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창 23: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창 23:16)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백이십칠 세를 살다가 죽었다. 그래서 장지를 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도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가 되어 진행이 된다. 그 약속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아브라함은 자기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헷 족속 사람 에브론에게 그 밭 값을 치루려 한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창 23:16) 이제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에브론에게 밭의 값을 치루었다. 그래서 막벨라 밭은 아브람의 소유가 되었다.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창 23:18) 그리고 사라는 장사함으로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이 되었다.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창 23:20)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은 값을 치루어야 소유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속량이라 한다. 즉 몸 값을 받고 종을 풀어 주어 의인이 됨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속량의 교리가 있다. 죄의 종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치루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속량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신의 소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나가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잡는 어부이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마 4: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기잡는 어부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이루시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오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분께서 앞서 가시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사람의 생각이나 고집으로 예수님을 따르면 안 된다.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이 땅에 참 많이 살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고라신과 가버나움 사람들이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고칠 수 없는 병자를 고친 것과 놀라운 이적을 보고도 자기 고집으로 맞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들을 행하여 헛수고 하지 말고 너희의 죄짐과 인생의 짐을 들고 주님에게로 나오라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왜 그럴까요, 아버지를 아는 자는 오직 아들뿐이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아버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를 서신서에서는 성도라 부른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성도들을 모으는 일의 사명을 받았다. 즉 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따랐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다. 약속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함을 말한다. 순종하였을 때의 복이 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권세가 무릎을 꿇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셨다. 고기를 잡던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와 그물을 던지고,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그물을 버려 주고 예수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랐다 함은 생각으로만 따른 것이 아니라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그분에게 맞추었다는 것이다. 즉 제자라는 것은 직업이 사도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을 한 것일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갈 때에 비유로 쓰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렘 16:16)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의 기도에도 바벨론의 악행을 이렇게 비유하였다.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다의 고기와 같이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합 1:14) 바벨론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기를 잡듯이 잡아가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합 1:15)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를 삼으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함은 포로로 잡혀갔던 종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이 영광스런 책임과 사명을 안다면 이전의 직업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셨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땅 끝에 죄와 마귀에게 포로된 자들을 낚으라는 사명을 주신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사도 바울은 목회 현장에서 울고 있는 디모데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말을 안 듣고 영적인 아버지 바울은 사형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데 함께 고난을 받자고 한다.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에게 고난이 기쁨이며 영광이라는 것이다. 왜 고난을 받으라 할까요? 복음 전하는 것이 고난이며, 고난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즉 복음 전하는 일이 세상의 일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삼위 하나님이 유기적인 사역을 하심으로 계획, 집행, 적용이 있다.   성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성자 하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집행을 하셨다. 그리고 성자께서 이루신 은혜의 공로를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적용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세상이 좋아하지 않기에 고난과 핍박이 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며 거룩한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고난 속에 영광이 있다는 약속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셨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즉 예수님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예수님의 사랑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한다. 시험의 내용은 그의 독자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결론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칼을 잡으려 할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불러 이르되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한다. 이 시험으로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이삭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7) 믿음이라 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믿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아브람을 통하여 무엇을 하려 하시는지를 약속하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고, 생명을 지켜 주시고, 약속하신 대로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주셨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고 있는 믿음은 약속하셨는데 자손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이다. 즉 약속하신 자식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시고 동물 사체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그 약속의 자손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만일 이삭이 죽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히 11:18)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잡으면 여호와께서 그를 살려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으로 믿었던 믿음이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을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지라 비유컨대 그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므로”(창 2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므로”(창 21:1)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져 마침내 약속의 자손인 이삭을 낳는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창 21:2) 이름을 이삭이라 하고 약속의 자손의 표징인 할례를 팔 일만에 행한다.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창 21:4) 약속의 자손이 태어난 것은 사라에게 기쁨인 동시에 듣는 자들이 다 함께 기뻐하는 일이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사라는 아들 이삭을 낳은 후에 몸종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 한다. 그 이유는 약속의 자식에게 기업을 얻기 때문이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창 21:10)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근심을 한다. 그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사라의 말을 듣으라 하며 이삭에게서 난 자들만이 네 씨라 부를 것임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아브라함에게서 물 한 가죽부대를 받은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한다. 가죽부대에 물을 떨어져 이스마엘이 죽게 됨을 안타깝게 여긴 하갈은 활 쏘기에 말맞은 거리에서 활을 당기려 한다. 그때에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 아이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실 것과 눈을 밝게 하여 샘물을 보게 한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 21:19) 그리고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을 만났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사

이에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이에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아브라함은 헤브론 산지에서 남방 땅인 네게브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런데 그 때에 그랄 왕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데려갔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 여인에게는 남편이 있음을 알린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 20:3)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이 선지자임을 알린다. “이에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왜 누이라고 하여 범죄하게 하였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없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 하셨음이요”(창 20:11) 그러면서 아비멜렉은 죄값을 치룬다. 사라에게 은 천개를 주어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이 일이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창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인하여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창 20:1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룰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죄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창 19: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창 19:13)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던 사건이 창 19장에서 나온다. 이것은 단순이 성적타락으로 인한 심판이라고 읽기에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있다. 앞 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지키게 하기 위하여 그와 그의 자손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통하여 보여 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한 백성들의 외침을 들으셨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창 19:13) 그리고 유황과 불을 내리신 것이다.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불의 심판이 작정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는 떠나라는 천사의 재촉을 외면한 채 갖고 있었던 재물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때에 천사가 그들의 손을 잡아 끌어내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창 19:16) 인도하심이란 손을 잡고 위기 가운데서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을 위한 기도를 하므로 그가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 19:2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여 순종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말씀으로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