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9의 게시물 표시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 17:19)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함은 그분과 연합이 되었음을 말한다 . 또한 그분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도와 보호하심이 함께 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 그리고 그분이 내 안에서 함께 하시기도 한다 .   내가 그분 안에 , 그분이 내 안에 거하심에 대한 지식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구속사의 언약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주의 계명을 지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서야 하기 때문이다 .   계명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 “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 요 17:19).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 그래야 연합 , 관계가 교통한다 .   계명을 지키는 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 주 안에 있는 나 ’ 는 삶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우리들의 찬양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의 고백이라 한다 . 마음의 고백이란 생각 , 감동 , 행동이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 그래서 찬송을 드릴 때에 서서 드린다 . 다시 말하면 입술로 고백을 하면서 행하는 자리로 나감을 말하는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에 은혜로 임하게 됩니다 . 그리고 입술로 찬양을 하시면서 행하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 하나님은 입술의 고백을 받지 않으시고 , 행함이 있는 마음의 고백을 받으십니다 .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생각하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시 84:2)   성경에서 ’ 골짜기 ‘ 라 할 때가 있다 . 산과 산 사이의 음푹 패어 들어간 곳을 말한다 . 다시 말하면 지나 갈 때에 영육 간에 고통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골짜기를 지나는 삶은 눈물에 없이는 통과 할 수 없다 . 다윗은 사울에게서도 그의 아들인 압살롬에게도 쫓김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 그와 같은 고통을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라 시적 표현을 한 것이다 .   다윗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다 .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데 성전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 그곳에서는 아주 작은 미물이라도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나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고 , 찬양할 수 있고 , 예배를 드릴 수 있다 . 압살롬에게 쫓김을 당하는 가운데 그는 성전을 사모하고 있다 .   “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시 84:2) 다윗의 영혼은 예배드리기를 사모하다가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오늘을 사는 신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사모하다가 거의 죽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 다윗의 삶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이었다 .   신자가 예배를 실패하면 모든 것을 실패하는 것이다 . 예배에는 하나님을 배움이 있고 , 죄인과 악인의 부패함을 확인하고 ,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셨음을 믿게 되었고 ,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성도들이 함께 모여 구원을 찬양하고 ,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다윗의 형통함은 예배를 사모하는데 있었습니다 . 예배에는 마음껏 기도할 수 있고 , 찬양할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 눅 24:49)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유대 지역은 난리가 났다 . 관리들은 잃어버린 시신을 찾아야 했고 ,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은 만나보기를 원하였다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열한번이나 제자들과 사람들에 나타나셨다 . 부활의 허다한 증인들이 있었다 . 그런데 이제 하늘로 승천을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   비록 열흘이라는 기간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시간이었다 . 문밖에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핍박이 있으며 내적으로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갈급한 심정이었다 .   왜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는가 ? 초월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 그렇다 하나님은 초월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   고난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함이다 . 오직이라는 뜻은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함을 말한다 .   제자들은 보혜사 성령을 간절히 기다렸고 , 지금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 간절함이 사모하는 자리로 가게 한다 .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 . 그리고 뜨겁게 기도하였다 . 보혜사 성령을 기다린 것이다 .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 그런데 기다리는데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인내하는 시간에 그분에 대하여 배움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성경적인 신자들에게는 기다림이란 참으로 익숙한 일입니다 . 기다림은 약속의 끝에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 인내는 묵묵히 참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농부가 가을의 추수 현장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요 21:22)   성경에서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많이 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말씀하여 주셨다 ,   그러자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앉겨 있던 사도요한의 죽음은 어떻게 죽는지를 질문하였다 . 그분의 대답은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요 21:22)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분께서 주시는 본분과 책임이 있다 . 그것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 내가 판단을 하거나 헤아려서는 안 된다 .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 그래서 인생의 삶의 길이가 각각 다른 것이다 .   우리들이 기억하여야 할 것은 “ 너는 나를 따르라 ” 에 있다 . 다시 말하면 다른 것에 신경쓰지 말고 오직 나만 따르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보다는 자기의 명분을 쌓는 일에 더 열심히 있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이 직분자가 되면 나도 직분자가 되어야 하는 시기와 질투가 있는 것이다 .   직분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 성도 ’ 가 되어야 한다 . ‘ 성도 ’ 란 이미 천국의 지위를 확보한 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다 . 우리들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사는데 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우리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만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 그러니 다른 것은 우리들에게 조건이 될 수도 없고 또한 막을 수도 없습니다 .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받으면 미움이나 시기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나를 시리게 하고 차겁게 하는 것들이 봄날에 눈이 녹는 것처럼 다 녹아 버립니다 . 사람들과의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 요 21:17)   사도요한은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베드로에게 ’ 주님이시라 ‘ 전한다 . 베드로는 반가운 마음에 이른 새벽 호수물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러 간다 . 막상 주님 앞에서 서보니 서먹한 분위기이다 .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침 조반을 준비하신다 . 떡과 물고기를 숯불에 굽고 계신다 . 그동안 베드로는 배 위에 올라가 잡은 물고기를 세고 있다 .   이전의 베드로라면 당연히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이전의 열정이 없다 .   무엇 때문일까 ? 내 열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숯불을 피우시고 세 번의 질문을 하신다 . 왜 그런가 하면은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고 물으시고 ’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라고 베드로가 대답을 하였다 .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나의 열정으로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고 , 그분께서 나에게 먼저 사랑을 주셔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음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할 때에는 먼저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열정 , 나의 열심히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 사람이나 , 나에게서 시작한 것에는 끝이 있어서 포기를 하거나 좌절이 있습니다 .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 영원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십니다 .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구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요 21: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그들의 본업으로 돌아갔다 . 그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였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여서 ”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섰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 요 21:4)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향하며 말씀하신다 . ” 이르시되 그믈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요 21:6)   놀라울 정도로 많이 잡힌 것이다 . 어부로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 꿇게 된다 .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부탁을 하신다 .   영육 간에 지쳐있는 그들에게 떡과 구운 생선을 갖다가 주신다 . 그들이 먹은 생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게 하여 주신 생선이었다 . 그 풍성한 기쁨을 그들에게 먼저 주신 것이다 . 그리고 남은 생선을 함께 나누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   그리고 그 그물로는 물고기 백쉰세 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 그 기적은 사람의 생각을 넘어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와 보호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함께 하십니다 . 풍성함과 기쁨을 주십니다 . 함께 나눌 기쁨을 주시되 그 과정의 시간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 물고기 백쉰세 마리를 주시는 장소는 그들이 작업하는 현장이었습니다 . 성경에서 전하는 기적의 이야기는 그 상황적 배경이 있습니다 .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 풍성함을 주십니다 . 내 힘으로 가져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보여 주십니다 . 꼭 기억하여야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는 사건이 있다. 제자들 가운데 의심이 많은 도마가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우리들의 의심을 도마가 깔끔이 해결하여 준 것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여러 증인들로부터 확인을 받은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두려움이 없고 평안이 있다면 부활의 은혜가 임하여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세우신 교회에 오시면 마음에 평안을 얻으십니까? 그러시다면 보혜사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지옥이 무섭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책임져야 할 것을 다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린문 장로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내가 그들이 져야할 죄의 책임을 사하여 주었다고 말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셨으니 이제는 화목한 자로 꼭 사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 가셨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방문을 꽉 걸어 잠겼다. 그런데 그곳에 나타나신 것이다. 그들을 향한 말씀이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하) 하시고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이 떠났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하)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재창조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며 살던 때로 돌아간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새롭게 재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하여도 우리를 대변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즉, 하늘 법정에 우리를 위한 변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그 사랑하는 아들이 요구하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들어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께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셔야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를 받은 자만이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 막 16:8)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세상은 뒤집혔다 . 시신을 찾는 자들이 있었고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온 지역이 소란하였다 .   그의 제자들 역시도 실망한 상태로 각 자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 엠마오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 . 두 제자의 대화의 내용은 당연히 부활하신 그분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였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세상을 발칵 뒤집은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에는 부활절이 지나도 세상은 놀라지 않는다 . 왜 그러는 것일까 ?   부활의 믿음을 소유한 자라면 당연히 새롭게 태어난 자의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 . 즉 , 속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   부활절이 지난 오늘 이러한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즉 , 성령충만을 받은 자의 모습이다 . 성령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능력이다 . 이것이 하나님 앞에 산 자로서의 은혜인 것이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얻은 자들입니다 . 아버지의 능력을 찬양하고 ,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감사하고 ,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감화 감동에 감사를 하여야 합니다 . 감사와 찬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 선행을 나타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여야 합니다 .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 주님의 성품이 내 성품이 되며 , 성령의 권능이 내 능력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우리는 약속한 복을 받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 이것이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할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롬 6:11)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여야 한다 . 의미가 없는 절기행사는 우리의 육신을 피곤하게 된다 . 고난 주간으로 시작하여 금식과 절제의 강박관념과 또 부활절 아침이 이른 새벽에 예배에 참석하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부 , 성자 , 성령 하나님이 회의를 하시고 결정을 하셨다 . 이것을 십자가의 구속사라고 한다 . 즉 , 결정하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기독론이라 한다 .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루신 것들을 밝히며 소개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구원론은 무엇인가 ? 기독론이 죄인인 나에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 이것은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연합하게 하는 일이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서 그분이 하신 일이 나의 것이 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죄에 대하여 죽으셨고 ,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신 것이다 .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   성령을 통하여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즉 , 죄에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어 말씀을 들으면 순종의 자리로 가게 된다 .   성령님 함께 하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술에 지배를 당하면 네 발로 기어 다니게 된다 . 그와 같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서 성령충만에 대하여 올바른 깨달음이 필요하다 .   성령에게 조종을 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 성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