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9의 게시물 표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요 14:16)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 구원의 방식을 알아 간다는 것이다 . 흔들렸던 고통의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즉 , 옛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약속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적인 믿음은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   성부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성자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 공생애 3 년 6 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 가셔야 한다 .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의 계명을 지킬 것을 명령하신다 .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다른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에게 간구하신다 . 위로자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영원토록 하신다는 약속이다 .   성령을 우리 안에 임재하게 하셔서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기도이다 . 성령이 임재하시면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가 된다 .   신자가 주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되고 , 아버지께 사랑을 받게 되고 , 예수 그리스도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능력을 나타내신다 . 그리고 성부 , 성자 , 성령 하나님이 그의 안에 들어가 거처를 삼으신다 .   왜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실까 ? 하늘에게 이미 이루신 뜻을 땅에서 이루시는데 우리를 통해서 이루려 하시기 때문이다 . 결국은 삼위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쓰임받는 자가 된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오늘 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구하셨고 , 계명을 지켰을 때의 유익 , 계명을 지켰을 때의 결과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 주의 계명을 지키므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 계약 , 약속이 드러나며 증명이 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고후 7: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커다란 실수는 오히려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자리로 가게 한다 .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 구원을 받은 순간의 은혜도 크지만 구원이후의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 다윗 , 베드로 , 바울이다 .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실수를 하였다 . 다윗은 밧세바 사건 , 베드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한 사건 ,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람이다 .   이들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를 하였다 .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이 화목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이다 . 교회 안에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교인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였다 .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오히려 바울을 거짓 교사라고 핍박을 하였다 .   그러나 바울과 제자들의 기도와 수고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다시 바른 복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저들이 이 사건을 통하여 얻은 교훈을 무엇일까 ? 이단의 가르침의 경계심과 진정한 회개라는 것이다 .   이 사건으로 저들은 오히려 단단한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 그래서 바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유익한 것이라 한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커더란 실수는 오히려 구원을 이루는 회개를 통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 우리의 잘못을 생각할 적마다 경계심이 생기며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 개인의 문제가 그렇고 , 교회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 누구나 어느 교회나 하나님 앞에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 욥 27:6)   진정성이 없는 말은 허공을 향해 말하는 것과 같다 . 신자들끼리 주고받는 말 가운데 ‘ 사랑합니다 ’ ‘ 축복합니다 .’ 평안하세요 ‘ 라는 것들이 있다 . 그런데 그러한 말을 들어도 확 다가오지 않는다 .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진정성을 담지 않고 전하였기 때문에 저 사람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   욥과 함께 하는 세 친구들의 대화가 그렇다 . 욥이 원하는 말은 아픔을 이해하는 위로의 말이다 .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자신의 의와 지식을 자랑하고 있다 . 그리고 욥은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언쟁을 하고 있다 .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누가 자식 자랑을 하면 나도 자식 자랑을 하게 된다 . 그런데 자식에게 자랑할 것이 없으면 사위와 며느리 자랑으로 이어진다 .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조카 자랑에 친구의 자식까지 등장을 한다 . 그런데 돌아서는 발걸음은 쓸쓸하고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   왜 허무할까요 ?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 왜 그런가하면 자식 자랑은 결국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욥의 신앙을 부러워한다 . 그 이유는 내가 죽는 그날까지 “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 욥 27:6) 하였기 때문이다 .   욥은 누구보다도 자랑할 거리가 많았던 사람이었다 . 자식 , 재물 , 명예를 다 갖고 있었다 . 욥은 고난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은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   극심한 육체의 고통이 있고 마음이 상하였지만 결단코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 그 이유는 사람의 생각과 말은 자기의 의가 담겨 있어서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 나를 향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지켜보고 계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4)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이는 그 말씀으로 다른 이를 정죄하고, 어떤 이는 자기에게 적용을 시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6)의 말씀을 가지고 엘리바스는 욥을 정죄하였고, 욥은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겼다. 또한 어떤 이는  의로운 심판만 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고, 반면에 어떤 이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엘리바스는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고, 욥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욥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려 한다. 즉, 하나님과 기도를 통하여 대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더 나아가 이 길을 많은 사람들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택한 사람에게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택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세상에 전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행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말씀만 있고 행함이 없어도 안 되고, 말씀에 근거함이 없는 행함도 안 됩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증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그의 백성이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 욥 21:22)   욥기를 통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의인과 악인에 대한 생각이다 .   소발의 신학으로는 의인은 이 땅에서 복을 받아 잘 살아야 하고 , 악인은 저주를 받아 고통과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다 .   그런데 욥은 소발의 충고에 대답을 한다 . 왜 악인이 이 땅에서 잘살고 있느냐 ? 저들은 죽는 날까지 고통도 없고 잘 먹고 떵떵거리고 사냐는 것이다 .   욥의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의인도 고난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   욥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 욥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야 만다는 것이다 .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 나의 물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   성경적인 의인과 악인의 정의는 생명과 사망이다 . 의인은 생명을 사랑하는 자이며 , 악인은 사망의 자리로 향하는 자이다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사랑의 매를 때리신다는 것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은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 욥의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오직 우리에게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 곰곰히 생각하시면 감사가 넘칩니다 . 우리는 아홉 가지를 잘 하였지만 한 가지를 잘못하면 섭섭한 마음을 갖는다 . 믿음의 사람이라면 아홉 가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 열린문 장로교회 교인들은 잘한 것 , 아홉 가지를 생각하시며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 욥 19:21)   욥이 받았던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 . 모든 재산을 잃었고 , 열 자녀를 잃었고 , 형제들로 외면을 하고 , 친구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자리로 떨어졌다 .   이 과정을 통하여 욥은 사람은 의지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리고 자신이 받고 있는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있다 .   그런데 세 친구들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욥을 정죄하고 있다 . 그러나 욥이 친구들에게 바라는 것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한다 . “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 욥 19:21)   욥이 고난을 받으면서 믿음이 성장하였다 . 그 고백의 내용은 나를 불쌍히 여길 대속자가 나타날 것에 대한 확신이다 . “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 욥 19:25)   그리고 내가 비록 육신의 피부병으로 인하여 죽더라도 내 영혼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확신이다 . “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욥 19:26) 결국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이다 .   그런데 욥이 확신하고 고백하였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육신으로 오셨다 .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구약에 등장하여 간절히 소망하며 간구하였던 믿음의 실체가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오신 것이다 .   욥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실 이를 찾은 것이다 .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죄가운데 있는 죄인에게 찾아 오셨다 . 욥이 그토록 소망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서 구세주가 되었다 .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욥을 불쌍히 여기셨던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약 5:7)   성경에서 욥의 인내와 기도를 소개한다 . 욥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   욥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자이었다 .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얼굴을 돌리시고 외면하셨다 .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 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그의 입에서 중재자 ( 예수 그리스도 ) 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 .   또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을 때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를 소개하고 있다 . 또한 하나님이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한다 .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 년 초부터 년 말까지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지켜 주셔야 한다 .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면서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한다 . 즉 ,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 그런데 인내의 시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농사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욥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 욥이 간절히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고통 가운데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예방하는 것이며 항상 동행하여 주심을 간구하여야 한다 . 우리에게는 욥이 간절히 찾았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   하나님이 정하신 직분 가운데 대제사장이 있다 . 죄인들은 언제든지 대제사장을 찾아 갈 수 있다 . 그러면 대제사장은 반드시 죄인의 죄를 용서받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 . 그러므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사함이나 기도를 기꺼이 받아 주셔야 한다 .   사랑하는 교우 여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요 14:8)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빌립이 하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한다 . 우리의 생각 같으면 하늘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직접 보여 주시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만일 그렇게 하면 빌립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게 되면 , 그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   그 질문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로 보여 주신다 . “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 14:10 하 ) 즉 ,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 아들을 통하여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   너희가 내가 전하는 말로 믿지 못하겠다면 십자가 사건으로 확인하라는 것이다 .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요 14:11) 즉 ,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러 왔다 . 그런데 만일 죽게 되면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는 사건이 된다 . 또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증명이 된다 .   하늘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끝이 난다면 하나님의 일도 끝이 나고 만다 . 아버지는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부활의 능력으로 살리셔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은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는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면서 또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오늘 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증명하면서 또한 십자가 사건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 . 하나님 나라는 예수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리라”(고후 6:18) 십자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리라”(고후 6:18)이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하나님이 신자의 마음에 들어와 계신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신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함은 아버지 앞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말씀 순종에 있어서 내가 이해되는 것만을 하려 한다. 그것은 참으로 곤란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다. 그분께서 하인들에게 명령을 한다.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발 씻는 물을 담는 항아리에 채우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종들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이유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물을 길어다 채웠다. 그러므로 놀라운 일이 나타난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명령문으로 되어 있다. 즉 순종하라는 것이다.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할 수 있다고 배웠다.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토론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순종하실 때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머리와 생각으로 있을 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열린문 장로교회 교인들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가나 혼인 잔치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종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발 씻는 물을 담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면 그대로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않는 일입니다. 혹시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에 채우라 하면 모를까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이 하는 것을 이해하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하다보니 이해가 되고 유익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오니

“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오니 ”( 욥 16:21)   욥기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다 .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욥기에서 욥과 세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각 사람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 지식으로 말하고 있다 . 그런데 그것이 욥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론으로 변하여 격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   욥은 자신이 시험을 당하고 있는데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고 한다 . 그러나 세 친구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신학으로 판단을 하고 헤아리고 있다 .   욥의 신앙은 우리에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데 만날 수 없는 욥의 심정을 이해하여야 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게 되면 죽기 때문이다 .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대화를 하지만 결코 위로를 받을 수 없고 오히려 경쟁과 시기가 된다는 것이다 .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승복하는 사람이 없다 .   이것에 대한 답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데도 중재자가 필요하고 , 이웃을 사랑하는데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잘남과 시기가 아니라 겸손과 자비이다 . 욥의 마음은 다 갈라져 있다 . 그리고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와 곪아 터진 상태이다 .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 앞에 있는 시체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욥을 상대로 신학으로 논쟁하고 있는 세 친구의 모습이다 . 지금 욥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 마음의 위로와 몸의 상처를 싸매주어야 한다 . 세 친구들은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다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상한 마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