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거듭남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으나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였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9) 이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 아닌 육신의 떡을 주는 자로만 이해하였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막 8:14) 이러한 제자들에게 맹인을 고쳐 주시면서 교육하셨다. 이 기적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가 어떠함을 말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셨다. 벳세다에서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즉 구원은 개인 구원임을 말한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막 8:23) 즉 첫 번 째 안수를 하시고 맹인에게 묻기를 무엇이 보이느냐? 맹인의 대답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아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 8:24) 그러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신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 8:2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시고 하는 것은 눈은 떴으나 진리를 왜곡되게 보는 상태인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모든 것을 밝히 보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안수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감정이 아닌 지식으로 알고 믿음을 세워야 함을 말한다. 새 생명인 어린 아이는 눈을 뜨고 있지만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없다. 하지만 성장을 하면서 눈이 점점...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 9:8)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바울은 자신의 열심과 철학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영적 소경이었다. 본문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진리(교리)가 있다. 그것은 중생의 은혜를 받고 성화의 과정을 다루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즉 단순히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바른 지식(교리)를 통해 영적 시력을 온전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육적인 눈은 멀고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된다. 이것을 중생이라 한다. 눈을 떴다고 해서 신앙의 완성이 아니다. 구원은 단회적 사건이 칭의로 시작이 되면서, 온전한 진리를 보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나(눈은 떴으나), 진리를 근거로 한 믿음은 정립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 갈 수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영안의 눈을 뜬 바울은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는다. 그 때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볼 수 있게 된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구원은 신분의 변화인 동시에 시력의 교정 과정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자들은 영안이 흐린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게 되면 자기 생각을 혼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이 문제가 오늘날 가장 심각하다. 이것을 혼합주의라 하며 또한 우상숭배라고 한다. 성경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이론 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10:4) 세상의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예수 그...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1) 빌립보 교회는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다. 그래서 한 마음과 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전한다. 전하는 내용은 단순히 도덕이나 윤리적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와 같은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즉 인간의 본성과 타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성육신의 신비를 소개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빌 2:6)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수동적 순종이라 한다. 그리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지키신 것은 능동적인 순종이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은 삼위일체 구원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죽기까기 순종을 하심으로 인하여 공의로운 보상을 받으신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왕위에 왕이 되심을 말한다.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만물을 통치자가 되심을 말한다. 이렇게 되심으로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기쁨이요, 불택자들에게는 심판의 두려움이 된다.  예수님처럼 ‘착하게 살자‘라고 하면 율법주의가 된다. 바른 믿음은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으니 그분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은 삶의 주권을 그분에게 양도함을 말한다.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 간에 다툼을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심각한 죄로 보았습니다. 성도들은 개인의 취향이나 이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고 없으시니라 하니라”(대하 19: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고 없으시니라 하니라”(대하 19:7) 아합과 잘못된 동맹으로 죽을 뻔했던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겸손히 회개하고 국가 사법 제도를 말씀 위에 세우는 제2의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그의 아버지 아사 왕은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옥에 가두었지만 여호사밧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한다. 왕이 악한 왕인 아합을 도왔지만 선한 일을(우상 제거) 한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음으로 은혜를 받게 된다. 그는 다시 북쪽 이스라엘로 가지 않고 각 견고한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고 엄중히 명한다.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대하 19:6) 즉 예루살렘에 레위 사람, 제사장, 족장들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인 종교 재판을 맡기고, 민사와 형사 재판은 왕에게 맡기고, 최고 재판소의 원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심으로 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참된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지적 받았을 때에 회개하며 돌이키는 자이다. 이것이 택함을 받은 자들의 증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성도가 완전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신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재판관은 왕의 대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다.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즉 여호와께 속한 일은 대제사장 관할이고 왕에게 속한 일을 구분하였다. 둘 다 하나님의 법 아래 있으면서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교회권은 말씀과 치리이며, 국가권력은 칼에 있다. 이것을 서로 혼동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법 아래에...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 하더라”(대하 18:4)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 하더라”(대하 18:4) 여호사밧 왕은 악한 아합과 잘못된 동맹을 맺으므로 겪게 되는 영적 혼란과 위기를 맞는다. 즉 그것에 대한 증거가 진실을 말하는 한 사람 미가야와 거짓을 말하는 400명의 대결 구도이다.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을 누릴 때 북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인 아합과 혼인 관계를 맺는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대하 18:1) 몇 년 후에 사마리아를 방문했다가 아합의 제안에 휘말려 전쟁에 동참을 한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한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 하더라”(대하 18:4) 반면에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들을 불러 묻는다. ‘올라 가소서, 승리하리이다’하며 아첨을 한다. 하지만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불려온 미가야는 목자 없는 양 같이 흩어진 이스라엘의 패배를 예언한다. 이것은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어 아합을 꾀어 죽게 하심을 선포한다. 그리고 미가야는 뺨을 맞고 옥에 갖히며 고생의 떡과 물을 먹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합의 꼼수는 전쟁터에서 평범한 병사처럼 숨고,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게 한다. 아람 군대에 위기를 맞은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소리를 지르므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 아람의 한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이 아합의 갑옷 솔기에 맞아 결국 과다 출혈로 사망을 한다. 미가야의 예언이 성취된다. 여호사밧은 선한 왕이었지만 아합과 평화를 추구하다가 영적 분별력을 잃었다. 이것은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음을 말한다(고후 6:14).  그리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가야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사람에게 아부나 아첨을 삼가고 진리의 말씀을 외칠 수 있는 진정한 용기...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대하 17: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대하 17:5) 아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사밧이 강하게 되어 이스라엘을 방어한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대하 17:4) 그리고 전심을 다하여 여호와의 길을 걸으며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셨다.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대하 17:6) 여호사밧의 가장 큰 업적은 방백과 레위사람, 제사장들을 유다 각 성읍으로 보내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르치게 한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대하 17:9) 남 유다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주변 나라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블레셋과 아라비아는 조공을 바쳤다. “블레셋 사람들 중에서는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리며 은으로 조공을 바쳤고 아라비아 사람들도 짐승 떼 곧 숫양 칠천칠백 마리와 숫염소 칠천칠백 마리를 드렸더라”(대하 17:11) 다른 왕들은 종교개혁을 할 때에 우상을 부스는 것만 하였지만 여호사밧은 율법책을 가르치는 적극적인 개혁을 한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론의 핵심은 말씀의 올바른 선포와 교육이다. 그리고 아사 왕은 돈으로 평화를 사려 했으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자 평화를 주셨다. 즉 교회의 권위와 평안은 세상과 타협할 때가 아니라 말씀 위에 설 때이다. 개혁주의 성도들은 죄에 대하여는 겸손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다협하지 않고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 이 열정이 산당을 제거한 것이다. 남 유다가 강대해 져서 116만의 대군이 모이게 되었다. 그것은 전 지역에 말씀 교사인 레위인들을 파송하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성도들의 믿...

“아사가 노하여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대하 16:10)

  “아사가 노하여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대하 16:10) 아사 왕의 통치는 믿음과 기도 그리고 개혁으로 큰 업적을 세웠다. 그런데 말년에 인본주의와 불신앙으로 인하여 이방 나라 에게 무너져 간다. 북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압박하려고 라마를 건축하였다. 그러자 아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대신에 성전과 왕궁에서 은금을 꺼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주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 소식을 들은 바아사는 물러갔고. 그 자재를 빼앗아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 “아사 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국하였더라”(대하 16:6) 마치 이 일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큰 해를 당한다. 그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을 나무란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전심을 다하여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시고 있는데 왕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전쟁이 있을 것이라 한다. 그 말은 들은 아사 왕은 회개를 하지 않고 분노하며 선견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 중에 몇 사람을 학대하였다. “아사가 노하여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대하 16:10) 왕은 통치 제 39년에 발에 병이 들어 위독해 졌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삽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대하 16:12) 왕은 믿음은 신본주의에서 실용주의로 변질이 외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처음에서는 100만 대군 앞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