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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믿음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에 유산 또는 유업이라 한다 . 왜 이러한 단어를 쓰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유산을 물려줄 때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존재한다 . 주는 자는 좋은 가치가 있는 것을 물려주어야 하고 받는 자도 그 가치를 확인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의 믿음의 가치는 무엇인가 ? 물질의 가치인가 아니면 거룩한 영혼의 세계인가에 직면하게 된다 .   전통이 있는 집안에는 가훈이 있다 . 그 집안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할 덕목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   지금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없다면 물려줄 유산이 없게 된다 . 또한 후대의 사람들도 지켜야할 가치가 없다면 물려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지켜야 한다 . 그리고 소중함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다 .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빌 3:8-9)   가장 소중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 성경의 모든 글 모세오경 , 선지서 , 시편 그리고 복음서 ,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 . 즉 ,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있다는 것이다 .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가르치셨고 ,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르쳤고 ,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 이제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   “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기도는 신자들이 어려워하는 믿음의 덕목이다 .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를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들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지만 용서를 구하러 오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푸신다 . 그러므로 죄를 심판하시는 그분 앞에 청결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시작을 하여야 한다 .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여야 한다 . 그분은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품안에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신 분이시다 .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을 하여야 한다 . 그분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단지 입술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   의인의 길 위에서 간구를 하여야 한다 . 하나님은 지금도 의인을 찾고 계신다 . 의인의 길이라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을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약속은 의인에게는 장수하게 하시며 구원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다 .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풍성함을 의인을 통하여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   이미 주셨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응답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 그리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 왜냐하면 인내를 통하여 더 많은 은혜의 복이 임하기 때문이다 .   내가 간구한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그 은혜를 찬양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 즉 은혜를 받고 전도자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의 고백이다 .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는 방식이다 . 신자가 간구하면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먼저 간구를 하므로 시작이 된다 . 그러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 그리고 응답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마치는 것이다 .   “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 시 18:49)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2

우리 사회에서도 판사 , 검사 , 변호사를 선망한다 . 본래의 그 이유는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유지하면서 악한 자를 심판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   유대교의 랍비도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로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 그래서 유대인들은 랍비의 말을 부모의 말보다 더 따른다 .   그렇다면 목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 목사도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자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참 정신을 깨달았다 . 구약의 백성들은 법으로만 지켰다면 신약의 백성들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깨닫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   그렇다면 목사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한다 . 그리고 율법의 참 정신을 회중에게 설교하여야 한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 무슨 말인가 하면 말씀을 듣고 행하여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가 질서를 지키며 행하며 살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 . 즉 , 세상 사람들보다 더 고급스러운 삶과 인격을 갖고 있기에 마치 드러난 산동네 위에 사는 것과 같다 .   법을 잘 지키고 따르는 나라가 선진국이요 , 일등 국가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나라들보다도 더 높은 고품격의 나라이다 .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마 5:14)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율법은 모든 나라의 법의 모법이 된다 . 즉 , 세상나라의 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   법은 질서가 유지되고 사회에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고 개인의 생명과 재산과 삶의 기본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인 것이다 .   하나님의 율법이 세상나라 법에 모법이 되는 이유가 있다 . 그것은 오직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   세상의 모든 법보다 훨씬 월등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경전이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율법을 주어 가나안 땅에서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백성을 세우려 하셨다 . 뛰어난 백성이 된다함은 주어진 법을 준수할 때만 실현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거룩하고 고급스러운 사람이 된다 . 율법의 참 정신을 깨닫고 행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게 하시며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 .   “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 신 6:25)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신자들이 모여 대화를 하다가 보면 마치 여기가 천국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 대화의 내용이 몽환적이고 낭만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신자들의 삶은 죄에 대항하여 영적전쟁을 치루는 것이다 . 마귀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교묘하게 다가온다 . 그래서 마귀를  향 하여 필사적으로 싸워야 한다 .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주셨다 . 믿음생활이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깨달아 지키는 것이다 . 그 법 안에 있으면 생명과 삶에 행복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   한 동안 친지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 성경 말씀에는 “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 잠 22:26) 하셨다 .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친지들에게 빚보증을 부탁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빚보증을 부탁받았을 때는 단호히 거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 법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고품격의 인격을 가진 사람일 수밖에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의 공동체에도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 그 법을 올바로 세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이삭은 순종의 인물이었다 .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을 하였다 . 또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었다 .   블레셋 사람들과 우물을 놓고 다툼이 있을 때에서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우물을 파던 사람이었다 .   이삭의 삶은 순종과 기도였다 . 하나님은 그러한 이삭에게 복을 많이 주셨다 . 결국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하고 먼저 화친의 손을 내밀었다 .   이와 같은 믿음이 있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 그분의 성품을 닮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베푸는 자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시는 것이다 . 즉 , 은혜를 받은 자가 더 은혜를 받는 복이 임하는 방식이다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 악을 선으로 갚아라 , 네 손으로 심판하려 하지 말라 ‘ 하셨다 .   신자의 삶은 말씀을 따라 은혜를 간구하여야 한다 . 오늘의 은혜가 어제의 은혜보다 더 큼을 확인하여야 하고 , 내일의 은혜는 오늘의 은혜보다 더 풍성함을 소망하여야 한다 .   이것이 이삭의 삶이었다 . 이웃과의 다툼에서 관용을 베푼 것이다 . 우리의 살벌한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야 관용의 자리로 나갈 수 있다 .   그래서 오늘도 내 잔을 넘치게 채워주소서 기도를 하게 된다 .   “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 창 26:27)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III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에서 온다 . 같은 사건을 보아도 생각과 해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   그래서 개인의 가치관의 한계를 정하기 위하여 법이 필요하다 . 그 법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서 중요한 것으로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여 주셨다 .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새겨 주신 것이다 .   십계명은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덕법이다 . 즉 ,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법이다 .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이다 . 그런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한다 .   선한 양심이란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을 때만 생겨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한 양심을 닮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   그래서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분을 본받게 하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를 하는 것이다 .   새롭게 창조함을 받았다함은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고 지킬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 언약의 십계명은 아무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만이 지킬 수 있다 .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도 그렇다 . 십계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각각 다르다 . 어떤 이들은 십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는 다고 하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요일 2:4) 라고 말씀하신다 .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진리가 없다함은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 된다 . 결국에는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은 행위언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목회자들이 목회를 하다가 보면 실망과 좌절할 때가 있다 .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결과가 예상 밖의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교를 하였을 때에도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지 않았고 , 사도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였지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던 자들이 있었다 .   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목회 서신서를 보낸다 . 왜냐하면 디모데도 같은 상황의 어려움에 쳐해 있기 때문이다 .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심대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과 썩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맡은 바 사명의 길을 달려갈 것이고 ,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 돈을 섬기는 자들은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   구원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있다 .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것은 성령의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여 사역에 열심하라는 것이다 . 즉 , 성경의 말씀대로 전하고 행하라는 것이다 .   복음의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 . 그런데 목회자에게 있는 것처럼 설교를 하거나 세미나를 하는 자들이 있다 . 거짓교사의 가르침이다 .   그런즉 목회자가 고난을 당할 때에는 말씀과 기도로 무장을 하여야 하고 ,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야 한다 . 그리고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   “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 딤후 1:14)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1

교회에서 가르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깨우치는 것이다 .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려고 나온다 .   왜 자기의 뜻을 이루려 하는가 ? 내 마음대로 살려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 내가 원하는 것 다이루어서 누구에게 기죽지 않고 큰 소리 치면서 살려는 것이다 .   그러다보니 자기의 욕심을 이루게 되면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다 .   아주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의 생각으로 고치려 한다 . 그 대표적인 것이 주일성수이다 . 그 범위와 한계를 자기가 정한다 . 마귀가 하는 짓이다 .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 그래서 거짓말하는 자는 마귀의 자식이 된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   진실에 거짓이 섞이면 진실이 약화되고 부풀려진다 . 즉 , 무엇인가를 첨가하려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것이다 .   주일성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를 생각하며 예배와 감사와 찬양 그리고 선행을 하는 날이다 . 그런데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무엇을 하면 되고 저것은 안 된다고 외치고 있다 .   교회에 자기의 탐심을 이루기 위하여 나온 자들은 결국에는 교만의 길을 간다 .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다 . 오로지 돈 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다 .   돈은 힘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 그 폭력성이 마음으로 살인하고 거친 언어로 나타난다 . 가난한 자는 교만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마 5: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을 하였을 때에 납작 엎드렸다 . 그런데 이것이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다 . 모세를 원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되었다 .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셨다 . 백성들이 원망할 때에 엎드리므로 뒤에 계신 하나님께 원망을 한 것이다 .   모세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사명을 맡았다 .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   모세가 신 광야에서 반석을 두 번 친 것도 마찬가지이다 . “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들이 마시니라 ”( 민 20:10-11) 모세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은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부탁을 하신다 .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 하셨다 . 하나님의 백성이요 ,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다 .   교회의 양무리는 목회자의 양들이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는 사명을 맡은 자이다 .   그리고 신자들이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다 . 목사를 공격하고 핍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다 .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   만일 누군가가 신자들을 원망하고 핍박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엎드리면 된다 . 결국에는 그 핍박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여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   그러므로 누군가와 싸우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엎드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 그렇게 되면 모든 원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나 설교를 배우고 듣는 것은 하나님 나라 법을 듣고 깨닫는 것이다 .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면 그것은 불순종의 죄가 되기 때문이다 .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가 얼마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신자들의 믿음의 실태가 드러나는 것이다 .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내가 원하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배웠다 .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 그 말씀을 넘어서게 되면 생명의 은혜와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물고기가 물에 살 듯이 신자는 법 안에서 살아야 생명을 유지하고 기쁨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음을 말한다 .   내가 이루고자 하는 문구를 반복적으로 외우며 기도하는 것은 주술적인 행위가 된다 . 이것은 이방종교에서나 하는 행위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가르침을 통하여 엄히 경고하셨다 .   “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마 6:7)   신자가 먼저 하여야 할 것은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늘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아들이 되면 아버지가 모든 것을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이다 .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 되어야 하고 ,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 되어야 한다 . 이것이 복을 약속하신 방식이다 .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 나라의 법을 배우고 지켜야 생명이 풍성하여 진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 하나님 율법의 참 정신을 가르치셨다 .   새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이다 . 성육신하신 이유는 죄인들의 죄를 씻어 주시고 속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여 새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다 .   새로운 존재가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어 순종하여 행하는 자가 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목적에 맞게 하나님 율법의 참 정신을 깨닫게 하여야 하고 행함의 자리로 나가게 하여야 한다 .   왜 갈릴리로 가셨는가 ? 갈릴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었다 . 그 당시 성전 안에는 사회정치적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즉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자들에게 찾아가신 것이다 . 그들에게 하나님 율법의 말씀을 전함으로 공의로운 사회를 세우려 하셨다 .   낮은 자가 되어 서로를 섬기는 공의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려 하신 것이다 . 성전 안에 있던 자들은 가난한 자들과 과부의 재산까지 빼앗던 자들이 있었다 .   공의로운 사회의 공동체는 하늘 아버지의 뜻과 통치가 임하는 곳이다 . 하나님의 통치권은 하나님의 율법이 된다 . 그러므로 하나님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 자녀가 되는 것이다 .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마 5:18)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신자와 교회의 본질은 소금과 빛이다 .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특성이 되어야 한다 . 그런데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 사탕의 공동체 , 설탕의 공동체로 자랑을 해 온 것이다 .   소금과 빛의 특징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 어떠한 것과 섞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 그리고 다른 것들을 점령하는 성질이 있다 . 즉 , 어떠한 것을 만나도 변질이 되지 않음에 있다 .   그런데 설탕의 공동체가 되다가 보니 더 강한 맛을 내는 사카린을 만나면 본질이 없어지고 오히려 존재 자체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어떠한 것과 섞일 수가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이 오직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포되어 그 말씀에 따라 행할 때만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신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소금과 같은 존재인 것이고 , 또한 빛이 되어 어두움인 죄악을 몰아내는 역할을 함에 있다 .   사랑의 공동체라 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그 제도 자체에서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다 .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을 제도화하지는 않고 사람들이 설탕이 되어서 모여 있다가 보니 변질이 된다 .   다시 정리를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회가 되면 그곳이 사랑의 공동체이며 , 그 공동체에는 사랑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가 소금이요 빛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   “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 막 9:50)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자기 목적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유치부에서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서 상을 받아야 하고 , 중고등부에서는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 대학청년부에서는 좋은 직장 입사와 꿈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여야 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예비해 두셨다 . 그 두려운 죄의 심판에서 구원의 길을 주셨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 요즘 세상에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 목사들이 그렇고 신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과 믿음은 헛 것이다 . 하나님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믿는 것도 헛 것이다 .   우상숭배라 함은 자기중심의 삶이다 .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탐심이다 . 즉 ,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다 .   그래서 우리가 늘 고백을 한다 . 주기도문에 있는 말씀이다 . ‘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   우상숭배는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이고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다 .   그런데 지금의 교회의 가르침이나 설교는 어떤 내용을 전하고 있는가 ? 배터지게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원의 도리를 전하여야 한다 .   “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 골 3:5-6)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여러분은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   구약시대처럼 선지자를 통한 하늘과 땅의 기적이 있으면 하나님을 믿기가 쉽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와 같은 현상이 없습니다 .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 증언하고 있습니까 ?   선지자와 사도의 글들을 잘 듣고 살피라는 것입니다 . 그 글들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성경의 모든 글이 자기를 통하여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그래서 선지자들의 글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고 , 사도들의 글은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다시 오실 만왕의 재림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 그것은 거짓과 시기와 다툼이 관영하는 세상 풍파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고 비록 흔들거리기는 하지만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요즘 우리의 사회를 보면 거짓이 거대한 조직이 되어서 막강한 힘의 세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그 속에서 거짓이 진실인줄 알고 산다는 것이 죄악이며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 “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 히 2:1)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고 합니다 .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던 자들과 천사들마저도 보응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   오늘을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가 이미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고 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 복음의 능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