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목사라면 한 번쯤은 아니 몇 번은 사도바울과 같이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처하여 있던 환경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요즘 SNS(Simple Notification Service)에서 자유롭게 자기의 뜻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목사들이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은 좋으나, 믿음의 본질을 망각한 상태에서 글을 올리고 있다.
 
마치 정치지도자들이 백성들에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앞으로의 5년이 기대가 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과거 유신시대 보다 더 독재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이스라엘 땅은 정치적으로 보면 절망의 상태에 있었다. 로마의 속국이며, 헤롯 왕은 에돔 사람이며, 대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이 아닌 자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으로 신분으로 종교적 자유만 갖고 있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긴급회의를 갖고 긴장을 한다. 그 소문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헤롯 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기 위하여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를 다 죽이라 명령을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의 황제나 총독을 찾아 면담을 하지 않았다. 또한 이방전도에 공을 세운 사도바울도 정치지도자들을 찾아 백성의 문제를 대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즉 사망의 그늘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사역을 하였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미련한 마음으로 계속 죄를 지으며 산다. 또한 허망하고 목적이 없는 일을 한다. 그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여 하나님을 알고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일이었다. 어두움을 찾아 어두움을 쫓아내는 일을 한 것이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어두움을 찾기 보다는 밝은 곳을 찾아 빛을 비추려 한다. 그러니 일단은 사역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 정치적 핍박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를 따라 얼굴을 돌려야 한다. 복음을 전하러 가지만 사도바울처럼 하기는 싫다. 왜 매를 맞으면서 강도에게 위협을 당하여야 하며 바다나 강의 위협은 있을 수도 없어야 한다.
 
내일이 성탄절인데 신자들은 무엇 때문에 기뻐하여야 하는가? 왜 천사와 동방의 박사는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 찬양을 했는가? 땅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고통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은 사망이라는 결과만 나오는 곳이다. 절망 밖에 없는 곳에 오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신자는 찬양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죄 아래에서 종노릇하며, 죄의 본성으로 싸우는 곳이 정치판이다. 여당과 야당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늘 평행선을 그리듯이 대립을 한다. 그래서 여당이고 야당이다. 이것이 정치적이 구도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움을 빛으로 밝힐 자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정치가들에게 어두움을 물리치라 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외침이다. 이 사역을 목사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니 이 혼란한 시대에 괜히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주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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