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자를 통해 열리는 생명의 빛(욥 33:13)

  대속자를 통해 열리는 생명의 빛(욥 33:13)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욥 33:13) 엘리후는 욥이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원수로 여기시고 침묵하신다'는 항변에 반박을 한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크신 분이시며, 결코 무자비하게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분은 오히려 중보자(중재자)의 사역을 통해 인간의 교만을 꺾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욥 33:28) 동일한 피조물이자 죄인이라는 겸손 엘리후는 자신도 흙으로 창조함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고 한다. 즉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피조물이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겸손함 위에 참된 영적 권면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시므로, 하나님이 당장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며 주권으로 계획하신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오묘한 작정과 통치를 자기 이성으로 알 수 없다. 고난, 사랑의 징계와 교육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을 꺾고 영혼을 구덩이(스올)에서 건져내기 위함이다. 즉 고난을 통하여 성도를 돌이키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와 교육이라는 것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히 12:6) 그러나 세 친구들은 고난을 죄에 대한 응보적 형벌로만 알고 있었다. 대속물을 통한 구원 고난을 받고 있는 인생 곁에 대속자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여 육신을 청년처럼 회복시키시고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신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

전능자의 숨결, 참된 지혜의 근원(욥 32:8)

  전능자의 숨결, 참된 지혜의 근원(욥 32: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욥 32:8) 욥은 스스로 의롭다고 항변을 하고, 세 친구들은 그를 더 이상 굴복시키지 못해 말을 잃었다. 그 때에 분노를 발하며 청년 엘리후가 등장한다. 욥과 세 친구들 간의 논쟁은 인간대 인간이었다. 그런데 논쟁의 구도를 인간대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영감이라는 새로운 영적 차원으로 전환한다. 엘리후는 두 가지로 분노를 한다. 욥이 자신을 의롭게 여기다 못해 은연중에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친구들에게는 욥을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하면서도 정죄만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나이가 적어 선배들 앞에서 말을 아껴왔다. 그 이유는 옛 전통과 연륜이 지혜를 보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지혜의 출처가 세상의 경험이나 나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전능자의 숨결)임을 깨닫고 발언을 시작한다. 즉 인간의 정통, 경험, 연륜, 학문은 영적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있다. 진정한 신학적 지혜는 전능자의 영(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을 밝혀주실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세 친구들의 논리가 헛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의 나이가 많고 인생의 경험이 많은 자들이지만, 오직 하나님 앞에서 참된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겠다고 한다.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욥 32:21) 욥기의 흐름이 욥의 도덕적 자의성과 세 친구의 율법주의적 지혜가 한계에 다달았을 때에, 엘리후의 입을 통해 전능자의 숨결이 선포되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권위가 아닌,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지혜와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외모나 신분을 보지 않으시고 완벽한 공의와 진리만을 전하셨다. 즉 세속적인 권위나 세상의 평가에 타협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대언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 앞에서(욥 31:6)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 앞에서(욥 31: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 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욥 31:6)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두고 걸었던 최후 진술이자 결백을 선언한다. 눈의 순결부터 타인과의 관계, 물질, 우상숭배, 사회적 약자에게 대한 책임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들추어내며 만약에 죄가 있다면 어떠한 저주도 받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겉으로 드러나는 죄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음란함과 마음의 속임수까지 통제하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걸음을 세시고 살피시는 분임을 알았기에 은밀한 죄조차 경계하였다. 진정한 거룩은 외적인 율법 준수에 머물지 않고, 마음의 중심과 은밀한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남종이나 여종이 쟁론을 제기할 때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을 모태에서 만드신 하나님이 그 종들도 동일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신분제였던 구약 시대에 그가 종과 약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모든 인간이 단 한 분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라는 개혁주의적 창조론이 있었다. 또한 재물의 풍부함이나 해와 달 같은 피조물을 마음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물질과 피조물을 마음으로 섬기는 것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은밀한 우상숭배임을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다. 즉 율법의 요구를 행동에서 마음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욥은 인간적으로 최선의 거룩을 고백했지만, 인간인 이상 결코 완전할 수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음과 생각과 삶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참된 의인이시다. 그는 만약 자신이 죄를 지었으면 저주와 심판을 받겠다거 자청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 앞에서 스스로의 행위로 합격할 수 있는 인생은 ...

타협 없는 진리 선포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행 20:27)

  타협 없는 진리 선포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행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의 진리 말씀을 바로 전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거짓 복음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요, 전달하는 자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즉 목사가 전하는 말을 듣고 성도들을 대신 깨우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한다. 그런데 만일 전하지 않게 되어 성도들이 죄를 범하게 되면 그들의 죄값을 목사의 손에 묻겠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8) 그런데 충성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자에게는 죄인들의 피값을 묻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 3:19)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을 깨닫고 복음을 전한 자가 사도 바울이다. 그래서 장도들 앞에서 나는 너희의 죄값에 대해서 나는 깨끗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행 20:26) 성경의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독된 책이다. “모든 성경...

모든 겸손과 눈물로 감당한 사역의 진실성(행 20:20)

  모든 겸손과 눈물로 감당한 사역의 진실성(행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올라가는 길에 에베소를 직접 들르지 못하고, 밀레도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마지막 목회적 권면과 작별 인사를 한다. 그의 작별 인사에는 사역에 대한 회고, 왜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사명에 대한 다짐,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사도인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일이 있었다. 병든 자와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면 사람으로서 대중 앞에 설 때에 자랑과 교만으로 설 수 있다. 그가 복음을 어떻게 전하였는지, 그리고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교훈을 준다. 복음을 전하였던 현장과 교육을 받았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 앞에서 확인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만일 거짓이라면 장로들이 반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당당하게 그의 사역을 확인 받고 있다. 복음을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즉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복음 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거리낌이 없이 전했음을 말한다.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을 가려서 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하였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1)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해주고 로마로 전도 여행을 떠나기 위함이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그런데 성령에 매여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의 주체는 우리 주 예수 ...

환난을 넘어 장차 누릴 영원한 영광으로(살후 1:3)

  환난을 넘어 장차 누릴 영원한 영광으로(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살후 1:3) 사도 바울은 극심한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고, 장차 임할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성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본문이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고난 속에서도 교회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명확히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해질 수 있었던 원인은 그들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성도의 견인 은혜 덕분임을 말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불운이 아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로 빚어가시는 은혜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들에게 임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하는 심판이다. 하나님은 재림의 날에 공의의 저울로 완벽하게 정산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2)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성도들이 받는 환난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로 맞추어지는 것이며,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하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세상의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보상하시는 최종 주권자가 예수님이심을 믿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주님의 공의를 신뢰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급함이과 불평을 버리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말씀과 기도 안에 거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신앙의 정절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수치와 침묵을 넘어 십자가의 위로와 안식으로(욥 30:9)

  수치와 침묵을 넘어 십자가의 위로와 안식으로(욥 30: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욥 30:9) 욥은 과거의 찬란한 영광과 복락을 누렸던 것을 회상했고, 한 순간에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한 이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형편에 처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냉정함 침묵과 무자비해 보이는 손길 속에서 육체적, 영적 절망의 극치를 통과하여야 한다.  그의 명예와 존엄성은 완전히 바닥에 추락하였는데, 이것은 인간 타락의 비참함과 세상 영광의 가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이 누리는 세상의 지위, 명예, 존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지면 한순간에 수치와 모욕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욥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육신의 고통이나 사람들의 조롱보다 하나님의 가혹함과 침묵에 있었다.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고 가혹하게 치시는 하나님 앞에 욥은 죽음을 예감하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침묵과 고난의 신비를 믿는다. 이는 하나님이 욥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깊은 구속적 작정 속에서 믿음을 연단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성도가 경험할 수 있는 영혼의 어두운 밤의 절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땅에서는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를 통과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욥이 당한 고난과 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치와 조롱을 예표한다. 욥은 억울하게 수치를 당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할 영원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욥 30:20) 욥이 탄식했던 하나님의 가혹한 침묵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겪으신 단절의 고통에 극치에 달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아들에게 철저히 침묵하시고 진노의 잔을 쏟으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