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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내가 누구랑 비교가 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기분이 좌우한다. 칭찬을 받을 일에 좋은 예로 등장을 하면 좋지만, 그와 반대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일에 이름이 거론 된다면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부모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을 일이 있을 때에 옆집에 사는 아이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비교를 할 때에 자존심이 더 상하였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도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이와 같은 방법을 쓰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고 또 보내고 끊임없이 보냈지만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레갑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가 명령한 것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시험하여 보라 한다. 레갑 사람들을 불러다가 방에 두고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선조가 명령한 것을 지키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선조가 명령하기를 포도주는 절대 마시지 말 것과 집도 짓지 말고, 포도원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레갑 족속이 땅에 사는 동안 생명을 길게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 하므로 인하여 육체와 정신의 정결을 지키게 하고, 유목 생활을 하므로 외국의 침략을 면하고, 장막생활을 하므로 부도덕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레갑 족속 선조가 내린 명령은 하나님의 율법보다도 훨씬 지키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레위 족속은 선조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정된 삶과 편리한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레갑 족속은 사람의 말도 순종하고 따르는데, 남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지 않음을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남 유다는 징벌을 받게 되고 레갑 족속은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영복과 영벌로 나뉘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만홀히 여기면 아니 된다. 어떻게 어디까지 순종을 하여야 하는지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생각이 없는 교회가 있다. 무슨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납작 엎드렸다가 일이 해결이 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또 반복되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이렇게 되는 데는 낙관적인 사고, 긍정적인 사고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징계가 임하며 납작 엎드리어 잘못했다고 싹싹 빌며 회개를 하였다가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면 다시 태평세월은 물론이고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범죄한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이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어찌 그렇게 한심할 수 있을까 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읽는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지적인 내용으로 목회를 하는 교회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교회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교회는 오늘을 기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하여 있다. 그러니 모든 교인들의 시선을 주님의 재림에 맞추게 하며, 거룩한 자리에서 앞으로 전진하여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습관적으로 반복적인 죄를 지은 백성들을 무지한 백성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에 처음에는 회초리로 사랑의 매를 때렸지만 깨달음이 없이 계속 범죄를 하자 더 큰 막대기를 사용하셨다. 정신을 차리게 매를 맞았지만 깨달은 것이 없어서 또 범죄를 한 것이다. 징계가 지나가면 또 다시 징계를 피하기 위하여 준비가 필요하다. 교회도 세상의 기류를 받아들여 어느새 '하면 된다'가 구호가 되었다. 그래서 모든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사고로 시작이 된다. 그런데 세상은 늘 변하는 곳이기에 '하면 된다'가 '열심히 해도 안 된다'로 변하니깐 교회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한 갈등이 교회 안에 팽배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망대를 건축할 때에 필요한 액수와 준비된 액수를 검토한 후에 시작을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피흘리시고 세운 교회에는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거룩함이 유지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법규가 있다. 그래야 세상과 다른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 안에는 사랑과 은혜만을 강조하다가 보니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이다. 그러다보니 이건 하나의 친목 단체보다도 질서가 없다.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용납이 되다가 극한 감정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이 되면 그 때부터는 법과 원칙을 따지기 시작하는 곳이 오늘날 교회이다. 그리고는 과거의 모든 일들을 되새김질을 하는 초식동물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법정에서도 다루기를 힘들어 한다. 즉 세상의 상식으로도 막혀 있고, 교회가 속하여 있는 교단의 헌법으로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는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정의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사랑과 용서라는 명분으로 그냥 그렇게 넘어 간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난리 난리에 생난리를 친다. 아니 어떻게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울분을 토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먼저 지켜야 할 것이 '예의'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예로써 나타내는 존경의 뜻' '존경의 뜻을 표하여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의라는 것의 뜻을 살펴보면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이다. 내 앞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존경의 반대되는 뜻은 '무시나 멸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막 대우 한다'는 것은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는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신자가 믿음의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디까지가 은혜이고 신자의 책임은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십자가의 구속사역은 하나님이 시작을 하시고 끝을 맺으신다. 이루어 가는 과정이 하나님이 주관을 하신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매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일을 하시고, 구원을 이루고 성취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시는 곳이다. 그래서 새롭게 된 자들이 오며,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곳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였고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구체적으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을 하였다. 그래서 진노는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지는 않으셨다. 만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시는 분이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리로 가기 위함이고 또한 도구로 사용하려 함이다. 그 백성을 거룩한 민족이 되고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여, 그 민족을 통하여 이방나라에 하나님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거룩한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랑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회초리로 앗수르와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이다. 즉 회초리를 사용하여 깨닫게 하여 마음을 고쳐서 다시 회복을 시키시겠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오며, 이방민족들이 들어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택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함이다. 그러니 그 백성이 원망과 시험을 하여도 진멸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가신다. 택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우리가 하는 농담 가운데 ‘한순간의 선택이 일평생을 좌우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중요함은 아는데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선택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충고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일을 하고 계신지를 알면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공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뜻을 생각하고 결정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의를 요하고 있다. 선행을 하더라도 윤리와 도덕의 선을 넘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 남자는 한 여자만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사랑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다른 모든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을 베풀되 천한 사랑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여야 한다. 주님이 주신 사랑은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이다. 자기의 가장 고귀한 생명을 주신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을 주시고 자랑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보여준 사랑을 전하며 살라고 하셨다. 교회나 신자가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이 되는 이유가 있다. 주님의 사랑처럼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자랑을 한다면 사랑을 베푼 사람은 의인이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반대로 사랑이나 도움을 받은 사람은 평생 빚진 자로서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된다. 자존심이 상하면 서로가 평생 원수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신자는 남을 돕는데 있어서, 돕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도움을 받는 자는 도움의 손길로 인하여 생명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도움을 받음으로 인하여 게으름의 자리로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한다. 선행을 통하여 다른 이웃들을 비판과 정죄의 자리로 나간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없다. 성경에서는 자기의 선행을 사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전하는 자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전하지 않으면 자기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고, 듣는 자 역시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함부로 남용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자아도취‘라는 단어가 있다. "자기 스스로 만든 생각에 홀려, 제 멋에 겨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소금과 빛은 존재론적이다. 내 자신과 존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금은 어디를 가도 소금이다. 교회를 가도 소금이고 직장을 가도 소금이 되고 심지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가도 소금이다. 빛이라 하는 것도 나에게서 빛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있는 모든 곳이 밝아지는 것이다. 어두움이 물러간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믿는 자들이 있다. 본인이 하여야 할 일이 소금을 뿌리는 것이고, 손  전등을 비추는 일이라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늘 시끄럽다. 내가 썩는 곳에 빛을 비추면 다른 사람들이 가서 소금을 뿌리라는 것이다. 소금은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그 맛을 잃지 않는다. 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소금은 말이 없다. 이런 존재가 되라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며 철저히 지켜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설교는 주님의 말씀하신 뜻을 잘 해석하여야 한다. 이 말씀을 올바로 뜻을 찾기 위해서는 성령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자아도취'되어서 스스로 판단을 하면 안 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날에 교회를 간다. 물론 예배를 드리러 간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받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받는 것 가운데 설교를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설교를 들으려 하는가에 생각이 있어야 한다. 설교의 내용은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내용이다. 즉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말한다. 아주 신비스러운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를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다. 즉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화합한 자로 서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능동적으로 얻는 성취감에서 오는 것이 있고, 주변의 환경이 주는 안락과 편안이 주는 행복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인간이 무감적인 상태에서 얻는 행복인데, 참 행복이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래서 죽음을 향하여 날마다 달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는 없으며, 과연 죽으면 끝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죽음의 세계가 끝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세계가 죽음 이후에 다른 세계인 천국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갈 수가 있고, 지금 이 땅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국의 모형으로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통하여 천국의 세계와 그 속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이것을 알고 얻고 누리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생명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영적인 감각이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영적인 감각이 있는 자는 깨달음이 있다. 세상에서 자랑하던 것들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하여 애쓰며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있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전쟁에서 한 가정의 가장을 잃어버린 슬픔과 고통은 너무나 큰 것이다. 아버지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돌보기 위하여 매년 6월 달을 보훈의 달로 정하였다. 대한민국은 수 없는 젊은 청년들과 이름도 모르는 외국 용사들이 나라의 영토와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알 때에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잘 모른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와 직접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 민족이 전부 몰살을 당한 뻔 일이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야 왕국의 아하수에로 왕 때에 유다인인 도르드게와 에스더가 있었다. 그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살고 있는 수산궁에 살고 있었다. 모드르게가 딸같이 여기는 에스더는 사촌으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다. 에스더는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이기에 왕후를 뽑는 행사에 참여하여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모르드게는 에스더를 딸같이 여김으로 그녀의 주변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대궐 문 앞에서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두 명이 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엿듣게 되고, 그 일을 에스더에게 알려 그 일을 꾸몄던 두 명의 신하는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등장을 하는 사람이 하만이다. 하만은 돈이 많았던 자이다. 정치적인 상황이 복잡하였기에 아하수에로 왕에게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만하여 자기 앞에 모든 신하들이 꿇어 절하기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모르드게는 하나님의 신앙을 지키는 자이기에 무릎을 꿇고 하만을 섬기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하만은 모르드게만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몰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하만은 신하들과 함께 그 일을 시행할 날을 제비 뽑았다. 그 날이 아달월 십삼일이다. 그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얼마 전만 하드라도 정치인들의 측근의 비리로 인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거나 검찰에 소환되는 일이 많았다.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에게는 사람이 늘 따르며, 또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측근으로 택하느냐에 자신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 권력자의 주변에는 늘 친구나 이웃처럼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평소에는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굽신거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뒤 돌아서 배신을 한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권력자들이 측근을 선택하는 일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측근이라는 말이 가까이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친지나 형이나 동생, 친구들을 측근으로 두었다. 그랬더니 엉뚱한 사고나 금품수수의 비리를 저지름으로 인하여 임기 중에는 고역을 치르고 나중에는 발목을 잡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험성을 알고도 친지나 친구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대통령을 경호하는 경호실에서 하는 일 가운데 수행함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드셔야 할 음식을 미리 먹어 보는 일은 한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대통령을 시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자는 미각에 뛰어나야 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바삭 왕 아닥사스다의 포도주를 담당하는 관원이었다. 느헤미야는 유대인이다. 즉 바삭 왕의 측근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왕을 시해하는데 가장 좋은 기회가 술에 독약을 섞으면 된다. 술에 취한 자는 미각도 없고 모든 경계를 흐트러진 정신의 상태에 있다. 그러니 위험으로부터 오는 경계를 충성된 신하가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을 느헤미야가 맡은 것이다. 바삭 왕국에 많은 신하들이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그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신뢰와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신하 그러면 아부를 잘하여 그 자리를 꿔 찬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를 보면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고, 이웃에게는 정의와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요즘 기독교인이나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오바마 대통령의 동성 결혼 옹호 발언과 몰몬교도인 롬니의 공화당 대선 후보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반대서명을 하고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럴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이미 성경 여러 군데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의 말씀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정죄와 심판의 자리에 서서 외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동성애자들은 대부분이 후천적인 선택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성애를 택한 데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다. 성을 즐기기 위하여 택한 자들도 있고, 아니면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뜻을 세기며 살고 있냐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 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믿는 자들이 누구보다도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에서 모범과 표본이 되어야 한다. 한 가정을 이루고 남자는 자기 아내를 자기의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 생각하고 복종의 자리에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에 모범을 보였다면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이혼율을 줄일 수 있다. 세상 사람이나 기독교인이 이혼율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 함께 하는 가정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의 가정이라 하면서 날마다 싸우면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것이 좋다고 하면 어불성설이 되는 것이다. 단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성적인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함이라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성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굳이 남자와 여자가 아니더라도 동성끼리 또는 동물과 교합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정죄와 심판을 외치기 전에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바다를 설명할 때에 ‘탁 트인, 넓은‘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사람들이 바다를 보고 감탄을 하는 이유는, 넓게 멀리 보이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어서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바다를 대하였을 때만 맛볼 수 있다. 아이다호 주에는 바다가 없다. 그 대신 넓은 호수가 있다. 바다가 없어도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다른 좋은 것들이 있다. 강에나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바다생선과 차이가 없다. 크기나 맛에서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더 단백하고 비린내도 덜 난다. 날씨도 아침과 저녁의 온도 차이가 심하다. 요즘 아침의 온도는 화씨 50도 정도이고 낮 기온은 90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래서 아침에는 히터를 켜야 하고 낮에는 에어컨을 켜야 한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끈적거려서 잠을 못자는 경우는 없다. 일교의 차이가 30~40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한낮에 내리쬐는 햇볕은 무척 따갑다. 따가운 햇볕이 비추는 점심때에 되면 우물가로 나오던 여인이 있었다. 나왔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떳떳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피하여 살 던 그녀에게 물을 얻어 마시려 하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로 알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니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맞는지를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 여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야곱이 그곳에서 하나님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었고, 여호수아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갈라 세우고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던 곳이다. 그러니 여인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예배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질문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여인의 예상과 달랐다.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장소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어제 아버지(Father's Day)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 후에 전교인과 함께 체리 피킹을 다녀왔다. 아이다호(Idaho) 주의 수도인 보이시(Boise)는 사방이 산으로 쌓여 있다. 산만 넘어 가면 들과 사막이 펼쳐진다. 어제 다녀온 에밑(Emmett)이라는 곳은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로 되어 있어서 과일나무들이 많이 있다. 과수원에 들어가서 체리 피킹을 하러 왔다고 얘기를 하면 간단한 주의 사항을 듣고 나무에 달린 체리들을 마음껏 따 먹고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봉지에 담은 체리는 1Lb에 1불이다. 그러니 너무도 싼 것이다. 무더운 날씨이었지만 처음 보는 체리나무와 탐스럽고 풍성하게 달려 있는 모습이 신기하였다. 많이 달려 있는 가지는 마치 포도송이와 같을 정도였다. 산 중턱에 있는 과수원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푸른 잎과 빨간 열매의 조화는 정말 아름다움이었다. 아이다호 주가 고지대인데다가 산 중턱에서 햇볕을 쬐는 것은 따갑다는 표현이 맞다. 그러니 나무 그늘 밑으로 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고생을 하던 요나가 생각이 났다. 호박 잎으로 햇볕을 가리었던 요나가 하나님이 벌레와 동풍으로 호박잎이 없어지게 되자 차라리 죽는 것이 낳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요나는 햇볕을 무척 싫어하였던 것 같다. 우리들은 체리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과 김밥을 먹으며 산 아래로 펼쳐진 마을 내려다 볼 수 있었고, 건너 편 산에 결려있는 뭉게구름도 보았다. 어른들은 환담을 하고 어린아이들은 재미있는 게임을 하였다. 산 위에서 부르는 찬양을 더 실감이 난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그 곳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다. 그런데 각각의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지방의 독특함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다호는 여름에는 갈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은 곳이다. 그런 반면에 겨울에는 춥고 눈도 많이 온다. 이곳에 사람들이 겨울을 견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미국사회의 이데올로기는 긍정주의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이 긍정주의 사고방식이 경제대란으로 가는데 큰 몫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낙관이 소비의 심리를 부추기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긍정의 힘이라고 하는 책이 기독교 서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고 교회에 추천도서로서 많은 신자들에게 읽게 하였다. 미래가 좋아 질 것이라는 생각은 두려움과 염려로 고민하고 있는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낙심으로 인하여 처진 마음을 세우는데 일시적인 방편으로 사용을 한다. 그런데 모든 일을 관찰과 정확한 분석 없이 수고를 하지도 않으면서 잘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설교의 예화 가운데 등장하는 인물들의 시대적인 배경이 있다. 물질의 성공을 위한 인물이라면 산업혁명 이후의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철저하게 산사람들은 종교개혁시대의 사람이나 청교도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의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설교자가 무엇을 강조하려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긍정주의 사고는 후기 자본주의와 함께 하면서 번창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신복음주의 운동이 한몫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모든 문제를 낙관적으로 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염려가 있냐는 것이다.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을 증거로 댄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한 사도바울은 그의 삶을 모두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생각을 했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삶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찰하고 더 깊은 자리로 나가려 애를 썼다. 성경의 서신서는 환난과 고통에서 몸부림치는 성도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이다. 그런 반면에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이적과 기적을 행하신 것을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이 땅에 이미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 이러한 말들은 신자들이라면 들어보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사용할 때는 곤란한 상황이거나 시간을 얻기 위하여 사용함으로 인하여 진실함과 신뢰를 얻는데 문제가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억지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복술가는 점을 치는 사람들이고, 꿈을 꾸며 환상의 세계를 말하는 사람, 술사는 남을 속이는 사람, 사람의 눈을 어리게 하는 괴상한 술법을 쓰는 마술사들이 남을 현혹하고 거짓을 말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을 이곳을 찾아다니며 심지어는 믿는 자들 가운데도 결혼 때나, 입학시즌이 되면 저들의 말을 따라서 결정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무엇이 되느냐를 생각하여야 한다. 세상에서 진급도 필요하고, 좋은 학교도 입학을 하고, 결혼도 잘 하여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창조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끝도 그 분의 손이 달려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구원이라 한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화합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냐?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을 한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찾아야 한다. 즉 생명에 관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 생각하고 단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축구경기에서 승리를 예상하는 것은 평소에 준비를 많이 한 팀에게 승률이 높다. 돈을 빌려 줄 때도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사람에게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래서 늘 아쉬워한다. 무엇이 있었으면, 그것만 있으면 하면서 산다. 목회자나 교인들에게도 바람이 있다. 좋은 예배당에 편리한 시설의 건물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털을 삐죽거리게 하는 음향에 맞추어서 찬양도 하고, 편안한 의자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곳에서 좋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지상에는 유형교회가 많이 있다. 그 가운데는 건물을 소유한 교회도 있고 세를 얻어서 있는 교회도 있다.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어서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를 걱정하는 교회나, 자기 건물을 가지지 못한 교회나, 교회 건물에 대한 걱정은 동일하다. 있어서 걱정을 하고, 없어서 걱정을 하는 차이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교회는 건물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큰 교회 건물을 소유하면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큰 건물을 소유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은행 빚을 끌어다가 건축을 한다. 건물은 지었는데 그 때부터 얼굴에 주름이 잡히도록 인상을 쓰며 기도를 한다. 건축 빚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이다. 재정이 점점 더 악화가 되자 교육비, 선교비, 구제비, 모든 것을 동결 시킨다. 교회 건축을 무리하게 하여 파산선고를 하는 교회가 해마다 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지나친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함으로 인한 결과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전만 잘 짓고,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며 제사만 잘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예루살렘 성과 유다의 모든 성읍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들이 성전만 잘 짓고, 제사만 드린다고 너희에게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성전 문에서 외치게 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웃에게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고아나 힘없는 과부나 이방인을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에게 피를 흘리게 하지 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좋은 글이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꼭 된다는 보장도 없고,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꼭 착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삶을 사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속은 검은데 겉은 하얀척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사람을 오래 사귀다 보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이 나타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호의를 잘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변함없이 오래 지속이 되면 좋은데, 도중에 곁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이유는 자기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의도는 자기의 말을 잘 듣게 하여 자기의 리더십을 부각시키려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조심하여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의 자리로 몰아가면서 자기의 선한 리더십을 자랑하려는데 있다. 이야기인즉 주변에 착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자기는 착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한국 프로 야구 감독 가운데 김성근 감독이 있다. 숱한 화제를 뿌리고 있는 감독이다. 김성근 감독은 우승을 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경기 중에 많은 투수가 마운드에 등판을 한다. 그래서 쫀쫀한 야구를 한다고 사람들이 비판을 한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승리를 챙긴다. 감독은 승리를 위하여 작전을 지시하는 자리이다. 야구는 말로 하는 경기가 아니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잘못되었다면 실력으로 보여 주면 된다. 즉 김성근 감독의 경기운영방식을 깨트릴 수 있는 야구를 하면 된다. 그런데 실력으로는 이기지 못하면서 말로서 승부를 내려고 한다. 이와 같은 장면 우리들 가운데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자기가 진실하고 거룩한 자라면, 평상시에 거룩하게 진실하게 살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시대의 졸장부가 하는 행동이 나는 너보다는 낫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대화를 하다가 보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들이 정한 방법으로 믿는다는 그들만의 고집이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더 황당한 주장은 주일날에도 집에서 TV로, 수요예배는 성경말씀을 묵상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새벽예배는 처음 시작한 사람을 원망하는 자리에 까지 나간다. 물론 복음을 변질된 내용으로 전한 목회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이것을 단순하게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과 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 광주리를 보여 주셨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다른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을 극히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잘 돌보아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으로 피신한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릴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반대로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 이미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그곳에 피할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심판과 멸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피할 길을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반대였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관자로서 이 땅에 사랑을 베푸시고 공의와 정의를 시행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이다호 보이시(Boise)지역 목회자 수련회와 타 주로 사역지를 옮기는 목사님의 송별회를 겸하여 맥콜(Mc Call)을 다녀왔다. 그곳은 아이다호 보이시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어서 기온도 낮다. 6월 달 인데도 아침에 얼음이 얼었었다. 그래서 유명 인사들이 여름 휴양지로 알려진 곳이다. 아직도 높은 산에는 흰눈이 덮여 있다.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고, 넓은 호수는 고요하고 찬물에 서식하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대표적인 물고기가 송어이다. 아이다호 주는 자연을 지키기 위하여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낚시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이센스가 있어야 하고 잡을 수 있는 물고기와 잡을 수 없는 물고기를 정하여 놓았다. 산에는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각종 산나물들이 있다. 산에서 나는 취나물은 거의 호박잎만큼 크다. 흰밥을 취나물과 함께 된장에 싸서 먹으면 그 향이 끝내준다. 또한 강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인 매운탕은 말로는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낚시를 좋아한다. 뉴욕에 있을 때는 바다낚시를 주로 다녔지만, 이곳은 바다가 없어서 강이나 호수에서 낚시를 한다. 강이나 호수에서 낚시를 하지만 고기의 크기는 바다의 물고기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낚시꾼들이 흔히 말하는 손맛이라는 싸움은 바다낚시가 훨씬 재미있다. 강이나 호수에서 잡힌 고기는 바늘에 걸리면 순순히 잘 따라 온다. 그래서 큰 고기를 잡아도 땡기고 밀고 하는 싸움은 금방 끝이 난다. 그런데 낚시라는 것이 물고기의 본능을 이용하는 것이라, 물고기의 습성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먼저 낚시의 미끼를 선택할 때는 잡고자 하는 물고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물고기가 서식하고 활동하는 곳을 알면, 그곳에서 낚시를 하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을 파악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낚시 바늘 끝에는 물고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탐스럽게 달려 있다. 그런데 물고기는 바늘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물고기의 입장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니라 하시니

독일의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가 쓴 책, ‘피로사회’에 담겨 있는 내용이 우리를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그 책의 내용은 인간은 행복을 얻기 위하여 긍정적인 사고방식인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성공을 향하여 달리고 있고, 그 속에서 얻는 것으로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강점이라면 성과급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사람들을 스스로 자기착취로 빠져들게 한다고 한다. 즉 노동을 위하여 자기 몸을 스스로 착취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식을 이용하여 사회는 노동력 착취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피로한 가운데로 빠져들게 하며, 이와 같은 사회 구조를 ‘피로사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로가 사람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긍정적인 면은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고, 부정적인 면은 만족한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실패와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의 발전과 능력을 발전시키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지나친 노동력으로 인하여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병철 교수는 피로를 통하여 우리들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과급 제도로 얻는 성공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에는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가 없다. 목표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목이 마르고 갈증을 느끼며 만족감이 없다. 사람이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면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구원이 필요한 대상자에게 하는 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만사형통한다고 한다. 그런데 만사형통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지를 알아야 한다. 즉 무엇을 위한 만사형통이냐는 것이다. 나의 욕심과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도 가능하냐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투고 싸우는 이유는 내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고 시기하고 살인을 하여도 능히 얻지 못하는 곳이 세상이다. 이와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게 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힘으로 이용하는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만사형통이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것을 말한다. 죄가 관영하는 세상에서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없다. 또한 죽음의 세력 하에서는 결국은 사망의 자리로 가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세상에서 몸부림을 쳐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어두움 가운데 오셔서 어두움이 물러가게 하셨고, 사망을 죽음으로 이기시고 부활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은혜이다. 이와 같은 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통하는 것이라 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 있다. 사마리아 땅에 마술사 시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큰 자라 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 앞에 빌립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 다니며 이적과 기사를 보고 놀랐다. 사마리아 땅에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내리게 하였다. 시몬이 사도들이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으로 능력을 사려 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시몬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내가 살고 있는 아이다호의 날씨는 화창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과실나무들이 열매 맺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과일들은 당도가 높아서 맛있다. 요즘은 푸르른 나뭇잎 뒤로 빨간 색의 체리들이 동그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체리 과수원에서는 좋은 상품은 수확을 한 후에 일반인들에게 체리 픽킹을 하게 한다.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며 플라스틱 봉지에 담아 오는 것만 값을 지불하면 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열매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열매를 통하여 무슨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고, 포도열매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인이라면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소원한다. 과실나무들의 열매는 가지에 붙어 있다. 그래서 열매를 보고 나무를 쉽게 구별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사람의 밖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안에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아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사랑이 없어'라고 말을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말을 한 사람이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다. 사랑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을 따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달려 있어서 내가 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한다. 참된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내어 버리듯이 버리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사랑을 움켜잡으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내가 맺어야 하고 이웃을 위하여 주는 것이라야 한다. 내가 맺어야 하고, 내가 맛을 보아야 참맛을 알 수 있다. 과일도 종류에 따라서 맛이 다르다. 사랑도 그 맛에 차이가 있다. 이웃이 주는 사랑의 열매의 맛과 내가 맺어서 맛보고 이웃에게 주는 사랑에는 분명한 맛의 차이가 있다. 이것을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예수님께서 피흘리시고 세우신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죄인들이 와서 구원을 받고 새사람이 되기도 하고 새롭게 된 자가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가 위하여 교육을 받으며 훈련을 받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이는 사람들은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 안에는 거룩함과 정결하기 위한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를 세운다. 교회는 건물 자체가 정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곳이다. 옛사람의 성품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새사람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래서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정결함이 있다. 요즘 청년들은 시대를 잘못 만나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청년실업, 결혼문제, 자녀교육에 있어서 특별한 상황 하에 있다. 경제는 경제대로 어려운데 결혼을 하는데 있어서 결혼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절약을 하고 싶은 생각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짜 낸다. 그 중에 하나가 결혼식장의 문제이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교회를 결혼식장으로 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더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교회를 단순하게 마을회관이나 강당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건물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행사와 예식은 거룩함으로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엄격한 구별된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행사는 하나님 앞에서 치루는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판단이 없다면 화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의 성경을 보면 성전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유사장'이라 하여 제사장 가운데 임명을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행사나 예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와 거룩함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주보를 통하여 공개적인 선포가 있고, 정결함을 지키기 위하여 신랑, 신부의 호적 초본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한 동안 한국교회에는 믿음이 좋은 사람은 의심을 하지 않고 믿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이해가 안 되어도 외우며 그대로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 안에 의심만 가득 차게 된다. 더 나아가 의심의 질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없는 자도 낙인이 찍혀 교회생활이 어려운 적이 있었다. 그런 오해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문제이다. 이 말씀이 나오기 전에 먼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떡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된다. 즉 듣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고 배웠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더 깊은 내용이 있다. 이 땅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자랑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사랑을 베푸시고 계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위하여 일하고 계심을 깨달은 자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사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물론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말씀에 담겨져 있는 분부와 명령을 따라야 한다. 지금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을 하는 것이 은혜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신 사랑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공의의 심판을 하시고, 불의한 가운데 정의를 세우고 계신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같이 행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여야 하고, 가난한 고아와 힘없는 과부를 도와야 하며, 나의 친족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연히 도와야 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보면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성경은 교훈하고 있다. 말씀을 많이 먹고 행함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지만 십 수 년 전만해도 흔히 들을 수 있었고, 목격하였던 것인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이 인생을 망치는 길로 가게 한 이야기이다. 좀 더 잘살아 보려고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올 때에 달랑 이민 가방 두 개를 가지고 왔다. 그 때는 모든 일을 열심히만 하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가진 것이 없고 살림이 변변치 않았을 때는 겸손하고 친절하고 부지런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큰 돈을 만지게 되자 사람이 변하여 교만하고 거만한 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는 도박에 손을 대거나, 혹은 젊은 색시를 얻어서 딴 살림을 차렸다가 쪽박을 찬 사람의 이야기는 참 흔한 이야기였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먹고 살만 하니깐 사람이 변하였다. 가진 것이 없을 때는 교회도 열심히 나왔는데, 돈 좀 버니깐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다. 떠난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은 것은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짓지도 않은 집과 심지 않은 과수원을 소유하게 되었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도 먹고 살만할 때에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며 교만한 자가 된 것이다. 교만한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요함과 풍성함을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에게 주신 풍요로움을 가난한 자, 불쌍한 자에게 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로 얻은 것이라 하여 과부와 가난한 자를 살피는 일을 지키지 않았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와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하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목회자로서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파멸의 자리로 가게 한다. 나그네와 같이 잠깐 스쳐가는 인생인데 무엇을 망설이냐는 것이다. 세상의 주인은 자기가 되어서 자기의 뜻대로 모든 것을 정하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마치 자기의 생각이 진리인양 역설을 펴고, 어차피 죽을 것인데 모든 남자와 여자들과 함께 성적인 쾌락을 마음껏 누리라는 것이 대중가요의 가사의 내용이며,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사치와 낭비를 크레디 카드로 마음껏 긁으라는 속삭임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행복과 편리함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쥐약이다. 쥐약의 성분은 전체가 쥐에게 치명적인 약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쥐약은 쥐가 아주 좋아하는 것에다 치명적인 약을 섞은 것이다. 그러기에 쥐가 의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먹는다. 그러나 먹으면 그 속에 있는 치명적인 독약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게 된다. 마귀의 종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곳을 세상이라 한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만들어 낸 것들을 세상의 가치관이라 한다. 이곳은 남을 죽여야 내가 잘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이 있는 나라가 군사력으로 침략을 하여 빼앗었다. 그러자 야만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자 전략을 바꾸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데 더 고도의 전략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도와주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는 방법이다. 그래서 빚으로 사는 인생은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는 국가도 거지가 되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단은 인간의 본능의 힘을 이용한다. 그래서 저들은 쥐약을 만들듯이 인간의 탐욕과 정욕을 이용한다. 쥐들도 쥐약을 만족해하며 맛있게 먹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생명을 빼앗아 가는 치명적인 독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