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17의 게시물 표시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목회자로서 깊이 회개를 한다 . 어쩌다가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을 할 때에 많은 부분에 목회자에게 책임이 있다 .   한동안 교회는 교인들의 소원과 치유를 하는 곳이라 자유신학이 강세를 띤 적이 있었다 . 교인들이 원하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고 상처 치료라는 명목 하에 잘잘못을 묻지도 않았다 .   그러다보니 사회에서 얻지 못한 명예를 세워주는 곳이 되어 교회의 직분은 계급장으로 변질되었다 . 교회에 일정기간 출석을 하고 헌금을 하면 당연히 받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용서와 위로가 있다고 가르쳤다 . 그래서 교회 안에는 진리도 없고 질서도 없는 곳이 되었다 .   매해 년 말이 되면 목회자들은 반복되어 상황을 겪는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을 즐겁게 할 것인가에 고민을 한다 .   그 첫 번째가 사람의 생각으로 교회를 판단하고 운영하려는 것이다 . 사람의 생각은 자기 생각이 언제나 옳다는 주장이다 .   그 두 번째는 섭섭하다는 것이다 . 내가 그동안 교회와 목사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을 열거하여 목사는 아주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으로 몰고 간다 .   그 세 번째가 목사가 미리 알아서 교인들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것이다 . 이 문제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 사람의 마음은 감정적이고 주관적이어서 정하여진 원칙이 없다 .   이러한 문제의 답이 있다 . 목회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교인들도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 즉 그분에게 묻고 그분에게 답을 듣는 것이다 .   이러한 상식이 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 묻고 그분에게 답을 듣는 교회가 주님이 세운 교회가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오늘도 외쳐야 한다 .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성탄절이 삼일 앞으로 다가 왔다 . 신자들은 성탄의 깊은 의미를 새겨야 한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평강을 주시고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신 것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창조주이시며 전능자 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깊은 뜻을 깨닫게 되면 사랑을 나누며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교회에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변질되었다 . 믿음의 생활이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으로 목적이 바뀌었다 .   교회에서 가르침은 개인이 부자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 각 개개인이 말씀에 따라 순종을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셔서 부요하게 하시고 받은 그 부요함으로 공동체에 나누어 줌으로 인하여 균등한 사랑을 누리라는 것이다 .   사랑을 많이 받은 자는 그 받은 사랑을 나누어 주라고 주신 것이다 . 즉 사랑의 배달부로 쓰시려 함이다 . 성경 말씀에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하셨다 . 사랑을 나누는 자에게는 더 많은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도 가난하고 외면 받은 자들이 있었다 . 이들은 로마 관리에게는 세금으로 ,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는 제사장들에게 돈을 더 지불하고 제수용품을 구매하여야 했고 , 바리새인들에게는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그나마 있는 재산마저 빼앗기는 신세가 된 자들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배를 불리는 기득권자들에게 책망을 하신 것이다 . 즉 배부른 돼지들에게 심하게 질책을 하신 것이다 .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나는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고 긍휼을 원하신다고 말이다 .   서신서에서도 배를 불리려는 돼지들을 경계하고 있다 . 저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이라 하였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 즉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는 것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사람을 판단할 때에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는 참 중요하다 . 사람이 흥하거나 패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며 말하는가에 그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다 . 그의 부모는 율법의 관례대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갔다 .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고 성령이 함께 하였다 .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다 .   성전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앉고 찬양을 한다 .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눅 2:29-32)   그리고는 마리아에게 놀라운 말을 한다 .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한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가에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판단한다고 하였다 ( 눅 2:34-35).   다시 말하면 흥망성쇠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사람의 가치관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말하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말하는가에 사람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   “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 눅 2:34)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 사람을 판단할 때에 외모를 볼 수도 있고 , 내면의 중심을 볼 수도 있다 .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데 부류마다 생각이 달랐다 . 나사렛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로 기억을 하였고 , 민족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정죄하였고 , 정치지도자들은 기득권을 빼앗기기 위하여 로마 정권에 고발할 죄항목을 찾기 바빴다 .   그러나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알았다 .   내 눈이 보는 대로 판단하는 것에 대한 위험한 경고를 바디매오를 통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 바디메오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다 . 그런데 그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봤다는 것이다 .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 그래야 올바른 성탄절을 맞아할 수 있다 . 사람의 가치관으로는 먹고 마시고 쉬는 날이지만 , 성경의 가치관으로 보면 인류에게 소망과 평화가 시작된 날이 된다 .   “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막 10:47)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작금의 교회나 신자들의 상황을 보면 염려가 되는 상황이다 . 행복한 삶은 물질에서 온다는 가치관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   이성이 과학이 발달하면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 그러나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 산업화 사회 아래에 갇혀서 오히려 지배를 받게 되었다 .   그래서 이성과 과학으로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 그러면서 과거의 전통적인 사고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생겼다 . 그것을 포스트모던니즘이라 한다 .   이성적인 사고에서 감성적인 사고로 바뀌었다 . 책을 보면서 생각하려 하지 않고 영상물을 보면 그것을 받아들인다 .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옳고 싫음으로 판단을 한다 .   또한 어떠한 사고가 생기면 미래에 어떤 득과 실이 있는가를 살피기보다는 지금 당장의 좋고 싫음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   그리고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기중심으로 바뀌었다 . 내가 좋으면 되고 , 내가 하는 것이 옳고 , 나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구속받으려는 것을 싫어하며 ,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진리보다는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이러한 사고를 갖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 그러다보니 진리와 미래지향적인 말씀 즉 , 종말과 재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 이러한 설교는 그들에게는 고리타분한 것이 된다 .   그들을 만족하게 설교를 하여야 하기에 이성적인 설교보다는 감성적인 설교를 하여야 한다 . 그래서 설교 중에 감동적인 영상물이 등장한다 .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라고 하는 설교에는 관심이 없다 .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삶을 닮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 자기만의 독특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이다 . 그래서 간섭이나 지시하는 것을 싫어한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의 철학을 승리하였던 역사의 기록이 있다 . 과거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설교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   사랑의 편지에는 신랑이 신부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으며 , 지금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 나만 사랑하며 기다리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   신부가 되는 신자들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 그래야 사랑이 성숙하여 지는 것이다 .   그러나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신부들은 신랑의 사랑에는 관심이 없고 돈만 달라고 한다 . 만약에 신부가 신랑과 결혼을 하는데 신랑의 돈만 바라고 결혼을 한다면 결혼생활이 힘들어 진다 .   ‘ 주 만 바라볼지어다 .’ 찬양은 열심히 부르지만 그 속에 담겨진 깊은 의미는 모르고 있다 . 사랑하는 부부가 서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남자나 여자를 바라보면 부부사이가 금이 간 것이다 .   부부간에 깊은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진실과 정직함이 있어야 한다 . 그것이 기본이 되어야 신뢰가 쌓이게 된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신자들에게 전하는 것이 설교이다 . 신자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와 해석된 문장으로 전하는 자가 설교자이다 .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   지금도 우리를 영원까지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됨으로 인하여 신부도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 우리를 사랑하셨고 , 지금도 사랑하시고 ,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신랑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신랑은 자주 속 썩이고 말썽을 피우지만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 주시고 영원토록 변함없이 사랑하신다고 피를 부으시며 약속하신 분이시다 . 그래서 그 사랑과 약속은 영원토록 지켜진다 .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왜 거짓말을 할까 ? 성경의 답은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함이라 한다 . 즉 ,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할 수 있고 , 자신의 배를 위하여 집단을 이룬 것을 거짓세력이라 한다 .   사람은 창조될 때에 몸과 이성 , 양심 , 의지적인 요소로 되어 있다 . 그래서 이성의 판단과 양심적인 도덕적인 판단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 한다 .   사람은 양심에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꺼림직 한 것을 하면 안 된다 .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을 도덕과 양심이 있는 사회라 한다 .   그런데 부끄러운 양심이 모이면 세력으로 변한다 .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 양심에 부끄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하면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   이러한 집단은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 특히 나라 예산 가운데 복지지원이라는 항목에서는 사나운 짐승이 된다 .   백성들 가운데 생업을 꾸리지 못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국가의 예산으로 보살펴 주어야 한다 .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나라의 예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성경에서는 고아와 과부 지나가는 나그네를 반드시 도와주어야 하는 사회법이 있다 . 내 이웃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간과하면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   세상이 점점 악하여져서 개인이 하여야할 일들을 나라에게 맡겼다 . 그래서 세금을 낸다 . 그런데 그것을 합법적으로 뜯어 먹겠다는 하이에나 같은 자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   부패한 양심이 모여서 거짓세력이 되었다 . 이 거짓세력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 행위도 서슴치 않고 있다 .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   그러나 사람은 선한 양심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 개인의 자유로움으로 더 적극적인 삶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나 닮으려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 그것이 전부이다 . 교인들의 수가 많으면 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   소금과 빛의 존재이다 . 소금이나 빛은 세력이 아니다 . 한 알의 소금도 짜고 여러 개가 뭉쳐 있어도 짠 맛이다 .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교인의 본질이다 .   이러한 본질이 삶 속에서 나타난다 . 말을 할 때는 간을 맞출 만큼만 하고 , 모든 일을 할 때는 주님께 하듯 하고 , 상전이 보든 안 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이다 . 한 사람 , 한 사람이 소금이다 . 소금이 모여도 소금이다 . 존재로서의 모임이다 .   반면에 소금의 존재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소금처럼 되려 하는 것을 운동 (Movement) 이라 한다 . 즉 , 소금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소금인 것처럼 프로그램이나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   우리는 회개하여야 한다 . 소금으로서의 존재감 보다는 소금인 척하는 일에 아주 익숙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본인도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일이 괴롭고 , 세상도 속아 주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 마 5:13)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교인들은 목사가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하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고 한다 . 그럴 줄 알았다 . 돈 싫어하는 목사가 어디 있는가하며 반색한다 .   성경 안에서 십일조의 시작은 아브라함이 평강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리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근거는 무엇인가 ?   그의 조카 롯과 식구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가 속한 연합국에게 잡혀갔다 . 그러자 아브라함은 집에서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데리고 쫓아갔다 .   전쟁에서 승리하여 롯과 식구들을 데리고 돌아올 때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들고 맞이하였다 . 멜기세덱왕이 그에게 축복을 하고 네가 전쟁에서 이기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말한다 .   그러자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 가운데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린다 . 이것이 십일조의 유래이다 .   그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 나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종주국과 복속국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 무슨 말인가 하면 종주국인 나라가 복속국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일을 하고 , 복속국은 그 대가로 해마다 조공을 바쳐야 한다 . 그러므로 복속국인 나라는 실질적인 왕이 종주국의 왕이 되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나의 왕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의 행위이다 . 나의 왕이 나의 생명과 식구들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모든 재산을 지켜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이다 .   진정한 십일조는 나의 왕은 하나님이시고 , 나를 지켜주신 은혜와 감사를 포함하고 있다 . 이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믿음의 고백이며 행하여야할 도리이다 .   그러므로 십일조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나에게는 왕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 창 1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신자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육신으로 오신 성탄절이 다가 온다 .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들로 태어나실까 ?   복음을 전하다보면 흔히 질문을 받는 질문이다 . 그것에 대한 답은 ‘ 내가 믿는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 ’ 가 답이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 하나님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시켜주었다 .   아브라함과 사라는 구십 구세이며 팔십 구세의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 .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라의 고백이 있었다 .   백세가 되어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아이를 주신 하나님이시다 . 그러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여 아들을 낳게 하신 것이다 .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다 .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만 믿을 수 있다 . 그러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대화가 될 수 없다 .   성경 속에 등장하는 구약인물들에게 하나님의 능력 , 사랑 , 성품 , 계시 등을 알게 하셨다 .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구약의 성경을 살피면 알 수 있다 .   “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창 18:14)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이 겸손하다는 것이다 . 성경을 안다고 자랑을 하거나 교만해지지 않는다 .   성경을 많이 알수록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어떤 이단들은 성경의 말씀을 놓고 토론을 하자고 한다 .   한마디로 어리석은 짓이다 . 인간의 머리로 저 큰 우주의 세계 , 영원의 세계를 생각할 수도 없고 담을 수도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안다고 자랑하는 이단들이 있다 . 그 말을 자기가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고 있고 , 하나님의 뜻을 다 판단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결국에는 자신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생각이나 동일하다는 것이 된다 . 이것은 마귀가 주장하는 것과 같다 .   성경의 말씀을 알게 될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거룩하신 분이시며 , 나는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또 다른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자들은 싸움이나 비판이나 정죄의 자리로 가나지 않는다 . 오히려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분쟁을 화평으로 이끄는 자가 된다 .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 결단코 토론이나 잘남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   믿음이 성장하게 되면 감사와 찬양이 늘어나게 되고 , 자기의 잘남을 자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된다 .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다 . 성경책을 펴놓고 정죄로 몰아가는 짓을 한다 .   그러나 진정한 전도와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말씀으로 변화된 나의 삶을 전하는 것이다 . 그것이 나를 변화시킨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   “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딤전 1:13)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 성경을 많이 묵상하십시오 .‘ 라는 말이 마음에 부담이 된다고 한다 . 즉 성경을 강조하게 되면 골수 신자이거나 광신도인 것으로 생각을 한다 .   현대인들의 고급스러운 믿음은 유명한 목사님에게 설교를 듣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자랑을 한다 . 또한 어떤 이들은 믿음의 생활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여야 한다고 훈계를 한다 .   신약성경 안에 있는 서신서들 가운데에는 교회에 이단이 들어와 혼란을 겪는 상황이다 . 그 이단을 대처하는 방법이 서신서의 내용이다 .   오늘의 상황과 똑같다 . 교회 안에서 다른 교훈을 퍼트리는 자들이 있었다 . 성경 이외의 것으로 가르치는 거짓교사에 대한 경계이다 .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려서부터 알던 성경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성경이 기록된 목적과 유익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   성경에는 거짓 교훈으로 악성 종양을 퍼트렸던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지금 교회 안에도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자들이 있다 .   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가로막거나 다른 교훈을 전하기에 힘쓰는 자들이다 . 악성 종양을 전염시키는 자들을 대적하고 물리치는 방법은 오직 성경밖에는 없다 .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묵상을 하여야 거짓 교훈에 대하여 예방을 하게 되고 치료가 되는 것이다 . 성경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지키고 면역성을 키워주는 것이 됨을 깨달아야 한다 .   “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 딤후 2:17)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하나님을 소개한다 . 그런데 그 때에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으로 소개를 하여야 한다 .   하나님은 자신을 알게 하게 하기 위하여 계시를 사용하셨다 . 즉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약속을 하시고 성취라는 방식을 쓰신 것이다 .   약속과 성취라는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하셨다 . 더 나아가 백성들과도 같은 방식으로 약속과 성취라는 방식을 위하셨다 .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신뢰가 공동체에 생긴 것이다 . 그러므로 공동체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 공동체 모두가 한 하나님을 믿게 되었음을 말한다 .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의 내용이 구약성경의 말씀이다 . 그런데 이단들이나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 즉 , 자기가 믿고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   작금의 상황은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그 내용이 다르다 . 왜 그럴까 ?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전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과 생각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   또한 이단들이 쓰는 방식이 있다 . 성경의 말씀이 딱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렇지 않다 . 사람의 이성으로 딱 딱 맞아 떨어진다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는 책은 과학 책이다 .   인간의 이성으로 ,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을 믿을 수 있는가 ? 삼위일체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 이해할 수 없다 . 올바른 믿음은 성경의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다 .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자리로 나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 매일매일 은혜를 구하러 나올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   “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살이니라

성경을 보면 빵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 예수 그리스도는 빵을 구하여 하는 사람들에게 빵을 사용하여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말씀하셨다 .   빵을 먹어야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함을 전한 것이다 . 생명의 빵을 통하여 영혼 구원을 하신 것이다 .   그 당시는 밀농사를 통하여 얻는 음식은 빵이었다 . 그러므로 밀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빵을 많이 갖고 있는 자는 부요한 자이었다 . 빵이 삶의 가치의 기준이 된 것이다 .   사람은 허기진 육체를 빵으로 채우지만 그 허전함을 여전하다 . 그런데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다섯 개의 빵을 나누었을 때에 오천 명이 먹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빵을 통하여 섬기고 나누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 이웃에게 헌신하고 섬기면 모두를 배부르게 하고 풍성해진다는 교훈이다 .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구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결국은 자신의 몸을 찢어 나누어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   즉 , 빵 때문에 싸우는 사람들에게 싸움이 없는 화평을 선포하러 오신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 새로운 피조물들이 하는 사역은 화목하게 하는 일이다 .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이웃들과 화평하게 살아야 함을 실천하여야 한다 .   아직도 자신의 출세와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면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을 아직도 모르는 것이다 .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살이니라 하시니라 ”( 요 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