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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결박을 찢으신 부르짖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구원의 승전가(시 18:3)

  사망의 결박을 찢으신 부르짖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구원의 승전가(시 18: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 18:3) 시편 18편은 장엄한 구원과 승리의 승전가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신 날에 부른 노래로 기록되어 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은 여호와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 믿음의 고백에는 긍휼과 애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여호와를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산성으로 찬양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만을 힘과 피난처로 삼아 순종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도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다윗이 사망의 줄이 두르고 불의의 창수가 덮치며 스올의 줄과 사망의 올무가 엄습할 때에 여호와께 아뢰고 성전에 들리게 하였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인류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사망 앞에 있을 때에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셨다. 주님의 부르짖음은 하늘의 참 성전에 상달되었다.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노로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드리워지며, 빽빽한 구름과 흑암, 번개와 우박 가운데 하나님이 강림하신다. 즉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다윗을 건져내시고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지진이 일어나며 바위가 터졌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마 27:51-52) 그리고 사흘 만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권...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처세술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복음의 사명(행 24:22)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처세술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복음의 사명(행 24: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행 24:22) 자신의 출세와 탐욕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준 자가 있다. 그 이름은 본디오 빌라도이다. 그는 체세술의 달인이었다. 통상 총독의 임기가 4~5년인데 10년이나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큰 죄는 두려움의 대상을 잘못 선택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백성과 폭동과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염려해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넘겼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빌라도의 종말은 사마리아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기병과 보병 부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 학살한 것이 문제가 되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결국에는 자살로 죽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존재는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변덕스러운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다. 며칠 전에는 겉옷을 펴고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졌던 무리가 순식간에 ‘예수를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소리쳤다.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마 27:21) 사명자의 기준은 어떤 것인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택하여야 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러므로 강단에서 전하여야 할 복음은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진노와 두려운 심판을 가감 없이 선포하여야 한다.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

벨릭스의 탐욕과 어떠한 처지에도 변치 않는 복음의 증인(행 24:10)

  벨릭스의 탐욕과 어떠한 처지에도 변치 않는 복음의 증인(행 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행 24:10) 바울은 로마 군대 보호 하에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에 도착을 하였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한다. 즉 일을 방해하는 자들은 끝까지 따라 다니며, 거짓 증인을 세워 악행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바뀌었고, 총독이 바뀌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변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이 있다. 자신의 유익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이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총독 벨릭스가 그러하다. 특히 이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무서워하고 돈을 좋아 했던 것이다.  바울이 고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때문이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는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자이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행 24:22) 부활에 대해서 자세히 잘 알고 있는데 재판을 미루고 천부장 루시아에게 미루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총독은 돈을 좋아하여 혹시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 24:26) 뇌물과 돈을 좋아하는 자가 벨릭스이다. 돈을 좋아하기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

경건의 참된 이익과 만왕의 왕을 바라보는 거룩한 청지기직(딤전 6:1)

  경건의 참된 이익과 만왕의 왕을 바라보는 거룩한 청지기직(딤전 6: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 6: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마무리 하면서 경건을 세속적 번영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배교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자족과 청지기직을 대조시킨다. 먼저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에게 상전을 공경할 것을 명한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적 불의나 노예제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다.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내적 자유을 얻은 자들은, 믿는 상전을 섬길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사랑을 받는 자로 대함으로써, 지상 사회의 계급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연합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바른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떠나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물질적 번영, 사회적 성공, 자기 확장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가장 치명적인 배교이다. 개혁주의 물질관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종말론적 무소유 의식이다. 즉 생명과 호흡, 모든 일용할 양식은 창조주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의 산물임을 믿는다. 그래서 참된 경건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자족하는 자족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왜 그런가 하면.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탐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신뢰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하나님 대신 맘몬을 궁극적 안전과 위로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영혼은 근심으...

눈동자 같은 기이한 사랑과 주의 형상으로 누리는 영원한 만족(시 17:7)

  눈동자 같은 기이한 사랑과 주의 형상으로 누리는 영원한 만족(시 17: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인한 사랑을 나타내소서”(시 17:7) 대적들의 잔인한 포위와 모함 속에서 자신의 순전함을 호소하며, 세상의 썩어질 분깃과 대비되는 주의 얼굴을 뵈옵고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는 시이다. 다윗은 정직한 자이었다. 그래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게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며 자신의 정직함을 하나님 앞에 세운다. 하나님 앞에서 흑암과 내면의 깊은 곳까지 흠과 결함이 전혀 없고 완벽하신 의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그리고 주님은 겟세마네의 밤에 극심한 시험을 통과하시면서도 한 치의 불순종이나 죄 없이 자기를 온전히 산 제물로 드리셨다.  다윗은 주께 피하는 자들을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기이한 사랑을 구하며, 자신을 눈에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달라 하였다. 이와 같은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도 영원한 언약의 눈동자로서 지키셨다. 육신은 찢기셨으나 그분의 영혼과 구속의 과업은 훼손되지 않고 하나님 품 안에서 온전히 보존되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눈동자이며 은혜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권세자들은 이 땅의 권력과 물질, 명에를 자기 분깃으로 삼았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분깃은 무덤과 함께 사라질 썩어질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빈손으로 세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의 형상으로 온전히 나타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

스올에 버려지지 아니한 거룩한 자와 부활의 영원한 생명길(시 16:10)

  스올에 버려지지 아니한 거룩한 자와 부활의 영원한 생명길(시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본 시는 베드로와 바울이 오순절 설교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설교에서 공통적으로 인용한 가장 명백한 부활의 메시아 예언시이다. 사망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 자신을 유일한 기업으로 삼으며, 무덤의 썩음을 보지 않고 부활하사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계시한다. 다윗의 신앙 고백은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 고백하였다. 또한 레위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여호와 자신을 기업으로 삼았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 18:20) 이것에 대한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이 땅의 부귀영화나 권세를 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하셨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하시는 것만을 자신의 양식이자 기업으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칠흙 같은 어둠과 고난 속에서도 항상 아버지를 앞에 모시고 아버지의 도우시는 오른 손을 신뢰하심으로 요동하지 않고 온전한 순종을 이루셨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다윗은 죽어 장사 되었고 그의 묘는 사도 시대까지 남아 썩음을 겪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 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2:29) 이 말씀의 진정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성취가 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무덤에 묻히신 아들의 육체를 ...

주의 성산에 오를 자 누구며 십자가로 완성하신 완전한 의(시 15:1)

  주의 성산에 오를 자 누구며 십자가로 완성하신 완전한 의(시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이니이까”(시 15:1)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처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말한다. 율법주의적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완전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와 그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질문이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이니이까”(시 15:1) 왜 그런가 하면 타락하여 부패한 아담의 후손 중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통과하여 성산에 오를 수 있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은 결코 같은 장막에 머물 수 없기에, 이 질문은 인간의 절망을 드러낸다. 반드시 하나님의 의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11가지의 온전한 의의 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주님은 마음에 한 치의 거짓도 없으셨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그리고 원수들의 조롱 속에서도 침묵하셨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극심한 십자가의 죽음을 불구하고 결코 뜻을 바꾸지 않으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설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한 의를 완성하심으로, 그 분 안에 접붙여진 성도들에게 결코 요동치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보증을 선물로 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가야 합니다. 인간의 도덕적으로 정직하고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