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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기도 ( 祈禱 ) 는 신에게 무엇인가를 간청하는 행위를 말한다 . 즉 신에게 의사소통을 하려는 인간의 행위 양식이다 . 그런데 모든 종교가 그들의 신들에게 기도를 한다고 한다 .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각기 다른 방법으로 묵상 또는 수행을 한다 .   기독교는 기도에서도 다른 종교와 분명히 달리하고 있다 .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고 영광을 나타내신 것들을 구하기 때문이다 . 구약의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 아브라함의 하나님 ,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 “ 간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엄위를 보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조상들의 하나님 ,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고 영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 영광을 우리들에게도 나타내 달라는 믿음의 기도이다 .   사도 바울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 그는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 영광의 아버지께서 ” 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 왜 그럴까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나타내신 영광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하셔서 능력을 주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을 주시고 ,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에 살려주셨다 .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셨던 능력과 은혜를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은혜과 영광과 진리를 나타내셨다 . 또한 아들을 통하여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 . 이렇게 하시므로 인하여 아버지의 이름도 영화롭게 되고 아들의 이름도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나타내신 영광을 제자들에게도 나타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들이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나타내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하나님은 품안에 계시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면서 죄인들을 구원하였다 . 왜 그렇게 하셨을까 ? 십자가에 못박으시지 않고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는 없는가 ?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였는지 아주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가 선택을 받은 것은 분명한 목적을 “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 살후 2:13) 라고 교훈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겠다는 이유이다 . 즉 구원받은 자는 거룩하게 되어 진리를 알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속물이 되게 하심은 ,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들의 죄와 죄악들을 완전히 도말시켜 거룩하고 흠이나 티가 없게 만들기 위함이다 . 거룩이라 함은 내적인 성결을 말하는 것이다 . 죄와 죄의 성품으로부터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 된다 .   거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 된다 .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에는 그의 속성이 함께 한다 . 만일 거룩하지 않는 일을 하시게 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 , 주님과 동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의 속성인 거룩 , 사랑 , 의로움이 함께 하여야 한다 .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 “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 암 3:3) 즉 , 뜻이 같지 아니하면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창 5:24), 에녹은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의롭다함을 칭함을 받은 자들이다 . 이것을 생명체로 표현을 할 때에는 새롭게 된 피조물이라 한다 . 이것은 분명 이전과 이후의 차이점이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 이전과 이후의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죄 가운데 잉태하여 태어난 인간은 죄성을 갖고 태어났다 . 죄성을 갖은 인간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죄성과는 상관이 없다함을 말한다 .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죄성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 이제는 영적인 본성 새로운 원리와 양심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 그래서 새롭게 된 자는 죄의 성품 아래에 있었던 것을 애통해 한다 .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 옛사람 “ 과 ’ 새사람 ‘ 이라 한다 . 옛사람과 새사람은 함께 할 수가 없다 .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지배하는 원리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 갈 5:17) 즉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 그분은 성령을 보내셔서 죄인들의 본성을 새롭게 하게 한 다음에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신다 . 기독교는 머리로 진리를 깨닫는 종교가 아니다 . 죄의 본성을 새롭게 하여 영적인 본성의 씨앗을 심어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비그리스도인 , 즉 옛사람과 함께 하면서도 아무런 갈등이 없다면 아직도 본성의 변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 혹은 믿음의 작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모르고 있을 수 있다 .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이다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그 분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   교회의 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기독교는 선한 행실을 강조한다 .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 하지만 모든 종교가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그렇다면 기독교의 선행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알아야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그리스도인들은 칭의 교리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어 진행이 된다 . 다시 말하면 칭의 교리와 연관이 된 것으로 선행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다 .   하나님이 창조한 빛은 완전한 빛이다 . 그런데 전기불이나 성냥불도 불이라고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선한 것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으로 안다 . 그러나 인간들이 만든 전기나 성냥불이 있듯이 자기의 생각으로 만든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기독교의 선행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 즉 선행에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는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 준 것으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알고 한 것을 선행이라고 한다 .   기독교의 선행의 목적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시려 하는 것들을 택함 받은 백성들이 삶에서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 선행을 할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할 수 있고 , 또한 성령이 함께 하여야만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 주님의 참된 모든 선행은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이다 . 주님은 자기의 뜻대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쁘게 하시기 위하여 일을 하셨다 .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좋아 하셨다 .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는 것이 선행이라는 것이다 .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과 의지적인 순종이 함께 함을 알아야 한다 . 그렇다보니 선행의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교회를 출석하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하나님을 “ 아빠 아버지 ” 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롬 8:16), 즉 성령이 함께 하는 자만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 “ 아빠 아버지 ” 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기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라는 것이다 .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 나를 보내신 자가 있다 . 아버지가 일을 하시니 나도 일한다 .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아버지가 일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심이다 “ 라고 말씀하셨다 .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일을 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 상속자 , 후사의 의미도 같은 뜻이 된다 . 우리들은 유산을 상속받아 내 것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만일 그렇게 된다면 탕자가 되는 것이다 .   눅 15 장에서 “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 에서 맏아들과 탕자가 등장을 한다 .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기쁨으로 맞이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자 맏아들은 불만을 갖는다 . 그에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   그러자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셨다 . 다시 말하자면 맏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곧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자기의 쾌락을 즐기었던 자이었다 .   우리에게는 맏형이 있다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우리 주님이시다 .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을 하셨다 .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런 의미를 말하고 있다 . 즉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죽기까지 순종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 그 이유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만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믿음은 하나님의 세계이며 통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 이 믿음의 시작은 성령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셔야 시작이 된다 .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하여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라고 하였다 . 즉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실재의 증거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 실상이라는 것은 확증이다 . 확실한 보장이라는 것이다 .   믿음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실재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는 말이다 . 그렇게 되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가 됨을 알 수 있다 .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시작하셔야 “ 나 “ 라는 존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바라는 소망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   소망은 믿음을 동반하여야만 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실재의 세계에 만들어 놓으신 것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중에 있다 . “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 마 6:10) 의 말씀이다 .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게 하셨다 . 우리 주님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시며 확신을 갖게 하신 것이다 .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한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셨다 .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것이다 .   믿음이 크다는 것은 눈에 보

하나님을 찬미하니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그 날에 세례를 받은 신도의 수가 삼 천이나 더 하였다 .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사 듣는 이들이 찔림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았다 . 이것이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셨던 역사이며 증거이다 .   우리는 그 다음이 궁금하다 . 세례를 받은 자들이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 그런데 그들은 사도들 곁에 있었다 .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대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 이 공동체의 모임이 최초의 교회 , 예루살렘 교회이다 .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신도들의 기도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많았다 .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과 말씀의 능력 앞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어서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 즉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하였다 함을 말한다 .   초대교회의 믿음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외를 하고 , 이웃에게는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기쁨으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육신의 떡도 기쁨으로 먹었다 . 즉 하나님의 말씀의 기쁨으로 인하여 떡을 떼는 기뻤다는 것이다 .   초대교회 교인들은 함께 생활을 하면서 부자나 가난한 자가 서로 불편함이 없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을 하고 많이 거둔 자는 적게 거둔 자를 위하여 나눠 주는 삶을 살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였다 . 이뿐만 아니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 . 칭송을 받았다고 함은 그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생활이 온 백성에게 지혜롭고 아름답게 보였다함을 말하는 것이다 . 그리하였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 교회는 온 백성들이 보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고 찬미하는 것이 지혜롭고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자들이 없다 . 또한 이웃을 내 몸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믿으며 사는 것을 말한다 . 즉 하나님이 은혜를 선물로 주심으로 인하여 믿음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다수의 신자들이 착각을 하는 것은 반대로 생각을 하고 있다 . 만일 그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에 대한 증거는 자기의 자랑과 교만으로 나타나게 된다 .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분들이 있다 . 금식기도 많이 하시는 분 , 철야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들 , 성경을 몇 번 통독하신 분들이다 . 그런데 이런 분들의 공통점이 자기 자랑이 많고 교만하다는 것이다 .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하여야 한다 .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나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 구원의 시작에서부터 구원의 과정과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교만한 자들의 특징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여 주신 이후로는 자기가 알아서 이 자리까지 왔다고 한다 . 그러다보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 만나는 사람마다 비판과 정죄를 서슴없이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아직도 믿음의 진실을 모르는 자이다 .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말한다 . 믿음이란 모든 구원의 복이 우리에게 임하는 통로가 됨을 알 수 있다 .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오게 하는 통로이다 .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우리에게 연결시키는 것이다 .   이와 같은 과정들이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은혜라는 것이다 .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 엡 2:8)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알게 되었고 , 알게 된 믿음을 믿음으로 인하여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이 믿음의 본질적인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늘날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진정한 복음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면 놀라시겠지요 . 설마 그럴까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 그러한 자들이 있다 . 설교자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교리를 설명한다고 해서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눈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 그분의 아들은 육신으로 오셨지만 아버지의 진리와 은혜와 영광을 가지고 오셨다 .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아들의 얼굴에 나타내셨다 . 그러므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 된다 .   성령이 하시는 일은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빛을 우리 마음에 조명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 . 즉 ,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주의 영광을 보고 깨달은 자는 그것을 전할 수밖에 없다 .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본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   그래서 삶의 방향과 목표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 날마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가는 성화의 믿음을 갖게 된다 .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비추는 아버지의 영광을 알고 깨닫는 기쁨이 넘치게 된다 . 이 기쁨은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고 ,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맛본 자만이 진정한 복음을 전하게 된다 . 그러나 오늘날 강단에서 전하여지는 설교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빛의 영광을 자랑하기 보다는 인간의 자랑거리를 늘어놓고 있다 . 그러다보니 유머와 예화가 들어가야 설교라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다 .   설교자가 성경과 교리를 잘 알아야 설교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 설교자는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아버지의 영광의 빛을 보고 지식으로 깨달아야 한다 .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