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12의 게시물 표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다 .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두 종류로 나누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비평을 하는 사람들이다 . 창작은 글을 쓰는 것이라면 , 비평은 창작된 글을 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묘한 것이 비평을 하는 사람들인데 , 그들은 창작을 하지 않는다 . 반면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글을 비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에도 두 종류의 신자들이 있다 . 열심히 봉사하는 일꾼들이 있고 , 반면에 일은 안 하고 다른 신자들을 비판하는 신자들이다 . 교회 안에 공동체에서는 서로 협력하여 봉사의 일을 한다 . 그래서 찬양대도 하고 , 안내도 서고 , 식당 봉사도 한다 .   교역자들이 모든 신자들에게 교회에서 봉사와 충성을 부탁한다 . 어떤 사람들은 정중히 거부한다 .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 더 나아 만일 부담을 부면 교회를 옮기겠다고 한다 .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서 할 수 없다고 한다 .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의 봉사가 있지만 찬양대에서 일어나는 일로 참 말이 많다 . 그중에 하나가 예배 시에 드렸던 찬양이야기이다 . 모두가 다 음악 평론가이다 . 음악은 전공도 안 했지만 , 악보도 앍을 줄도 모르지만 비평이 시작된다 . 곡 선정이 어떠했고 , 지휘자의 폼이 좋았느니 , 누가 잘하고 누가 틀 린 것을 거침없이 말한다 .   그래서 듣는 사람 가운데 핀잔을 주는 말로 그러면 찬양대를 하시면 어떻겠냐고 하면 , 자기는 무대 체질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고 한다 . 이 말은 비평은 잘 하지만 창작을 할 수 있는 실력은 안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창작하는 신자를 좋아 하신다 . 그리고 비평하는 신자는 싫어하신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든지 한 마음과 한 입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 .   신자가 찬양대의 찬양을 비평을 해서는 안 되는 이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의 똑똑함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 있다 . 그 가운데에 교회를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 .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아무나 툭툭 건드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여서 , 자신의 의로움이나 깨끗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 그 사람들의 속마음에는 인류 역사 가운데 최고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를 평가할 때에 , 비판하는 자신의 지적인 수준이 상대적으로 부각된다고 생각을 하는 교만이 있다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고 부요한 은혜를 약속한 곳이기도 하다 .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기에 , 초대교회 당시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로마 사람이나 글을 모르는 무식한 자들도 함께 모였는데 , 이것은 정치와 문화적인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이다 .   그런데 정치와 문화의 사상이 다르므로 말미암아 사람들 간의 문화적인 충돌이 있었다 . 히브리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구제와 가난한 과부를 돕는 일에 헬라사람들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사도들은 헬라인들인 일곱 집사들을 세워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   오늘날 교회에도 출생지역이 다른 사람들 , 학교 , 사상 , 취미를 초월하여 사람들이 모였다 . 그래서 다양성을 띠면서도 목표와 방향은 같다 . 그런데 같은 방향을 향하여 나가면서 논쟁이나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거룩을 향하여 나가고 있지만 ,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임이다 .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에는 누구든지 나아와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며 , 세상의 어떠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무릎을 꿇는 곳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요즘 신자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 각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 즉 이 말은 자기의 생각대로 예배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교양강좌 내지는 신앙 강좌로 생각을 한다 . 그러다보니 감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 자기가 동의하는 내용은 인정하지만 , 듣기에 거북하고 인정하기 싫은 것은 거부한다 . 그리고 설교를 평가하는 자리에까지 이른 자들도 있다 .   구약의 제사법은 하나님과 화목을 위하여 ,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 약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 그래서 제사를 드리러 갈 때에는 제물을 가지고 갔다 . 그러니 제사를 드리려면 죄와 함께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 .   신자들이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준비하고 나가야 할 것이 있다 . 죄와 예물과 말씀에 대한 확인이다 . 그런데 요즘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죄를 들고 오지 않는다 . 그 이유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살면서 무슨 죄를 지었냐고 오히려 항변을 한다 . 자기는 의롭고 깨끗한 자라 한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데 , 알고도 짓는 죄가 있고 , 몰라서 짓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 여기서 문제는 모르면서 짓는 죄는 죄가 아니라 생각한다 .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을 몰라서 짓는 죄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 이것에 대해서는 전혀 죄의식이 없다 . 그러니 늘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다 . 내가 세상 일로 바빠서 성경공부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알지 않으려 하는 죄가 무서운 것이다 . 이스라엘의 패망이 여기에 있었다 .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아서 자기들 마음대로 믿다가 멸망을 자초하였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 안고 생각하였다 . 더 나가 자기들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생각이 동일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이 먼 것 같이 다르다 .   믿는 자들이 경각심을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신자들은 세상에서 지위를 가지고 살고 있는데 , 그 지위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지위로 죄와 사망에 대하여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산다 . 왕의 자리는 누구에게 지배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 권위로서 통치의 자리에서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는 위치에 있다 .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연합한 자가 되어서 ,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내 것이 된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보한 죄와 사망에 대하여 왕 노릇을 하신 것 같이 우리들도 은혜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이것은 죄에 대하여 호통을 치는 외형적인 권세의 자리보다는 , 그동안 나를 지배하고 나를 괴롭게 하였고 , 거짓된 자로서의 삶에서 이제는 거부하고 오히려 나에게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의미로서 이해하여야 한다 .   유명한 신학자인 데이비드 웰스는 미국의 기독교가 오늘날에 이르러 교인이 감소하고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교리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인데 , 결국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은 교회를 다 떠나갔다고 하였다 .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 아직도 죄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고 , 삶의 내용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의 고집이 아직도 있다면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된 권세와 지위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어두움 가운데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고 , 영원히 견고한 나라의 왕위를 가지고 오시는 것이다 . 우리를 은혜 안에서 왕 노릇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다윗 왕권의 족보로 오시며 , 아브라함에게 임하셨던 그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기 위함이다 .   그런데 신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오른 자로서 ,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영광을 가지고 있다 . 이 지위와 영광은 우리가 이미 세례를 통하여 얻은 것이다 . 세례는 죄 씻음은 물론이고 , 은혜의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 신자와 불신자는 세상이라는 곳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질문에 착한 행실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면만 생각을 한다 . 그러나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도 깨끗한 사람이 많다 . 어떤 면에서는 불신자가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하는 자들이 더 깨끗하고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다 . 그래서 이러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비교를 한다면 신자들은 할 말이 없다 . 왜냐하면 우리들의 행실로 보아서는 그들보다 착한 행실을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런 것들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 세상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는가에 기준이 있다 .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가 ? 아니면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가의 차이인 것이다 .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어두움이라고 말하는데 , 이 어두움이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어두움 가운데로 보내신 것이다 . 그런데 이 어두움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곳이 되며 ,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자기의 주장으로 사는 곳이 세상이다 .   십자가 구속의 진리로 보면 세상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곳이 되면서 또한 구원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 구원받은 자를 새롭게 된 피조물이라고 한다 .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어두움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 저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 즉 빛을 향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체로서의 창조의 의미를 갖고 있다 .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 함은 그의 마음이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신자들은 새롭게 창조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의 사물과 이치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과 질서로 이해하며 바라보라는 것이다 .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좋아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 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한 동안 열린 예배라 하는 것이 유행을 하여서 강대상도 치우고 그 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예배의 형식마저도 없애 버리는 일이 있었다 . 그런데 이렇게 하였던 이유는 교회에 처음 오거나 새로운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그래서 예배의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을 하였고 , 새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배 중간에 연극공연도 하였고 , 설교자도 청중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단상 아래로 내려와 말씀을 전하곤 하였다 .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 와서는 그들의 주장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것 같은데 , 그들의 발상은 새신자의 수준에 맞추어 놓으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사람들을 앞세우고 홍보를 하였다 . 홍보를 위하여 앞자리에 섰던 사람들이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믿음이 성숙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하였고 또한 도덕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었었다 .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는 신실함과 거룩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이런 아이디어를 낸 목회자의 권위도 실추를 하며 ,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지 못함으로 공인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   이렇게 교회와 목회자가 권위와 순수성을 잃어버리자 , 이제는 세속적인 교회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 그 이유는 기독교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안에 있어서 믿음과 순종을 강조하는 것인데 , 세속적인 교회는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사람이 행각대로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였다 .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신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발견하고 개발을 하면 유능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 .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이어온 예배의 형식에는 내용과 가치가 있다 . 성전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기독교의 신앙은 관념적이거나 사상적이지 않다 . 설교의 내용이 추상적이며 , 감성적인 내용이 신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 그러나 설교는 삶의 내용과 성품과 행동을 변하게 하는 것인데 , 이것은 추상적인 내용과 바라는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기독교인은 비전이라는 명목 아래 너무나 지나친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다 .   어떤 이의 가르침은 구하는 것마다 다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그저 간구하고 부르짖으라고 한다 . 원하는 것이 내 것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 내 것이 된다고 하는 집요한 집착을 가르치는데 오히려 토속신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 또한 고통의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뇌 속에 세뇌작업을 하여 스스로 최면을 걸게 하여 현실의 문제를 잊게 하려하고 , 현실의 고통이 또 생각이 나면 반복인 훈련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며 , 감정을 호소하여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함을 기억하게 하여 , 그것을 기억하게 하며 생각나게 하여 그것이 은혜이며 ,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 하여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이 있다 .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지 않아도 되는 메시지를 전하는 현대 과학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는 자들이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유효한 것이 된다 . 인간은 스스로 선한 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과 힘도 없어서 , 율법을 가지고 있어도 생명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죄만 더 짓는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죄가 없으셔서 십자가의 화목제물로 드릴 수 있는 흠이 없는 제물이 되셨다 . 사망의 권세를 부활의 권세로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 천국시민의 자격을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여 주시며 , 의로움과 거룩함을 공급하여 주시면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