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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왕하 16:2) 남 유다 왕들을 평가할 때에 ‘다윗과 같지 아니하며’ 라고 한다, 왜 다윗은 하나님께 지혜와 복을 받은 왕이라 하는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고 그 다음은 선지자 나단의 충고를 듣고 회개의 자리로 나왔기 때문이다. 자기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진실로 뉘우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왕하 16:3), 자신의 아들을 불태워 드리는 이방의 신을 따랐던 것이다. 그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 왕을 의지하였고, 그 왕이 섬기는 신을 섬기기 위하여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아에게 보내었다.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아에게 보냈더니”(왕하 16:10) 그리고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옮기기도 하고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상번제사도 새로 쌓은 제단에서 드렸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제사는 오직 아하스가 주께 여쭐 일에만 사용하였다. 아하스 왕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앗수르 왕을 더 두려워한다.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왕하 16:18) 하나님은 이렇게 악한 왕과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앗수르 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며 표적을 구하라 하신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표적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표적을 주신다. 그래서 주신 표적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왕하 15:37)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남 유다는 유다지파에서 왕위를 이어가지만 북 이스라엘은 역성혁명(혈통이 바뀌어 이어가는 것)으로 왕위를 이어간다. 남 유다의 왕들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죄이고, 북 이스라엘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왕은 칼로 쳐 죽임을 당하여 죽는다. 반면에 남 유다의 왕들은 징계는 받지만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된다. 남 유다나 북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따르지 않았다. 남 유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왕상 8:20) 그런데 동네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산당을 지어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방 신도 섬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였다. 반면에 북 이스라엘은 아예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바꾸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였고, 아론의 후손이 아닌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장막절 절기를 한 달 뒤로 하여 지킨 죄이다. 이것을 시작한 사람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인 것이다. 그래서 죄악의 결과로 이스라엘 왕들은 칼에 죽임을 당하고, 남 유다는 주변이 있는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고통을 준다.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남 유다를 지켜 주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비로소 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왕하 15:37). 참으시다가 할 수 없어서 회초리를 드신 것이다.

또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또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우리 주변에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저들의 결과는 뼈를 흩으신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죽은 후에 시체를 개나 새가 와서 살을 뜯어먹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을 하는 자들을 악인이라 한다. 악인들이 하는 짓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9). 악한 것에 마음을 품고 행동으로 악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왜 악인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저들의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악행을 하게 되면 용서와 회개의 자리로 나아온다. 왜냐하면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 됨으로 인하여 죄를 짓고는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아직도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생을 얻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영생을 얻지 못한 자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일을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이 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을 생명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에 영생의 은혜가 충만하여 집니다. 악인을 구하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시 53:5)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면서 대적하는 자들에게 전하는 내용이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가? 하나님께서 저들의 상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어리석은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오늘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을 열심히 믿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이다. 하나님 구원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도성에서 메시야가 임하여야 한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6)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즉 죄사함을 받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죄사함의 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대언자로 세우셨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죄사함을 받는다. 그래야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이 믿음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는 온전한 구원의 자리에 임하지 못한다. 이단의 특징은 성경의 믿음을 부인한다. 쉽게 이르고 한 방에 성취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고 현혹을 한다. 그래서 거짓 이단들의 가르침이 속아서 이미 깊숙이 빠져 있다. 교회 안에도 이단의 사상에 물든 자들이 있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직도 악행을 행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살라고 내버려 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래서 죄를 거부하고 악행을 행하면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5-7)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그들에게 유월절 절기를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을 한다. 즉 구원에 대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시작됨을 자비의 못인 베데스다가 배경이 된다. 거기에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다. 하나님에 말씀에 불순종하여 삼십 팔년 동안 광야를 돌아다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서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비의 못에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데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감으로 고침을 받지 못한다는 병자의 고백이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든 자를 불쌍히 보시고 징벌을 멈추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며 물으신다. 병이 든다고 함은 죄의 대한 책임이며, 죄의 결과로 생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결어가나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 5:9) 병자를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다. 이제 안식일 날을 배경으로 유대인들에게 가르침을 주신다. 그들은 안식을 의롭게 지키기 위하여 의결법 39개의 항목을 정하여 지키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39개의 의결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에게 임한다. 그 은혜가 임하는 장면이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말씀은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징계를 거두시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후 재창조의 모습을 인식하여야 하며, 재창조 사역의 핵심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진 육체의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아느냐 하나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아느냐 하나”(왕하 14:10) 우리 속담에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하는 말이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 왕 아마샤가 그러하다.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 왕인 요아스에게 대면을 하자고 한다.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왕하 14:9) 이에 대하여 요아스 왕이 우화로 대답을 보낸다.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하였더니 지나가던 짐승들이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유다의 왕 아마샤에게 사람을 보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왕하 14:9) 유다 왕 아마샤가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였다고 이스라엘 왕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래서 대면을 하여 이스라엘에게 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마샤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기병을 빼앗겼다.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왕하 14:14) 유다 와 아마샤가 왜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패하였는가 하면, 산당들을 제거하지 않아서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신복들의 반역으로 죽음과 같이 그도 무리들의 반역에 의해서 죽는다.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라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니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라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니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왕하 13:19) 이스라엘 왕 요아스 때에 엘리사가 병이 든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에게 나아와 엘리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 한다. 그러자 엘리사는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소서 하는지라 활과 화살들을 그에게 가져오매”(왕하 13:15). 왕에게 지시를 한다. 선지자는 왕에게 동쪽 창문을 열고 화살을 쏘라 한다.   왕이 선지자의 말씀을 따라 쏘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살을 주어오라 한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화살로서 아람을 멸절하실 것이다. 이번에는 화살을 치라 한다. 왕은 세 번을 친다. 그리하였더니 선지자가 어찌하여 세 번만 치냐고 역정을 낸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라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왕하 13:19). 즉 일곱 번을 쳤으면 아람을 진멸하였을 것이라 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만큼 주신다는 것이다. 앞 장에서도 선지자 제자의 아내가 빚에 고통을 받을 때에도 선지자가 이르기를 이웃에게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 하였다. 빌려온 그릇에 다 채우자 기름이 멈추었었다.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왕하 4: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구하는 만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일곱을 쳤으면 아람을 완전하게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왜 세 번 밖에 치지 못하였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토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성전 파손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성전 파손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왕하 12:8) 유다와 요아스 왕은 일곱 살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의 자리에 올라서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바알 신당과 우상들을 철저히 부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산당은 제거하지 못하였다. 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비합리적인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이 된다. 요아스 왕위 이십삼 년 되는 해에 일어난 일이다. 왕이 제사장들에게 명령하기를 각 사람의 몸 값으로 드리는 은으로 성전을 보수하라 명령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십 세 이상 된 자들이 드리는 인두세가 있고, 제사장들이 각 자에 대한 사람의 평가에 대한 값과 첫 태생을 드림이 있고, 자발적으로 드리는 은이 있었다. 이러한 예물들은 성전 보수를 위하여 쓰도록 명령하였지만 제사장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썼다. 그래서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가져다가 성전에 둠으로 은을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성전 일을 하는 사람들을 불러 성전을 고치게 된다. “그 은을 일하는 자에게 주어 그것으로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왕하 12:14) 본문에서 교훈하고자 하는 말씀은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의지하였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의 정세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하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곳간에 있던 은을 다 바치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성전 보수를 하여야 하는데 그 일은 뒷전으로 하고 자신들의 것을 먼저 챙기려 하였던 제사장들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이 얻은 수치는 성전 보수를 맡지 못하고 일군들에게 넘겨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에 일군을 선출할 때에도 믿음을 보고 뽑습니다. 본문에 제사장들은 성전이 낡아 있는데도 자기의 것을 먼저 챙깁니다. 그들이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자 그 일을 빼앗아 미장이와 석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자세로 교회의 직분자가 되는 것은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한지라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한지라”(왕하 11:2) 르호보암 왕 때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남 유다는 다윗의 족보를 통하여 왕위를 계승하고 있고 북 이스라엘은 역성혁명으로 왕위를 이어가고 있다. 북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악한 왕으로는 아합을 꼽는다. 왜 그런가 하면 그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바알 신전을 짓고 본격적으로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이다. 악한 아합 왕이 남 유다의 여호사밧과 사돈을 맺는다. 즉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과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가 결혼을 한다. 이 사이에서 태어난 왕이 아하시야이다. 그런데 아하시야가 죽으면서 왕하 11장의 내용이 전개된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달랴는 그녀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죽자 손자들을 진멸한다. 왜 그런가 하면 다윗의 씨를 진멸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유다 땅에 계속해서 바알의 우상숭배 정책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딸인 여호세바가 왕자들 가운데 젖먹이 요아스를 감춘다. 그리고 칠년이 지난 후에 요아스가 칠 세에 왕위에 오른다. 요아스가 왕 위에 오를 때에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을 수직하게 하고”(왕하 11:18) 온 백성이 함께 바알의 신당을 헐어버린다.   그리고 아달랴는 무리들의 칼로 왕궁에서 죽임을 당한다.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더라”(왕하 11: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함으로 인하여 악인들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 설교를 통하여 에돔 사람이 도엑이 제사장 팔십오 명을 죽였지만 아비아달은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은 예닐곱가지이니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은 예닐곱가지이니”(잠 6:16)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을 함께 싫어하는 것이다. 잠언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잠 6:17)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18)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19) 첫째는 교만한 눈이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이다. 모든 사람을 자기 눈 아래로 깔보며 부시를 한다. 둘째는 거짓된 혀이다. 의도적으로 진리를 왜곡시키고 사람을 속여 파멸의 길로 가게 하는 것 셋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으로 악행을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넷째는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이다. 마음은 감정과 이성이 있는 곳으로 생각과 말로 나타낸다. 다섯째는 악으로 달려가는 발로서 악인들과 연합하는데 빠른 자들이다.   여섯째는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다. 물질의 유익을 위하여 거짓말하는 자를 위하여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형제 사이를 이간질 하여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게 한다. 이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물질의 부요함을 의지한다. 그래서 모든 일에 돈으로 해결을 하려하고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죄악도 서슴없이 행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신자라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거부를 하고 대적을 하여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어불성설(말이 이치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어떠한 명목으로도 정당하지 않습니다. 뇌물은 무조건 허용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물질로 지위나 권력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을 의지 않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세상이 모든 악함을 동원하여 다윗을 공격하지만 다윗의 집은 은혜가 임하고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임한다.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성막이 있는 놉에 이르게 된다. 쫓기는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었다. 이 광경을 사울의 목자장인 에돔인 도엑이 보았다. 도엑은 사울에게 알리므로 인하여 제사장을 죽이라 한다. 그러나 왕의 신하들은 제사장들을 죽이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에돔인 도엑은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삼상 22:19) 도엑은 포악한 자이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시 52:1). 아무리 포악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포악한 자들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물질의 풍부함을 의지한다. 그러서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을 하려 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7)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임하게 된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먹을 양식이 없었었고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하여 푸른 감람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푸른 감람나무란 척박한 땅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며 많은 과실을 맺는다. 다윗의 광야와 수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그에게 임하였던 것이다. 다윗은 이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요한복음 3장에서 영생을 얻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듭 나야 함을 확인하였다. 요 4장에서는 영생을 주시는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면서 수가라는 하는 동네에 이르러 우물가에서 여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아주 쉽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사마리아 땅은 요셉 지파인 에브라임의 땅이다. 하나님이 열두 지파에게 주신 곳이다. 이곳에 우물이 있다.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마시는 물은 하나님이 야곱을 통하여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영생의 샘물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함을 말씀하시려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신랑이 되시며 구원을 얻은 백성들 그의 신부가 된다. 예배의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 되심을 말씀하신다. 하늘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인데, 그 말씀대로 행하면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는 때가 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전도라 함은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영생의 은혜가 임하여서 들을 수 있다. 그 은혜가 임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이라 고백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여러 가지 비유와 주변의 조건들을 사용하셔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하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고,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다 하니라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다 하니라”(왕하 10:10) 왕하 10장에서는 아합의 아들 칠 명에 죽음을 당한다. 예후는 군사를 지위하며 전투를 행하는 방법이 뛰어난 사람이다. 아합의 아들을 죽이는데 이스르엘의 귀족들을 이용한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들은 예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의 왕 아하시아가 그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하는 자들이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의 머리를 베어 예후에게로 가져온다. 이것을 본 예후가 하는 말이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다 하니라”(왕하 10:10) 그리고 바알 선지자들을 불러서 저들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고 다 죽인다. “번제를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왕하 10:25) 바알의 목상을 불사르고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다.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왕하 10:27) 예후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아합의 집에 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호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단지 시간에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