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를 넘어 상한 영혼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욥 26:2)

  정죄를 넘어 상한 영혼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욥 26:2)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욥 26:2) 욥은 친구들이 하는 말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 피조 세계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 뒤에 숨겨진 신비를 웅장하게 찬양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그는 정죄만을 일삼았던 친구들에게 반어법을 사용하여, 너희들이 아는 지식은 영적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 뿐이라 한다.  이것은 바른 교리와 지식을 가졋을지라도 성령의 역사와 사랑이 없으면 상한 영혼을 살릴 수 없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지금도 우주 만물이 질서 가운데 운행되고 있음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말씀으로 지탱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와 보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이 듣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거대한 능력 중에 손 끝에 불과하며,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라 한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라”(욥 26:14) 인간은 하나님의 존전 앞에 벌레같은 존재인데,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 하였다(사 42:3). 주님은 율법의 정죄 아래 기력없이 죽어 가던 죄인들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온유와 겸손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또한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공중 권세 잡은 자이자 날렵한 뱀인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님의 권능은 십자가에서 사탄을 무찌르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완성된...

벌레 같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은혜(욥 25:2)

  벌레 같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은혜(욥 25:2) “하나님은 주권과 화평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욥 25:2)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는 자신의 신학을 바탕으로 펼쳐지고 있다. 세 친구 신학의 공통점은 율법주의적 사고에 의한 인과응보를 주장을 한다. 즉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인은 저주를 받는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를 모르는 신학이다. 하나님을 알지만 경외의 대상이며, 거룩하신 분이고 의로운 분이라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서는 부정을 하고 있다. 빌닷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과 위엄 앞에서 인간은 그저 벌레나 구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6) 즉 하나님의 통치권, 거룩함, 그리고 비할 데 없는 위엄으로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시고, 우주에 화평을 이루시는 분으로써, 그분 앞에 감히 대적을 하거나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른 믿음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이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함 앞에서 스스로 높일 수 없는 존재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나 인간 스스로의 공로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롭다 함(칭의)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의 죄를 대속의 은혜가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는 인간을 가리켜 벌레 같은 인생이라 비하하며 절망케 하였다. 구속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벌레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조롱과 수치응 담당하시며 벌레처럼 짓밟...

악인의 형통과 침묵 너머, 참빛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욥 24:12)

  악인의 형통과 침묵 너머, 참빛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욥 24:12) “성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욥 24:12) 욥은 악인의 형통과 부조리한 현실(욥 21장)에 이어,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과 불의를 즉각 심판하지 않으시고 정한 때를 두시지 않는가에 대한 깊은 영적 고민을 다룬다. 악인들은 경계표를 옮기고, 고아의 나귀와 과부의 소를 담보 잡으며,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는 악인들의 죄를 지적한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이 사회적 구조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부패함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악인의 죄를 즉시 처단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유보하시는 하나님의 침묵과 섭리의 신비를 알게 한다. 어둠을 사랑하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욥 24:13)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빛이신 하나님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인은 지금 하나님이 주신 평안 속에 당당히 서 있지만, 결국에는 스올에 삼키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결코 취소된 것이 아니라 유보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모든 악은 반드시 멸망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세상 속에서 신음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부조리와 악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성육신하셔서 몸소 체험을 하신 것이다. 어둠 가운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참 빛이 세상에 왔으니 세상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참 빛을 싫어한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저들의 악함은 참 빛을 보고도 함께 모여 예수님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행을 한 것이다. 저들이 십자가에서 행한 악행은 어둠으로 빛을 덮으려 한...

영적 어둠 속에서 정금같이 나오는 신앙(욥 23:11)

  영적 어둠 속에서 정금같이 나오는 신앙(욥 23: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욥 23:11) 욥은 눈 앞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깊은 영적 어둠과 침묵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마침내 순금같이 되어 나올 종말론적 신앙을 고백한다.  그는 그의 억울함을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탄원하고 판결을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 23:3) 이것은 세상의 불의나 친구들의 비난을 바라보는 대신, 오직 긍극적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여 그분의 공의에 항소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나님을 느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깊은 영적 침묵의 상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알지만, 욥의 감각과 이성으로는 그분을 경험할 수 없다. 성도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느낌이나 체율이 아니라, 감추어진 순간에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볼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온 삶을 알고 계신다는 능동적 신뢰로 고백을 한다. 즉 자신의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정금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화의 과정 속에서, 성도들을 불순물에서 건져내어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지만 순종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려지는 영적 침묵과 부재를 경험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며 완벽한 순종을 이루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아버지의 작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 이루셨다. 또한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순금으로 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에서 완전하게 성취하셨다. 그리고 이루신 은혜를 우리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

참 생명의 능력과 신성한 성품의 열매(행 19:26)

  참 생명의 능력과 신성한 성품의 열매(행 19: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행 19:26) 2 하나님의 생명이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즉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성부 하나님의 깊은 속사정까지 밝히 알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영생) 주신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고, 나의 삶을 움직이는 원리이자 힘이 된다. 참된 생명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내용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의 특징은 그분의 말씀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참된 필요를 알기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즉 말씀이 양식이 되는 삶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최고의 양식이자 생명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인간의 본질적인 불행은 가치 없는 대상에게 애정과 사랑을 쏟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닮음의 법칙으로 증명이 된다. 사랑하며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면 썩어질 허망한 것을 얻고 그것을 닮아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

허망한 우상을 넘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행 19:24)

  허망한 우상을 넘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행 19: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행 19:24)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그 도시의 사람들이 이전에 섬기던 아데미 신상을 섬기지 않으므로 영업에 손실이 났기 때문이다. 데메드리오라는 세공업자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 모형 관광기념품을 만들어 큰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는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진리가 밝혀지자, 여신의 신상을 만드는 자들과 팔던 자들이 난리를 친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을 그들의 자존심이 상하였다고 하여 소동이 일자 서기장까지 출동을 하였다.  왜 불신자들은 우상숭배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이어서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에 빠진 것이다. “그들이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들은 목적이 없는 허망한 인생이다. 그래서 자신의 고집대로 사느라 썩어져 갈 허무한 것을 좇으며 허망한 인생을 한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그들의 허무함이란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생명이 없는 우상에게 말을 하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입에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시 115:5)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자의 실상은, 그 우상처럼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생명이 없는 어리석음과 허망함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이것에 대한 증명이 데메드리오라 하는 자들과 우상을 팔고 섬기는 자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즉 썩어질 경제적 이익과 허망한 우상을 지키려는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졌다. ...

빛의 자녀답게, 깨어 준비하는 삶(살전 5:5)

  빛의 자녀답게, 깨어 준비하는 삶(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니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성도들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 자들에게 그 날이 언제, 어떻게 임하는지와 그날을 기다리는 성도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언약의 신실함으로 이루시는 것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확인할 수 있다.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시대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날과 때를 계산하는 호기심에 빠지게 된다. 우리들은 이미 얻은 영적 신분에 기반하여 아직 다가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작정하신 주권적 시간표에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임하는 심판의 날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이미 구원이 작정된 영광의 날이다.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주권 아래로 옮겨진 자들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빛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출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거룩한 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살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세속적인 안일함에 속아 영적으로 영면해서는 안되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되 마음의 중심은 늘 하나님을 향해 깨어 있는 영적 경각심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 말씀을 하시며 열처녀의 비유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등불뿐만 아니라 기름을 함께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웃과의 삶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라 한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살전 5: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말씀은 종말에 대하여 막연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