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III

    ’ 십계명 ‘ 은 인류의 모든 사람이 지켜야할 보편적인 도덕법이다 . 그런데 문제는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그 법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죄로 타락한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과 대적을 하고 , 타인을 내 마음대로 죽이기도 하고 이웃의 것을 힘으로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   또한 그 법을 어떻게 하면 교묘히 지킬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 더 나아가 범죄를 저질러도 주변의 환경과 조건을 탓하는 단계까지 간다 .   ’ 십계명 ‘ 을 지키게 되면 평화와 자유를 보장받는 사회가 된다 . 그러나 죄로 타락한 죄인들은 그 법을 지킬 수가 없다 . 그래서 그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   인간의 부패된 마음을 고쳐서 ’ 십계명 ‘ 을 지키기 위함이다 . 그 법을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키는 자리까지 가게 함이다 .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 새계명 “ 이다 .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 간의 싸움과 정치적인 싸움은 죄로 부패한 인간들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평화와 청결 ,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위장한 죄악의 싸움이다 .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 인간들의 전쟁과 싸움을 멈추게 하기 위함이다 .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눅 2:14)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돈 버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 출신 지역의 성향을 따라 정치적 이념을 말할 때는 핏대를 세우다가 , 주일날 옆구리에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참 신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   내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나와 내 욕심을 간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 나의 멋진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의뢰하는 것도 신앙이 아니다 .   신앙이란 하나님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다 . 나의 생각과 의지를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에 맞추는 것을 신앙이라 한다 .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는 것 또한 신앙이 아니다 .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   우리는 참으로 말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다 . 전부다 자기 말이 옳다고 한다 . 옳다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유명인의 말을 동원하기도 하고 성경의 말씀도 인용을 한다 .   성경의 말씀은 자신의 옳음을 위하여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 성령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에 살아있는 운동력이 있어 이미 의지적인 행함으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 .   그래서 말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 그 방법을 성경 속에서 마귀가 썼고 , 거짓 교사들이 사용하였었다 . 오늘의 시대에서도 가짜들은 믿음의 행함이 없이 말로만 떠들고 있다 .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는데 믿음의 행함은 없고 말로만 떠들었던 자들이 있었다 .   “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 고전 4:20)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란 ? 큰 구원으로는 절대자가 내게 임하는 것이다 . 즉 하나님 나라의 왕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게 된 이유는 칼춤을 추는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고 침노하기 위한 것이다 .   ’ 침노 ‘ 라는 뜻은 다른 나라를 쳐 들어가 점령하는 것이다 . 칼춤을 추는 나라는 사람의 생각으로 세워짐으로 인하여 권력이 바뀔 적마다 칼을 휘둘러야 한다 .   자기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끼리는 늘 충동할 수밖에 없다 . 사람의 생각은 불완전함으로 향하게 된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다 함은 구원을 통하여 오직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산다 .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생각하고 따르는데 있다 . 그러므로 칼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것이다 .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마 11:12)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배만 참석하면 , 설교만 들으면 모든 것을 면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 주일날 골프 치러 가기 전에 예배를 참석하면 골프장을 가는 것이 허락된다고 생각한다 .   제물에 눈 먼 목사가 잘못 가르친 것이다 . 주일날은 일체의 오락을 금하는 날이라 가르치는 것이 올바르다 .   주일 날은 주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는 날이다 . 육체의 노동을 쉬면서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을 향한 소망을 채우는데 있다 .   성경 공부나 설교 말씀을 배우거나 행하는 데는 상관이 없다 . 오로지 예배만 드리면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인정함을 받는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너무도 만연하다 .   그렇지 않다 .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알게 되면 감사와 찬양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 그리고 그 큰 은혜가 나에게 임한 것을 깨달으므로 회개의 고백을 하게 된다 .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이다 .   제물을 좋아하는 목사들이 헌금만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 큰일 날 소리이다 .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 . 우리에게 구원의 영광을 찬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되신다 .   “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엡 1:6)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 우리라는 공동체이다 . 즉 우리라는 공동체가 마치 절대 진리를 따르고 있다는 착각이다 .   그래서 우리를 대적하는 자는 다 마귀가 되는 등식이 성립된다 . 그런데 정작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모여 있다 .   이러한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다 . 말씀을 들을 대상은 자기는 아니고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목사와 한 편이 되면 진리를 따른다고 스스로 만족을 한다 . 그러나 목사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생각을 주장한다면 결국은 사람의 생각을 따르는 자가 된다 .   사람을 따라 다니면 안 된다 . 목사는 신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세움을 받은 사람이다 .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야 한다 .   이러한 착각에 빠진 목사나 신자들 때문에 교회 안은 늘 시끄럽다 . 성경의 말씀은 목사에게나 신자들에게나 순종과 굴복의 자리로 나가게 한다 .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이 이단이요 , 그 사람이 교주가 되는 것이다 . 교주는 달래 교주가 아니다 . 자기를 따르게 하는 자이다 .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자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라 가게 하는 지식과 지혜를 전하는 자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고후 4:5)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 건너편 감람산에는 이방신을 섬기는 산당들이 있었다 .   시편의 기자는 산당들을 바라보면서 한탄을 하고 있다 .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서이다 ”( 시 121:1-2)   그 산 위에 많은 산당들이 있지만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 자신을 구원하시고 지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이라는 고백이다 .   그 산 위에 많은 신들이 있지만 나를 온전히 지켜 주실 분은 여호와뿐이라는 담대한 고백이다 . 시편의 저자는 많은 신들 앞에서 담대히 고백을 하는 것이다 .   신자들의 고백이 이와 같아야 한다 . 여행길에서 만난 유적지에서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분위기 휩쓸리는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거나 합장을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   우리들의 신앙은 이방신 앞에서 담대히 고백하는 것이다 . 세상 앞에서 담대히 고백하며 사는 것이다 .   이방신 앞에서 세상 앞에서 “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라는 고백을 하여야 한다 .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주님도 당신을 알지 못하신다 하셨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신자들은 지금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해결이라고 말한다 . 이것이 참말이라면 신자는 지금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자들은 세계관이 바뀐 사람들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살고자 하는 진리를 갖고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있는가에 할 말이 없게 된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라면 그 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 그렇다면 그분의 가르침으로 살아야 한다 .   신자가 말을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고 무든 일을 할 때에는 주께 하듯 하라는 가르침이다 . 이 말씀대로 살게 된다면 신자들은 신념으로 사는 것이다 .   내가 있는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살면 된다 .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싸움이었다 .   아담과 하와가 뱀과 싸움에서 졌고 ,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의 생각으로 살다고 망하였고 , 중세교회가 사람의 생각으로 교리를 바꾸었다가 종교개혁이란 사태를 맞이하였다 .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경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면 된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고 읽고 세상을 바라보면 된다 . 그러면 세상이 넓게 보이고 , 절망이 아니라 안도할 수 있고 , 아름답게 보인다 .   “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시 121:2)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라

‘ 거짓말 ’ 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 거짓말을 잘 하는 이유는 심성이 부패되었거나 또는 영혼이 진리에 짓 눌려 있을 때이다 .   위조품이라는 것이 있다 . 물건을 만드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하여 진짜인 것처럼 만든 것이다 .   사람들 가운데도 위조품을 만들 듯이 거짓으로 거짓말을 만든다 .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시작을 한다 .   이러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 거짓이 탄로 났을 때에는 그럴싸한 변명으로 대처할 수 있는 또 다른 거짓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   뱀은 아담과 하와를 속였다 .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저주를 받았다 . 그러한 저주를 받는 것을 보고도 뱀은 회개를 하지 않았다 .   마귀의 특징은 회개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 끊임없이 거짓으로 일관한다 .   혹시 내가 위조품이나 짝퉁을 좋아한다면 생각하여 볼 일이다 .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거짓말이나 거짓으로 만든 위조품을 싫어한다 .   위조품을 파는 사람이 나에게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지 , 또는 거짓말을 자주하는 자가 잦은 왕래를 한다면 나 자신을 점검하여야 한다 .   거짓이 나오는 부패된 성품을 고쳐야 한다 .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 말씀이 새겨져야 한다 .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오늘도 거짓말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다 .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엡 4:23-24)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학생이 교과서는 갖고 있는데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모른다면 답답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를 모른다면 이것역시도 답답한 일이다 .   한국교회는 잘못된 종말론 신학으로 인하여 종말에 대한 관심과 열심히 있었다 . 그래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면서 성경의 말씀을 차분히 생각하기 보다는 기도에 더 열정적이었다 .   그러다가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선교회가 난리를 쳤다 . 이단의 허망한 종말론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다시 복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   이번에는 뜨거운 감정으로 전하는 복음운동으로 인하여 청년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 그리고 선교사역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었다 .   뜨거운 감정은 냉철한 현실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 적극적인 열심과 열정적인 감성만으로는 안 된 것이다 . 즉 , 그들에게 성경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부흥이 없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에게 주신 구원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찬양으로 나가는 회개를 말하는 것이다 .   한국교회의 회개운동은 강요와 율법주의적인 것이었다 . 회개운동은 먼저 회심이 있어야 한다 .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서 성령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 .   죄인들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 이것은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 즉 성경의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읽게 되면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의 말씀의 넓이와 길이 , 그리고 깊이와 높이를 측정하여야 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   “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엡 3:19)   *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의 구속사적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예수를 믿고 ,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 성경을 믿는다고도 한다 .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   믿음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데 있다 . 천지만물도 창조하시고 , 사람도 만드시고 , 죽은 자도 살리시니 그 능력을 믿게 되면 많은 도움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을 한다 .   하나님과 택한 백성들은 언약의 관계로 되어있다 . 그래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져 있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새약속이라 한다 .   언약이라 함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언약서가 있다 .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준 언약서를 택한 백성이 지키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언약의 내용 ( 십계명 , 의식법 , 정결법 , 사회법 ) 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고쳐 지키게 하기 위하여 새언약을 새우신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언약의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그 언약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   다시 말하면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반드시 지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오순절성령강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오늘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왜 율법은 지켜야 하는지 , 또 계명은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   하나님과 우리는 언약의 관계로 되어 있어서 , 하나님나라의 왕과 백성으로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나타낸다 .   왕과 백성의 관계라 함은 백성은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함을 말하는 것이고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임을 말한다 .   지금의 교회 안에는 무 율법주의자들이 넘치고 있다 . 질서와 법이 없어서 혼돈과 공허와 어두음이 짖게 깔려 있다 .   교회가 다시 회복을 하려면 주님께서 주신 계명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피고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 또한 주님의 계명이 어떤 것인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요즘 방송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 진실 , 진리 ‘ 라는 단어이다 . 인류의 역사는 진리를 찾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다 . 진리를 내세우며 반대하는 세력을 처형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   참으로 복잡한 것이 각자가 주장하는 것마다 진실이고 진리라고 한다 . 그러다보니 늘 언쟁이 그치지를 않는다 .   진리는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진리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 진리는 작은 소리로 읊조려도 진리이다 .   진리를 아는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 시기하지 않는다 .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는다 .   진리를 아는 사람은 법을 스스로 지키며 그 법 안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다 . 그렇다면 그 법의 내용은 무엇인가 ?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 .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중심의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섬기는 낮은 자리로 간다 .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각을 작게 한다 .   이러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 하나님 나라의 법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곳이다 . 나 중심의 사고를 갖고 싸우며 주장하는 나라가 아니다 .   진리는 자유를 주고 평화를 준다 . 전쟁과 싸움이 없는 것이다 .   그런데 작금의 세상은 서로 칼춤을 추면서 진리를 외치고 있다 .   이제 교회는 진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자들이 빛을 비추어야 한다 .   “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 고후 13:8)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오래 묶은 것 가운데 친구와 포도주는 좋다고 한다 . 또한 오래된 사찰도 사람들이 그 전통성을 인정한다 .   그러나 오랜 전통을 이어온 예배당보다는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에 최고의 음향 시설인 교회는 신자들에게 늘 관심거리이다 . 삐걱거리는 마루소리와 풍금소리는 오래된 것이라 싫어한다 .   종교는 무엇을 전통으로 지켜야 하는가 ? 핵심이 되는 사상인가 , 아니면 부대시설이 주는 편리함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   그동안 교회들은 무엇을 자랑하였는가 ? 외형적인 건물과 사람의 수를 자랑하였다 .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   성경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였다 . 모든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는 권면도 있다 . 즉 , 십자가 이외는 자랑할 것이 없는 곳이 교회인 것이다 .   이것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임인 곳이 교회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자리에 나갈 수 있다 .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고백이 항상 필요하다 . 그래야 성삼위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자리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   이것이 우리가 이어갈 전통이다 . 할렐루야 !   “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 엡 3:21)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는 탐심이라 한다 . 탐심이라 함은 육신의 정욕을 말한다 .   우리들은 갖고 싶은 것도 많고 , 하고 싶은 것도 많다 . 그런데 그것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과학문명의 결과물들이다 .   사람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흔드는 것들이 있다 . 그것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 , 핸드폰이라 할 수 있다 .   탐심은 우상숭배라 하였다 . 그렇다면 어디까지 마음에 두어야 하는가 ?   자동차는 운송수단으로 이동거리를 편안하게 시간을 단축하는 편리함을 준다 . 전화기 역시 시공간을 넘어서 통신 수단으로 사용을 하면 된다 .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신자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 . 그러다보니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만족시키려는 갈망이 기도 시간에 나타난다 .   세상의 철학과 종교에서는 절제와 통제를 가르치고 있다 .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물질문명의 것을 받아들이고 자랑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   교회에서도 사람에 대한 평가를 돈이나 물질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그러나 교회에서는 사람을 돈이나 물질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분량으로 판단을 하여야 한다 .   그리고 교회는 물질의 욕망을 채워주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르치는 곳이다 . 이것에 대한 본질을 모르면 무속신앙을 숭배하는 곳이 되며 또한 목사는 양복입은 무당이 되는 것이다 .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골 3:5)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할 일을 하게 하셨으니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의사가 있다 . 그는 헌신적인 정신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다 .   기독교는 사람을 살리는 종교이다 . 사람을 살리는 방식이 먼저 거듭나는 ( 중생 ) 것이다 .   거듭남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썩음과 살인의 자리를 벗어나 생명과 평강의 자리로 오게 된다 . 그리고 이웃에게도 거듭남의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된다 .   거듭남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 거듭나기 이전의 것들을 미워하며 대적한다 . 그리고 거듭났음의 기쁨으로 삶을 산다 .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 이웃을 살리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고 , 또 어떻게 해서든지 이웃을 비판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이 있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을 살인하고 비방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이다 . 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함과 사랑과 의로움을 마음에 담아 두기를 싫어한다 .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에게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 것이다 .   그러니 신자들은 저들을 통하여 악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의인은 더욱더 의를 지키며 살아야 함을 되새기게 된다 .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할 일을 하게 하셨으니 ”( 롬 1:28)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 ‘ 는 말이 있다 .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숭늉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   성경 말씀을 보면 믿음은 자라나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한다 . 씨가 심겨지고 고난과 시련의 인내를 참고 견디어야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 . 즉 , 믿음은 반드시 열매로 결과가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믿음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농부가 씨를 뿌려야 하며 , 씨는 땅에 심겨져 싹을 내어야 하고 , 따가운 햇볕과 폭풍우를 견디어야 하고 ,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다 .   믿음이 자라나야 한다는 것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 그래서 믿음의 분량대로 또는 분수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라고 하였다 .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을 무시하고 단시간에 씨뿌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 이런 사람들을 소위 부흥사라고 한다 . 씨 맺는 열매를 속성으로 자라게 하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느끼게 된다 . 사과 한 알이 지난 봄날부터 여름을 버티면서도 그 얼굴은 햇볕을 바라보았고 , 강한 바람이 불면 줄기를 붙잡았고 , 가을이 되어 농부를 기쁘게 하였고 , 우리는 그 맛에 감탄하였다 .   “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 살후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