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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걸린 사랑의 약속, 알록달록 무지개(창 9:13)

  하늘에 걸린 사랑의 약속, 알록달록 무지개(창 9: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3)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와 약속을 하셨다. 그것은 무지게 약속이다. 무지개 약속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특별 은총을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반 은총적 보존 언약이다. 무지개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의 후손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함께 한다. 즉 피조 세계를 포괄하는 우주적, 보편적 성격을 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창 9:12) 언약의 조건은 인간의 순종이나 도덕적 상태를 내세우지 않으셨다. 일방적으로 맹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창 9:17)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세상이 죄로 인해 다시 우주적 심판으로 자멸하지 않도록 자연 질서와 역사를 지탱하고 보존하시는 언약이다. 일반 은총을 통하여 자연 질서의 안정성 확보를 할 수 있는데 낮과 밤을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허게 하시며, 인류의 예술 및 기술을 발전하게 하신다. 그리고 사회 질서와 공의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포악과 무법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회적 징벌을 허락하시고 정당성을 부여 한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을 보존하시는 궁극적 이유는 세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보존된 세상 속에서 택하신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구속 사역(은혜 언약)을 완성하기 위함인 것이다. 노아의 언약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머무는 터전으로서 환경을 돌보고 사회 공의와 법치를 세우는 일에 성실히 동참해야 함을 교훈한다. 언약의 보증은 연약한 인간의 결단에 있지 않고,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이 있다. 그리고 무지개는 물로는 다시...

언약적 기억하심과 제단 위에 드려진 향기로운 번제(창 8:20)

  언약적 기억하심과 제단 위에 드려진 향기로운 번제(창 8: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위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창 8:20) 온 세상을 뒤덮었던 물 심판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기억하심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창 8:1) 여기서 ‘바람‘은 창 1:2절에서 혼돈과 공허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영(성령)과 같은 것이다. 물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을 성령의 바람으로 물러가게 하심으로써, 피조 세계를 새롭게 회복하시는 사역을 보여 주신다. 노와와 생명체들이 칠흙 같은 심판의 망망대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방주의 경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자신의 거처를 짓거나 농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를 드린 것이다. 정결한 짐승의 희생 제사는 흠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여진다. 인간의 생명 보존과 하나님과의 화목은 오직 무죄한 대속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피의 언약을 예표한다. 향기로운 냄새를 흠향하심은, 제물의 연기 자체가 아니라 제사에 담긴 언약적 믿음과 순종을 기쁘게 받으심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의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꼐 드리셨느니라”(엡 5:2) 노아의 희생제사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하시므로 인간의 전적타락(원죄)은 씻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근본적으로 거듭나게 할 새 언약(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필요성...

심판의 물결 위로 떠오르는 방주와 언약적 대속의 은혜(창 7:23)

  심판의 물결 위로 떠오르는 방주와 언약적 대속의 은혜(창 7: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23) 창 7장의 내용은, 인류의 죄악에 대해 집행된 하나님의 공의로운 우주적 심판과, 그 속에서 언약 백성을 구원하시는 주권적 은혜를 보여 주신다. 노아 한 사람의 언약적 의로움(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을 근거로 그의 가족 전체가 방주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는다. 이것은 나중에 아브라함의 언약에서도, 신약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로 이어진다.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기 전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였다. 하나님은 제사용 정결한 짐승(암수 일곱씩)과 부정한 짐승(암수 둘씩)을 구분한 것이다. 즉 홍수 심판 직후 하나님께 드릴 희생 제사(피 흘림을 통한 제사)를 미리 예비하신 것으로, 구속의 중심에 대속적 제사가 있음을 선포하였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인하여 부정한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됨을 예표한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마 9:20) 창 1장에서 나누어 놓으셨던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하나님이 직접 허무시고, 죄로 오염된 세상을 근원적으로 씻어내시는 철저한 공의의 집행을 하셨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달 열이렛날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창 7:11)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를 선포하시고 칠 일 간을 유예하셨다. ”지금부터 칠 일이며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 7:4) 지금도 마지막 심판을 앞두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볼 수 있다. ”주의 약속은 어ᄄᅠᆫ 이들은 더디다...

세속의 혼합을 심판하시는 공의와 유일한 구원의 방주 그리스도(창 6:2)

  세속의 혼합을 심판하시는 공의와 유일한 구원의 방주 그리스도(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자들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언약 신앙을 전수하던 경건한 계열이었다.   반면에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속 도시 문명과 육체적 쾌락, 폭력을 따르던 가인 계통의 여성들이다. 셋의 계열이 영적 거룩함과 언약적 순결을 버리고 오직 외모와 육체적 정욕에 이끌려 무분별하게 불신 결혼(혼합)을 행했다.  거룩한 백성이 세상과 동화됨으로써 지상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순수한 언약 공동체가 전멸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세속 가인 문화의 힘 숭배와 셋 계열의 타락이 결합하여 낳은 결과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폭력과 권력으로 명성을 떨친 자들이 생긴 것이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11) 그러므로 인간의 전 인격적(생각, 계획, 의지)이 철저하게 죄로 물든 전적 부패를 가장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하나님의 한탄은 변덕이나 후회가 아니라, 거룩하신 공의의 하나님이 인간의 파멸적인 반역을 보시며 느끼시는 언약적 거룩한 분노와 의로운 진노를 인간의 언어로 나타내셨다. 여기에 무조건적인 은혜가 임한다. 노아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불린 것은 그의 선천적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그에게 먼저 임했기 때문이다. 즉 이신칭의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노아의 방주는 단순한 나무 배가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방식을 예표하는 완전한 모형론적 실체이다. 방주 옆면에 오직 하나의 출입문만 존재한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

사망의 행렬 속에서 이어지는 은혜의 계보와 영원한 생명의 빛(창 5:1)

  사망의 행렬 속에서 이어지는 은혜의 계보와 영원한 생명의 빛(창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 5:1)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온 인류를 덮친 사망의 현실 속에서도 여자의 후손을 신실하게 보존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사를 보여주는 핵심 본문이다. 창 4장에서 가인의 족보는 문명과 폭력의 계열이지만, 창 5장에서는 은혜의 계통(하나님의 도성)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를 밝힌다. 그래서 아담이 셋을 낳고,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이는 죄로 인해 부패한 본성(원죄와 전적 타락)이 후손에게 유전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무조건적 선택을 통해 이 타락한 계열 속에서 구속의 씨앗이 보존하심을 드러낸다. 가인의 계열은 도시 건설, 목축, 음악, 금속 제련 등 세속 문명의 화려함과 힘을 자랑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없는 죽음과 살인의 노래로 끝난다. 그러나 셋의 계열은 눈에 띄는 세속적 업적은 기록되지 않으나, ‘낳고, 살고, 죽었더라’는 일상 속에서 신앙의 유산을 전수하며 언약의 계통을 이어간다. ‘죽었더라’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행위 언약의 경고로 인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더라도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결국 죽음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5) 그런데 모든 인물이 ‘죽었더라’로 끝나는 장례 행렬 속에 오직 에녹만이 다른 결말을 맞는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에녹의 승천은 아담의 저주가 사망으로 끝이 아님을 선포하는 구속사의 부활이다. 이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

부활 신앙의 거룩한 분별과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사명(행 23:7)

  부활 신앙의 거룩한 분별과 교회를 세우는 성령의 사명(행 23: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행 23:7)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히게 된 것은 부활의 신앙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자들만이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존폐가 걸린 핵심 교리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거짓이며, 하나님을 거짓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고전 15:1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란?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 6:10) 이것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육체적 소생이 아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단번에 영원히 심판하시고, 택하신 백성을 하나님께 대하여 영원히 살아 있는 자로 삼으신 승리의 확증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동일한 은혜와 능력을 얻은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그렇다면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이루시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속의 일을 밝히 깨우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만을 드러내고 교회를 세우기 위함인 것이다. 이 일을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다. 성령은 신자를 자기 도취로 이끌지 않고,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충만함 앞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왜 그런가 하면 모든 구원의 비밀과 영광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 머리가 되신다. 그래...

육신의 열심을 넘어 성령으로 고백하는 참된 신앙(행 23:1)

  육신의 열심을 넘어 성령으로 고백하는 참된 신앙(행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행 23:1)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증언을 하고 있다. 자신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었노라고 한다. 그러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치라 명령을 한다. 여기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유대인들이나 바울이나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갈등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즉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문제의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육신적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의 참뜻을 결코 판단할 수 없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벡했을 때, 주님께서는 “바요나 시문에 이를 에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의 말로 알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어리석게 보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령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자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믿는 자이다.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믿는“자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는 곳이 고린도전서의 말씀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방언과 신비로운 은사를 소유하면 자기 수준이 높고 영적으로 신령하여 ‘성령의 도장’을 받았다고 착각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본래 종자가 다르고 실력이 뛰어나 은사를 받았다는 교만한 엘리트주의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성령의 도장’을 받은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야 한다. 즉 나에게는 자주권이 없고 주님을 주라 시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