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회개와 후회는 다르다 . 후회를 하는 순간에도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나올 수 있다 . 그런데 눈물만 흘리면 회개라고 가르쳤다 .   한국 사람들은 분위기를 많이 타고 감정에 약하다 . 그래서 정확한 이성의 논리보다는 감정에 치우쳐 사리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 그러다보니 믿음의 생활도 그렇게 한다 .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생각이나 느낌으로 오는 분위기를 많이 따른다 .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의 호소로 찬양을 한다 . 찬양하는 모습만 보면 신령한 신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 . 그런데 눈물을 닦으며 교회문을 나설 때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   신령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 신령한 은혜를 받았다면 당연히 신령한 사람이 되어 심령이 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옆 사람도 안다 . 더 이상 속고 속이면 안 된다 .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 두 눈을 뜨고 말씀을 직시하며 기도를 하게 하여야 한다 . 왜냐하면 말씀을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을 하게 하여야 한다 . 즉 , 마음이 변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에 생기지만 , 후회는 내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슬픔이다 . 이 둘의 차이는 분명히 다르다 . 전자는 하나님의 생각이지만 , 후자는 사람의 생각이 기준이 된다 .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고후 7: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싸움을 하는 이유는 어떠한 유익을 얻기 위하여 한다 . 즉 ,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강렬한 수단이다 . 대표적인 경기로는 권투나 격투기를 들 수 있다 . 챔피온이 갖고 있는 명예를 빼앗는 것이다 .   반면에 방어라는 것이 있다 . 지켜야할 자가 지키는 것을 말한다 . 자신의 챔피언 벨트를 지키기 위하여 평상시에 혹한 훈련으로 대비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것을 지켜야 한다 .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은혜를 주셨다 . 그것을 지키고 후대에게 전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다 . 성경은 이것을 영적전쟁이라 한다 . 전쟁이라 함은 반드시 한쪽이 죽어야 끝이 난다 .   영적전쟁은 특징이 있다 . 교묘한 속임수와 거짓으로부터 승리하는 것인데 선한 양심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   선한 양심을 갖지 않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 만일 그렇게 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믿음에는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   거짓과 불법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명예를 얻고도 당당한 사람들이 있다 . 결국은 이단의 교주가 되는 길로 빠지고 만다 . 이단의 교주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신의 자리로 변하게 하는 짓을 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영적전쟁을 하여야 한다 . 거짓과 불법을 물러가게 하는 일이다 . 빛이 되어서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여야 한다 . 즉 , 믿음이 좋다는 것은 믿음의 싸움을 잘하고 있음을 말한다 . 그리스도의 진리와 영광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 엡 6:13)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교회가 산 위에 있는 동네라 하였다 . 선함과 착한 행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 성경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생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   교회는 주님이 세우셔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세워간다 . 즉 , 지적 , 정적 , 의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비지성적이고 ,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 변명과 핑계가 많은 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더 심하게는 일반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   알려하지도 배우려하지 않고 세력을 무기로 삼고 , 하나님의 은혜를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나는 것으로 알고 있고 , 정죄와 비판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자들로 가득차 있다 .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 가면서 인격적인 교제를 한다 . 먼저 지식으로 하늘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   하늘 아버지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닮아 나아가야만 한다 . 그래서 그분의 제자도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오늘의 문제 있는 교회들을 보게 되면 비인격적인 교인들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 그래서 비지성적인 집단 , 감정의 변화에 따라 주장이 바뀌고 , 커피마시면서 낭만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있다 .   아마도 세대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 고집스러운 세대가 가야 회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다 . “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 잠 29:1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인생의 삶에는 맡은 책임으로서의 짐이 있다 .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리더십을 가져야 하고 어머니는 자녀를 양육하고 사랑을 품어야 한다 . 또한 직장인은 온갖 종류의 수치를 참아야 하고 , 학생은 성실과 인내로 교육과정을 마쳐야 한다 .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의 짐이다 . 때로는 가볍게 무겁게 느껴진다 . 그러나 책임으로 다가오는 것에는 늘 염려와 두려움에 대한 부담이 있다 . 이것을 성경에서는 죄짐이라 한다 . 죄로 인한 저주가 사람들의 삶에서 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람들은 힐링콘서트 , 치유집회 , 회복집회에 열심히 참석을 한다 .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책임의 자리는 벗어날 수 없다 . 책임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휴가 , 여행이다 . 그리고 부부로서의 책임을 포기할 때에는 이혼을 하게 된다 .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 인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책임의 자리를 맡게 된다 . 부모로서 , 가장으로 , 직장인으로 맡은 책임의 고통이 혼자 지고가기에는 너무도 크고 고통스럽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을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 11:28-30)   즉 , 고통의 짐을 지는 법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 그러면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 책임의 자리를 피하거나 책임의 환경을 변화시켜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 그 짐의 고통이 계속되지만 마음에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시는 짐 지는 법은 , 남을 헤치지 않는 것이며 ,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며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 모든 것을 참으며 ,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 하셨다 .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신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이다 . 겸손과 겸양은 다르다 .   겸손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높여 섬기는 것이고 , 겸양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거나 양보하는 행위를 말한다 .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으로 채워졌을 때에 나타나지만 , 겸양은 단지 겉으로만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성품적인 연합이다 . 그분은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사람으로 계신다 .   그분의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하여 주의 영을 보내주셨다 . 주의 영이 함께 하는 자들은 고난과 죽음과 영광의 자리로 나갈 수 있다 .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 임하게 되면 전능하신 아버지의 권능으로 부활의 영광이 임하게 된다 . 그래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노라 , 오늘도 죽노라 하였다 .   겸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다보면 자신은 없어지고 순종한 말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   사회적으로 이슈가 등장을 하면 목사들은 저마다 솔루션 ( Solution) 을 제시한다 . 이것을 성경에서 세상의 초등학문이라 하였다 . 왜 그럴까 ? 결국은 주 예수의 권세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   “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요일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