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 월 십삼 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 일에 쉬며 그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에 9:17)

  “아달 월 십삼 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 일에 쉬며 그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에 9:17)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려 했던 아달월 13일이 다가와 도리어 유다인들이 대적들을 제어하고 승리를 거두는 대역전의 승리를 한다. 이 기쁜 날을 대대로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제정한다. 이와 같은 역사와 은혜는 하나님의 언약적 보응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즉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가 역사 속에 가시화된 사건이다. 그 당시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전리품을 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으나, 유다인들은 이 싸움이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임을 인식했다. “아달 월 십사 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에 9:15) 부림절은 부르(제비)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악인이 제비를 뽑아(에 3:7) 인간의 운명을 정하려 했으나 하나님이 그 제비를 바꾸어 구원을 주셨음을 대대로 기억하는 절기이다. 대적들이 유다인을 치려 했던 바로 그날에 오히려 유다인이 대적을 치게 되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임으로 교회를 진멸하려 했으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 십자가로 사망 권세를 잡은 자 사탄을 멸하셨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유다인들이 승리 후에도 탈취물에 손을 대지 않은 태도는 이 땅의 소유보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데 있다. 성도들의 진짜 승리는 원수를 이기는 것을 넘어, 내 안의 탐욕과 세속적 본성을 이겨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날을 매년 부림절을 지키며, 서로 예물을 보내고 가난한 자를 구제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구원의 날을 기억하도록 성찬을 주셨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와 성찬은 영적 부림절의 성취이며...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라 하니라”(에 8:8)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라 하니라”(에 8:8) 하만의 죽음 이후 유다 민족에게 닥친 위기가 완전히 반전된다. 하만의 재산은 에스더에게 넘어가고 모르드개가 반지를 위임받아 유다 민족이 스스로 방어하고 대적을 멸할 수 있는 새로운 조서가 전국에 반포된다. 악인 하나님의 집과 권세가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넘어 간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주권과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며, 결국에는 주님의 교회의 유업으로 회복될 것을 말한다. 아하수에로 왕의 첫 번째 조서(유다인을 죽이라는 하만의 조서)는 취소될 수 없는 페르시아의 법이었다.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라 하니라”(에 8:8) 그래서 두번 째 조서를 내리게 된다. 그 조서에는 유다인들이 대적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새로은 것이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 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에 8:11) 즉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도록 선포한 날에 오히려 대적 자들이 진멸을 당한다. 이 일로 유다인들은 기뻐하였고 이방인 가운데 두려워 하여 유다인이 되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율법의 요구를 폐하지 않으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의 새 법을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지혜를 예표한다. 에스더 8장에서 선포된 기쁜 소식과 역전의 법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깊이 맞닿아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폐르시아 왕이 법을 어길 수 없어 첫 조서를 그대로 둔...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 16:3)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한다. 그래서 십자가 사랑의 특성을 앎으로 인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바울은 고기를 먹는 문제로 인하여 내 형제를 실족시킨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식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전도는 단순한 방법론이나 기술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내면에 본질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들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통해 이웃에게 다가가야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편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지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들고 전도에 임하면 금지할 법이 없는 강력한 그리스도인의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본적인 덕목과 타인과의 덕목들,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먹목들이다. 먼저 개인적인 기본적인 덕목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익한다. 희락(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 할 수 없는 영관스러운 즐거음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화평(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누리는 평강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즉 하나님을 깊이 앎으로 인해 우리 내면에 자리 잡는 절대적인 평안인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의 먹목으...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행 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행 16:1)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데리고 간다. 디모데의 가족 배경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외조모와 어머니는 유대인으로서 일찍부터 기독교 배경 안에서 성장하나 청년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건이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 16:3) 즉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공회에서 결정한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1) 그것은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얻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할례를 행하느냐 마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조건도 아닌 할례를, 율법의 멍에를 벗어던지라고 강도했던 바울이 왜 굳이 디모데에게 행하게 한 것일까? 즉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라 한다. 달리 말하면 본질적인 것은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상관이 없음을 말한다. 바울은 선교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에게 다가 가기 위한 방법으로 할례를 행하였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0)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2차 전도 여행을 가면서 유대인들에게 다가갈 떄에 만일 디모데가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이 큰 장벽이 될 것을 알았기 떄문이다. 이것은 연약한 자를 품기 위항 바울의 위대한 전도 방법이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 한 지혜로운 것이다...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 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욥 20: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 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욥 20:5) 소발은 욥의 신앙 고백을 듣고 끔찍한 저주를 쏟아낸다. 욥은 나의 대속자가 있으며 부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소발은 감동은커녕 오히려 모욕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욥 20:3) 그러면서 악인의 번영은 일장춘몽이라 하며, 자기 똥처럼 망할 것이며, 꿈처럼 날아가고 환상처럼 살아질 것이라 말한다. “그는 꿈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욥 20:6) 그리고 악인은 악을 혀 밑에 감추어 뱃속에서 변하여 독사의 쓸개가 된다고 경고한다. 또한 하나님은 뱃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하게 할 것이며, 가난한 자를 억압하여 빼앗은 집에서 결코 평안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고 있다. 악인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명렬한 진노의 비를 내리게 하실 것이며,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쓸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악인에게 정하신 분깃이라는 것이다. 소발이 하고 있는 말은 성경이 지지하고 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무죄한 자인 욥에게 억지로 끼워 맞추었다. 하지만 구속의 은혜와 긍휼이 결여된 교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난도질하는 무기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마지막 날에 있다. 그런데 소발은 마지막 때의 심판을 지금으로 끌고 와서 욥을 정죄하는 조급함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재판관처럼 정죄하고 있다. 소발은 악인이 독사의 쓸개를 먹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심판을 당할 것이라 했다. 이것은 율법 앞에 선 우리가 당할 것임을 정확히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고 저주를 당하신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마 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욥은 가족들의 외면과 친구들의 저주와 하나님의 공격 속에서도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다.  빌닷의 잔인한 저주가 있었다. 너는 악인이라서 이름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욥 18:17) 이것에 대해서 욥은 부활 신앙을 언급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욥은 아내와 어린아이들까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의 친구들아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욥 19:21) 그는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이 영원히 기억되기 위하여 바위에 철필로 새겼으면 좋겠다고 한다.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욥 19:24) 이 억울함을 갚아 줄 자가 있다는 것이다. 즉 고엘의 사상을 갖고 있다. 비록 이 땅에 없을지라도 하늘에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설령 죽는다고 할지라도 몸 밖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리라는 고백이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마지막 날에, 즉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억울한 자들을 신원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즉 사망 권세를 가지고 승리자로 설 것을 믿고 있다.  욥은 주변의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변한 것이 없다. 즉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속에서도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라는 믿음이 있다. 그의 이러한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지만 친구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왜야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나를 오해하고 비난하더라도 사람을 붙잡고 해명하지 마십시오. 어리석고 알지 못하...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욥 18: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욥 18:2) 욥의 친구 빌닷의 두 번째 변론이다. 그는 욥이 저항하는 것에 격분하여 점잖은 충고를 버리고 악인의 운명은 파멸뿐이라 하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는 욥의 현재 상태(질병, 자녀의 죽음, 재산 몰수)를 악인의 최후와 빗대어 묘사한다.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욥 18:21) 욥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우긴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욥 18:4) 그는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장막의 빛도 사라져 어두움 속으로 간다는 것이다.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욥 18:5) 악인의 최후를 끔찍하게 표현한다. 사망의 장자가 그의 피부를 먹는다며 노골적인 잔인한 말을 쏟아낸다.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욥 18:13) 악인은 의지하던 장막에서 뽑혀나와 죽음에게 끌려 가고, 그의 자손은 땅에서 끊어지고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저주한다.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욥 18:14) 빌닷의 신학은 잘못된 종말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성경은 의인도 고난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 있을 심판을 지금 적용하며 선과 악의 개념으로 천국과 지옥을 나누고 있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맞지만, 개별적인 질병이 개별적인 죄의 형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랑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성도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