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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2012 년의 365 일이 다 지나간다 . 세월은 참 빠르다 . 아침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한다 . 그러나 지난 세월을 돌이킬 때에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다 .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원망과 아쉬움이 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 그러나 아직도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 죄의 본성을 지워가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과정을 성화라 한다 . 이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교단의 신학이 나누어진다 .   착한 행실을 강조하는 곳도 있고 , 신비의 초월을 강조하는 곳도 있다 .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을 하시고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 이 약속을 주장하는 신학이 개혁주의이다 .   신자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한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 즉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이다 . 그래서 나의 생각은 없어지는 것이고 , 하나님의 뜻이 내 것이 된다 .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는 하나님과 동행을 믿고 고백을 하면서 자기의 주장대로 살려 한다 . 자기의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이끌려 한다 .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거나 명분으로 내세우는 행위이다 .   목회자가 목양을 하면서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이다 . 그리고 이런 신자들과 늘 싸워야 한다 . 자신들의 자아를 버리라고 외치지만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 바라볼 수 있다 .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 한다 .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 그 분을 알 수 있고 , 찾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십자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사는 예배를 드릴 때에 설교를 한다 . 설교는 혼자서하는 것이 아니라 , 듣는 회중이 있다 . 회중의 형편을 살펴서 필요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 그러니 회중의 살피지 않고 설교를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 . 대표적인 것이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카피하는 것이다 . 그 설교는 그 형편에 있는 회중을 상대로 한 것이다 . 그래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그대로 옮기는 것은 듣는 자나 전하는 자 모두다 은혜가 안 된다 .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 듣는 회중들이 나는 곤고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 . 즉 병든 자이다 . 그래서 의원이 필요하다 . 병든 자를 고쳐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찾게 하여야 한다 .   그래서 그 말씀은 쓴 맛이 난다 . 유월절 어린 양 고기는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 . 쓴 맛이 나중에는 단 맛이 되고 몸에 유익하다 . 정직한 영혼은 책망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된다 .   다윗은 이와 같은 상황을 비유로 말하였다 . 더러운 음식을 위에 담고 있었더니 고통으로 인하여 신음을 하고 뼈가 상하였다고 하였다 . 그런데 이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짓누름으로 인하여 토하여 내었더니 여름 가뭄에 바짝 마른 식물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고백이다 .   설교는 죄를 토하게 하는 것이다 . 자백하게 하여야 한다 .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여야 하고 , 비어진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 그런데 설교를 듣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많다 .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도 순종하기 보다는 따지고 돌로 치려했었다 .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들이다 . 죄는 고쳐서 다시 쓰는 것이 아니다 . 버려야 한다 . 토설물과 같다 . 이것을 버리지 않게 하는 설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가 아니다 . 지금은 설교자의 상식과 지적인 면과 교양을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목사는 교인들을 사랑하여야 한다 . 그런데 이 사랑의 지식이 있다 . 즉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사랑과 긍휼과 용서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다 . 사랑과 용서는 견고한 터 위에 세우기 위함이고 , 거룩을 향하여 가도록함이다 . 거룩과 견고한 터 위에 서기 위함이 아닌 사랑과 용서는 아무 유익이 없다 .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용서는 죄의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면하기 위함이다 . 만약에 이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 , 죄에 대한 심판을 이해할 수가 없다 .   요즘 교인들은 죄에 대한 책망을 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 오히려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 더 나아가 목사는 한술 더 뜬다 .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이벤트를 많이 하여야 교인 많이 모인다고 한다 .   목사는 교인들이 드리는 헌금으로 생활을 한다 . 교인들에게 믿음과 신앙의 유익을 주는 수고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목사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교인들의 비위나 맞추면서 목회를 한다면 삯군이 되는 것이다 . 목사의 수고와 외침으로 인하여 교인들이 견고한 터 위에 서게 하여 거룩을 향하여 나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교회 안에서 사랑이라 하여 다 같은 사랑이 아니다 . 사람의 명분을 나타나기 위한 사랑과 의를 구분하여야 한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싫어 하신다 . 죄를 씻고 멀리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회개의 자리로 가게 되며 , 용서를 받게 된다 .   그러니 목사가 하여야 할 일이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 죄 씻을 받고 거룩해 져야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가 시작된다 . 깨달음은 회개의 자리로 간다 . 만일 회개를 동반하지 않는 깨달음은 영지주의 자들이 되며 , 이단의 주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산다고 한다 . 이 말은 단순이 외적인 패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그 사람의 마음을 기초하고 있는 자존감 때문이다 . 신자들 가운데도 각 양의 성격과 성품을 갖고 있다 . 그러다보니 신자들 한 사람 , 한 사람을 대할 때에 무척 조심스럽다 . 설교를 통하거나 상담을 통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 가운데 어려운 것이 설교를 통하여 상처를 받는 것이다 .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전하였는데 상처를 받는 신자가 하나 , 둘이 아니다 . 사람의 감정은 마음에서 나온다 . 감정을 조정하는 자존감이 있다 . 그 자존감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기쁜 일에나 나쁜 일에 반응을 한다 .   그래서 감정의 높낮이가 자주 변하는 사람을 대하기가 어렵다 .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다 . 신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 그러한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 그래서 교회 안에서 행하여야 할 , 신자들의 합당한 행동 가운데에 옛사람의 성품을 벗어 버리라 한다 .   그동안 살아왔던 환경들이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가 있다 . 그 가운데 자기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말들이 있다 . 이런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했던 말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열등감으로 나타난다 .   교회는 사랑과 긍휼로 용서를 하는 곳이다 . 그러나 거룩함을 확인하고 거룩으로 나아가는 방향에서 용서이다 . 깨달음이 있고 , 회개를 통한 자에게 용서를 받은 기쁨이다 . 그래서 말씀으로 책망이 따르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하여 가치관이 변한다 .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생각이나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다 . 그러다보니 이전 사람과 새로운 사람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 왜냐하면 신자들의 마음에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이것은 나의 고집으로 세워졌던 것을 허물고 주님의 말씀으로 세우는 것을 말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오늘도 동녘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다 . 영광의 아침이 밝았다 . 예수님이 오신 영광의 아침이다 . 구약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셨던 약속들이 성취되었다 . 그 약속이 성취됨으로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였고 , 땅위에 있는 택함을 받은 자들과 모든 피조물이 평화를 얻게 되었다 .   매년 마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2012 년은 많은 사건이 있었다 . 총기사고이며 , 종말에 관한 혼란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했던 것이 대통령 후보들의 비방전이었다 . 이러한 사건으로 볼 때에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에 대하여 잘 증명하고 있다 . 즉 인간의 생각과 힘으로는 선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   죄로 타락한 세상은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는 곳이다 . 그러나 남을 죽이게 되면 결국은 자기도 죽게 된다 . 또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갖고 있다 . 그래서 자기의 꾀로 준비하려 한다 . 즉 죽음의 재앙을 피하려 한다 .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도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 입을 벌리면 거짓에 욕설에 가까운 인신공격이다 . 거짓말 잘하고 악을 뿜어내는 대통령을 택한 나라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을 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 백성들 역시 다름이 없다 . 악한들 어떠하랴 이다 . 그저 나만 잘 살게 하여 주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어두움이 관영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 또한 우리들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 사람들이 원하던 대로 결과가 나타났지만 무엇이 달라졌는가 ?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 우리는 속이고 속고 있는 것이다 . 거짓 탐심으로 인해서이다 .   예수님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 욕심과 비방으로 가득 차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며 길을 안내하러 오신 것이다 . 그 길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 .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다 . 그리고 두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목사라면 한 번쯤은 아니 몇 번은 사도바울과 같이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 그런데 사도바울이 처하여 있던 환경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 요즘 SNS( Simple Notification Service) 에서 자유롭게 자기의 뜻을 전할 수 있다 . 그런데 목사들이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은 좋으나 , 믿음의 본질을 망각한 상태에서 글을 올리고 있다 .   마치 정치지도자들이 백성들에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한다 . 어떤 이는 앞으로의 5 년이 기대가 된다고 하고 , 어떤 이들은 과거 유신시대 보다 더 독재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이스라엘 땅은 정치적으로 보면 절망의 상태에 있었다 . 로마의 속국이며 , 헤롯 왕은 에돔 사람이며 ,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이 아닌 자들이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으로 신분으로 종교적 자유만 갖고 있었다 .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긴장을 한다 . 그 소문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 헤롯 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기 위하여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를 다 죽이라 명령을 한다 .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의 황제나 총독을 찾아 면담을 하지 않았다 . 또한 이방전도에 공을 세운 사도바울도 정치지도자들을 찾아 백성의 문제를 대변하지 않았다 .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 즉 사망의 그늘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사역을 하였다 .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미련한 마음으로 계속 죄를 지으며 산다 . 또한 허망하고 목적이 없는 일을 한다 . 그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여 하나님을 알고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일이었다 . 어두움을 찾아 어두움을 쫓아내는 일을 한 것이다 .   오늘의 목회자들은 어두움을 찾기 보다는 밝은 곳을 찾아 빛을 비추려 한다 . 그러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탄절입니다 .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오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중심이 되어 세계사가 기록되었다 . 이 명확한 사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믿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   신자들 가운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오셨는데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것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   성탄절인데 왜 기쁜 일인지 알지 못한다면 감동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는 것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 이상으로 경이롭다 . 그런데 감동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기도문이 있다 . 거기에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 라는 말씀을 믿는다 . 이미 하나님이 이루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 그 일에 시작이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나시는 것이다 .   그러니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성탄을 축하할 수 있다 . 아버지는 아들을 왜 세상에 보내시는가 ?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려 하심이다 . 영생을 얻은 자에게는 다시는 죽음의 권세가 다가올 수 없다 .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가 영생이다 .   영생을 얻은 자는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겼고 , 죄의 책임의 심판의 자리로 가지 않는다 . 또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 이것이 영생을 소유한 자의 유익이다 .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다시 말하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 즉 세상에서는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얻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