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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겔 28:2) 에스겔 28장은 두로 왕이 받을 심판이다. 두로 왕은 무역으로 재물을 많이 모아 마음이 교만하여 졌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다.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겔 28:5) 하나님과 같은 체하는 자가 결국에는 심판을 받고 죽음을 당하므로 신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두로 왕은 바벨론 나라의 침략을 받아 죽게 된다.   신이 사람의 손에 죽으면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겔 28:9) 사람이 재물이 많으면 각 종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좋은 옷으로 치장을 하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의 마음이 교만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 두로 왕이 심판을 받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재물, 권력, 명예를 가지고 하나님과 같은 체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거나 말씀에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자신의 지혜와 총명을 자랑을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사람의 총명과 지혜와 재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손에 죽는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시 133:2) 여호와의 율법에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할 때에 기름을 머리에 부어 흐르게 한다. “관유를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부어 바르고”(출 29:7) 이 의식은 성별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머리에 붇는 기름이 충만하여서 수염에 흘러 옷깃까지 젖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다. 그와 같은 은혜를 받는 곳은 교회이다. 즉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의 몸의 각 지체가 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머리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 주님의 교회는 이와 같은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 모인 자들은 진리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즉 교회 안에 있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에 여호와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에 놀라운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즉 여호와께 순종을 다짐하고 화목한 자에게 복이 임하였습니다. 번제와 화목제에 화목제물이 되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면 이와 같은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양분을 받아 뼈와 힘줄 그리고 근육이 성장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아버지의 일을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시편 133편은 다윗의 시이다. 시편의 내용은 기자가 단순히 소망이나 바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몸소 은혜를 체험한 것을 감사 찬양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떠한 일을 통하여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돌아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삼하 6:15) 그 때에 다윗에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축복을 해 주었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삼하 6:18) 그리하였더니 여호와께로부터 복이 임하였다.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하 6:19) 이와 같은 복에 대하여 다윗은 이렇게 표현을 하였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시 133:2)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의 감사 찬양시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이 놀랍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을 헐몬 산들로 시작된 시냇물이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요단강물이 생수가 되고 더러움을 씻는 곳이며 양식을 얻는 곳입니다. 본문에서 이와 같은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할 것을 다윗이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줄 알고 또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줄 알고 또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행 22:29) 사도 바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하였고 로마 군대에 잡혔다. 그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나는 로마 시민권자라 하여 보호를 받게 된다. 더 나아가 영내 층대 위에 서서 유대인들에게 자기변명을 하게 된다. 변명의 내용은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여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심을 전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드러낸다.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살피려한다. 지금 바울이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이 왔을때에 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라지 말라”(눅 12:11) 바울이 위정자 앞에 끌려갔을 때에 성령께서 할 말을 입에 넣어 주셨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2) 그 말이 로마 시민권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난과 장벽이 가로 막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하셔야 하늘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이 땅에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미리 자폭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네 재물과 상품과 바꾼 물건과 네 사공과 선장과 네 배의 틈을 막는 자와 네 상인과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용사와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무리가 네가 패망하는 날에 다 바다 한가운데에 빠질 것임이여

  “네 재물과 상품과 바꾼 물건과 네 사공과 선장과 네 배의 틈을 막는 자와 네 상인과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용사와 네 가운데에 있는 모든 무리가 네가 패망하는 날에 다 바다 한가운데에 빠질 것임이여”(겔 27:27) 성경에서는 부자를 나쁜 사람이고 지옥에 갈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믿음은 물질이 자신의 삶의 가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부자의 교만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돈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함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영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본문에서는 심판의 날을 배경으로 부자 나라인 두로를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갖은 것 같지만 허황된 것을 붙잡았다 함을 말한다.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다 너를 비웃음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겔 27:3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자의 재물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오직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20)를 말씀하시면서 마음과 눈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우리 주님의 말씀은 돈이나 재물이 나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무엇을 바라보며, 무엇을 마음에 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부자들의 심판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고 있음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큰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겔 26;2) 에스겔 26장은 두로가 받을 심판에 대한 말씀이다. 두로는 무역을 하는 부요한 나라로서 재물과 향락을 즐기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패망한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전쟁에서 피해를 입게 되면 먹을 것이 없고 생필품이 부족하게 된다. 이 장면을 두로가 보면서 쾌재를 부르고 있다. 이제 예루살렘 사람들이 돈을 빌리러 물건을 사러 두로로 올 것을 생각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가난한 자를 압제하여 부를 챙기려는 악한 행위이다. 지구상에는 식량의 위기, 에너지 위기, 경제의 위기가 반복으로 나타난다. 경제의 위기가 오면 돈 많은 자들은 더 높은 이자로 이익을 챙기고 있다. 이러한 것을 율법에 정하기를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지 말라 하였다. 이웃의 소유를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이 도둑질하는 행위가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5)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경제 위기 오면 서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자가 비싼 사채를 써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돈 있는 자들은 더 배를 불리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상태로 계속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대로’를 외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심판의 본보기로 두로를 심판하십니다.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겔 25:17) 에스겔 25장에서는 암몬과 모압, 에돔, 블레셋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계시이다. 심판은 바벨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암몬의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하는 것에 대하여 아하 좋다고 하였다. 암몬의 신은 몰렉으로서 남아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받는다. 그것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모압의 신은 그모스인데 그것도 또한 인신제사를 드렸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자들을 죽이라 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레 20:2)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야곱의 후손들을 원수 삼았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갚아 심판을 하신다.   블레셋 사람들도 역시 옛날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며 멸시하여 진멸하고자 하였다. 그들에게도 역시 분노의 책벌로 갚아 주신다.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겔 25:1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나라와 주변의 나라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원수적인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야(이란) 왕국이 그리스와의 전투인 마라톤 전쟁(BC490)에서 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란은 올림픽 경기 가운데 마라톤에 참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직도 마음에는 전쟁 중이고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만이 인류를 평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겔 24:24) 여호와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심판의 날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심판을 하시되 철저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양 한 마리를 잡아 각을 뜨고 고기를 모으고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물을 부어 뼈가 무르도록 삶는다. 나무를 많이 쌓아 국물을 졸이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을 놓아 가마의 놋이 달궈서 그 속의 더러운 것을 녹게 하여 소멸시킨다. 이렇게 심판하실 것을 에스겔에게 전하라 하신다. 이 때에 여호와의 심정을 말씀하신다. 에스겔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의 모습으로 표현을 하셨다. 아내를 일은 남편은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지도 않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겔 24:17) 그러나 우둔하고 미련한 이스라엘 백성은 심판을 당한 후에야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장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겔 24:2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더러운 것을 진멸하는 심판입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말을 한 사람에게는 상급이 있고 불의한 말을 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시 132:15) 이제는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풍성함을 주셔야 한다. 즉 영육 간에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날마다 왕에게 일용한 양식을 구하여야 한다. 왕은 백성들을 돌보아야할 책임이 있다. 만일 그의 나라 백성이 굶거나 핍박을 당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다면 나쁜 왕이 된다. 왕은 백성들의 사정과 요구를 들은 후에 그에 합당한 조치를 내린다. 즉 왕에게 나가지 않는 자는 어떠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하는 자, 찾는 자, 두드리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지킬 때에 얻을 수 있는 복이기에 성령을 주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편의 기자가 간구한 풍성한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는데 아버지가 되셔서 아들에게 주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구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여야 하고 인도와 보호하심을 간구하여야 됩니다. 우리들이 부요한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구하면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시 132:11) 시편의 기자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윗에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와 여호와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제사를 드렸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시편의 기자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 왕위를 이어갈 것이며 영원하고 견고한 터 위에 세워질 것을 약속하셨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 즉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시 132:17)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고 백성들을 불러 모으신다. 그의 나라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백성들도 영원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는 이와 같은 다윗의 언약을 풍성히 누릴 수 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히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사 55: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다윗과 약속한 언약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다윗이 받은 복을 부러워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복을 모르는 자가 됩니다. 다윗이 누렸던 풍성한 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아와 값없이 젖과 포도주를 사 먹으면 됩니다. 교회에 나아와 약속의 말씀을 들으시고 순종하는 자에게와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행 21:27)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잡힌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헌금을 전해 주기 위함이고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 15:26) 또 하나는 로마에 가기 위함이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본문에서는 바울이 잡히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아무런 저항이 없이 쉽게 잡힌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그 계획은 로마 군대 천부장의 보호 하에 유대인들과 왕들에게 다섯 번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군대의 호송을 받으며 로마까지 갈 수 있다. “백부장 둘과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 과 기병 칠십 명 과 창병 이백 명 을 준비하라“(행 23:2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생각에는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히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붙잡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붙잡히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많은 사람 앞에서 자세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계획도 군사들의 보호 하에 가게 됨으로 인하여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백부장 둘과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 과 기병 칠십 명 과 창병 이백 명 을 준비하라“(행 23:23) 바울이 잡혀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2) 성경에 서신서를 보면 발신자가 누구이며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편지를 보내는 목적이 은혜와 평강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 1:2) 왜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는가? 그것은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은혜라 함은 죄인들의 죄값을 치루어 주셔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평강이라 함은 속량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됨을 말한다. 평강은 하나님 앞에서 점진적인 발전의 관계이다. 이제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부활을 향하여 있다는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정결한 신부로서의 믿음이다. 정결한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서신서의 내용은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약속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적인 교회라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잘 먹고, 함께 놀러 다니며 친교를 많이 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단들은 죽어라 교리 공부를 하는데 정통이라 하는 교단들은 먹고 놀러 다니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오히려 믿음에 대하여 더 당당합니다. 이러한 때에 깨어서 근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여야 됩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한다. 그런데 인사말이 인사를 받는 사람의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밥 먹고 사는 것이 힘들 때에는 ‘식사하셨습니까“하며, 밤새 연탄가스나 각종 사고가 많았을 때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이며, 영국은 비가 많아 오므로 ’Good Morning”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는 난리가 났다.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정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덤을 지켰던 군병들에게 돈을 주고 거짓말을 하게 하셨다. 이와 같은 상황에 있는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그분의 승리는 종교적 심판과 정치적 심판을 이기신 승리이다. 즉 유대종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내린 법정 판결과 로마의 정권인 빌라도의 법정에서 내린 판결이 거짓임이 드러났고, 거짓과 권력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음을 밝히 드러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먼저 지식으로 밝히 아셔야 합니다. 거짓음모와 술수를 이긴 승리입니다. 지식으로 깨달음을 알아야 믿음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 3:18) 그래야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영광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것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은혜와 평강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평강은 죄사함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환난을 다 이기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런데 그 능력을 구하여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와 같이 약속을 하셨는데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또한 열심히 구하는데 얻지 못함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와 간구로 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열립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2023년을 맞이하면서 ‘그리하면’의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구하면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여호와의 약속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점은 여호와께 의존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십 년이나 쫓아다니며 죽이려 했다. 왜 사울은 다윗을 죽여야 하는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을 죽여야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이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쫓아다니는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존적이었던 다윗은 모든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본문의 말씀에서 다윗은 자신의 생각으로 큰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였더니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였다. 그것을 ‘젖 땐 아이가 그의 어머니의 품에 있음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주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기도와 간구로 구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얻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는 것을 확인합니다. 다윗이 주는 교훈이 이렇습니다.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일을 이르려고 힘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일을 할 때에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기 보다는 먼저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 명의 제자가 변화산에서 천국을 보았다. 그래서 그곳에 이르면 큰 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왕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그러면 좌편과 우편의 권력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특별히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두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질문을 한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러하다.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의존적인 사람이 큰 자 이다는 것이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 문제는 더 나아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도 같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천국에서와 교회에서 큰 자는 겸손하고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6) 그리고 으뜸이 되기 위해서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땐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땐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시편 131편은 다윗의 시이다. 그는 지금 평온한 상태이다. 평온한 상태를 젖 땐 아이가 어머니 품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본 시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하는가? 그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의존적인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의존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다윗은 왕 위에 오르기 전에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이었다. 피난 중에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또 압살롬 반역으로 인하여 피난 길을 오를 때에 시므이의 비난과 저주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 일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었다.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 외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음은 포근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이 여호와께 의존하라는 권면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여호와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심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하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나무는 스스로 설 수 없어서 막대기를 세워서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의존적이어야 합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행 21:21)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다. 그들이 바울을 핍박하는 이유는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지 말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본질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나 자랑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인 육적인 표징이다. “너희는 표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영적인 연합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된다. 올바른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으며, 사랑과 감동을 느끼며, 행할 때에 기쁨을 느껴야 한다.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리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행하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짐으로 본질이 아닌 것은 간과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주장과 자랑은 모세의 율법이며 할례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할례를 행하여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