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의 게시물 표시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에 5: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에 5:3)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한 후에 죽음을 무릎쓰고 왕 앞에 나아가는 장면과, 그를 기쁘게 맞이하는 왕, 그리고 여전히 교만함에 빠져 모르드개를 죽일 음모를 구체화하는 하만의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 준다.   왕후가 왕 앞에 섰을 때 왕이 금 규를 내어 미는 장면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마음의 통치인 것이다. 즉 에스더의 용기 있는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왕이 손에 든 금 규 는 황금 지팡이는 심판과 동시에 자비를 베푼다. 즉 그 끝을 만지는 것을 허용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에스더는 왕의 금 규 를 만지므로 인하여 자비를 얻게 되어 생명을 구하였다. 그리고 소원을 말한다.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에 5:4) 그러자 그녀는 당장 하만을 고발하지 않고 두 번에 걸친 잔치를 제안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욕이 아닌,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신중한 섭리적 지혜이다. 하만은 왕후의 잔치에 초대받은 것을 자랑하며 50 규빗 높이의 나무를 세운다. 이것은 전적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영광에 취해 스스로 파멸의 도구를 준비하는 비극적인 역설이 된다.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가는 은혜가 허락되었고, 그리고 마음의 소원을 아뢰어 얻게 되었다. 아하수에로 왕보다 더 크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권세와 은혜가 허락되었음 알아야 한다(히 4: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나아 갈 수 있는 권세를 얻었지만 구하여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그리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뱀 ...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배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에 4: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배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에 4:1) 하만의 조서가 내려지면서 유대인들을 진멸하는 날이 12월 13일로 정하여졌다. 이 소식을 들은 모르드개는 옷을 찢으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재를 뒤집어쓰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언약적 회개이다.  개혁주의는 고난의 때를 하나님께 돌이키는 기회로 보며, 인간의 무능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됨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적 주권을 믿음으로 인하여, 에스더에게 네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약의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 4:14) 즉 하나님은 절대주권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동시에 에스더라는 도구의 순종과 인간의 책임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는 질문은 성도의 모든 환경과 지위가 하나님의 섭리적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일깨워준다. 에스더는 왕의 부름 없이 나가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민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로 결단한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고백을 통해 진정한 길로 나가는 성도의 자세를 보여 준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하셨다. 예수님의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깊이 연결된다. 에스더가 삼일 동안 금식하여 준비한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예표 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목숨을 내어주셨다. ”...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행 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행 15:4)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무조건적인 것이다. 즉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를 보지 않으신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 즉 유대인들도 죄인이며, 이방인도 죄인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육체도 구원에 스스로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되면 인간의 공로가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이 100% 하신 것이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 바른 믿음을 가진 자의 구원의 확신은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 하나님은 인간 조건을 보시지 않는 분이시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30) 그렇다면 구원을 얻는데 율법의 행위로는 이를 수 없는데, 그러면 율법을 안 지켜도 되냐는 질문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들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들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2) 이방인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에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것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전통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인간의 행위(율법)가 추가 되어야 한다는 율법주의의 공격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며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과 심한 다툼과 변론이 있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들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2)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올려 보낸다.  율법주의는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니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태야 한다는 사상이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히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만일 구원의 근거를 나에게 두는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익하게 된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율법을 주신 진짜 목적은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앞에 서면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또한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의지하게 만드는 ‘초등교사(몽학선생) 역할을 한다....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욥 15: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욥 15:6) 욥과 세 친국의 첫 번째 논쟁 주기가 끝났다. 이제 본문부터는 두 번째 논쟁 주기가 시작되는데, 친구들의 말은 더 거칠어지고 욥은 고립감은 깊어진다. 세 친구들은 첫 번째 주기에서는 나름대로 점잖게 타이르려 했다면, 이제부터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노골적인 정외와 인신공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엘리바스는 욥의 저항이 거세지자, 그를 지혜 없는 자로 몰아 세우며 공포감을 조성한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욥 15:2) 그리고 그의 말 자체가 죄인이라 하며 나이의 연소함을 비웃는다.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욥 15:7) 엘리바스의 논조는 내가 보아온 바를 근거로 악인의 최후를 길게 묘사한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욥 15:17) 논조의 내용은 악인은 평생 고통을 당하며, 환난과 역경이 그를 덮치고, 그는 하나님을 향해 목을 세우고 달려들다가 결국 망한다는 것이다.  욥의 현재의 모습이 바로 이 악인의 운명과 정확히 일치함을 암시하며 회개를 종용한다.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 가리라”(욥 15:30) 엘리바스는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를 욥을 정죄하는데 사용하였다.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욥 15:14) 이 교리는 인간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고백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인 것이다. 또한 악인은 절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욥의 현재의 고난만을 보고 유기된 자로 단정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비밀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지혜로운 자들이 조상들에게서 받아 전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욥 14: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욥 14:14) 욥은 하나님 앞에서 탄식의 기도를 한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는 날도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넘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욥 14:1) 그러면서 인간은 나무보다도 못하다고 한다. 즉 나무는 찍혀도 다시 싹이 나는 소망이 있지만 사람은 죽으면 소멸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리이까?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욥 14:14) 그의 소망은 자신을 무덤에 감추었다가 진노가 지나면 다시 기억해 주시기를, 그리워해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다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욥 14:15) 그리고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아픔을 토로한다. 물이 돌을 닳게 하듯 하나님이 사람의 희망을 끊으신다고 탄식하는 것이다.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욥 14:19) 욥의 탄식 속에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고백한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나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함을 역속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과 절대 주권을 인정한다. 사람의 죽음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시간표 안에 있음을 말한다.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날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욥 14:5) 욥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 하였다. 그런데 초자연적인 소망을 품고 자신이 죽...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2)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2) 욥은 친구들과의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고 하나님과 담판을 짓는다. 친구들을 향하여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이요, 다 쓸모없는 돌팔이 의사들이라 한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욥 13:4)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는데 입을 다무는 것이 곧 지혜라고 한다.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 13:5)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당당히 앞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즉 죽도라도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죽겠다는 일사각오의 믿음이다. 즉 자신의 경건하지 않은 자라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기에,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재판정에 들어 간다. 친구들을 물리친 욥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한다. 먼저 두 가지 탄원을 올린다. 첫째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지금 겪고 있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잠시 거두어 주셔야 편안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진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실 것으로, 압도적인 임재와 공포로 나를 찍어 누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 조건이 수락되면 주께서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며, 혹 내가 말씀하게 해주셔서 주는 내게 대답하여 주시길 아뢴다. 그러면서 기도하기를 나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기소장을 보여달라고 한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3:23) 그리고 전에 그토록 친밀하셨던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원수로 대하시냐고 묻는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 13:24) 욥은 자신을 낙엽으로 비유하며, 하나님께서 낙엽을 잡으려고 이렇게 전력으로 질주하신다고 한다.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