직일 뿐, 영혼을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믿음은 인간의 지혜나 자유의지의 결단으로 얻어낸 결과물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의 기원에 대해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3)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도 이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이처럼 구원은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2. 성령이 내재하는 자들의 영광스러운 특징 성령의 유효적 부르심을 입어 거듭난 성도, 곧 성령이 내재하시는 자들에게는 감출 수 없는 명확한 복음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을 주라 시인합니다 (고전 12:3). 내 안의 성령께서 구원의 확신을 주시므로,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예수를 나의 유일한 주인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둘째,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집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 역시 마지막 날에 반드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롬 8:11). 셋째,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라고 ...

철학의 한계와 십자가의 유일성(행 17:23)

  철학의 한계와 십자가의 유일성(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3) 1. 아덴의 지혜, 인간 철학의 한계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철학의 중심지였던 아덴의 아레오바고 광장에 섰습니다. 그곳에는 쾌락주의를 표방하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금욕적 이성을 숭배하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적 가능성과 학문적 탁월함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인간의 지성과 합리성으로 신의 영역을 이해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한 종교인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고발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이성과 세상의 얄팍한 지혜로는 결코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이 세워놓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은, 결국 인간 지성의 한계와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비극적인 증거물에 불과했습니다. 2. 설득의 실패, 선포의 유일성 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뼈아픈 실책을 범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시인의 글을 인용하고, 인간의 철학적 논증과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복음을 변증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인류 최고의 지성들을 설득하려 했던 그 세련된 설교 속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못 박히신 사건’은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성에 호소한 전도의 결과는 초라했습니다. 성경은 아덴에서의 결실을 향해 그저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었다”라고 쓸쓸하게 기록합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행 17:34) 바울은 이 아덴의 실패를 통해 뼈저린 영적 레슨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