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고집이 대단히 세어서 다루기 힘든 사람을 고집불통이라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기의 주장이 강해짐으로 인하여 고집불통이 되어 간다. 이 말은 나이가 들어감에 겸손하기 보다는 자기 고집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지식과 학문을 깨우치면서 자신만의 확고한 틀을 세운다. 불혹의 나이라 하는 40대는 자신만만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만의 고집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경계하여야 하고, 더 나이가 먹으면 남의 말은 한 쪽 귀로 듣고 한쪽으로 흘려버린다. 그리고 세상이 변하여 가고 달라지고 있는데도 자기만의 고집으로 사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교회 안에도 나이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고집불통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기가 배웠던 지식과 경험으로 주장을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과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다가 보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잘못되었다고 고집을 펴는 꼴이 된다.
 
성육신하신 성자하나님을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이라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의 죄항목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다. 그들의 잘못된 믿음과 전통이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자들이 너무 많다. 신학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모든 신학을 다 안다고 하며 목사들의 설교를 비판을 한다. 신자들은 겸손하여야 한다.
 
목사들의 설교를 도덕과 윤리, 일반상식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녀가 아이를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으로는 메시야가 어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냐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땅의 낮음과 하늘의 높음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겸손하여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고집불통이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의 생각과 과거의 전통을 늘 들먹인다. 그리고 과거를 자랑한다.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마치 말씀이 필요하지 않은 자처럼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애통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하나님의 깨닫지 못함에 대한 송구함과 죄에 대한 분노를 느껴야 한다.
 
온유한 자, 겸손한 자는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자이다. 즉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함이 무엇인자를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기업을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고집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살려는 뜻과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점점 자라가고 나이가 많아지게 되면, 고집은 사라져서 뼈 없는 연체동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아직도 고집이 세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면, 정녕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아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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