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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교회와 목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행위는 설교이다. 설교는 회중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거룩한 곳에 서서 거룩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를 하는 자가 설교자이다. 설교자는 언어를 가지고 이해와 납득을 시키기 위하여 비유나 예화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설교를 잘 듣기 위하여 예배의 여러 요소들이 있다. 즉 예배의 순서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때에 설교 부탁을 받고 가면 가급적이면 짧게 해 달라고 하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아주 곤란한 것이다. 또 어느 곳에서는 찬양은 오래 많은 시간을 갖는데 설교 시간은 고작 몇 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말들이 많다. 죄로 인하여 진노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말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즉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높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요즘 예배의 형태나 형식은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추어져 있다. 모든 것이 내가 좋아야 하고 마음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내 스타일에 맞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죄의 문제로부터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를 자기의 카타르시스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다. 즉 예배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무속신앙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우상숭배의 근원인 탐심으로 인한 것이다. 설교는 모인 회중의 성격에 따라 말씀을 전하는 방식이나 방법이 달라 질 수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삶 속에서의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즉 죄로부터 오는 고통과 고민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피할 길을 찾는 것이다. 설교는 좋은 내용이나 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설교가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진정한 설교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전하고, 그 말씀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하여야 한다. 인간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나, 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목적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저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곳은 가나안 부족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먼저 하여야 할 일이 가나안 땅에 있는 일곱 부족을 진멸하는 일이었다. 왜 가나안 일곱 부족을 진멸하라고 했는가? 저들로 인하여 악이 번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약탈을 일삼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와 긍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는 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자들을 진멸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저들의 우상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곱 부족을 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진멸하기만 하면 된다. 즉 저들이 저항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하시면 이스라엘 군대는 진멸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꺼냄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 오실 때에 목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의 나라로 삼아서 세상 모든 나라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수가 많지 않고 힘의 세력이 없는 민족을 택하여 이루시는 것이다. 즉 약한 자를 택하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 세상은 강한 자가 살 수 있는 곳이다.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무기가 필요하고 전쟁과 폭력이 필요하다. 그런 반면에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들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약속의 복이 천 대에 까지 이른다고 한다. 가나안 땅에는 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다. 악을 번영하는 일곱 족속은 진멸을 하고, 다른 민족에게는 먼저 화친을 하라고 하였다. 즉 악을 행하는 족속은 죽이고 다른 족속에게는 하나님을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70명으로 시작하여 400년이 지난 후에 이십 세 이상의 남자만 60만 명을 만드신 일이다.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는 계산을 할 수도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방법을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일부다처제이다. 한 남편에게 여러 명의 아내가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교들이 도입을 하여 제도화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을 하신다. 그 약속한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백성의 수를 많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식량이 풍부한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백성의 수를 늘어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 땅 위에는 많은 사교들이 있다.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다. 그런데 저들은 진리의 내용보다는 세력의 힘을 갖기를 원한다. 수적인 우세로 인하여 소리를 높이려 한다. 즉 진리내용의 본질보다는 다수의 소리로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사교의 특징은 결혼이라는 제도도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가 된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가? 무엇을 위하여 그런 일을 하셨는가를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교만이 된다.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구속사도 하나님이 주관을 하시고 우주만물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 사교의 특징은 개인의 생각으로 욕심과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자기에게 특별히 계시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패한 선지자, 이전의 선지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선지자가 진짜라고 우기고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이번 주는 바쁘게 보냈다. 멀리서 어머니와 아들, 동생과 매제가 왔고 또 시애틀에서 노회 목사님이 오셨다. 저의 아이다호 장로교회 담임목사 취임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 반갑고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참 좋은 것이다. 그래서 함께 온천도 다녀왔고, 맛있는 햄버거도 먹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 그런데 어떤 동기와 목적에서 만나느냐에 따라서 참으로 묘한 감정의 기류대가 조성된다. 그래서 가족과 친지가 좋고 오래된 친구가 좋다. 먼저는 편안함이 있고 서로 우호적인 관계이고, 적군으로부터 오는 공포감이나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자들과의 만남은 동업자의 마음이다.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기에 위로와 격려가 있다. 이곳은 살기 편하고 조용한 곳이기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비행기를 타고 오더라도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면 한군데 내지는 두 군데를 거쳐서 와야 한다. 그래서 정성과 사랑이 없으면 오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많은 분이 오셨다. 저를 축하하여 주고 위로하기 주기 위함이었다. 흔히들 목회자의 길은 외롭고 힘들다고 한다. 이렇게 힘들 때에 교인들의 정성스러운 사랑이 있었고, 가족 간의 우애가 있었고, 목회자들 간에 의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목사는 가끔 동굴 막다른 곳에 다다를 때가 있고, 사막에 홀로 외롭게 서 있으며 뜨거운 햇볕을 쬐는 것과 같은 때도 있고, 또 외로운 밤에 공포와 두려움과 추위에 떨 때에 오는 아픔이 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아굴람 동굴 안에 갇히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 심한 고통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외로움을 오른 편에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법정에 피해인이 섰을 때에 변호인이 있는 곳이 오른 쪽이다. 변호인은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세운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기를 위하여 힘을 써줄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한다. 하나님은 다윗이 제물을 잘 드리거나 용맹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윗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과 닮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였다. 심지어 악인들에게 쫓기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었다. 다윗이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수양을 많이 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윗은 의인과 악인에 대한 구분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많은 악인들을 대적하였다. 악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악인들을 늘 꾀를 짜어 내는 것이다. 즉 자기들의 생각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한다. 그러나 의인은 세상과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알고 있다. 그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공의 심판이다. 악인을 향한 불의 진노의 심판이다. 누구나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보응한 대로 대가가 있다. 다윗은 사울의 공격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증명이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공의 심판에 맡기는 선택을 하였다. 시편을 지혜의 시라고 한다. 다윗의 삶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 것이다. 다윗이 극한 상황에서도 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했는지를 교훈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직접 보복을 가하고 죽이라고 하지 않았다. 원수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고 하셨다. 악인들이 악한 말로 의인을 공격하는 것이 다시 악인들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인들이 세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시편을 통하여 다윗과 악인들의 행함을 보게 되고, 그들이 행하게 하는 근거가 무엇이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다윗의 삶을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 살핌 속에는 고난과 환난 그리고 악인들로부터의 핍박에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우리가 쓰는 비유로 ‘등 따시고 배부르면‘이란 말이 있다. 과거를 잊고 교만하고 건방지어 졌다는 것이다. 사람 마음의 자세가 쉽게 변하고 교만해 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겸손하고 순종을 잘 하는데 먹고 살만하면 삶의 생각과 바뀐다. 그래서 도박으로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다 날려 버리기도 하고 또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교훈을 하고 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조심하라고 한다. 즉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늘 겸손으로 임하라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고를 한다. 너희 조상과의 약속으로 인하여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너희가 짓지도 않고, 파지도 않았던 우물을 차지하게 될 때에, 또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여 너희가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조심하라고 한다. 그 때에 너희가 우상을 숭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부족할 때는 하나님을 열심히 순종을 하지만, 이제는 되었다고 생각이 들면 교만하여 진다는 것이다. 내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채워졌다고 생각이 들면 그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욕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나의 생각과 욕심으로 인하여 우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는 사람은 물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서 스스로 만든 신 앞에서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바다에는 어떤 신도 없다. 바다 위를 하나님이 운행하고 계신다. 교만한 마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 없이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인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맛보며 사는 자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영적인 교만이 있다. 이제는 성령의 도움 없이 나 혼자 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다윗하면 용맹스런 자로 기억이 되고 있다. 그전에는 양을 치는 목동이었는데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여 어린소년이지만 용감한 자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적을 향하여 나아간 자이다. 또한 시편의 기록된 다윗의 시는 하나님을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자인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윗이 찬양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한 분이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며,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계시고, 공의의 심판을 하시는 분이라 한다. 즉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속성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다윗의 찬양 가운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는데, 우리의 몸에 있는 장기들을 창조하실 때에, 그 필요를 알고 지으셨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장기들을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에 지으셨다고 한다. 그 얼마나 놀라운 찬양인가? 신자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고백은 서슴없이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세밀하게 고백을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 몸의 장기에 대해서 필요성이나 고마움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깊이 생각을 하시고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에 대한 깊은 생각이 있었던 자이다. 특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한 자이다. 그 구원의 은혜가 사건에서만 끝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사와 온 몸으로 느낀 것이다. 자기의 몸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깊은 생각 속에서 창조되었음을 알고 찬양을 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을 한다고 하지만 다윗의 믿음을 생각하면 부족하기가 한이 없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우리들은 아직도 달라고 하는 수준인데, 다윗은 이미 받은 것을 생각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누리는 자이다. 그런데 우리도 이미 다 받은 것들이다. 이미 받은 것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한다. 찬송가사 가운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다윗은 성품도 좋고 수금도 잘 타는 자로서 음악에도 재능이 있고 거기에다 용맹하기까지 한 인물 이였다. 그리고 삶에서도 풍족함과 풍성함을 누려본 자이고, 또한 여러 가지의 극한 상황을 겪은 자이다. 그가 인생 말년에 신앙을 고백한 내용은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다윗의 시는 자기의 경험과 체험한 것을 근거로 시를 지은 것이다. 하나님을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의 인생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좋았던 날도 많이 있었지만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라린 날도 많이 있었다. 아내의 아버지인 장인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고, 블레셋 왕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척하였던 일도 있고, 전쟁터에서 장수로서 지휘관으로서의 삶도 있었고, 가족 간의 갈등으로 피난길에 오른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인생의 경험에서 다윗이 체험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구체적으로 표현을 한다. 먼저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성실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세탁소에 Y-Shirt를 맡기면서 상황이 급할 때에는 Same Day Services를 부탁할 때가 있다. 이것은 세탁물을 맡긴 날에 찾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다윗이 위급한 상황이 닥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간구하는 날에 응답을 해 주셨다고 고백을 한다. 이것은 즉시 응답을 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여러 신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주님을 찬송할 수 있다고 한다. 구약 속에 등장하는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다. 각 나라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였다. 다윗은 신들과의 전쟁에서 이미 주님이 승리하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 유다의 왕들을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였다. 이미 자기에게 약속한대로 함께 하시고 보호하여 주셨음을 확인하였고 그 약속은 유대 후손들에게도 영원할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신자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일 가운데 하나가 친목회나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우선 노래 실력으로 인한 두려움이 있고, 그 다음은 어떤 곡을 선정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대중가요를 부르자니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마음이고 찬송가를 부르자니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는가에 대한 부담이다. 그런 가운데도 꼭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듣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 모두가 난감한 일이다. 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중에는 타당한 의견도 있지만, 신자로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예배는 중생한 자들이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하여 주시고 의롭게 된 자들이 드리는 예배이다. 그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임의 성격과 분위기를 참고하여야 한다. 오히려 찬양을 잘못 하게 되면 영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이 된다. 또 회식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사가 조롱조로 하급 직원에게 찬송가를 부르라고 시키는 일이 있다. 이때도 역시 고민이 생긴다.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며 직장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신앙의 양심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가에서 노역의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바벨론의 감독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에서 하였던 찬양을 하라고 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을 위하여 수금을 연주하지 않았고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더라고 저들을 위하여 노래를 하지 않겠다는 군센 의지를 보여주었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회식 자리나 술자리에서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영광의 자리인 시온 산에서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그러니 영광의 자리를 구분할 줄을 알아야 한다. 술 취한 사람들의 흥을 부추기에 주기 위함이 아니다. 지혜로운 방법은 술자리나 회식 자리에 참석하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성경에서 인자함이란?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베푸는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편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찬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찬양할 것을 세밀하게 나열하였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찬양하였고, 지금도 주관하고 계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찬양하고 있다. 또한 광야에서의 인도하심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던 것들을 찬양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데 사람이 오른 손으로 일을 하듯이 하나님의 오른 팔로 하셨다고 한다. 오른 팔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즉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에 집중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 온 몸과 마음과 정신을 집중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사랑과 관심을 짐작케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관심을 갖고 계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을 알 때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할 수 있다. 넓은 들판에 부는 바람도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날씨에 대하여 불평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의 생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각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늘 불평이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신선한공기와 물이다. 당장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금과 은, 보석과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하여 생명과 맞바꾸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피조물인 인간에게 신선한 공기를 주시기 위하여 구름을 동원시키고 바람을 불게 하신다. 대기 중에 더러운 먼지들이 많이 있음으로 소낙비를 내리게 하셔서 맑은 공기로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먹을 것을 주시기 위하여 천천히 적당하게 보슬비도 내리게 하여 나무들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런데 자기 밖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우리가 기도 할 때에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 만일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은 이 문장으로만 끝을 낼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찬양받으실 구체적인 이유를 고백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청년들이나 청장년들이 기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교회의 믿음의 어른들의 기도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들은 대로 따라 하기 때문이다.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이방나라들을 멸하시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신자들은 더 큰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시편을 지었던 자들보다는 더 큰 찬양과 감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시편의 저자의 고백에 머물러 있다면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찬양의 내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문장의 내용이 멋있어서 따라하다가 언젠가는 이해하는 때가 온다. 그것보다는 청년 때에 올바른 이해를 통하여 더 깊은 믿음 가운데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자유인이 되었다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인이 된 것이다. 또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교회가 있고 아름다운 가정이 있다. 이미 우리들도 얻어서 찬양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을 잊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이 우리들의 찬양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찬양의 내용에 더 해져야 한다. 분명히 우리에게도 임하셨던 은혜가 있고 지금도 함께 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있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한다. 미국 땅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태평양을 자기가 만든 돈으로 비행기 타고 건넜다고 생각을 하면 감사의 믿음은 생기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교회에서 나누어지고 있는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푼다. 그것을 동정이라고 한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여겨 딱하고 가엾은 마음을 가짐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알려지는 선행이 있다, 거액을 기부하면서도 익명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어려웠던 지난날이 생각나서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여 도움을 베푼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도와주는 것은 같겠지만 사랑을 주고받은 후에는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선행을 베풀고 나면 다시 그 일에 대하여 거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는 선행을 하고 공치사를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자기를 자랑할 때면 그동안 선행을 베풀었던 모든 일의 이야기를 다 한다.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만나기만 하며 하는데 들을 때 마다 인내를 요구한다. 이야기의 결과는 자기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미 그 사람은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선행을 베풀 때에 도움을 받은 당사자에게는 아픔과 부담이 된다. 선행을 자랑하는 자의 전리품이 되는 결과가 된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좋은 관계가 아닌 적대적의 관계가 된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랑을 하지 않는다. 사랑을 전하고 선행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이웃을 죽이고 마음이 아프게 하는 자리로 갔고, 자기의 자랑으로 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는 남을 가엽고 딱한 마음으로 다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은 자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간다. 은혜를 맛본 자로서 은혜의 자리로 올라오게 하기 위함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나를 자랑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러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의 믿음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근거가 되어 감사와 찬양을 하고 그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 피흘리시고 세우신 교회는 선한 행실을 몸소 실천하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에도 시기하며 질투하며 싸운다는 것이다. 즉 좋은 하는 사람 때문에 여러 사람이 상처를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시험에 들게 하면서 하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품은 죄성을 가지고 있다. 그 죄성 가운데에 교만이 비중 있게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과 비기려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이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과 사람이 모인 곳에는 늘 분쟁이 일어난다. 아무리 좋은 옷에 점잖은 체하여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신자라 하여도 죄의 성품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죄의 성품이 없어지고 천사가 되는 줄로 안다.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은 할 수 있지만, 아직도 옛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죄를 지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 봉사의 일을 잘하는 교인들이 있다. 그런데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아주 조용하게 봉사하는 교인이 있고, 모든 교인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설쳐 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자세로 하는 교인도 있다. 신자는 봉사의 일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봉사라는 것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애씀을 말한다. 또는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자기를 자랑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 교회의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교인들과 먼저 동업자의 정신이 필요하다. 같은 종류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즉 봉사의 일로 인하여 누가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사람이 만나면 당연히 분쟁이 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섬기는 방법이 싸우면서 질투와 허세로 한다면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신자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지 에는 관심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욕심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자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거나 아니면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따르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라 한 것이 있다. 먼저는 이것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세상 사람들도 양심에 근거하여 도덕과 윤리의 법이 있다. 이 법을 어기게 되면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신자가 지켜야 할 법의 크기나 내용은 세상의 법 보다 훨씬 더 크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의 법은 인간의 의를 근거한 법이다. 사람이 지킬 수 있는 한계를 정하여 놓고 지키는 자는 자랑의 자리로 가고 지키지 못한 자는 정죄와 비판의 자리로 간다. 그러나 신자들이 지켜야 할 법은 다른 사람을 정죄나 비판의 자리로 몰고 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생명과 거룩의 자리로 가게끔 한다. 신자는 거룩한 법을 지켜서 자신도 생명의 자리로 가고 다른 이웃도 생명의 자리로 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자랑의 자리가 아니라 섬지는 자리로 간다. 그러니 신자들은 좋은 일을 하면서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자리로 간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이러한 신자의 삶에서 교만이나 부족함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어떤 신자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자기는 죄에 대하여 별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이 없고, 기도도 5분만 하면 더 이상 용서를 구할 것이 없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셔서 약속을 하셨다. 그래서 그 약속을 얻을 수 있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는 아주 신비롭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함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과연 이 땅에 세워진 교회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였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다. 교회의 머리를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을 강조함에 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을 할 때에 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모인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다. 그 법궤가 다시 돌아오고 되었지만, 예루살렘이 아닌 기럇여아림의 오벧에돔의 집에서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 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법궤가 다시 돌아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제가 화합을 하며 선하고 아름다움을 맛보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을 직유법으로 표현을 하였다. 성령의 기름이 아론의 머리를 적시고 수염까지 흐르고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 산에서 흐르는 물이 풍성하여 유다지방의 남쪽 척박한 사막에 까지 흘렀다는 것이다. 이 땅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에도 이와 같은 약속 가운데에 있다. 그 약속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키는데 있다. 즉 싸우고 분쟁이 있고 분열이 있는 교회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형제가 연합하여 함께 동거를 하며 선한 일을 할 때에 충만한 은혜가 임한다는 것이다. 건물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고 해서 다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머리로 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며 누리는 곳이 참다운 교회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함을 맛본 자들은 참다운 교회를 찾아 가는 것이다. 충만한 은혜를 맛보지 못하면서 고집으로 버티는 교회가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지 않는 교회는 새로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신앙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모인 이유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만일 다른 것을 믿는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면 이단이 침투를 하였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근거와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임한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명령대로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오늘날 교회의 분쟁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해결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의 생각과 고집으로 해결을 하다가 보니 늘 마찰이 생기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교훈이 아닌 다른 교훈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쳐올 수 있다. 그 시험을 이길 수 있고, 피할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그런데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교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분당을 짓고 또 세상의 힘을 확보하기 위하여 변호사도 선임을 한다. 그리고 세상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판결을 받게 한다. 이 모든 일에 신자들이 앞장을 서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을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는 자들인가?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만일 교회의 분쟁이 생겼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순종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신자들은 모든 믿음을 망각하거나 잃어버린 사람들 같다. 평상시 기도에서는 하나님께 순종을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되면 이 문제는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엉뚱한 고집이 생긴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지구촌 곳곳이 뜨겁다 못해 난리이다. 한쪽에서는 기득권을 잡기 위하여 눈이 충혈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지진과 쓰나미 경보로 인하여 거의 절망 상태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즉 땅속에는 시뻘건 용암이 가득 차 있다. 이것이 가끔씩 분출을 하면 난리가 났다고 난리를 친다. 그러다가 다시 망각을 하고 지구는 평온한 곳이며, 이곳에 지상의 낙원을 세우자고 지혜를 짜낸다. 가끔씩 지구가 흔들리고 화산이 폭발을 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땅이 한 번 흔들리면 큰 건물과 모든 시설이 폭삭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또 용암이 솟아올라 흘러넘치면 그 피해가 얼마나 큰지도 확인하였다. 화산의 재로 인하여 항공기 운행이 어렵다. 이것을 천재라고 한다. 하늘이 내린 어려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온전하지 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흔들리는 땅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흔들리는 땅에 지상의 천국을 만들 수 있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흔들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견고한 터 위에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다. 이 말씀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왕위는 영원히 견고케 될 것이라고 하셨다. 흔들리는 땅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견고하지 않다. 또한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지는 나라는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지며 영원하다. 이것이 실현되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다.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이가 있다고 믿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지무지하게 바쁘다. 먹고 살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돈을 버는 일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하늘 위에 무엇이 있는지,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을 한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내가 믿고 있는 신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성령을 믿는다 한다. 물론 신은 한분이기에 모두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논리적인 서술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이다. 성부 하나님이 누구이며,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 지를 세상에 알리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성품, 사랑과 자비, 긍휼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천국을 가는 것이나 성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밝히고 있다. 품 안에 계시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네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들을 위함이다. 더 놀라운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하여 직접 낮은 자리로 오셔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약속을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셨다. 또한 그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도 말씀하셨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을 갈 수 있는데 그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천국을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을 새롭게 된 자라고 한다. 새롭게 되었다고 하는데 무엇이 새롭게 된 것인가? 혹시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얼굴이 더 예뻐지거나 아니면 날씬해지었는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새롭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구원을 받은 사람을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라고 한다. 타락한 인간이라 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앞에 와 계셔도 알아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의심을 하는 자들이다. 앞에 와 계셔도 알아 볼 수 있는 기능이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새롭게 창조함을 받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생겼다는 것이다. 영적인 감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영적인 기능이 활동을 함으로 인하여 전에는 들리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들리기도 하고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을 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은혜가 임하고 구원을 받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죄에서 죽어야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죽고 부활한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신자들은 이러한 영적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 앞과 이웃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제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거룩함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죄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한 과거의 죄를 아주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간증 집회를 자주 다니는 유명한 인사들이 있다. 그들은 과거의 죄악 된 생활의 습성들을 몇 년째 반복하고 다닌다. 이것은 마치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애굽에서 먹고 마시고 즐겼던 이야기를 추억하는 것과 같다. 신앙은 점진적으로 발전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신앙을 어린아이로 비유를 한다. 신앙의 시작을 생명체가 있는 어린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를 위하여 부활을 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즉 나를 위하여 부활을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나를 위한 부활이라는 것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내게 부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라고 하였다. 신자에게 있어서 부활의 신앙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신자들은 죄사함에 대한 확신은 있지만, 부활에 대한 확신은 좀 부족한 것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구원 이후의 믿음의 진지함에 대한 고찰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더 크다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베풀어 주시고 약속하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은혜이다. 죄인의 자리에서는 맛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세상이 주는 낙심과 절망과 사망의 고통에서 화평과 기쁨의 차이이다. 그래서 삶의 차이가 다른 것이다. 인생이 두렵고 염려가 되어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스포츠나 도박에 광적으로 빠진다. 그 이유는 결과가 나타나는 시간까지의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염려의 시간을 바꾸기 위한 열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람은 축구관람에 모든 것을 건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 패하면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그러한 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망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다. 그래서 과거에 죄의 종이었을 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즉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죄를 거부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또한 성령과 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부활의 영광의 아침이 밝았다.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부활의 약속이 우리의 것임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헛된 것을 믿고 마는 것이다. 사탄은 공중권세를 잡은 자로서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낙심과 절망 그리고 사망의 자리로 끌고 간다. 하나님은 사탄의 종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즉 사탄의 권세를 꺾으러 오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고발과 빌라도의 판결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땅 속에 장사하였다. 그 때에 사탄은 승전가를 불렀다. 하나님의 아들을 이겼다고 좋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이다. 이 소식은 인류에게 놀라운 소식이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모두 죽음의 자리로 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죽은 자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도 임함으로 인하여 부활의 열매를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사는 자가 되었다. 영생의 은혜와 부활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님의 부활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아버지의 능력에 내게도 임한다는 약속을 함께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른 새벽에 나아갔지만 피곤할 수가 없다. 세상이 만들 수도 들려줄 수도 없는 기쁜 소식을 들었는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리스도인이 신앙고백으로 하는 사도신경이 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다가 보면 거슬리는 인물이 등장을 한다. 그의 이름은 빌라도이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을 읽다가 보면 빌라도가 자기는 그의 피에 대하여 죄가 없다고 하면서 대야에 손을 씻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참으로 웃기는 소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의 정치적인 상황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을 하였지만 사형을 집행할 판결은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판결은 로마에게 있었다. 그래서 빌라도의 법정을 빌린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항목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 정권에 대항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로마의 황제에게 항거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협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 하였지만 유대인들의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빌라도는 백성들이 민심의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지만 사형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유대 총독의 자리를 계속지키기 위함이었다. 그 판결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악인으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 때에도 빌라도의 심정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 불의와 타협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즉 권모술수를 쓴다. 이것은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꾀하는 모략이나 수단이라 한다. 세상은 이렇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출세를 한다고 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허망한 것과 허영된 것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러니 진리를 지키거나 보존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만일 빌라도가 양심을 따라 판결을 하였다면 악인으로 전해져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간 권력의 욕심으로부터 자유함을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날을 수난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와 누구 죽였는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의견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죽였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로마의 관원들이 죽였다고 한다. 우리가 악해서 죽였고 무지해서 죽였다고 한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셨는데 누구의 뜻에 의한 것인가를 확인하려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구원의 은혜를 제대로 맛볼 수 있고, 신앙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은혜라고 함은 값을 치르지 아니하고 얻은 것을 말한다. 은혜라는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의 수고로 얻은 결과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가 되는 것이다. 나의 수고로 인한 결과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무지한 백성들 로마의 관원들이 죽였는데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에게 인자는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실 때에도 이 잔이 내게 피할 수만 있다면 하시면서 기도를 하셨지만 그러나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다. 그러니 이후의 모든 일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진행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또한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십자가의 구속사건은 이미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에 의해 계획인 된 것이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 것이 우주만물을 창조하기 전이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십자가의 구속사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번 주가 참 의미 있는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우리들의 죄문제가 해결되기 위하여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고난주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육체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한 시간이라고, 혹은 외적으로 경건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의 모든 내용이 담겨있는 아주 특별한 기간이다. 인간이 죄사함을 받는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몸이 다시 사는, 또 영원히 사는 문제가 은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함에 핍박과 악인들의 음모가 있다. 악인들의 음모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백성들의 광분이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생각으로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세상의 정권을 잡았던 자들이 메시야의 등장에 호의적이지 않았음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역경에서도 예수님은 굴복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을 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분이 자신의 죄를 사함을 받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다. 우리들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은혜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은혜가 임하는 것을 말한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실 때에 함께 올라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고백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패망한 북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나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그들이 망하였다. 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저 그들이 불순종하였다고 간단하게 말한다. 불순종하였다고 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는 아주 좋은 제물로 드렸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이 된다. 구원을 얻고 구원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주인은 종에게 요구를 한다. 주인으로서 종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함이다. 그 종의 삶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인의 말에 순종을 하여야 하고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만일 종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주인과의 관계가 파기가 된다. 종은 스스로 살 수가 없는 자이다. 누군가가 거두어 주어야 살아갈 수 있다. 이와 같은 원리 하에서 구원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말씀에 순종을 하고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종이 주인의 마음을 외면하고 자기의 생각과 뜻으로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 이와 같은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주인님은 가만히 계시고 내가 알아야 할 터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무엇을 할 때에는 이름을 빌려 주시고 돈을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이 같은지를 확인하여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보기 원한다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한다. 이번 주는 고난 주간이다. 고난 주간에 주님의 행적을 보게 되면 그 당시의 제사장들과 장로들, 민족의 지도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만났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었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야가 그들 앞에 계셔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살피면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교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목사를 조직 폭력배의 두목정도로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 조직원으로서 두목에게 충성을 하듯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교인은 목사의 말을 듣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충성을 하여야 한다. 교인은 목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시험을 들은 것이 아니라 목사에게 시험을 들었다고 한다. 목사의 비위를 맞추다가 시험에든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한 목사에게도 시험을 들을 수가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목사를 의지하고 믿고 있기에 시험을 받는 것이다. 주님이 피흘리시고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법이 있다. 이 법은 목사도 지켜야 하고 교인들도 지켜야 한다. 이 하나님 나라의 법을 목사가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이 목사요, 목사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그래서 모두가 법을 지켜야 하지만 누구보다도 목사가 그 법을 지켜야 한다. 목사의 가르침은 법으로부터의 보호와 법을 어겼을 때의 심각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법을 어기면 목사가 법을 고치거나 보호를 해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이해하고 있다. 목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목사 역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사람들이다. 먼저 모범을 보이는 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족을 하고 실망을 하는 것이, 자기의 문제로 인하여 섭섭함을 느꼈을 때이다. 섭섭하다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기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섭섭함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목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교인들이 목사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선물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마치 먼 훈 날 사고 나면 처리를 위한 보험금 납부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정말 곤란한 것이다. 목사는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다. 그래서 늘 분쟁과 다툼이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인간의 갈등으로 인한 싸움에 올바른 지표가 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불완전한 교회에 나타나는 교인들의 현상 가운데 하나가 분당이다. 분당이 생겨 싸움이 나면 목사는 참 곤란하다. 그동안 함께 하였던 사람이라면 더욱 곤란하다. 모두가 다 알듯이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고 따르게 하고 순종하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자기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삐지고 섭섭하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이 목사에게 밥 사주면서 순수한 마음이 아닌 보험금 납입으로 생각한 사람이다. 그래서 목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나 식사를 하게 되면 경계의 마음이 있다. 그리고 식사를 하게 되면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결정을 하여야 한다. 값비싼 음식을 시키게 되면 뇌물이 된다. 또한 커다란 액수의 현금을 주면서 생활비에 보테에 쓰라고 주는 것도 조심하여야 한다. 아니 받지 말아야 한다. 먹으면 쥐약이 된다. 그런데 만일 문제가 생겨서 자기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섭섭하다고 한다. 목사에게 섭섭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하나님에게는 쓰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편을 들어 주시지 않아서 섭섭합니다'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섭섭하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잘못을 하였을 때에 상대방의 배려를 기대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 말씀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목사는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고 그 말씀을 잘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교인들 가운데 드리라고 하는 헌금은 아니 하면서 남에게 선심 쓰는 일에는 아주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 즉 다른 사람들로부터 통이 크다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만 인정을 받으면 되지만 교인들은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교인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이다. 성령을 속여서 즉사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잘못된 동기가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으려 한다가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초대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사도들로부터 위로자라는 말로 불리었다. 바나바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내어 놓은 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다. 이러한 바나바처럼 자기들도 위로자의 말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다. 판 것에 반을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 놓고 전부를 내어놓았다고 한 것이다. 즉 반만 내어 놓고 전부라고 속인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즉사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너무 많다.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 게으름을 피우지만 사람들이 보면 생색을 내며 열심인 사람들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뒤에서 불만과 불평의 말을 하다가도 사람들이 보이면 금방 달라진다. 이와 같은 자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속이면서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는 싫어도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싶다는 속마음이다. 이러한 사람을 성경에서는 위선 또는 외식하는 자라고 한다. 교회는, 교회가 하면서, 교회는 선한 일과 구제의 일을 많이 하여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이 있다. 교회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시애틀 지역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곳하면 커피가 유명하다. 왜 커피가 유명하냐 하면 비를 즐기기 위한 것이라 한다. 비가 계속적으로 내리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중충한 날씨에 몸과 마음을 따습게 하기 위하여 뜨거워야 하고 퀴퀴한 냄새를 좋은 향으로 바꾸어야 하고 축 쳐져 있는 기분을 카페인을 마셔 약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늘 습관적으로 하던 일에 매여 있다면 때로는 무력감과 능률이 저하된다. 그래서 기분 전환을 위하여 각 자마다 여러 가지의 취미 활동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너무 치중을 하거나 빠지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몸을 해치고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의 말씀을 보게 되면 먹고 마시는 일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 마시는 일은 가장 기초적인 일이고, 가장 많이 하는 일이다. 그런 일에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니 다른 일에는 물론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운전할 때에 유행가 가사를 따라 부르지만, 믿음을 가진 자들은 찬양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운전을 하면서도 기도의 시간이 되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는 자들은 마치 전기선이 끊어진 냉장고와 같다. 냉장고가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면 부패가 시작이 된다. 그리고 악취를 풍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가 끊긴 사람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생명의 은혜가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이나 노래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속임을 숨을 쉬듯이 하는 것이다. 또한 생명이 있는 자는

남편들아 - II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자를 좋아한다. 또한 거룩한 뜻을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그 일을 담당할 자로 가정에 아버지들을 세우셨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거룩한 것을 지켜야 하는 자들이다. 가정에 아버지의 지위로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한다. 제사장은 자기의 죄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 자들이다. 제사장들은 죄를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가정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죄 가운데 거하지 않게 하고 죄가 가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파수꾼의 사역도 감당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먼저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지으셨다. 돕는 배필이다.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하와를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란 아담이 혼자서 쓸쓸히 지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들 중에 하늘에 있는 것과 땅위에 있는 것, 바다 속에 있는 것을 주어 그것들의 특성에 따라 이름을 짓게 하셨다. 아담이 정한 것이 이름이 된 것이다. 아담은 동물이나 물고기나 공중의 새의 이름을 짓는데 특성을 연구하여 지은 것이다. 넙적한 물고기는 넙치가 되고, 까만색의 새는 까마귀이고, 코가 길어서 코끼리가 된 것이다. 아담은 이름 짓는 일에 열중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의 이름 짓는 일을 하였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을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아담이 혼자 수고를 하니 하와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를 한 몸으로 이루신 결혼의 제도이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은 신비한 연합이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남자를 그리스도라 하고 여자를 교회라 하여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피흘려 죽으시고 세우신 것이 교회이다. 즉 교회는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은 그의 몸에 생명을 공급하여 주고 거룩하게 함이다. 그리스도가 그 일을 감당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