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오늘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어느 전도사님의 글을 보았다 . ‘ 담임 목사님께서 성경적인 설교를 하라고 하여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준비하여 전하였더니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듣기에 불편하다고 하였다 ’ 는 것이다 .   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어디 성경적인 설교하는 교회없는가 질문을 한다 . 그런데 그 교회에 등록을 하거나 출석은 하지 않는다 . 설교가 듣기에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   구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 왜 그렇게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을까요 ?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오늘의 삶을 고치기 위함이다 .   이단들의 가르침은 오늘의 삶을 중요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 미래를 향한 예언에 중점을 두고 있다 .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을 고쳐서 그렇게 살아야 미래가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   신자라면 가룟 유다를 다 알고 있을 것이다 .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 . 즉 하나님을 돈받고 팔아먹은 자이다 .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넘져주고 나니 양심이 부끄러워 자살을 하였다 . 사람에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라고 ” 오늘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 마 27:8)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칭찬하고 세워주는 것이 아니다 . 오늘을 올바로 살라고 전하는 말씀이다 . 그러므로 당연히 찔림이 올 수밖에 없고 회개의 자리로 갈 수밖에 없다 .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으로 설교를 해달라고 한다 .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 설교를 들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부활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산 자로서 그의 의를 배우려 하는 자들이다 .   그동안 잘못된 길을 섰던 것을 회개하고 오늘부터 올바른 의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한 설교이다 . 신자들에게 ” 피 밭 “ 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야한다 . 그래서 ” 오늘까지 피 밭 “ 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공동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의로움 뿐이다 . 그런데 그 의로움이 인간의 것이라면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 그런데 절대자의 의를 불순종하였을 때는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 .   세상은 변하고 변하여 ‘ 의 ’ 를 상실하였다 . 그저 투쟁과 분쟁의 이유는 밥그릇 싸움이다 . 나의 밥그릇을 크게 하거나 지키기 위해서 집단이 형성되고 있다 . 대표적인 예가 한국의 정치를 보면 알 수 있다 .   사람이 진정한 기쁨과 희열을 느낄 때는 의로운 행동을 하였을 때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을 하면 오는 기쁨이다 . 이 기쁨과 희열을 느껴본 자는 계속하여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 즉 맛을 느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   다윗이 자신이 경험하였던 이야기를 한다 .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에 대한 것이다 . 결정적인 상황을 전할 때에 도저히 말로 표현되지 않아서 한 말이 있다 . 너희도 그의 선하심을 직접 맛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를 잃는 사회에서는 분쟁과 투쟁이 당연히 일어난다 .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세상에서는 내일의 양식을 내가 준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 .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내가 이웃을 , 이웃이 나를 보살펴주는 곳이기에 싸울 일이 없다 . 오히려 서로를 섬기려 한다 .   사회가 혼란하고 어지러울 때에 늘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일어섰다 . 일어섰다고 함은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순종의 길로 갔었다 .   “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 34:8)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즘 시대를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하나님 보다 돈이 더 무섭고 , 자신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한다는 생각이다 .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그 나라의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부하면서 순종적인 백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   더 교활한 자는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이 동의하시고 이해하여 줄 것이라고 말하는 자이다 . 이러한 자들이 요즘 너무나 많이 있다 .   그러나 성경의 증언으로는 이러한 자는 마귀인 것이다 . 마귀는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비기려 하는 자이다 .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하나님처럼 행세하려는 자이다 .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하시는 의지 , 열정 , 사랑 , 진실함이 말씀 안에 담겨져 있다 . 하나님과 교제를 한다는 것은 가까워지는 것을 말한다 . 하나님의 마음에 동의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함께 할 수 있다 .   성경 안에 있는 말씀은 그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 그러므로 택함을 받았다면 그의 말씀을 지키고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말씀과 의를 구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말이다 . 돈과 명예과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들이다 .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왕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명령을 하셨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 만일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사칭하지 말아야 한다 .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도 그러한 자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 요 8:44 상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 땅 위에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것은 신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 세상이라는 곳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는 곳이다 .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는 곳에서 그의 의를 따르는 것이 신자인 것이다 .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있다 . 그래서 공부도 취직을 위하여 하고 , 취직은 돈을 많이 주는 회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   사람들이 시장을 들러야 한다 . 그래야 생존을 위한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하여 저울과 추를 속여야 하고 , 상한 물건을 속에 감추고 포장을 하여 팔기도 한다 .   이와 같은 행위가 당연하다는 말로 ’ 사람은 서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 ‘ 라고 한다 .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 적은 이익을 얻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믿음이다 .   거짓된 세상에서 신자들이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 그래야 거짓된 세상으로부터 진실한 세계를 이어갈 수 있다 . 이것이 세상에서 신자에게 맡겨진 소금과 빛의 사명이다 .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마 5: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교회의 공동체는 혈연의 공동체이면서 신뢰의 공동체이다 .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벽이 무너짐으로 인하여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   교회가 신뢰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임하여야 한다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공동체이다 . 교회의 모든 시작은 그리스도의 피로 시작함을 인정하여야 한다 .   만일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고백하지 않는 자들이 모여 있다면 서로를 신뢰하지 않고 피를 나눈 공동체라 인정하지 않는다 .   또한 교회에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곳은 교회가 없는 것이다 . 교회가 아닌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없는 것이 된다 .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억하고 지키는 교회만이 교회인 것이다 .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 그래서 교회는 선지자와 사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곳이 되어야 한다 .   하나님의 언약은 피로 세운 언약이다 .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로 언약을 하였고 ,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십자가의 언약을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례를 시행하는 것이다 .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엡 2:13)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2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모든 병자를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셨다 .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셨다 .   우리들이 바라는 바는 십자가에 죽지 마셔야 하고 , 인류의 모든 병자를 고치시고 , 매일 매일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셔서 모든 굶주리는 자를 배부르게 하셔야 한다 .   이 문제에 대한 답을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벧전 1:9) 말씀하고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을 구약의 백성들에는 돌판에 새기어 주셨다 . 그랬더니 그들이 말씀을 뒤로하고 이방신을 찾아 다녔다 . 그래서 방법을 달리하셔서 이제는 사람의 마음에 새겨주시기로 하셨다 .   마음에 말씀을 새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 그래서 믿음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영혼이 새롭게 되었다 .   그래서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진리의 말씀만을 따르는 것이다 . 이 말씀에 대한 확인은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   어떠한 환경이라도 차디찬 감옥 , 심한고문 , 지독한가난 , 민족차별이 영혼의 구원을 이길 수 없었다 . 베드로는 서신서에서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신자들의 찬양과 기도가 이전만 못하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지는 오래 전부터이다 . 물질만능시대와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갖고 싶은 것과 하고 싶었던 것들이 참으로 많았었다 .   그런데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니 먹고살 정도로 벌었고 해볼 것도 해 보았다 . 그래서 이제는 갖고 싶은 것보다는 지니고 있는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   그러다보니 이제는 구태여 이른 새벽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 문제의 답을 정리하면 돈과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것이 된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약속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다 .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면 영혼이 깨끗하여 진다는 것이다 . 자기중심적에서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함을 말한다 .   즉 ,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소유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랑이 넘치는 인격체가 되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다 .   자기의 욕심을 따라 거짓으로 이웃을 속이고 헛소문으로 형제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자는 영혼이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 성경적인 설교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 진리의 말씀만이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 벧전 1:22)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세상이 점점 묘하게 변해 가면서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긴다 . 그러한 이유는 신자들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문제를 예수님의 공생애 행적에서 살펴보려 한다 . 예수님의 사역은 섬기는 것이었다 . 그래서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 오셨다 .   그렇다면 그들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 가난한 자에게 돈을 많이 주었던 것일까 , 버림 받고 외면당하는 자들을 찾아 가셔서 그들의 신분을 격상시켜 주시고 권력을 주신 것일까 ,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을 다시 회복시기키 위하여 오셨다 . 이 세상의 가칭의 기준은 돈과 권력과 명예이다 . 그것을 소유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있는 자들에게 찾아 가신 것이다 .   인생의 가치는 권력이나 돈이 아니다 .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본래 목적이 아니다 .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도우며 섬기며 살라고 창조하셨다 .   사람의 가치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 그것에 대한 답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지에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를 타락한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   그러므로 신자들은 세상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따라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사회를 개혁하여야 한다 . 나 자신에 사회 속에서 소금으로 있는 것에 개혁이다 . 구호를 외치거나 함성을 지르는데 있지 않다 .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 9:13)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교육의 내용 가운데 인간에 됨됨이의 기본이 있다 . 바르게 법을 지키며 선한 양심으로 착하게 살고 , 만일 잘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용서하라는 것이다 .   그런데 세월이 지나 인생의 연륜이 팔십이 되어서도 유치원의 교육 내용을 실행하는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 즉 아직도 철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   왜 그럴까 ? 수만 번을 들었던 내용인데 행할 수 있는 의지력이 없다 . 그러한 이유는 마음이 죄악으로 부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부패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고치기 위함이다 . 썩은 마음을 새것으로 바꾸기 전에는 선한 양심으로 선행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할뿐더러 사회를 개혁시키는 개혁자가 된다 .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   썩은 세상 속에서 ,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 . “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암 5:24)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시편 2 편의 말씀을 보면 세상나라의 왕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 왜 그런가하면 나라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공의가 시행되는 곳이다 . 하나님의 ‘ 의 ’ 이란 하나님의 의지 , 율법 , 선한양심을 말한다 . 그의 의를 각각 개인이 마음에 기초로 삼고 , 사회에서 그의 의를 타나내는 것을 ‘ 공의 ‘ 라 한다 .   그리고 사랑과 자비로 변치 않는 정직함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가라는 것이다 . 만일 이와 같은 나라를 이루어지 못하면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함을 경고하고 있다 .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며 살피는 관계로 되어 있다 . 그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베풀어야 한다 . “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 출 23:19 하 ) 율법을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은 Cheese Burger 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 왜냐하면 어미의 고기와 젖이 함께 들어가 있기 때문이란다 .   지금 온 인류가 고통 가운데 있다 . 가장 근본적인 창조주의 질서의 법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한 양심은 찾기가 힘들고 거짓이 판을 치고 거짓말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있다 . 거짓이 들어났어도 진정성이 없는 말로 포장을 하고 있다 .   신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선한 양심으로 ’ 그렇다 , 아니다 ’ 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 왜 그런가 하면 말과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보응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   “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 약 5:12)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   그들의 불순종은 삶에서 나타났다 . 삶 속에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서 불만이 많았다 .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   먼지가 날리고 물이 없는 사막 길이 아니라 평탄한 대로이며 가장 빠른 길로 인도하기를 바랐었다 .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한 길은 사막 길이며 물이 없고 양식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   왜 그렇게 하셨을까 ? 그들에게는 광야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 강력한 무기를 가진 군대들로부터 피하는 길이었다 .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며 인도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불순종을 하는 이유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내가 생각하는 길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   “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사 55:8)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구원한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는 법이다 .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백성들은 율법의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   율법은 우리를 억압하고 제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풍성하게 한다 . 율법의 범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위로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던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 그는 말씀대로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 그의 고백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는 것이다 . 고난보다 위로의 은혜가 더 컸음을 말하고 있다 .   신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의 시민권을 얻었다 . 그 구원의 은혜가 풍성하지만 더 큰 은혜는 말씀을 지키며 사는 자들에게 임하는 위로의 은혜라는 것이다 .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이다 . 이것을 깨닫고 율법의 말씀을 지키면 믿음으로 살려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   “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고후 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야 율법을 지킬 수 있다 .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 새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   하나님 앞에 산 자는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 이미 구원을 얻었기에 자유인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 율법의 내용은 하나님을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   율법에는 하나님의 속성 , 인격 , 사랑이 담겨 있다 . 율법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 말씀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게 된다 .   즉 ,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상대하신다는 것이다 . 신자가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새 사람이 되어 율법을 지키는 생활을 믿음의 생활이라 한다 . 거룩한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됨으로 거룩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한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 그리고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위로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롬 6:11)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예배는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십자가의 능력과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 그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시간이다 . 십자가의 사건은 내가 있고 공동체가 있게 된 그 기초이며 ,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자가 인식하여야 할 것이 있다 . 즉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이시며 , 드리는 나는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언약을 맺은 자만을 그의 백성으로 인정하셨다 . 그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만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자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가 된다 .   그 십자가의 능력은 죄사함을 통하여 거룩한 자가 되어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된다 .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과 교제 하게 된다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된다 .   예배의 중심은 설교이다 .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 씻음 받은 자가 새롭게 살아야할 규례를 듣는 시간이다 . 거룩하게 된 자를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말씀이다 . 거룩한 말씀을 지킴으로 나를 지키고 이웃과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책임으로 살게 함이다 .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레 19:2)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교회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곳이다 .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 그렇다면 예수를 믿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 만사형통의 복을 받는다고 들어 왔다 . 복이라는 개념을 나 개인의 욕망 , 성공과 출세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행운까지도 포함이 된다고 생각한다 . 그것은 목사 개인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거짓을 섞어서 전해진 잘못된 것이다 .   그렇다면 교회를 통하여 얻는 복은 무엇인가 ?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 이 연합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임하게 된다 .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심의 능력이 현실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   그리하므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임한 자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하게 된다 . 겸손한 마음을 가짐으로 인하여 섬기는 자가 된다 .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낮아짐과 같이 됨을 말한다 .   참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이다 . 제자들의 성품과 삶이 변하였던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 겸손하여 섬기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다 .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복의 약속이다 .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고후 3: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교회는 유익함을 얻기 위한 곳이 아니다 . 본질적인 문제를 상실하여 오늘날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신자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에 유익함이 있는 곳을 선택한다 . 아이들의 학습에 도움이 된다든지 , 사회생활을 위한 인맥에 도움을 준다든지 , 문화생활에 편리한 시설과 공간이 있는 지를 보고 결정을 한다 .   교회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 공동체이다 .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목적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 우선 교회에 모일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 이러한 공동체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룬 교회라 한다 .   주일학교는 이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음으로 인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서는 교회를 떠나고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또한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교회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배우는 곳이다 . 십자가의 능력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 오직 성령 하나님의 역사함으로만 능력이 나타난다 .   하나님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성령하나님이시다 .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책이다 . 교회는 성경적인 설교와 공부만으로 능력을 나타낸다 . 그래야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함의 능력과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사는 부활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고전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