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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대한민국에 아파트가 850 만 채가 있다고 한다 . 그리고 전체 아파트 관리비 1년 예산이 무려 12 조원이라 한다 . 그런데 70~80% 가 부정비리에 관련이 있어 주민들과 관리 사무소 간에 분쟁 중에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 그러다보니 아파트에는 정의가 없다고 한다 .   고치지 않아도 될 것을 고치고 , 만일 고치게 되면 비싼 값을 주고 고친다는 것이다 . 그리고 뒷돈을 받은 상태라고 한다 . 그런 반면에 모든 사업 계획을 투명하게 하는 곳은 문제가 없다고 한다 .   교회 일도 마찬가지이다 . 목사가 재정을 마음대로 다루다가 보면 문제가 생긴다 . 부정에 의한 문제일 수도 있고 , 오해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 그래서 회계 장부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오픈한 교회도 있다 .   교회의 일은 투명해야 한다 . 우선 사업 계획이 모든 교인들이 알 수 있도록 광고를 하여야 하고 , 기도로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 그래야 시시비가 없다 . 그런 반면에 목사의 갑작스런 통보나 전횡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도 만만치 않다 .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찾고 계시다 .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자이다 . 그러니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공의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그래야 거룩함이 세워질 수 있다 .   교회 일을 하면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함이 여기에 있다 . 교회의 모든 일은 투명하면 된다 . 계획하는 일 ,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 교회 일을 하면서 밀실에서 만날 필요가 없다 . 은밀하게 회의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   담임목사는 주간 별로 , 월 별로 계획을 세워 주보를 통하여 알려야 한다 . 그리고 담임목사 동정 란을 만들어 모든 교인이 활동 상황을 알아야 한다 .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 예배에 참석을 못하게 되면 그 이유를 알려야 한다 . 그리고 여행을 갈 때는 행선지를 알려야 한다 . 이렇게 하는 것이 유혹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교회를 생명체에 비유를 하여 생명이 넘치거나 썩은 것으로 표현한다 . 교회가 썩었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마치 물을 가둔 호수와 같기 때문이다 . 빗물이나 샘물이 솟아오르지만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없다 . 많은 물을 가두어서 풍부할 것 같지만 오히려 썩는 현상이 나타난다 .   오늘날 교회가 이와 같은 모양으로 변했다 . 교인들의 헌금과 심지어는 기부금까지도 받고 있다 . 교회는 축복의 통로이다 . 물이 흐르듯 복이 흐르게 하여야 한다 . 그런데 받는 데는 익숙하지만 주는 데는 아주 인색하다 . 신자들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이 무조건 많이만 내면 대우를 받는 곳으로 변했다 .   성경 말씀에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된다고 하였다 . 그런데 교회가 이 기능을 잃어버렸다 . 교회에 쌓이는 물질로 자기 몸집 불리는데 힘을 쓰고 있다 . 그러다보니 교인들도 실망을 하고 세상도 비판을 한다 .   교회는 사랑을 전하고 퍼주는 곳이다 . 조건 없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 가난한 고아나 과부를 우선 돌보아야 한다 . 그런데 주기는 주는데 조건을 붙이고 따지기 시작하였다 .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을 돌보아야 한다 .   사랑을 준다는 명목 하에 투자를 하고 있다 . 교회 돈으로 장학금을 주고 있다 . 우선 일간지 지면에 대대적인 광고를 한다 . 장학금 신청 광고를 내는 비용도 만만치 않은 액수이다 . 공부 잘하는 학생을 선발하기 위하여 성적증명서를 보내라고 한다 . 좀 속보이는 짓을 하고 있다 .   또한 좋은 일을 하면서 생색을 내자는 것이다 . 교회 이름과 목사의 이름도 알리자는 욕심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자랑을 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 죄인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 그러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다면 교회의 개인을 위한 자랑이 될 수가 없다 .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자의 기쁨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목회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 그러다보니 다양한 인격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 만남이야 어떠하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믿음을 알도록 인도하는 일을 한다 . 목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 그 가운데에 목사를 어떻게 대우 또는 대접을 하는가에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몸가짐과 제자로서의 태도를 당당히 분부하셨다 . 그리고 제자들을 맞이하는 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셨다 . 그러니 신자들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살피고 따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목사를 위함이 아니라 신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세움을 받은 목사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상급이 결정지어 진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자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된다 .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을 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한다 .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자들이다 . 그러니 목사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권위 말씀이요 , 거룩하신 일에 동의하며 동참을 하는 믿음의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 그래야 선지자의 상이 임한다는 것이다 .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은 대로 행하는 자를 의인이라 한다 .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다 . 이런 신자에게는 의인의 상을 받게 된다고 하셨다 . 그리고 제자들에게 냉수를 대접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냉수를 대접한 것이 된다고 하셨다 .   그러니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판단하려 하지 말고 성경의 말씀으로 판단을 하여야 한다 . 목사를 어떤 믿음의 자세로 대하는가에 따라서 상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목사를 편리함에 따라 사용하려 하고 이용하려 하면 안 된다 . 즉 형식과 요식행위를 갖추기 위함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 목사를 대하는 태도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분량이 나타난다 . 목사는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변호하는 자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어느 철학자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 . 혼자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람이 태어 날 때나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태어날 수 있고 , 흙으로 돌아갈 때도 누군가가 흙으로 덮어 주어야 한다 .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이다 . 남자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천명 정로의 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경조사에 서로 도움을 줄 때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 오고 가는 것이 없으면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 그분은 그들의 주인이 되시기에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 그래서 부름을 받은 자들끼리는 형제라 하고 , 자매라고 한다 .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는 쉽게 자연스럽게 친밀한 교제를 이룰 수 있다 .   목회자는 부르는 곳을 향하여 가는 자들이다 . 이곳 감자골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오게 되었다 . 처음에 이곳에 부임하였을 때에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들만 열분 정도가 계셨다 . 청장년이나 어린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   한 주가 지난 주일에 아이들을 안고 손을 잡고 부부가 들어 왔다 . 이곳에 새로운 직장을 얻어 한국에서 온 가족이었다 . 목사가 혼자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알아서 척척해 주었다 . 그리고 주일학교 , 한글학교 , 방송실 , 교회웹사이트가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 한글학교는 이 지역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발전을 하였다 .   그런데 집사님이 오늘 예배를 드리고 LA 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 이미 한 달 전에 이주 소식을 접하였지만 많이 섭섭하였다 . 목사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고 동역자이었기 때문이다 . 또한 교회 봉사와 헌금도 분에 과하도록 하였다 . 참으로 목사에게는 잊지 못할 집사님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정치 , 경제적인 형통함이 아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영의 메시야를 기다렸다 . 그와 같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 . 검을 주러 왔다는 것은 불의를 정복하고 악을 제거하는 투쟁이다 .   검이라는 것은 길이가 짧은 것으로서 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치명적인 급소를 찌를 때에 사용되는 무기이다 . 예수님이 오셔서 세워질 나라에 대하여 세상이 거센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 십자가의 승리하셔서 죄악된 질서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말한다 .   그래서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라 한다 . 신자가 되었는데 영적인 전투가 없다면 곤란하다 . 즉 승리를 맛 볼 수 없다 . 어찌 전투를 하지 않고도 승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 신자의 기도의 내용은 전투가 없는 하루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의 내용이다 . 전투는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시고 나면 나는 그 뒤를 따라 가겠다는 것이다 .   주님께서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한다 . 그러니 신자들은 검을 쥔 자들이다 . 죄악된 질서를 제거하고 거룩한 나라의 거룩한 법을 세우는 일을 하여야 한다 . 세상이라 함은 어두움을 말한다 . 어두움 속에 있을 때에는 방향이 없는 삶을 살았다 . 방탕에 방임하여 욕심으로 인하여 우상을 섬기고 육체의 정욕을 위하여 살았던 것을 말한다 .   그러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옴으로 인하여 더 이상 어두움의 자식이 아니다 . 어두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 검을 사용하여야 한다 . 검은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무기이다 . 그런데 검을 손에 쥐고 있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오히려 적에게 농락을 당한다 .   신자들이 세상에서의 삶은 죄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 이 죄의 유혹을 검으로 잘라야 한다 . 죄의 유혹이 신자에게 가까이 오면 실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는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신자라면 핍박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 그런데 핍박이라는 상황을 너무 확대하려는 것 같다 . 생각 속에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이어야 하고 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다 . 그러나 핍박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 가운데도 있다 .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정치의 상황이나 국가의 제도가 아니다 . 오히려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친구들이다 . 대를 이어 믿던 종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여야 한다 .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십자가의 도를 따를 때에 핍박을 하였던 자들이 있었다 . 그들은 다름이 아닌 가족과 유대인들이었다 . 가족에게 쫓겨난다는 것은 호적에 있는 기록을 지우므로 인하여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리고 유대사회에서는 출교를 당하였다 . 즉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을 마비시키겠다는 의도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당하는 고통이 가족들의 반발이다 . 또한 남편과 아내와의 갈등이다 .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   성경말씀 속에 있는 답은 그래도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핍박을 선한 행실로 이기라 한다 . 말로 구원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 선한 행실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라는 것이다 . 선한 행실 속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순종과 두려움을 나타내어야 한다 .   신자는 착한 행실로 핍박을 주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 고난과 핍박의 현장에서도 기도와 찬송을 하여야 한다 .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 바울이 찬송과 기도를 드리자 옥문이 터졌다 . 이 상황에서 더 놀란 사람이 바울을 지키던 간수였다 . 그는 자결하려 하였다 . 오히려 바울이 그를 위로 하였다 . 창과 채찍을 쥐고 있던 자가 부끄러움을 느꼈다 .   간수는 놀랬고 당황하였을 것이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번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신자들을 만나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때가 있다 . 성경전체를 몇 번 읽은 자나 성경공부 또는 제자훈련과정을 이수한 자들이다 . 그 당당함은 누구를 만나도 똑같다 .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요즘 목사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 또 성경에 관한 문제나 믿음의 문제에 의견이 갈라지면 성경공부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읽게 되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올바른 교역자에게 바른 말씀 교육을 받았다면 그럴 수가 없다 . 성경말씀을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착한 행실로 나타내라는 것이다 .   이 말씀은 지적인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라함이다 . 신자의 착한 행실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리라는 것이다 . 도적질을 멈추는 것만이 아니라 , 더 나아가 손으로 수고하여 남을 도와주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 .   성경을 여러 번 읽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였으면 더 낮은 자리 , 더 깊은 곳으로 가서 섬기는 자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 교회 안에서 목사를 괴롭히고 골탕을 먹이는 자들 대부분이 성경지식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다 . 입만 열면 비판이다 . 그리고 목사를 가르치려 한다 . 그리고 만일 자기의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실력이 없는 목사로 몰아간다 .   그런데 이것도 옛날이야기이다 . 이제는 아예 성경을 읽지도 않는다 . 목사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해도 아멘이라 하는 시대가 되었다 . 성경말씀에도 흥미가 없다 . 그러니 기독교 교양 강좌나 윤리 도덕이야기로 강단을 채우고 있다 .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목사는 미련하고 센스가 없는 목사가 되었다 .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복스러운 소망으로 주님께서 영광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시대의 흐름이 진짜보다는 가짜가 판을 치는 시대이다 . 짝퉁이 진품보다 더 진짜처럼 보인다 .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소식을 전하는 복음에도 같은 현상이다 . 그런데 여기에도 가짜가 너무 많다가 보니 ‘ 순복음 ‘ 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한 것이다 .   이제는 참기름도 순참기름이라 하여야 참기름으로 인정을 받는다 . 그렇다면 이름만 좋으면 진짜냐는 것이다 . 이름은 참기름이지만 그 안에는 콩기름과 깻묵 찌꺼기로 채워져 있다 . 그러니 상품성이 있기 위하여 속은 가짜이지만 겉은 진짜처럼 꾸민 것이다 .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성직자 , 정치가 , 인권운동가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 보수주의 사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보수층의 표가 많으면 보수주의자인 것처럼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 나의 자존감이나 사고의 가치는 진보가 아닌데 젊은 층을 끌어 앉기 위해서는 진보주의자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   가짜가 판을 치다가 보면 피해와 손해는 소비자들이 고스난이 당한다 . 엉터리 목사들이 설치게 되면 신자들이 멍들게 된다 . 오죽하면 양복을 입은 무당이라 하겠는가 , 그 만큼 엉터리가 많다는 것이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하면 그 자체가 복음이 된다 .   많은 신자들이 목사가 복을 주는 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 목사는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복의 통로자이다 . 목사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도록 힘쓰고 애쓰는 자들이다 . 그런데 가짜들은 마치 자기가 복을 주는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다 .   그리고 하나님의 복에 대하여는 성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다 .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는 능력이 있다 . 그러니 심령이 가난한 자나 , 죄에 대하여 애통한 자 , 마음이 온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