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신자와 불신자는 세상이라는 곳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질문에 착한 행실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면만 생각을 한다. 그러나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도 깨끗한 사람이 많다. 어떤 면에서는 불신자가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하는 자들이 더 깨끗하고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비교를 한다면 신자들은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행실로 보아서는 그들보다 착한 행실을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는가에 기준이 있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가? 아니면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가의 차이인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세상은 어두움이라고 말하는데, 이 어두움이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어두움 가운데로 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이 어두움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곳이 되며,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자기의 주장으로 사는 곳이 세상이다.
십자가 구속의 진리로 보면 세상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곳이 되면서 또한 구원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구원받은 자를 새롭게 된 피조물이라고 한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어두움을 향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저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즉 빛을 향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체로서의 창조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 함은 그의 마음이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새롭게 창조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의 사물과 이치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과 질서로 이해하며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재물도 하나의 수단이나 편리함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그런 성품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이해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실패와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다. 또한 문장을 외운다고 해서 뜻도 함께 해석이 된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해석이 되지 않으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뜨거움과 열심도 필요하지만, 그 반면에 정확하고 세세한 면도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안에서만 응답을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지하였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 힘을 쓰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제사를 좋아하셔서, 제물에 관심이 많으시고 자주 제사를 드리면 좋아하는 줄로 알아서, 그들은 삶 속에서 이방의 신도 섬기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크고 좋은 제물을 제물로 드리기에 바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풀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자의 믿음이다.
신자들은 누구를 만나도 변함이 없는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거나, 필요에 따라서 조건적인 거래가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친절을 베푸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속이 탱탱하고 꽉 찬 사람이지, 탱탱하고 꽉 찬 척을 하는 사람이 아니며,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더 해가는 사람들이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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