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복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생명(시 1:2)

  참된 복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생명(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도다”(시 1:2) 시편 1편은 단순한 개인 윤리나 권선징악의 교훈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구속의 원리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다. 참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담 이후 타락한 모든 인류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리에 앉은 자들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런데 율법의 모든 요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히 순종하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주야로 즐거워 하며 성취하신 참된 의인은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네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옮겨 심겨진 나무를 뜻한다. 죄로 인해 마르고 메마른 광야 같던 성도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푸른 나무가 된 것은, 스스로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은혜 때문이다. 반면에 악인의 본질과 운명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을 넘어, 하나님의 언약과 생명에서 단절된 채 자기 의를 의지하는 자를 의미한다.  생명의 무게와 알맹이가 없기에 환난과 심판의 바람이 불 때 날아가는 겨와 같은 것이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 의인의 회중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 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할례와 전인격적 순종으로(행 21:26)

  자기 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할례와 전인격적 순종으로(행 21: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행 21:26)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저들의 잘못은 사람의 의와 자랑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려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전가시키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리스도를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할례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인 징표이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1) 그러나 할례의 참된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이다.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그리스도의 할례란?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 곧 육적 몸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영적 연합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마음의 할례란? 마음의 완악함을 잘라내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세속적 욕망을 제거하여 청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고백은 청결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마음은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담아 두는 중심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과 십자가 진리를 바르게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선포된 말씀 앞에...

복음의 자유와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양보(행 21:24)

  복음의 자유와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양보(행 21: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여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난다. 장로들이 바울의 사역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로서, 그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버리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왜곡된 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장로들이 바울에게 제안을 한다. 나실인의 결례를 앞둔 서원자 네 사람의 정결 예식 비용(번제, 속죄제, 화목제물, 소제, 전제)을 바울이 대신 지불하게 한다.  나실인의 서원 규례는 서원자가 일정 기간(7일~한 달)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멀리하고, 기간 만료 후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머리털을 화목제물 밑 불에 태운다(민 6:13-20). 유대인 사회에나 나실인의 비용을 대신 내주는 것은 매우 경건한 율법 준수의 행위로 여겨졌기에, 바울은 이를 행함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풀고 평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한다는 표시가 됨으로 그들이 갖고 있던 오해를 벗게 된 것이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 21:24) 그렇다면 바울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간 것일까? 즉 말과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구원은 할례를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율법의 참된 용도와 죄인의 괴수를 살리신 은혜(딤전 1:7)

  율법의 참된 용도와 죄인의 괴수를 살리신 은혜(딤전 1: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율법의 적법한 사용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주권적 은혜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완성되는지를 명확히 보여 준다.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경고하는 것이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거짓 교사들은 구약의 역사가 오직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흘러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 무익한 변론으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구속사의 중심축에서 이탈했다는 것이다. 즉 거짓 교사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했지만, 그 본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이라 한다. 율법이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고발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명확히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은 우리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오직 은혜의 복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는 구속사적 도구로 사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자격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적인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극악한 훼방자였던 바울을 구원하심으로써, 앞으로 주를 믿어 영생 얻을 자들에게 ‘일체 오래 참으심’의 본을 삼으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눈으로 뵙는 신앙과 십자가의 용서, 그리고 영광스러운 회복(욥 42:2)

  눈으로 뵙는 신앙과 십자가의 용서, 그리고 영광스러운 회복(욥 42:2)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노니”(욥 42:2) 욥기 전체의 위대한 최종 결론이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와 계시 앞에 선 욥의 진정한 회개와 신앙 고백, 그리고 친구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과 욥의 기도와 마침내 임하는 욥의 갑절의 회복과 평안한 종말을 다룬다.  욥은 마침내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불변하시는 주권적 작정을 온전히 인정한다. 이제 폭풍우 가운데 계시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눈으로 뵙는 신앙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했던 항변과 자의적 주장을 완전히 철회하고, 티끌과 재 위에서 참된 회개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참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감정을 넘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대면을 통해 자신의 전적 무지함과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번제물을 준비하게 하시고, 내 종 욥의 용서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우매함을 용서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욥은 자신을 저주하였던 친구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므로, 하나님은 욥의 억울함과 결박을 푸시고(곤경을 돌이키사) 모든 소유를 이전보다 갑절로 채워주신다. 그가 받은 갑절의 복은 단순한 기복적 보상이 아니라, 고난을 끝까지 통과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최후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을 가리킨다. 구약의 욥은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신약의 구속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친히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 곧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셨다. 그가 친구들을 위하여 용서하며 기도하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을 용서하여 주신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

리워야단을 꺾으신 십자가의 권능과 무조건적 은혜(욥 41:34)

  리워야단을 꺾으신 십자가의 권능과 무조건적 은혜(욥 41:34)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는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욥 41:34) 욥 41장에서는 바다에서 가장 두렵고 저항할 수 없는 절대 괴수 리워야단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리워야단의 압도적인 신체 구조와 맹렬한 힘, 인간의 무기(창, 칼, 화살)를 비웃는 무적의 위용을 상세히 열거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혼돈과 악의 세력조차 하나님의 완벽한 통제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함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이 무시무시한 존재를 다루시는 분이신데,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맞서며 은혜를 빚진 것처럼 따질 수 있겠느냐고 선언하신다. 개혁주의는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한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피조된 것들을 들고 하나님께 드려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된 세계를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적 잣대로 존재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없다. 창조의 다양성과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 아래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무기인 칼, 창, 투창, 화살, 맷돌도 리워야단 앞에서는 지푸라기나 썩은 나무에 불과하다. 깊은 바다를 물처럼 끓어오르게 만드는 리워야단은 두려움이 없이 지음을 받아 모든 교만한 자들의 왕으로 군림한다. 십자가의 구속사에서는 리워야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다 괴물, 곧 사탄과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교만의 왕인 사탄 아래 종노릇하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었던 리워야단을 제압하신 분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물꼬물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

자기 의를 내려놓고 구원의 능력 있는 오른손을 보라(욥 40:8)

  자기 의를 내려놓고 구원의 능력 있는 오른손을 보라(욥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8) 욥은 자신의 의를 들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다. 만나 주시지 않고 자신을 악인으로 취급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다. 하나님은 땅 위에 가장 악한 것을 짓 밟을 수 있다면 욥의 구원의 능력을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 40:14)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창조 세계의 거대한 피조물인 베헤못을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다시 한 번 확증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서 우주 만물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굴복을 한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다물 뿐이로소이다”(욥 40:4) 즉 하나님을 대면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합당한 반응은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입을 닫는 겸손이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다시 허리를 묶고 대답하라고 명하신다. 왜 그런가 하면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무능력한 존재이다. 그래서 자력 구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 40:9) 사람의 무능함을 베헤못(하마)을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비유한다. 인간은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없으나, 오직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칼을 댈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나 인간의 도덕적 의로움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오직 은혜’의 구속사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오른손은 무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 있는 오른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강력한 오른손의 권능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우리의 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