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의 게시물 표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II

  어느 덧 세월이 흘러 12 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 세월은 물과 같이 쉬지 않고 흐르고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하였다 . 2013 년도 그렇게 흘러간 것 같다 . 새해를 시작 할 때에는 마냥 긴 것만 같았고 멀리 보였던 2013 년의 끝자락이 다가온 것이다 .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인생의 칠 , 팔십은 잠깐이라 하였다 . 그 인생의 길이를 좀 더 긴장하며 다짐하며 새롭게 살게하려고 짧은 단위로 나누신 것 같다 . 일 년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계절을 주신 것 같고 , 1 년을 365 일로 묶어서 칠 , 팔십 년을 살게 한 것이다 .   또 , 1 년을 좀 더 점진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열두 달로 나누었고 , 한 달을 삼십 일로 나누어 의미있게 계획을 세우게 하시고 , 세월의 긴장감과 흐름을 보여주기 위하여 시간으로 분으로 초로 나눈 것 같다 .   2013 년이 지나가고 2014 년이 다가와도 우리의 삶에는 특별하게 변하는 것은 없다 . 2013 년의 마지막 날 다음날이 2014 년 새해 첫날이 되는 것이다 . 그저 우리의 나이는 한 살을 더하게 된다 .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어제의 삶이 오늘로 이어져서 정해진 방향을 향하여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루하루를 새로운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 어느 누구도 살아보지 않은 2014 년 1 월 1 일을 산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 먼저는 눈을 떠야 그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 그리고 아무도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   그날 그 시간에 어떤 일이 정하여 졌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하나님만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시간을 관장하시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니 2014 년의 세월도 하나님이 주셔야 하고 또한 역사의 주관자이신 분이 함께 하셔야 한다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려 하시는 지를 분명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2013 년 올해도 성탄절은 어김이 없이 다가오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날이다 .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고 있지만 그 즐거움의 근원은 확연하게 다르다 .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쾌락을 즐기기 위함이고 ,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죄로부터의 구원의 감사함으로 인한 기쁨이다 .   목사들에게는 매년 오는 성탄절 절기설교가 생각보다 더 힘들다 . 왜냐하면 교인들의 현실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 “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 “ 라는 기쁨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을 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   지금 이 땅위에는 사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은 집 걱정 , 자녀 문제 , 먹고사는 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격고 있다 .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믿음의 생활이 흔들리고 있다 . 좌절과 낙심으로 이어진다 . 그래서 한 동안은 “ 하면 된다 .“ 와 ” 긍정적인 생각 “ 을 강조하였다 . 그러나 변한 것은 없다 . 그러다보니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이 더 심하게 나타나서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   지금도 성경 안에서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찾는 자들이 있다 .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유혹하는 거짓된 자들이 있다 .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신통한 비법이 있다고 한다 . 이러한 자들을 일각에서 양복입은 무당이라고 조롱을 한다 .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관계이다 . 사랑이란 관계가 형성이 되면 서로를 위하여 헌신하고 섬기게 된다 . 어떠한 조건이나 목적이 개입될 수가 없다 . 사랑의 대상인 그 인격이 좋은 것이다 . 그 인격을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   하나님의 사랑은 엄청난 것이다 .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죽으신 사랑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면 부요함의 복을 받는 것이다 . 그런데 다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 .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있다 .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사람의 감정은 주관적이다 . 그래서 같은 슬픈 영화를 보고도 우는 사람이 있고 슬픈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 그래서 감정의 표현을 인체의 아픔으로 나타낸다 . 창자가 끊어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한다 . 왜 그런가하면 누구나 몸의 장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성경의 인물 가운데 다윗은 참 어렵고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 . 사울 왕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적의 나라이며 적장을 죽인 블레셋으로 도망을 가서 한 성읍을 얻어서 살게 된다 . 그런데 그때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사울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   블레셋 왕인 아기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함께 나가자는 명이 떨어진다 . 만일 반대하는 의사를 나타내게 되면 블레셋 왕인 아기스에게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된다 . 그래서 할 수 없이 전쟁을 참여하게 된다 . 그러나 블레셋의 다른 왕들이 다윗과 함께 전쟁에 참여는 것을 반대를 한다 .   그래서 다윗은 그가 살던 곳이 시글락에 삼일 만에 돌아오게 된다 . 그런데 왠일인가 , 아멜렉 군대가 쳐 들어와 모든 여자들을 잡아갔고 성읍을 불살라 버렸다 . 너무도 절망을 하여 큰 소리를 내며 울다가 나중에는 울 힘도 없도록 지치게 된다 .   함께 따랐던 부하들도 분노가 치밀었다 . 그래서 돌로 다윗을 치려하였다 . 그때에 다윗은 크게 다급하였지만 ,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 기도의 내용은 아멜렉 군대를 쫓아가 쳐도 되는가하는 질문이었다 . 하나님은 쫓아가라고 하셨다 .   그래서 이틀 동안 아멜렉 군대를 쳐서 소년 사백 명을 제외하고는 다 죽였다 . 그리고 빼앗긴 모든 것 , 아주 작은 것까지 도로 찾았고 , 아내와 여자들도 모두 찾았다 . 그뿐만 아니라 아멜렉 군대가 가지고 있던 양 떼와 소 떼를 전쟁의 전리품을 몰고 온다 .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의 믿음을 볼 수 있다 . 아주 다급하고 위험이 따르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 인간의 생각으로 위기를 모면하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 지상에 있는 사자는 더 이상 사자가 아니다 ‘ 라는 다큐멘트를 보았다 . 남아공에 가면 사자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 어린 사자를 사육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낸다고 홍보를 한다 . 그래서 어린 사자를 돌보아줄 자원봉사자도 모집을 한다 .   이곳은 ‘ 사자 농장 ’ 이다 . 사자를 이용하여 철저하게 돈벌이를 하는 곳이다 . 이제 막 태어난 사자를 돌보는 프로그램은 입장료만 십만 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 어린 사자에게 우유병을 물리고 놀아주며 함께 사진도 찍는다 .   어린 사자가 육 개월이 되면 함께 놀아주기 프로그램에서 함께 걷기 프로그램으로 옮겨지게 된다 . 숲속을 사자와 함께 걷는 프로그램이다 . 걷는 사람들 모두가 긴 막대기를 들고 있다 . 그 이유는 사자가 긴 막대기를 아주 무서워한다 .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마치 사람 손에 길들여진 개와 같다 .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서도 쫓겨나면 사냥꾼들을 위한 사냥터로 보내어져서 총이나 화살에 죽어야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 사람들의 헛된 욕망에 의해서 밀림의 왕인 사자도 더 이상 사자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 .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사자는 야생의 들판으로 나왔지만 사냥하는 방법도 모른다 .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보내게 한다 . 그때에 사냥꾼들이 사냥터로 오면 사육사가 먹이를 주는 것으로 착각을 하여 다가온다 . 사냥꾼이 총을 겨누고 있지만 , 사자는 사육사의 막대기와 사냥꾼의 총을 분간하지 못한다 .   사냥꾼은 사자를 향하여 총을 겨누지만 오히려 사자는 점점 다가온다 . 사냥꾼은 방아쇠를 당기고 사자는 쓰러진다 . 그때 철부지이며 헛된 욕망을 가진 더러운 인간인 사냥꾼은 환호를 한다 . 가장 용맹한 사자를 잡았는데 그것도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제압했다는 환호를 지른다 .   그리고 기뻐한다 . 마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용맹스러운 자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 . 그러나 그것이 짜여 진 각본에 의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오색의 색깔과 높고 푸른 하늘이 지나가면 잿빛 하늘이 온다 . 풍요로움과 풍성함이 있던 자리는 허전하고 쓸쓸함이 찾아온다 . 그리고 쓸쓸함이 변하여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변한다 . 이때가 되면 흔히 가을을 타는 남자들의 증상이 나타난다 . 그래서 떠나가는 시간을 잡으려고 무드를 잡지만 매서운 바람을 앞세우고 찾아오는 초겨울은 어김없이 온다 .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성품이 있다 . 각각 사람의 성품이 다르다 .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낙천적인 성품으로 또 어떤 사람은 소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그러나 알 수 없는 미래에 앞에서는 동일하게 근심하며 염려를 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 그런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 더 이상 자신의 성품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은 내일의 염려를 생각하니 괴로운 것이다 . 내일의 염려가 오늘을 두렵게 한다 . 그래서 머리를 마취시키기 위해서 알코올을 부어서 채운다 .   세상이 나를 막아도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능력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세상의 관원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살리셨고 , 유대인이 돌로 치고 태장으로 몽둥이로 내리쳤지만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냈던 바울이 있다 .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라면 그의 성령을 받았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었다 .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심을 믿을 수 있고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 그래서 우리는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러나 생각없이 이리저리 널뛰는 자가 아니다 . 근신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생각하여 판단하고 절제하는 마음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 교회의 일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   차디찬 겨울바람보다 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한 동안 언론 지상에 ‘ 슈퍼 갑 ‘ 이라는 단어가 유행을 했었다 . 계약문서를 작성할 때에 ’ 갑 ’ 이 제시 하는 조건에 ‘ 을 ‘ 을 따라야 하는 것이 관례이었다 . 그런데 ’ 을 ‘ 이 ’ 갑 ‘ 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를 수 없다고 하여 대항한 것이다 . 그런데 세상이 변하여 ’ 갑 ’ 이 ‘ 을 ’ 의 요구 조건을 들어 주게 되었다 .   그러나 세상을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이다 . 이것은 변할 수가 없다 . 교회 안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 을 ’ 의 관계를 갖고 모여 있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속에서도 ‘ 갑 ’ 과 ‘ 을 ’ 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   성경 말씀 가운데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하는 문제가 나온다 . 처음에는 죄를 범한 사람과 일대 일로 만나고 ,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두세 사람을 데리고 가고 ,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교회 앞에 알리어 교회가 묻고 ,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출교를 시키라는 것이다 .   범죄한 자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준다 . 이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된다 . 비록 죄를 범하였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 교회 안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 갑 ’ 의 위치에 있지 않다 .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범죄를 하면 나는 ‘ 갑 ’ 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잘못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 그리고 죄의 무서움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관찰하라는 것이다 . 또한 범죄한 자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 함께 아파해야 한다 . 이것이 형제 사랑이다 .   그리고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안다면 ‘ 갑 ’ 의 위치에 설 수 없다 . 내가 죄사함을 받은 가치는 금 일만 달란트이다 . 그러나 형제의 잘못은 백 데나리온이다 .   하나님의 명령 속에 범죄한 자가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받는 자는 반드시 용서를 해 주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월 달에 비가 내리면 왠지 쓸쓸하고 울적한 마음이 든다 . 지금 이곳은 비가 자주 내리고 있다 . 그래도 향내 나는 따스한 커피가 있고 , 정다운 사람이 옆에 있으면 푸근한 마음이 든다 .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이렇다 .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하늘 높이 바삐 날아가는 새들도 있고 ,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새는 슬피 지적이고 있다 . 그리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들은 빗줄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이 비가 지나가면 낙엽이 쌓일 것이고 차가운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 가을을 서둘러 정리하기 위하여 비가 내리고 있다 . 그래야 겨울이 시작되고 또 다시 봄이 온다 .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면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반성과 깨달음과 감사를 생각나게 한다 . 그리고 깨달은 새로운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 . 올 해보다는 내년에는 더 많은 풍성함을 위하여 다짐을 하게 된다 . 가을 추수로 곡간 안에 비어있을 수도 있고 , 꽉 차 있을 수도 있다 . 그 결과에 따라서 겨울의 삶이 고통이냐 아니면 기쁨인가가 결정된다 .   신자들의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 영적인 열매를 많이 거둔 사람들은 차디찬 혹독한 고난과 시험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 이 땅 위에 있는 것들은 안전하지 않다 . 땅이 갈라지고 산이 흔들리고 정권이 바뀌면 법도 바뀌는 세상이다 .   이러한 세상에서 살다가 보면 흐름에 따라 살 수밖에 없다 .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흐름에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 즉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사는 것이다 . 세상의 정책은 빚을 지며 살라고 하여 크레디 카드를 아무에게나 내어 준다 .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곳간에서 열매를 채워 놓고 사는 사람들이다 .   미리 준비하며 사는 자들이다 . 육일 동안 벌어서 칠일을 살고 , 육년 동안 농사를 지어서 칠년을 살아야 한다 .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런하여야 한다 . 그래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 . 오늘은 어제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II

  이 땅위에 밝혀진 것 가운데 너무나 선명하게 밝혀졌지만 , 왜곡되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곳이 교회이다 . 즉 교회는 어떤 곳이며 무엇을 하는 곳이냐는 것이다 . 이것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알아야 한다 . 사람의 생각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시고 세우신 곳이기 때문이다 .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교회가 위기를 맞이하여 계속 존재하느냐 아니면 없어지느냐 하는 문제로 자유자제로 말들을 하고 있다 . 그러나 다 틀린 말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결코 망하거나 문을 닫는 일은 없다 .   그것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택함을 받았지만 죄의 본성으로 인하여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함에서 실족한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함에 있다 .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 .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된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 그리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과 만물이 진노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   그래서 지금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은 죄의 고통을 받고 있다 . 그 가운데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 죄로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하고 또한 죄로 저주를 받은 우주만물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 즉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함이다 .   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일을 교회를 통하여 하시려 하는 것이다 . 즉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려 하신다 . 그러기 위해서는 죄로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 . 이것이 중생의 역사이다 . 영어로 Born Again 이라 한다 .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다 . 그래서 교회에 모인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법과 규례를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