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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본문은 다윗의 시로서 인생 말년에 기록하였다. 사람은 삶을 다하게 되면 뒤를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게 된다. 다윗의 삶은 고난과 환난 가운데 있었다. 이 땅에 살았던 어떤 사람도 다윗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다윗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나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알리셨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셨음을 전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다. 사도 바울이다. 그는 택함을 받을 때부터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고난 가운데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 가운데서도 로마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당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자신이 옥에 갇히자 빌립보 교인들이 더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환난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에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 드러난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   다윗이나 바울이 고난을 많이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난을 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몸이 쇠하여 질고의 고통 가운데 있어서 빨리 죽고 싶지만, 빌립보 교인들에게 더 많은 위로를 주기 위해서라면 더 살아도 좋다는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구원의 은혜는 죄악과 고통 가운데서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실상을 다윗이나 바울을 통하여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엿새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시몬 문둥병자의 집에서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한 근을 예수에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그때에 이 장면을 본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5) 하며 마리아에게 핀잔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가룟 유대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위선자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넘긴 자였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것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 12:7)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가치가 마리아가 모든 것을 바친 것보다 더 크다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가치는 무엇인가? 영생(하나님과 함께 하는 운명), 구원(죄에서 구원하여 주심), 화목(하나님 품안으로 들어감)이다. 이러한 하나님 구원의 가치를 마리아는 알았는데 가룟 유다는 모른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가치를 안 다음에는 이렇게 고백을 하였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난 후에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 즉 구원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자신의 가치관이 바뀔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것으로 헌신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강요를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구원의 가치를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그를 예후에게로 잡아가서 죽이고 이르기를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힘으로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그를 예후에게로 잡아가서 죽이고 이르기를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힘으로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대하 22:9) 남 유다의 왕위는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로 이어진다. 여호람은 악한 왕이어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를 장려하였다. 이 악한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여호람의 아들 가운데 아하시야만 남기고 다 죽임을 당하였다. 아하시야 왕도 아버지 여호람이 따랐던 아합 왕을 길로 갔다. 아합 왕의 아들인 요람과 가까이 했다. 그래서 불순종할 때에 약속한 말씀이 임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님시의 아들 예후를 세워 아합의 집을 진멸하시고 아하시야와 그의 형제들과 아하시야를 따르는 자들을 죽임을 당하게 하신다. 아하시야 왕이 사마리아에 숨었지만 예후의 손이 죽는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악한 사람의 악랄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대적한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결말을 어떠한지를 알았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으로 나와 즉시 회개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더 극악무도한 짓을 아달랴를 통하여 볼 수 있다.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며, 남유다 왕인 여호람의 아내이며, 아하시야의 어머니이다. 이제 이 여인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막으려 하는 짓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과 약속하시고 이루시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녀가 한 짓은 다윗의 왕손을 진멸하려함이다. 다윗 왕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막으려하는 사탄의 계략인 것이다. 아하시야의 아들들, 즉 그녀의 손자들을 다 진멸하려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그녀의 딸인 여호사브앗에 의해서 이루지 못한다. 여호사브앗이 왕자들 가운데 요아스를 몰래 빼내어 하나님의 전에 숨겼던 것이다. “요아스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대하 22: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의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의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대하 21:12) 대하 21장은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고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지른 악한 왕이었다. 여호사밧의 아들들 가운데 여호람은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을 하였다. 여호람에게는 왕위를 주었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주었다. 여호람이 왕위에 올라 세력을 얻은 후에는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을 죽였다.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대하 21:4)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합 왕의 길을 따랐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죄하게 하였던 왕이었다.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으므로”(대하 21:11)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므로 인하여 주변의 나라들이 배반을 하여 돌아서는 일들이 생기고, 자녀들에게도 화가 미쳐서 다 죽임을 당하게 되고, 자신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병에 결려 죽게 된다. “그들이 올라와서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대하 21:17) 본장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의 비참함과 결말을 깨닫게 하며 경계하게 한다. 마지막 죽음의 길에도 백성들이 분향을 하지 않았고 열 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섰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던 자로서 은혜와 인도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악한 왕이 여호람은 비참한 최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러 왔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를 하였다. 기도의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셔서 그의 자손들을 이 땅에서 지켜 달라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대하 20:7)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와의 영을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였다. 그래서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을 믿고 “백성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으니”(대하 20:21) 군대 앞에서 찬양하는 자들을 앞세워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그 노래가 시작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연합군을 패하게 하셨다. “그 노래와 찬양이 시작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대하 20:22) 전쟁에서 승리한 여호사밧 군대는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불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여호와의 전으로 나갔다. “그들이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대하 20:28)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는 왕 여호사밧이 있는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대하 19:6) 여호사밧 왕은 아합 왕과 연합하여 아람 군대를 치러갔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아합 왕은 전사하였고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후에 여호사밧이 하는 일은 백성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온 나라에 견고한 성을 세우고 재판관을 성읍마다 세웠다. 본문의 말씀은 여호사밧이 재판관들에게 이르는 말씀이다. 즉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정하게 재판을 하라고 명령한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 된다. 재판관들이여,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갈라디아지역에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과는 간을 빼어줄 정도로 가까이 지냈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단의 가르침을 따라 가게 되자 바울이 큰 소리로 잘못을 외치었다. 그러자 그들의 생각에는 바울이 변하여 자신들에게 서운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때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만 특별히 임하고 특별히 봐 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도, 베드로 사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났을 때에는 징계를 받았고 사탄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대로 시행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그들의 요구를 뇌물을 받고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본문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 하신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데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서 말씀에 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은 분부하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천국을 확보하였다. 그래서 하늘의 복을 받았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겸손한 자가 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시며 또한 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심판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오히려 위로를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회개와 용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받게 되어 천국에 이른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신다. 이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다면 산상수훈의 말씀을 묵상하셔야 합니다. 그 말씀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나의 아들이라면 아버지를 닮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자비와 긍휼을 구하러 나오셔야 하고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값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70:5) 시편 70편은 다윗의 시이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전과 다른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라고 한다. 여기서 다윗은 가난함을 물질의 부족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함이다. 즉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영을 소생시키며 회개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킨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다윗의 기도를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통회하며 마음이 겸손한 자를 만나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워주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구원과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의인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너희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고 한다.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가 형성이 되면 비로소 간섭이 시작된다. 다리 밑에서 살던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으면 그때부터 아버지의 간섭이 있다. 만일 다리 밑에 그대로 살면 간섭할 일이 전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방식이다. 본문에서 다윗이 간구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심령이 가나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함과 같은 것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여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여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유대인들에게 학대를 받으셨는데 저들이 돌로 치려하고 잡으려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요단 동편에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장소로 오셔서 거하셨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가 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는데 이틀을 더 유숙하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는 길을 막는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 11:8) 그래서 예루살렘 동북쪽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을 하니 나사로가 이미 무덤에 누운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마르다는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하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있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곳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더라”(요 11:32)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아버지께 보냄을 받았노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건으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보여 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미 죽은 자였던 회당장의 딸과 과부의 청년과 나사로를 살리셨고, 제자들에게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대하 18:1) 남 유다 왕이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킴으로 인하여 큰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대하 18장에서 그 영광의 축복을 잘못 사용함으로 인하여 결국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였다. 여호사밧 왕이 받은 축복으로 북이스라엘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동맹을 맺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대하 18:1) 이것은 혼인 동맹으로 두 나라의 존립과 번영을 그들의 힘으로 유지하려는데 있었다. 즉 여호사밧의 아들과 아합 왕의 딸이 혼인을 하였다. 여호사밧은 큰 실정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이 실정으로 인하여 다윗 왕가의 왕손이 전멸할 위경에 처했다. 아합의 딸인 아달랴가 훗날 아하시야의 아들을 다 죽이는 참극이 일어난다. 즉 아달랴의 손자들을 다 죽이고 다윗의 왕손을 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아스는 죽지 않아서 다윗의 족보를 이을 수 있었다. 악한 왕인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가 혼인을 하면서 우상 숭배가 남유다에 유입되어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군사적 동맹을 맺어서 길르앗 라못으로 원정을 가서 아람군대를 치자고 한다. 그때에 여호사밧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자고 하여 선지자 사백명이 등장을 한다. 이 선지자들은 아합의 비위를 맞추어서 유익을 얻는 자들이므로 거짓으로 아합의 승리를 위한 예언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전쟁을 나가라 한다. 전쟁에 나가면 패하게 될 것이라 하며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대하 17:4) 대하 17장은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왕정 초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산당을 철거하지 않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여호사밧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였다고 한다. 다윗이 처음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을 때를 말한다. 즉 밧세바 사건이나 인구조사의 길을 행하기 전의 다윗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대하 17:4),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명을 잘 지키는 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데 힘을 썼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대하 17:9) 그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변 나라들이 남유다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대하 17:10) 그리하여 유다의 성읍들은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이는 다 왕을 모시는 자요 이 외에 또 온 유다 견고한 성읍들에 왕이 군사를 두었더라”(대하 17:1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께 구하며 계명을 지켰더니 나라에 전쟁이 없고 더욱 견고한 성읍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대국이 됨으로 인하여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조공을 바칩니다. “블레셋 사람들 중에서는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리며 은으로 조공을 바쳤고 아라비아 사람들도 짐승 떼 곧 숫양 칠천칠백 마리와 숫염소 칠천칠백 마리를 드렸더라”(대하 17:11) 그 당시에는 강한 나라가 되면 잘 살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을 견디고 지키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그 때에 선지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그 때에 선지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대하 16:7) 대하 16장에서는 아사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내용이다.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왔을 때에 아사 왕은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약조를 한다. 그 때에 선지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일어날 일을 알려 준다. 지금까지는 아사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인하여 온 땅을 두루 감찰하여 주셨지만 이제부터는 전쟁이 있을 것이라 한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니라 하매”(대하 16:9) 아사 왕의 교만이 대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둔다. 그리고 그가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하게 되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대하 16:12)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는 교만에 대하여 확인하였습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아사 왕이 왕궁 곳간에서 은금을 가지고 가서 밀실에서 은밀히 약조를 하였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면 모든 일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으로 행하게 되면 그것을 교만이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버리시기까지 하십니다. 은밀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은밀한 계획까지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 15:2) 대하 15장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아사랴가 아사 왕과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제사장들은 율법을 가르치지 않아서 백성들은 우매한 자들이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에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대하 15:3)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서로 상하게 되었다. 그때에 아사 왕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말씀을 듣고 가증한 물건들을 없애고 다시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여 제사를 지내며 다시 하나님을 찾기로 언약을 맺는다.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1)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 않는 자는 죽이기로 맹세를 한다. 이렇게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을 얻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셨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 15:15) 그래서 남유다 주변에는 전쟁이 없어졌고 평안이 임한 것이다. “이 때부터 아사 왕 제 삼십오 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대하 15:19)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목숨을 다하라 하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사 왕이 남유다 지역에 각종 가증한 우상물을 제거할 때에 예외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까지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시 69:33) ‘자기연민’이란 스스로를 스스로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스스로 높여 자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고난을 많이 당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한다든가, 착한 일을 많이 하였기에 복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이다. 그래서 그 큰 사랑을 죄인들에게 주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나타내셨고 죄인들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구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워주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궁핍한 자의 소리와 하나님을 위하여 갇힌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시 69:3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편 69편의 설교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가는 방식과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만든 조건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