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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오늘 주일 설교로 느헤미야 성벽 재건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 이 땅에 세워진 교회들이 교훈을 삼아야 할 말씀을 소개하려 한다 .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국 수산궁에서 신하로 있을 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 그의 동생 하나니에게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을 듣는다 . 그래서 그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유다땅 예루살렘에 다녀오겠다고 청을 하여 허락을 받았다 .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독려한다 . 그러나 이방 사람들의 방해공작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 그러자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남은 백성들은 성벽을 쌓았다 .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다 . 너희가 성벽을 쌓은 것은 “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 하였다 .   성벽재건은 오십이 일 만에 끝났다 .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이자 학사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으매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이었다 .   “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 느 8:5)   모세의 율법책을 읽을 때에 백성들은 칠월에 초막절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 그래서 여러 가지의 무성한 나무를 가져다가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절기를 지킨다 .   절기를 지키는 동안 오전 6 시에서 9 시까지는 말씀을 듣고 , 9 시부터 12 시까지는 회개의 기도시간을 가졌다 . 그들의 회개는 이틀이나 지속되었다 . 그리고 돌이킴의 결단이 있었다 .   성벽재건이 완성된 이후에 놀라운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 이방인의 공격을 차단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다 . 그리고 폐허였던 땅은 거룩한 성 , 예루살렘 성이 되었다 .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에 살기를 자청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의 의미를 기억하여야 한다 . 칼과 창과 활을 쏘는 자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인간이 감성을 느낄 때는 마음이 동요되기 때문이다 . 즉 같은 경험을 하였거나 생각이 같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 그래서 마음을 잡아라 , 마음을 움직이게 하라고 한다 .   어떤 이는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하라고 한다 . 그리하면 감동이 넘치고 대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한다 . 그러다보니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있지만 진리의 내용이나 교리는 실종하는 결과를 낳았다 .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 , 성품 , 인격을 전하는 것이다 . 성경은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을 다 밝히고 있다 . 신자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과 인격을 배우고 닮아가야 한다 .   설교의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공감이다 . 그러니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 성경공부는 설교를 은혜롭게 받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   만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설교자가 아무리 열심히 전하여도 허공에 외치는 소리가 된다 .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공감을 하게 되면 ‘ 아멘 “ 이라 화답을 하게 된다 . 그러니 ’ 아멘 ‘ 은 강요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신자들이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분량만큼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작은 믿음의 분량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목사를 찾고 있다 .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 그렇다보니 매년 새로운 목사를 찾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   나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으로 전할 수 있는 목사를 찾아야 한다 .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엡 3:18)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교회가 동네북이 되었다 . 아무나 두드리고 발로 걷어차는 신세가 되었다 . 그러나 이 땅위에 세워진 모든 교회가 같은 교회는 아니다 . 그리고 세상의 잣대로 교회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   어떤 사람들은 도덕 윤리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정의를 내리려 할 것이고 , 또 어떤 이들은 교회사적 역사의 전통으로 바라볼 것이고 ,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친목단체나 봉사단체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   그러나 교회를 올바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선지자와 사도의 가르침 위에 서 있어야 한다 .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다 .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께 보고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곳이 아니다 .   저들은 십일조를 하나의 제도라고 생각을 한다 .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 제도는 강제력이 함께 하지만 십일조의 정신은 감사에 의한 자발적인 의지적인 행위이다 .   지금도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 신자들은 정신 차려야 한다 . 선지자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그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교회가 이 땅위에 진정한 교회가 된다 .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 엡 2:20)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 공평하다 ’ 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 . 또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정의를 구하는 필수적인 조건으로 사용한다 .   신자들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찬양한다 .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 제비뽑기라는 것이다 . 기업분배시 , 범죄자 색출시 , 성전직무 분담시 , 사도 선택시에 사용하셨다 .   그러나 제비뽑기는 행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 제비뽑기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 지파의 수에 따라서 땅을 분배하였고 , 믿음의 분량에 따라 복을 주셨다 .   믿음의 분량에 따라 복을 준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분량만큼을 말한다 . 하나님의 말씀에는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이 있다 . 즉 말씀에 순종을 하면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만큼이 나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이다 . 믿음의 분량만큼 복을 주심을 명심하여야 한다 .   “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 잠 18:18)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을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 습관 ’ 은 일상의 반복되는 행위라 한다 . 습관은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정신과 심리에도 영향을 주고 있고 잘못된 습관 가운데는 ‘ 게으름 ’, ‘ 변명 ’ 이 있다 .   성경에서는 ‘ 게으름 ’ 에 대하여 경고한다 . “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을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 잠 20:4)   게으른 자에게는 가을철에 곡식을 거둘 때에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씨를 뿌리지 않았거나 늦게 씨를 뿌려 아직 낱알이 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땅을 분배받지 못한 일곱 지파가 있었다 .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가만히 있지 말고 땅을 정복하라고 명한다 .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 ‘ 부지런함과 정직함 ’ 으로 습관을 들여야 한다 .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나 열 므나를 남긴 자의 칭찬이 작은 일에 충성된 자라하며 상을 주셨다 . 즉 습관적이며 반복되는 것이 작은 일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들의 믿음의 생활은 ‘ 게으름과 변명 ’ 이다 . 그 증거로 거둘 낱알이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변명을 잘한다 . 교회가 어떻고 목사가 어떠하다며 길게 수다를 떨고 있다 . 이것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자나 , 한 므나를 수건에 감추인 자가 된다 .   그들에게는 ‘ 게으르고 악한 종 ’ 이라 하였다 . 그들은 상급을 받은 것이 없다 . 오히려 어두운 바깥으로 쫓겨나 이를 갈며 지난날을 후회하며 울고 있다 .   믿음의 생활은 누구를 탓이나 하는 게으름이 아니다 . 나의 생활습관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우리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요즘 ‘ 교회 ‘ 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 그렇다면 예전에 어떠했다는 것인가 ? 예전에는 재정이 넘쳤었는데 이제는 물질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수가 감소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정확한 표현이 없다 .   ‘ 교회 ’ 는 세속적인 것에 대한 경계 장치가 있다 .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있고 , 성전을 지키기 위하여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 그리고 망대와 성문이 있다 .   망대는 높은 곳에서 멀리 볼 수 있는 곳이다 .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그리고 성문은 거룩을 구별하는 문이다 . 제사에 드릴 제물이 들어오는 문과 택함을 받은 자들이 들어오는 문이 있다 .   교회에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파수꾼이 있어야 한다 . 그리고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하고 , 주님께 생명을 바쳐 헌신하여 성벽을 쌓을 수 있는 신자들이 있어야 한다 .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외치고 있다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 그리고 망대와 성벽과 성문을 다시 세우자고 하였다 .   교회가 지금 하여야 할 일은 망대와 성문과 성벽을 세워야 한다 . 교회를 파괴하려는 세속적인 것들을 주시하여야 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구별하여야 한다 . 그리고 아무것이나 다 받아들이면 안 된다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그 사랑으로 헌신하는 제자들을 생성하여야 한다 .   그러므로 든든한 교회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목사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며 열정이 있는 신자가 함께 할 때에만 세울 수 있는 것이다 .   “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 셀라 )”( 시 87:3)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 벧전 5:14) 성경 말씀 가운데 사랑의 입맞춤으로 인사하라 한다 .   다윗과 요난단이 헤어질 때에 장면은 너무도 감동적이다 . 다윗이 요나단에게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었고 ,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다고 한다 .   그 당시의 문화로는 세 번 절을 한다는 것은 왕이나 왕자에게 예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요나단에게 세 번 절을 한 것은 생명을 살려준 생명의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   생명의 의인을 만나는 기쁨으로 입을 맞추고 , 헤어짐의 이별에 슬픔으로 입맞춤이었다 . 다윗에게는 생명같은 친구와 이별의 아픔과 정처없이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안타까워 더욱 이별의 아픔이 켰을 것이다 .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입맞춤의 인사를 하라 한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의 기쁨으로 인사를 하고 , 신자가 핍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걱정하며 헤어지는 아픔의 이별이다 . 이것이 근거가 되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   누구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있다 . 육체의 위기나 질병에서 구하여 주었던 의사가 혹은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히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혼을 구하여준 기쁨이다 .   신자들이 모이면 새생명을 얻은 구원의 기쁨으로 인사를 하라는 것이다 . 그리고 서로를 염려하는 헤어짐이다 . 그래서 그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   다윗과 요나단은 깊은 우정을 표현할 때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 이들을 연결하여 주는 조건은 생명이다 .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   그러므로 신자들은 무수히 많은 다윗이나 요나단을 갖고 있는 것이고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기쁨이요 영원한 즐거움이다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교회는 세상에서 고유의 정체성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 외형상으로는 건물 위에 십자가가 올려져 있으면 교회라고 한다 . 그러나 교회는 본질과 사명이 있어야 한다 . 건물 위에 십자가만 세워졌다고 모두 다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교회의 정체성은 건물 위에 십자가가 아니다 . 교회로 모인 신자들의 정체성으로 구분이 된다 . 주의 백성들이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된다 . 백성들은 계명에 순종하므로 당연히 주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   교회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 교회는 생명체이다 .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의 공동체이다 . 거룩이라는 정체성으로 하여야 할 일이 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한다 . 아버지의 이름을 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교회는 살아있지만 죽은 교회나 다름이 없다 . 생명이 있는 교회는 생동감이 있다 . 주님의 가르침과 소원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   주여 , 주여 외친다고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주여 , 주여 외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   이제 신자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 . 주의 계명에 순종하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한다 . 이러한 신자들이 모인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된다 .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요 14:1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서적가운데 인기가 있는 책은 ‘ 성공과 부자 ’ 가 되는 비법을 소개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 성공한 사람의 경험담을 근거로 쓴 책이라면 더 인기가 있다 .   그래서 어떤 이는 ‘ 생각을 바꾸어라 ’, ‘ 생활습관을 바꾸어라 ’, ‘ 적은 돈이라도 저축을 하라 ’, ‘ 주변사람들을 잘 관리하라 ’ 등등의 주장을 펼친다 .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 . 그 비법으로 지금의 성공의 자리에 와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 성공과 부자 ’ 가 되는 비법에 관심이 있는 자가 있다 . 또 이것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러 다니는 강사도 있다 .   그리스도인이 ‘ 성공과 부자 ’ 가 되는 비법은 올바른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다 .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예배이다 .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여기거나 귀찮게 여기는 자는 결코 복을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벌을 받는 자리로 가게 된다 .   신자는 먼저 예배의 진정성을 알아야 한다 .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다 .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으로 따라야 한다 .   구약의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여로보암의 생각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장소가 아닌 곳에서 제사를 드렸고 , 레위사람이 아닌 일반의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고 ,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절기의 날짜를 왕의 생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   오늘날에도 예배를 편리한 곳에서 드려도 된다고 하고 , 설교도 아무나 할 수 있다고 하고 , 아무 때나 한가한 시간을 골라 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 그러니 수고하며 교회를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 그 결과로 세워진 교회의 소중함과 가치를 잃어버렸다 .   그러므로 주일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시간이요 , 모든 복이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

 우리 주변에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자주하는 사람은 그의 안에 자존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흔한 말로 ‘네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순간순간 변한다는 것이다. 거짓이 들통나도 언제 그랬나는 듯이 너무도 태연하게 하다. 심지어는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왜냐하면 거짓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울음과 감정을 동원하여 변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거짓에는 실체가 없다. 그래서 허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허무함으로 가게 된다. 비관주의자가 된다. 삶이 아름답지가 않다. 죄 가운데 빠져 방임을 하다가 죄의 종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신자들 가운데도 거짓말을 자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지 못함에 있다. 즉 그의 안에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진리는 선한 것을 추구한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 생명을 충만하게 하시며 영원한 즐거움을 주시는 분이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 성품이 모두 선하시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라 찬양을 하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 선과 악을 구분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속삭이었다. ‘너도 선악과를 먹으면 선과 악을 심판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과 동일한 자리에 오르려 하여 교만의 죄를 범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예수님은 거짓의 아비는 마귀라고 말씀하셨다. 마귀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바꾸는 자이다. 신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실체를 무시하고 허상을 따른다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자신이 마귀의 종임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내 것과 남의 것 ’ 을 잘 구분하여야 한다 . 이것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지면 커다란 책임을 져야함을 명심하여야 한다 . 더 나아가 법적인 구속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자신의 것이 아닌 돈이나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때는 횡령죄가 되고 ,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와 정분이 나면 간음죄가 된다 .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분명한 경계가 있다 .   회사에 경리를 담당하는 사원이 맡은 일을 회사의 돈을 관리하는 일이다 . 그런데 회사공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을 하면 횡령죄가 된다 .   경리사원에게는 회사공금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다 . 만일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비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혜와 판단력이 필요한 것이다 .   주님의 교회나 신자들에게는 책임이 주어졌다 .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라는 책임의 의무이다 . 이 나라에 속한 백성들에게는 “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 ” 에 대한 판단력이 필요로 한다 .   “ 하나님의 것을 내 것 ” 으로 살아야 한다 .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라 한다 .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는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되며 , 세상 앞에서는 비난을 받게 된다 .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책임을 묻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   책임이라는 것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 주님께서 비난 받으심을 알아야 한다 .   그러므로 신자에게 성화의 과정은 “ 주님의 것을 내 것 ” 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리고 내 것으로 만들어 책임지는 자리에 서 있음을 말한다 .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요 15: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 세습 ’ 이란 , 국어사전을 보면 재산 , 신분 , 직업 등을 한집안에서 자손대대로 물려받는 것이라 한다 . 이 지구상에도 왕의 지위를 세습하는 나라가 있다 . 오늘날에도 교회 세습이라는 문제 때문에 언론에 가끔 이슈가 되곤 한다 .   하나님 나라의 복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한다 . 움켜잡는다고 내 것이 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전능하신 하나님의 편 팔과 크신 손으로 부어주시는 은혜가 훨씬 더 큼을 깨달아야 한다 .   이 땅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라면 자기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 오히려 후배들에게 , 후손들에게 ‘ 나를 밝고 올라 더 크게 되어라 ’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 요 14:12)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자신의 이름이 세상 끝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 그 일을 위하여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 하늘로 올리어 가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성령을 통하여 일을 하고 계시다 .   예수님의 소원은 아버지의 이름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인데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 그렇다면 교회는 성령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요 사명이다 .   후계자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은 성령이 함께 하는 자이다 . 성령이 함께 하는 자만이 주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 . 그리고 전임자의 영역에 갑절이 임하도록 하는 간구가 필요하다 .   엘리사 선지자의 사역이 전임자 엘리야에 비하여 더 빛이 났던 이유가 있다 . 엘리사가 엘리야 하늘로 올리움을 받기 전에 영역에 갑절이 임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