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12의 게시물 표시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2012년은 각 나라마다 선거가 있어서 복잡하고 시끄러울 것 같다. 정치가들은 사람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표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시대에 따라서 지도자의 상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이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세명의 김씨가 정권을 맡아서 해 봤지만 오히려 박 대통령만 못했다는 결과에 따른 것이다. 지금 박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박 대통령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기대하였던 지도자들이 국정운영이 실망으로 나타남으로 인하여 그 옛날이 그립고 옛사람을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요구하였다. 왕을 요구한 이유는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침략을 당하고 전쟁에서 패하는 이유가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의 제도를 허락하시면서 자연을 통하여 뜻을 전하셨다. 추수철에 하루 종일 비를 내리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앞에 출입하는 자로서 세운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먼저이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과 은혜와 자비를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하심에 따라 국정이 운영되어야 하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패한 이스라엘은 백성을 다스리고 지도하여야할 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있었고, 뇌물을 받고 불공평한 판결을 한 것이다. 또한 성안에서 관리하는 자들이 물건을 빼내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왕정정치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네 씨를 통하여 견고한 터 위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다.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갖고 계시다. 그 분이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이 앉아 계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신자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안에서 간신히 질서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인데, 특별은총을 받은 택한 자들은 종말론적인 삶으로 하나님이 유보하시고 계시는 심판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기다리며 살아야 할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믿음을 잘못이해하고 행하면 낭패를 본다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자기의 치성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의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자기의 뜻을 이루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겠다는 위험한 생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을 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다. 그들 역시도 자기들의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제사를 드릴 때가 되면 아주 좋은 제물만을 들고 성전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한다. 즉 어떠한 환경과 조건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화를 더디 내고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 좋아 하시고, 영원한 사랑을 갖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분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에 만사형통을 바라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은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거룩한 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순종의 자리로 가는 것이며, 우리의 욕심으로 가는 것은 정성이나 치성으로 가는 것이다. 욕심은 결국 우상숭배로 가게 된다. 시편의 기자들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바위이시라 할 수 있는 자는,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고 경험한 자가 할 수 있는 찬양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내가 직접 경험하여야 하는 것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생각보다는 간단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가라하면 안 가고, 가지 말라 하면 가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하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을 해도 쉽게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고 들어가겠다고 하여 열두 정탐꾼을 보내게 된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자들에게 보고를 듣고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난리를 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다. 불평과 원망의 내용은 가나안 땅에 있는 힘센 원주민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죽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이 그들의 소원대로 해 주신다고 하여, 그들이 광야에서 다 죽을 때까지 40년이 걸린다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야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그들이 전쟁을 하더라도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도 나아갔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를 당하였다. 또 불순종을 하였던 사울 왕이 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기를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 이외에는 누구도 제사를 집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울은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블레셋이 곧 공격을 해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한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제사를 드리게 된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사울 왕이 아닌 다른 왕을 세운다고 하셨다. 사울 왕은 여기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요나단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런 그의 반응은 엉뚱하게 나타난다. 자기의 보복을 위하여 금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아들이 요나단이 왕의 명령을 어기는 자가 된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려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러나 사울은 금식을 하나의 힘으로 생각을 하였다. 이렇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리더십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까지 잘 인도하였던 사람이었다. 모세의 지도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이다. 그 땅은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지켜주심으로 인하여 평안한 가운데 희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까지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다 들어야 했다. 그럴 때 마다 모세는 엎드리어 백성들의 말을 참고 들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을 드렸다. 하나님은 그 때 마다 모세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셨다. 모세에게 배워야할 더 놀라운 것은 비록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또 가나안 입구까지 잘 인도한 것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에,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성실하심으로 택한 백성을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여 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또한 홍해를 건너오면서 행하셨던 기이한 일들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지도자인 모세는 가야할 곳과 그곳에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즉 지도자는 미래의 미리 예견하고 앞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비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어디로 가야하는지 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곳을 가는데 우리의 생각이나 철학으로 가는 곳이 아니다. 또한 교회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확인하고 사명을 감당하면 교회로서 책임을 다 하는 것이다. 앞으로 향하여 나가야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여야 한다. 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는 영이라

부모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불효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에 근심을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내가 나를 걱정하는 것보다 더 걱정과 근심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자식을 불효자라고 한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은 태어 날 때에 불순종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불순종이라 함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 사단이 등장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던 아담과 하와를 자기의 말을 듣게끔 속삭이며 다가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마귀는 자기의 권위를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말을 들으며 살고 있는 사람을 불순종의 아들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귀의 말을 듣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왜 이런 일을 하려는가에 의문이 든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손수 창조하신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마귀는 타락한 천사들이다. 천사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마귀가 창조주의 자리에서 영광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피조물에게 영광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마귀가 하려하는 일은 하나님의 높은 자리까지 오르려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동등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여 자기의 말을 듣게 하려 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약속이나 맹세는 그 사람의 이름과 인격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누구와 했느냐가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중에는 아버지의 권위마저도 잃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시편의 저자는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찾아 오셔서 약속하셨던 것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찾아오셔서 약속을 한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밝히고, 그분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자요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지존자이며 창조주라고 소개를 하고, 그리고는 그분을 찬양을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하셨던 약속은 자손을 통하여 견고한 터 위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이 약속에는 그 나라가 세워지기까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현실에서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다. 환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승리를 얻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침략을 당하여 나라가 없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유다의 족보는 계속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가 예수님이 탄생을 하신다. 그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같지 않아서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곳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을 통하여 이 나라를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이 약속과 이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나라에 백성들을 모으시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세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법이 통치되고 있으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완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세상의 권력이나 풍조에 밀려서 힘이 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지존자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최후에는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현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대한민국에 선거철이 다가오면 표를 얻기 위하여 모든 곳을 다 다니고, 연줄만 있으면 다 만나려 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욕심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교회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광고시간에 자기에게 특별한 시간을 주어서 직접 인사를 하게 해 달라든가 아니면 잘 소개를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여야 하고 왜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납득이 될 만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 당선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 소견의 전부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치가의 힘이나 나라의 권력으로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욕심은 힘을 얻으면 낮은 자리에서 섬기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섬길 기회를 달라고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정치의 힘을 빌리려 하셨다면 모세를 사용하지 않고 그 당시에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애굽의 바로 왕을 훈련시켜서 사용을 하시거나, 로마의 황제들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쁘게 사용하시던 방법은 십자가의 도이다. 낮은 자리로 내려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섬기는 자의 자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섬김은 주님을 따라 하는 것을 말한다. 섬기겠다는 자들이 막상 당선이 되면 금방 자세가 돌변을 한다. 그들이 보여 주었던 겸손은 일부러 하는 겸손인 것이다. 즉 겉과 속이 다른 겸손이다. 우리 주님이 보여 주신 겸손은 겉과 속이 같은 것이다. 정치의 세계라는 곳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다루는 곳도 아니다. 그곳은 타협의 세계이다.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챙길 것은 챙기고 줄 것은 주는 곳이다. 그래서 유능한 정치인은 타협과 술수를 잘 쓰는 사람이다. 한국이 정치의 후진국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타협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고집만을 주장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정치집단이다. 우리 기독교인을 순한 양이라고 비유한다. 양은 다른 동물을 공격하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수의 양들이 있어도 늑대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좋은 정치라 함은 백성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와 마음의 걱정을 덜어주어 평안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정권이 시작을 할 때는 금방 세상을 변화시킬 것 같았지만 실망 속에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쓰고는 뒤로 사라지곤 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꺼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여기서 젖과 꿀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생각하려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하여야 할 일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을 진멸하며 내어 쫓아야 했다. 또한 실제로 젖과 꿀을 공급받았다는 내용도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란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풍요함을 주실 것이며, 꿀은 사람의 마음을 달콤하게 하여주는 행복과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의식주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마음의 평안함을 얻어 온유함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되며, 명령하신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 제사법이고 공동체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법이다. 인간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사람들의 손에 있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나라의 지도자로 선택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의 공약은 자기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행복으로 안내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공약은 대대로 전해져오는 거짓말 중에 거짓말이다. 이 땅에서 사람이 세운 지도자 중에 이와 같은 일은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매한 백성들은 지난번에도 속았는데 또 속는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법을 스스로 지키며 자유롭게 인격적으로 살 수 있다. 스스로 법을 지키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보면 하나님 나라와 대비되는 단어로 세상이라는 단어를 쓴다. 도대체 세상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 길래 이 단어를 쓰게 되는가? 세상이라는 곳은 진리가 없는 곳이다. 즉 사람들의 정욕과 욕심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유행이다. 이 유행은 변하기도 하고 돌기도 하여 왔다가 갔다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탐욕과 정열에 의하여 변화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시게 판결을 한 빌라도의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의 고소로 인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가셨다. 예수님에게 심문을 하던 빌라도는 예수님이 어떤 잘못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소리쳤다. 만일 당신이 그와 같은 판결을 한다면 로마황제에게 불충성하는 종이라고 한다. 로마의 황제는 가이사인데 어찌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자를 가만히 놔둘 수 있냐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로마 황제에게 당신의 판결을 알리겠다는 협박이었다. 협박을 받은 빌라도는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을 한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대표하는 정체성이다. 빌라도의 고백은 자기는 진리를 모른다고 하였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다수결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함이 아니라 힘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다. 나라의 법을 결정하는 입법부의 국회의원이 지역구 주민들에게 선택을 받는데 있어서 진리의 내용을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유익을 공약하여야 당선이 된다. 즉 나라의 정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주어야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지도자는 상황에 따라서 리더십이 바뀌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희망과 기대감에 부풀어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실망과 한숨만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다수의 원칙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사람들은 과학의 지식을 알게 되면서 핵폭탄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핵폭탄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연구하여 소유하고 있다. 물론 이 폭탄으로 주변의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나를 위협하는 시대가 있었다. 핵폭탄 몇 개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했었다. 그런데 지난 수년간의 일들을 보면 인간의 지혜로 만든 과학의 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연의 재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로 맞서려고 한다. 즉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부정을 하는 것이다. 저들은 문제의 시작을 이미 나타난 결과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기독교와 이슬람과 갈등으로 인하여 전쟁이 있고 많은 사람이 죽게 됨으로 인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만일 신들이 없었다면 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과학과 이성으로 밝히는 것이다. 즉 현실의 문제를 역추적하여 밝히려 한다. 그러다보니 문제의 답은 과거에 일을 시작한 이에게 잘못이 있고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못이 없고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생각은 항상 악하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사람들 스스로가 만든 평화는 없었다. 그저 만들었다면 강한 자가 무력을 동원하여 힘으로 누르고 있는 동안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관자이시다. 천지만물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신다. 그분의 역사함을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자연의 문제나 사람의 문제에 있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즉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사람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한계가 여기까지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하고 계시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이 자연의 힘이다. 자연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될 것을 알리는 것이다. 지금도 약속하신 것들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심을 나타내신다. 그리하므로 신자들에게는 더욱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한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해 주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심어 주었고, 외로움을 달래 주었고, 따스한 된장국으로 고향의 맛을 생각나게 하였고, 또한 정착하는데 필요한 행정적인 도움도 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나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준비된 자들이 이민을 오게 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에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곳이 아니다. 이 땅 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역사적인 사실과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 안다면 놀라게 된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알고 뜻을 알 수 있는 곳이 교회이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나타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과 함께 하나 되어서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영광이 있는 곳이다. 지금 이 땅에서 장차 하늘에서 살아야 할 모습으로 사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를 천국의 모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이 교회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있는 교회 가운데 십자가가 달린 교회 건물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얼마나 되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이 거처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시고 교인들의 몸이 연결되어 지어져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위하여 교회 안에 많은 직분을 주셨다. 그 직분을 잘 감당할 때에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된 것은 이미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직분을 잘 감당을 할 때에 신자의 믿음이 성장을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 안의 신자들은 맡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은 천국의 모형을 가지고 있지만 불완전한 교회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분쟁이 있을 수 있다. 즉 불완전하기에 싸움이나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분쟁이 있을 시에는 그 문제의 해결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질서는 믿음이 큰 자가 작은 자의 부족함을 담당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모여 있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기 다르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 안에서 만일 싸움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큰 자에게 먼저 책임을 묻는 것이 순서이다. 평상시에는 믿음이 큰 자로 자처하기를 좋아하지만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나면 자연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믿음은 찾아 볼 수도 없는 것이 교회 안에서의 모습이다. 세상에서는 잘못한 자나 나이가 적은 자가 먼저 잘못을 사과한다. 그러나 교회는 이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큰 자가 먼저 나아가 사과를 하는 것이다. 즉 제단에 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리려 하다가 형제에게 사과할 일이 있으면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목한 후에 제단에 돌아와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믿음이 크고 좋다는 것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 안에는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 고급한 인격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순종의 모습이다. 이러한 고급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신자들이 중직을 맡은 직분자들이다. 중직자들은 이러한 분쟁 가운데서도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현실의 모습은 전혀 아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보다 더 비인격적이다. 세상 사람이 바라보는 교회는 신비로움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세상사람 눈에 비상식적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도의 문을 막는 것이다. 각 자의 마음 안에 있는 자존심이 상하여 분쟁으로 이어지게

믿음과 상식

교회 안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또한 십자가의 도를 따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식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상식의 기본은 서로를 존중하며 지켜야할 예의인데, 그것의 시작은 서로간의 인사이다.  요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교인들끼리 인사를 아니 하는 것이다. 인사를 아니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에 믿음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사랑하고 존재를 인정하여야 한다. 아이다호 한인 장로교회에는 이러한 분들이 진심으로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 16:20)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세월이 흘러갈수록 인간사가 그리 쉽지만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때에 따라서 순간을 판단하여야 하는 일도 있는데 결정을 잘못하면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일은 경우에 따라서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지난 주간에는 7~8년 전에 주택경기가 좋았을 때에 집을 몇 채씩 샀던 사람들을 만났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여 그들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이야기로 들었다. 한마디로 죽도록 고생하고 후회하는 내용이었다. 한 치 앞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모두에게 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모험을 하려 하는 사람들이다. 속칭 돈 놓고 돈 먹기 도박을 하거나 고상한 이름으로 위장한 주식 투자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은 한 번의 결정으로 대박 인생의 꿈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세상이라는 곳은 남들이 이용하여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다. 그러니 도두가 돈을 따러 나오는 것이지 일부러 잃으려고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즉 이기적인 마음으로 모인 곳이 세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좋은 단어로 포장을 한다. 투자하여 돈을 잃게 되면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단어를 사용한다. 허망한 곳에 투자를 하여 도든 것을 다 날렸어도 자존심은 꺽기지 않는다. 남을 이용하거나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즉 나의 욕심으로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탐심이라 하고, 우상숭배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쓰는 자와 같다. 그런데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간은 제한 적인 삶을 사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위대함과 오묘한 솜씨를 잘 구경하며 즐기며 가는 인생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 하다가 헛수고만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믿음을 어디에다가 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조금 깊이 생각을 해 보면, 갑자기 복잡한 생각이 든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이 분부하신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는 이해가 되고 쉽게 행동으로 행 할 것 같은데, 삶의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자연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일반적인 고민이다. 그런데 삶에서 행위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하다는 것을 믿으며 지키려 하는 순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입으로는 아멘으로 화답을 하지만,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그 말씀이 거룩한 것으로 납득이 되질 않았거나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지킬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믿음을 갖고 입으로 하는 비판에 사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이웃들에게 적이 아주 많다. 늘 이웃에게 총질을 하기 때문이다. 목사로서 신자들을 만나는 일이 많이 있는데, 어떤 신자들은 이웃을 비판과 정죄를 하려고 만나자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이럴 때는 아주 곤란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주지만 지나치면 서로 감정만 상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양육과 훈련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종교적으로 다른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위 속에서도 말씀으로 훈련 받은 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세상과 다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 받은 것을 생각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 세상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더 우월함을 보여 준다.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확장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의인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 기대감이 있다. 그것은 착하게 살면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눈이 보이게 나타나는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하여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믿음이 적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성경의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흩으셨다고 한다. 또한 권세있는 자들을 위에서 내리치셨다고도 하였다.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하였던 자들의 최후의 순간이 어떠하였는지를 우리는 눈으로 확인하였다. 창조주가 그에게 준 생명의 시간을 다하지 못하고 순간에 사라져 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에 하나님의 공의가 지금도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비록 우리에게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됨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악인에 대한 공의의 심판이 있음으로 인하여 의인에 대한 상급이 실현 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공의의 심판이 있듯이 의인에 대한 상급을 확신할 수 있다. 즉 세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지켜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지금도 일을 하시고 계시다. 일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들과 약속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시는 것이다. 즉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영광의 감사와 찬송이 울려 퍼진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승리와 보상이다.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강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부각시키고 저들의 행위를 우리들의 눈에 보이게 하시는 것은 의인들을 위함이다. 악인들의 행위와 최후의 결과를 통하여 의인들을 깨우치게 하신다. 죄로 인한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한 죄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의인들은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해결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당한 낙심이나 슬픔, 고통도 사람의 말로는 위로가 되지를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의 문제를 만져주셔야 안심이 되고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시편의 기자는 자기가 처한 환경과 고통 속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다. 그가 당하고 있는 아픔을 간절히 호소를 한다. 그리고는 해결의 실마리를 지난 날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풀어 간다. 내가 왜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와 같은 고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공의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믿음의 선조들과 함께 약속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자비와 긍휼을 간구한다. 자비와 긍휼은 지난 날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주셨던 놀라운 기적의 사건들을 기억하며, 왜 홍해를 가르고 그 길을 걷게 하셨는가 생각하며, 또한 하나님에게는 약속하신 말씀을 눈으로 확인하시라는 담대한 기도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인들은 보호를 받으며 악인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일을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로 시행하여 가신다는 것을 믿을 때에 의인들은 시험 중에서도 감사와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의 기자는 고통과 환난이 있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만일 불순종하였을 경우에 약속하신 저주의 심판의 약속의 내용을 살펴보고 확인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구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감사와 찬양을 하였다. 시편의 기자가 확인하는 것은 환난과 시험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공의로 시행되고 있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신자의 믿음의 눈 속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확인하고 체험을 하여야,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의 심판의 날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과 함께 하시지만 사랑도 주시지만 공의로 심판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교만이라는 것의 나타나는 증상이 머리를 높이 들고 목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은 증상이 하나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 앞에서 행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악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교만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성경에서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나 뜻을 대적하거나 거역하는 것을 말한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한 죄가 교만의 죄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성전에 침입을 하여 성전의 기물을 부수고 조각물들을 탈취하여 가는 행위를 하였다. 저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우연하게 성전을 침입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계획을 하였다고 한다. 즉 저들이 힘을 키우고 모아서 하나님에게 도전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일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서 없애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저들의 힘으로 통치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죄가 교회 안에서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본 것을 가지고 생각을 하여 과장되게 교회 안에다 전하는 것을 말한다. 즉 세상의 성공담이나 개인의 무용담으로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학문이요 철학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생각이며, 인간 스스로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지금도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주관자이시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 교회를 움직이고 가르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세상적인 생각으로 목사를 조종하려는 것도 역시 교만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요즘은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TV나 휴대폰을 통하여 지구촌의 모든 소식은 물론이고 목사님들의 설교까지 듣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 TV를 켜고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인 동시에 은혜의 풍성함을 눈으로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즉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거룩한 자의 모습과 변화된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교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회중의 들의 신앙을 살펴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박한 것을 해결하여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의 내용은 회중의 형편에 따라서 죄의 질책, 수고에 격려, 위로, 하나님 말씀의 풍성함, 하나님의 약속의 근거 등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교회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확인하며 기뻐하는 내용이며, 분쟁이 있는 교회의 말씀은 화합이며, 교인들끼리 싸움이 있는 교회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설교에는 먼저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변화 되어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림을 받게 된다. 그리고 회개를 하게 되고 회심의 자리로 가게 된다. 그런데 TV를 통하여 설교를 전하게 된다면 듣는 사람들의 형편이 다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들은 정보와 지식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는 좋은 말씀이나 또는 정보나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자들 중에 설교와 신앙 강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 강좌에는 좋은 내용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설교는 우리에게 유익한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좋은 말씀으로도 사람이 변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변화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설교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전달할 수 있는 언어로 듣고자 하는 회중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설교의 목적은 듣는 자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설교는 좋은 말씀과 유익한 정보를 얻는 정도로만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은 신앙 강좌나 교양세미나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사역하고 있는 이곳 아이다호 보이시라는 곳은 약간 고지대이며 태풍이나 홍수나 자연재해의 피해가 전혀 없는 곳이다. 넓은 땅에 아주 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날씨는 아침에는 몹시 춥지만 낮에는 따듯하다. 그래서 겨울철인 지금도 새벽에는 히터를 켜야 하지만 낮에는 히터를 끄고 다닌다. 아이다호의 자연의 풍경은 몹시 아름답고, 땅은 기름지어서 농사가 잘되는 곳이다. 그래서 감자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 사는 한국 분들은 집 뒤에 있는 텃밭에 온갖 종류의 채소는 물론이고 어떤 분들은 배추와 무, 알타리 무, 마늘, 부추도 직접 재배한다.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과 자연 재해가 없음으로 인하여 이곳에는 토속신도 물론 없다.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없음으로 인하여 신앙의 절심함도 없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경험과 체험이 상식이요 법이 된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런데 교인들끼리는 20년 이상 알고 지나온 분들인데, 그동안 쌓였던 앙금들을 풀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잘 해보려 하는 것이 오히려 충돌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더 거룩한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성령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성령하나님의 증거와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설교를 들으러 오는 자들의 마음을 각인하셔서, 설교는 좋은 말씀이나 유익한 정보를 듣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으로 듣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교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가 아닌 것이다. 만일 교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