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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혔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애굽과 바벨론에게 압제 하에 있었을 때이다. 본문에서 하늘 나는 새가 올무에 걸리면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여러 민족에게 침략과 위협을 당하면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올무에 걸린 새를 자유롭게 하여 주신 것처럼 자유를 주셨다. 즉 포로가 되면 영혼이나 육체나 압제를 당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압제를 말하면서 영혼의 압제를 말하려 한다. 영혼이 마귀에게 포로가 되면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마귀에 포로가 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대적하는 자가 된다. 왜 그런가 하면 마귀에게 압제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영혼의 압제를 풀어 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더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여호와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찬양도 하고 기도를 하며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마귀의 압제 하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술수나 이간질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말과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합니다. 마음이 정직하며 진실되게 살게 됩니다. 본문을 기록한 다윗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다윗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우리들이 받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든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든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할 때에 여호와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는 모세를 부르시고 애굽으로 보내려 할 때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 6:3) 여호와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가 되신다. 즉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는 만군의 여호와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전투를 할 때에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여 나간다. 만군의 여호와라 하심은 모든 군대에 주가 되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군대라 할지라도 여호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가 역사하시사 애굽을 이기시고 골리앗을 물리치고 바벨론을 멸망시켰다. 만군의 여호와가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신 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신다. 여호와의 능력이 온유한 성품으로 나타나 세상을 이기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이 사망의 권세를 이겼고, 로마 정권을 이겼던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셔서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하십니다. 여러분! 만군의 여호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시편의 기자는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가를 생각하려 한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 땅에 많은 잡신들이 있다. 그런데 참 신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만이라는 것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으로 만물이 다스려지며 작정과 섭리 속에 세상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는 마지막 날에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망한다 하였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 하라”(렘 10:11)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또한 언약을 맺은 백성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하는 빛이 생겨서 어두움이 물러갔다. 어두움이 물러감으로 인하여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마음에 어두움이 물러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임한다. 그러면 어두움이 물러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어두움이 물러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그 나라의 왕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에서는 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그러나 이 땅에 세워진 나라의 왕들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노역을 시킵니다. 이 땅에 세원진 나라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시 124:1) 시 124편은 다윗의 시로서 감사 예배시이다. 성전을 향하여 가면서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올라가고 있다. 다윗이 회상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만일 애굽에서 구원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종살이를 할 것이고,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의 침략에서 보호하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라를 지켜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힘이 없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였다. 그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인한 감사를 찬양한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지켜 주셔야 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데 있다.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그래서 언약을 맺은 백성과 나라에 대해서는 끝날까지 함께 하여 주셔야 한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한 번도 지키시지 않으신 적이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불순종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을 때에 손을 잡고 하셨다. 그랬더니 손은 잡고 있지만 마음과 눈은 이방신에게로 행하였다. 그래서 새언약을 약속하시면서는 마음에 들어가서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새언약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떠나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결단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행 18:2) 사도바울은 아덴에서 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지혜로 하다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낙심과 좌절한 상태에서 고린도에 이르렀다. 사도행전 18장에서 전하고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낙심한 바울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함께 하게 하신다. 아굴라도 역시 로마에서 좌절을 하고 고린도로 온 것이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피난을 왔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아굴라를 만나게 된 것은 유대인으로서 생업으로 천막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굴라를 통하여 아볼로를 만나게 된다. 아굴라와 아볼라는 바울의 동역자이며 이방전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가 낙심하고 좌절한 곳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은 겸손으로 기다리게 된다. 낙심한 바울에게 아굴라는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았다. 그리고 아볼라는 성경에 능통한 자이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이 좌절할 때에 찾아오십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리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마 14:24) 우리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일 때에 우리를 구원하러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1) 여러분!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먼저 사정을 아뢰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은혜가 넘치도록 임하는 것입니다.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리라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리라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 3:19) 에스겔 3장에서는 선지자가 명심하여야 할 사명을 고취시키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먼저 두루마리 책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표현은 몸의 체질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소화를 시켜서 힘을 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여야 한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겔 3:5) 말씀을 전할 때에는 백성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이 없이 외치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 듣지 못하였다고 핑계를 댈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온 힘을 다하여 회개하는 자리로 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다. 만일 대충 전하여서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자들의 피 값을 에스겔의 손에게 묻겠다고 한다.   그런데 듣는 자가 회개를 하면 에스겔의 영혼은 보존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겔 3:2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겔 3:27) 이 말씀에 근거하여 회중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목사도 말씀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겔 2:8) 에스겔은 하나님의 음성과 계시를 보고 무릎을 꿇고 엎드러졌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경외와 두려움이 임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네 발로 스스로 서라 하신다. “그가 네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겔 2:2) 그리고 사명을 주신다. 내가 너에게 전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 하신다. 그러시면서 주시는 것이 두루마리 책이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겔 2:8) 그 책의 내용을 보니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겔 2:1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에게 왜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의로운 자와 블의한 자의 심판이 하늘로부터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즉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겔 1:1) 에스겔서의 저자는 제사장 에스겔이다. 그는 야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잡혀 갈 때에 함께 갔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나타나신 곳이 예루살렘이 아닌 바벨론 땅에서이다.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에만 계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발 강 가에 나타나신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무소부재(아니 계신 곳이 없다)하심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을 네 생물의 모습과 움직임을 통하여 보여주신다. 즉 여호와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함을 말하는 것이다.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겔 1:12)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약속하셨다. 어떻게 회복이 되는가에 대하여 그체적으로 계시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에스겔서에는 환상과 계시가 많이 등장합니다. 왜 환상을 보여주실까요? 그것은 말로 설명이 안 될 때에 보여줌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 그발 강 가에 있는 사람들은 나라와 재산을 빼앗기고 채석장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시기 위하여 에스겔을 쓰시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진리와 영광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분문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어야 진정한 회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신약에서 중생, 거듭남의 은혜를 말한다. 이것에 대하여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하며 눈물로 간구하였다. 예레미야의 기도에서는 끊임없이 백성들을 가르쳤는데도 그들이 교훈을 듣지 아니하며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워 그들의 마음에 두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신다고 하였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에스겔에게는 굳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하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이렇게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에 오순절 날 성령강림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성령하나님의 거듭남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제 교회로 모이게 된다.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그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회개의 기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죄를 깨닫게 하는 찔림이 되기도 하고, 두드리는 방망이가 되며, 자르는 칼이 되며, 태우는 불이 되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은혜의 방도를 만드셨는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자만 상대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거역하거나 불순종을 하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행복의 시작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시작이 된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는 인도와 보호 그리고 의와 거룩함이 있고 최후의 승리가 있다는 것이다. 모세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영적인 이스라엘인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본문에서 약속한 복은 처녀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외쳤고 모세와 다윗이 갈망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함은 인생 최고의 행복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느 절기에 찬양을 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의 만족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구원의 약속의 성취로 인한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절에 감사 내용을 따라 하나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의 풍성함으로 감사 찬양을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증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왜 구원에 대한 감사가 중요한가 하면은 인생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감사하는 자에게는 물질의 부요함은 덤으로 옴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시 123:3) 추수감사주일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무엇으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영향과 경기 침체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들이 뻔뻔하게 당당하게 잘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그러하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교만한 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인으로 사는 고민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시 123:4) 그런데 성경적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모세가 행복한 사람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면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 방패가 되시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모든 세력이 무릎을 꿇게 된다. 이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하나님을 보내 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하나님을 통하여 주시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기신 고난과 수난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이 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하신 기쁨을 성령하나님을 통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본문은 사도 바울에 아덴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이다. 이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의 생각으로 아름다운 말과 지혜의 말로 설득하려 한 것이 복음 증거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증거하고 있다. 사람의 생각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의 가능성, 권위를 인정하며 탁월함을 주장한다. 사도 바울이 철학자들을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이 사건으로 선포하는 것을 잊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가 될 문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은 사람의 이해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임재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이해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실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적으로 이루셨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포하게 되면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시사 마음 안에로 임재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성령의 나타남과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망 가운에 있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세우시는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애 4:16) 예레미야 애가 4장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타락을 말씀하고 있다. 그들이 먼저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고 외치던 자들이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의로운 자들을 핍박하고 피를 흘리게 하였다. “그의 선지자들이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훌렸도다”(애 4:13) 즉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이익이 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지만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애 4:15)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쳐야할 선지자와 제사장이 타락을 함으로 인하여 재앙이 내린 것이다. 그 땅에 기근이 내려서 굶어 말라 죽게 되었다. 주린 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칼에 죽는 자는 굶주림의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애 4:9) 이렇게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데 기근의 시작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함에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이라 합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며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만일 하나님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의 생각과 욕심으로 살게 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예레미야 애가는 여호와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3장은 좌절에서 소망의 위로의 말씀이다. 1장 2장 4장 5장은 각각 22절로 되어있는데 그러나 3장은 66절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좌절의 고통보다 위로의 소망의 말씀이 세 배나 더 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 때문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이 약속한 말씀이 근거가 된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이 말씀은 고후에서도 위로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즉 고난보다 위로의 은혜가 크심을 사도 바울을 통하여 증거하신 것이다.   바울이 당한 온갖 고난을 다기고도 기쁨과 감사와 찬양함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바울이 받은 위로의 은혜가 우리들에게도 임합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하나님을 믿는 소망이 있을 때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약속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베풀어 주셔야 하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켜야할 믿음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마 6:33)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애 2: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음을 특권이라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도덕 윤리 영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하여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신성시하고 자랑하였던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불에 타고 폐허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셨다고 한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람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애 2:3)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구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늘에 구름이 덮여 있으면 비가 오듯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면 반드시 심판이 임함을 알게 한다. 이 마지막 날에도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하늘 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마물러 있느니라“(요 3:36) 무슨 말씀인가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음을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의 풍성함을 얻고 불순종을 하면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구약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습니다. 즉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하셨으며 어떻게 심판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먹구름이 덮여 있으면 소낙비가 내리듯이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애 1:18)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에 내리는 재앙과 여호와의 성전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며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 고통을 과부가 남편을 잃고 당한 고통을 기억하며 표현한다. 고통의 슬픔과 애통함을 신학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기록한 목적은 오늘의 고통을 살펴보아야 함에 있다. 그래야 미래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문제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회개를 하여야 함을 깨닫게 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약속한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순종의 무서움을 보여 준다. 여호와의 말씀은 죄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경고하지 않고 실제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회개를 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이 임할 것을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 즉 하나님의 위로가 고퉁의 아픔보다 훨씬 더 크다는 약속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현재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애 1:22) 무슨 말씀입니까? 죄있는 자들은 죄의 심판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시 122:9)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게 된다. 십자가의 구속사의 은혜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이루신 유기적인 사역이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다. 성자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아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다. 여기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의 은혜가 계속 필요한가에 대한 것인데 정답은 계속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원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과거는 죄의 종에서 자유함을 받아 의의 종이 됨을 말한다. 이제 의인의 신분을 가진 자로서 거룩한 자로 살기 위한 죄 용서와 말씀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정결한 신부로서 다시 오실 영원한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얻는 구원이 있다. 즉 정결한 신부가 되어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 앞에 사는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을 하셨고 끝을 맺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자에게 얼굴을 비추어 주신다. 그래서 각 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채워진 것이다. 빌립보 있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2) 은혜와 평강의 은혜는 구원의 풍성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됨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주시는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 앞에 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얼굴을 빛추어 주시고 복을 주시고 항상 지키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버지의 뜻과 다르게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공적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