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1-2)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1-2) 본문에서는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구출이 대조되는 부분과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 무능함을 보여 준다. 즉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철저한 무능, 그리고 오직 은혜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생존을 한다. 헤롯의 칼에 야고보는 순교의 제물이 되고, 베드로는 천사를 통해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는다. 그것은 야고보가 기도를 덜 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순교를 통해 교회의 밑거름을 삼으시는 것이고, 베드로를 살려내어 이방 선교의 문을 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땅 끝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열심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성취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베드로는 내일이면 헤롯의 손에 죽어야 한다. 그런데 감옥에서 깊이 잠이 들어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할 정도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적으로 연합된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제는 인간의 전적 무능과 오직 은혜를 볼 수 있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살아서 문을 두드리자, 전하는 자에게 ‘네가 미쳤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우리들의 믿음과 기도는 불완전하고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기도가 완벽해서 감옥 문이 열린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구속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연약하고 의심 많은 자들의 기도 조차도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 여호...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고난도훈련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https://youtu.be/JKo56Vj22Zw?si=fAFx_i0L-MoJHlGN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 위에 세워진 것임으로 인하여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 교회 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복주의와 성공 주의로 오해한다.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자신을 거룩하게 빛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선하신 섭리 안에 있다. 그래서 가난도 부요함도, 하나님이 내게 가장 필요한 훈련의 도구로 주셨음을 인정할 때에 나타나는 절대 평안이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기복 주의와 성공 주의로 이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좋은 대학가고 승진 된다고 믿고 있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입시철이 되면 양복 입은 무당 목사들이 난리를 치고 있음을 봄으로 창피한 일이다. 바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므로 인하여 그의 생명력으로 이 땅의 고난과 결핍을 견뎌내고 통과할 수 있는 신앙 고백이다. 또한 바울은 헌금은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영원한 은혜 언약 안에서, 그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의 영적, 육적 필요를 채우신다는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즉 많이 헌금하면 복을 받는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라는 것이다. 사...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스 4: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스 4:4) 성전 재건이라는 사역 앞에 몰려오는 대적의 방해와 위기가 온다. 즉 영적 전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와 베냐민을 대적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성전 재건에 함께 하고자 한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단호이 거절한다. 이것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되지 말하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신앙의 순결성을 강조함을 말한다.  그러나 성전 건축이 중단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전히 통치를 하신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섭리의 신앙을 보여 주는 것이다. 대적하는 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저들은 ‘우리도 함께 건축하게 하라’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는 호의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흐리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지도자들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스 4:3상) 대적하는 자들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거짓 소문을 퍼트린다. 유다 사람들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반역을 꾀하기 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왕의 조서가 내려와 성전 공사가 중단된다. 다리오 왕 제2년까지 약 16년 동안이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실패처럼 보이고, 백성들은 깊은 낙심에 빠진다. 고난 속에 달콤한 속삭임이 다가온다. 예수님 사십 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마귀는 다가와 유혹을 한다. 내게 절하면 천하 만국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의 저항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성전 재건이 중단되는 동안에, 지도자들이나 백성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그리려 할새”(스 3: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그리려 할새”(스 3:2) https://youtu.be/MWsj84rr3DI?si=R0lgD1Ym0jIDT37q 포로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 예배의 터를 닦고 성전 지대를 놓고 감격해 하면서 찬양을 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예배의 우선순위와 말씀에 따른 규정적 원리를 강조한다. 개인의 것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선포하는 것이다. 즉 예배는 사람이 고안하여 낸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를 드려야 한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그리려 할새”(스 3:2)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렸고, 초막절을 지킴으로써 자신들이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찬양대를 여호와를 일제히 찬양하였다. 솔로몬 성전이 사라지고 선지자도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찬양하였을까? 그것인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찬양한 것이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스 3:11) 즉 폐허된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약속만 있어도 감사하다는 찬양이다. 그래서 늙은이들은 초라함을 보고 눈물을 흐렸고, 젊은이들은 회복의 시작을 보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제단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즉 예배의 중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하는 것이다.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에 백성들이 찬양을 했듯이, 신약의 성도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엡 2:20), 즉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셔서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이 거하실 ...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스 2: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스 2:2) https://youtu.be/j7NhLLlI16M?si=a-o2VwEJZ-BOM_el 성경에서 읽기 힘든 명단의 나열이다. 하지만 개혁주의에서는 단순한 이름의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보존을 보여주는 보석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신다. 이는 창세 전에 작정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오게 하는 성도의 견인이다. 그리고 그들을 성전(교회)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성전의 질서를 따라 제사장, 레위 사람, 느디님 사람등을 직분별로 계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교회의 직분적 책임을 강조한다. 온 회중의 수가 42,360명이고, 남종과 여종의 수가 7,337명이고,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이다. 그래서 귀환자의 총수는 49,897명이다.  이 가운데는 자신들의 종족이나 계보를 입증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구별되었다.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스 2:62) 예루살렘에 정착한 백성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린다. 그리고 무너진 삶의 터전 위에서 예배 중심의 공동체가 재건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본 장에서 기록된 이름들은 세상 권력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들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3) #하나님의신실성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 1:3) 에스라서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로에서 회복시키시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과정을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핵심으로 한다. 즉 인간의 정치적 변화나 바사 왕 고레스의 자비가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계획을 성취해 가시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으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 70년의 기한을 잊지 않으시고 정확한 때에 이루신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대하 36:21) 하나님의 전능적인 섭리는 이방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모습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바사 왕 마음을 감동 시키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온 세상에 조서를 내려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자들이 돌아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감동된 자들, 즉 남은 자들이 일어나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제이의 출애굽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탈취하여 자기 신들의 신전에 두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들이 다시 돌아온다. “그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어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스 1:7) 이것은 단순히 물건의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가 회복될 것임을 상징하는 가시적인 증거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러 가듯이, 신약에서는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8)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8) https://youtu.be/LlKXwQ4dwJM?si=lnZpaPdN79wsYBlr 땅 위에 흉년이 들면 신자나 불신자나 똑같이 고난을 겪는다. 고난을 견디기 위하여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과 빛의 자녀는 다르게 반응을 한다.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은 정욕과 정신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었다. 그곳에 안디옥 교회가 새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즉 고난을 견디기 위하여 술과 정욕을 채우고 맘껏 즐기다가 오늘 죽자는 사상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자들이다. 왜 이러한 소개를 하는 것인가? 세상의 정신과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비교하기 위함이다. 즉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재림과 천국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 반면에 빛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들을 밝히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내 권리를 주장하거나 보복을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 나그네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통과하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 것처럼 따라야 한다. 천국은 도피처가 아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면 신자나 불신자가 똑같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 고난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함이 신자의 책임이다.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붙잡고 견디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점진적으로 성장을 합니다. 고난을 견디는 것으로 만족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