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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신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다. 즉 소금 비유를 통하여 전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소금은 특성은 짠 맛을 낸다. 짠 맛을 내는 것은 유일하게 소금뿐이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임하는 것은 유일한 진리라는 것이다.  또한 소금은 흡착력과 전도력이 있어서 닿기만 하면 짠맛을 내게 한다. 그리고 억제 효과가 있다. 강한 단맛을 가지고 있더라도 적정한 맛을 내게 한다. 소금이 갖고 독특한 성질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짠 맛은 변치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그 맛을 내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지키며 영향력을 나타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어떠한 것들이 다가오더라도 포섭당하지 않고 끝까지 짠 맛을 유지함 같이 고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변치 말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또한 소금이 흡착력이 있고 전도성이 있음과 같이 신자들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음의 영향을 받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은 물과 공기와 함께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 그러하듯이 신자들은 세상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하여야 한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길에 버림을 당하여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님과 같이 신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알지못하며 행하지 못하면 세상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소금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의 특성을 통하여 신자의 특성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끝까지 변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금이 어느 것에게도지지 않음과 같이 신자들은 영적인 싸움에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위로하며 권면하기 위함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인들과 로마 황제의 핍박과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행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우월성과 안전함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지막 때의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유대인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숭배 사상을 갖고 있었다. 즉 천사가 하나님을 연결하여 주는 중보자라 믿었음을 말한다. 구약의 말씀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들이 천사들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한적이 있었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애 아들이라 오는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 천사들이 하는 일은 하늘 보좌에서 수종을 들며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에 경배하며 수종드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또 가기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 1:6)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셨다고 한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히브리서 1장에서는 천사숭배를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 구원의 우월함과 안전함을 전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천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수종을 들고 있는 영적인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출 4: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출 4:5) 출애굽기 4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장면이다. 즉 모세는 의심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자신이 이룰 것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애굽의 바로와 히브리 사람이다. 그들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모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주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 4:4) 그러나 모세는 자신은 말을 할 줄 모르니 보낼만한 자를 보내라고 한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대신하여 말할 자를 주겠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이적을 행할 것이라 하였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출 4:16)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며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도 모세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이려 한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출 4:24)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약속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일에 모세의 아들들이 할례없이 하려는데 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밭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출 4:25) 그의 아내가 할례를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 주셨다.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출 4:2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부름을 받은 모세에게 하늘의 권세를 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 같이 말하면 아론이 그 말을 바로에게 전하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 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 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모세가 광야에서 양 떼를 치고 있을 때에 떨기나무가 불에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가서 볼 때에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게 하시는데 믿음의 선조들과 함께 계시는 분임을 알게 한다. 즉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 그 백성을 인도하라 하신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바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전에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감춘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고 있는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고 다시 호렙산으로 돌아올 것이라 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 하나님임을 반드시 기억하라 말씀하셨다. 이 이름은 너희가 영원토록 부를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게 하라 한다.  그러나 바로는 완악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으로 패한 이후에야 너희를 보낼 것이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너희를 보내리라”(출 3:20)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 나올 때에 빈 손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0)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이고 어머니는 요게벳이며 레위지파 사람이다. 애굽 바로 왕의 감시가 심하여 모세를 석 달 동안은 숨겨 키웠으나 더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에 넣에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둔다. 그 때에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강 가를 거닐 때에 갈 대 상자에 담긴 아이가 우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아이의 젖을 먹이기 위하여 히브리 유모를 찾게 된다. 이 장면을 모세의 누이가 지켜봄으로 모세의 어머니인 요게벳이 모세에게 젖을 먹이게 되며 그 삯을 받았다. 아이가 자라서 바로의 딸이 데려가서 이름을 모세라 지어 주었다. 모세란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0) 모세는 물 속에서 건져 내음을 받아 산 자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널 때에 지도자로 모세를 쓰신다. 물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물에 있는 자들을 인도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도 적용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에서 부활하신 분이다. 그래서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란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데 중보자로 쓰셨던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 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세의 글인 오경에서 이미 예수 그리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출 1: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출 1:1)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백 년동안 바로 밑에서 종살이를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을 괴롭히리니”(창 15:13)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면 약속의 말씀처럼 큰 민족을 이루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니라”(창 15:5) 그래서 출애굽하는 과정을 야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권능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 당시 애굽을 당할 나라와 신이 없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내 백성을 보내라 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즉 애굽의 바로를 항복시키시는 분이 야훼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 9:17) 야훼 하나님이 왕이 되시며 율법을 가진 백성들로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진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알리는 거룩한 백성이며 제사장의 나라로 쓰임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그리고 택함을 받은 백성들과 교제를 하시기 위하여 성막을 지으라 한다. 성막은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야훼 하나님의 권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1)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한다. 그리고 복이 있다고 한다. 하늘에 큰 상이 준비 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베드로와 사도들은 박해를 받는 것을 기뻐하였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사탄과 마귀의 공격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이다. “그들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행 5:40) 같은 편끼리는 싸우지 않는다. 마귀와 마귀는 한 편이다. 세상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핍박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임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거짓과 유혹으로 다가온다. 온갖 것으로 모함을 하여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계명을 범하는 자로 만들어 실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여야 한다. 빛은 어둠과 함께 어울리거나 함께 거할 수 없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 안에는 마귀가 함께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마귀가 함께 모여 친교를 하며 먹고 마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자들이 당하는 핍박은 결국에는 신들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당연히 아버지의 말씀을 끝까지 지켜야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다른 여러나라 사람들은 결혼을 위하여 종교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니라”(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니라”(마   5: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고 자녀가 되었다.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자랑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고난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아니라는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의 명령과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데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이 때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의를 전가 받아야 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고 그의 아들이 되었으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믿음의 승리는 고난과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핍박과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을 말한다. 즉 반석위에 세운 집은 홍수가 나고 폭풍우가 풀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그와 같이 세상은 창수가 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라 한다. 고통과 박해를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몬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몬 :7) 빌레몬서는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 가운데 옥중서신에 해당된다. 빌레몬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아내인 압비아와 아들인 아킵보가 있다.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2) 빌레몬의 가족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일꾼이면서 그의 집을 교회로 사용할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의 집에 종으로 있던 오네시모가 금전적인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서 유익한 자가 되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몬 :11) 더 나아가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신복이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 내용은 오네시모를 나의 심복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빌레몬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을 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써 간구를 한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 :9) 즉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는 바울의 신복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몬 :14) 그리고 오네시모를 종으로 대우하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대우하라 한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라”(몬 :16)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피해를 입은 금전적 손해는 바울이 갚아 주겠다고 한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몬 :1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 은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5) 창세기 50장에서는 요셉이 야곱의 죽음에 애통해 하며 장사 지내는 과정과 막벨라 굴에 장사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 왔더라”(창 50:14)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두려워한다. 지난 날의 일을 생각하며 보복을 할까 하기 때문이다. 형들은 요셉에게 죄의 용서를 구한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 50:17) 이것에 대한 요셉은 반응은 놀랍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 당신들이 나를 미디안 상인을 통하여 애굽에 팔았지만 그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 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요셉에게도 야곱에게 있었던 믿음이 있었다.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기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5)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할 때에 그의 해골을 들고 나온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 49: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 49:28) 이제 야곱이 죽음이 임박하여 열두 아들들에게 모이라 한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창 49:1) 그 아들들에게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을 하였다. 이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통하여 형성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미치는 축복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들들을 행하여 축복기도를 하는데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기도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알고 있음을 말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 즉 야곱의 아들들을 향한 예언적 축복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를 좇아 행한 것임을 말한다. 유다지파에서 왕권이 나오되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 과정 속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명에 맞게 축복을 베푼 것이다. 야곱의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죽어서도 약속에 땅에 들어가려는 믿음과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막벨라 굴에 대하여 전한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는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창 49:29) 그곳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있으며, 이 굴은 헷 사람에게 산 것임을 알린다.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창 49:32) 야곱은 이 모든 말을 명령하였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창 48: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창 48:3) 요셉이 두 아들과 함께 병상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갔다. 야곱이 힘을 주어 앉아 이스라엘으로 축복기도를 한다.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창 48:2) 즉 약속의 하나님에게 전능하신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가 이방 땅에서 거류할 때에 큰 힘이 되어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사 복을 주시기를 요셉의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아들이 되어서 함께 유산을 받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들어 간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세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창 48:5)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장자의 축복권을 준다. 장자에게는 두 배의 유산을 주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장으로서 동생들을 감독하고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몫을 받게 되에 요셉의 이름 대신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몫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기도를 할 때에 이스라엘의 오른손이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얹어지고 왼손은 장남인 므낫세에게 얹어진다. 요셉이 손이 어긋났음을 이스라엘에게 말하지만 그대로 축복기도를 한다.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9) 이스라엘은 이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에게 당부하기를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므로 인도함을 따르라 한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창 48:2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야곱은 그가 경험하였던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 47:9) 야곱은 처자식들과 애굽으로 내려와 고센 땅에 거하게 된다. 그곳에서 가축들을 기르면서 바로의 가축까지 관리한다. 요셉은 자기의 아버지를 바로 앞에 서게 하였다.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을 하여 준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창 47:7) 이 축복은 단순이 문안 인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권이다. 즉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그러므로 야곱은 바로가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개인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축복이다. 야곱은 자신의 삶에 함께 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나그네 길이라 하였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약속 받았으나 그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오랫동안 방황하였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조들보다 적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연단이며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성화의 기간이었다. 즉 아버지의 고난 속에 자식들의 믿음이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셔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창 48:16) 야곱의 믿음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 경배를 하였고 죽어서도 조상의 묘실에 묻히기를 바랐다. “낵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창 47:3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야곱의 험한 인생길은 에서를 피하여 삼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1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1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성육신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은 사망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 사랑을 깨달으면 이웃에게 낮은 자로 찾아 나갈 수 있다. 초대교회 가운데 성질이 까다롭고 거짓에 쉽게 넘어가며 변덕이 심한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이다. 이들은 유목민으로서 십자가의 복음을 쉽게 버리고 이웃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그래서 저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만일 이웃 형제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온유한 심령으로 너희의 마음을 잡으라 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당할까 두려워하라”(갈 6:1) 무슨 말인가하면 형제를 정죄하기 전에 먼저 나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때에 내가 어디에 있었으며 어떠한 자이었는지 생각해 보라 한다.  즉 분쟁과 다툼을 일으키는 자가 되지 말고 화목케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나에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방법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방법은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에 범죄한 자가 있었고 고린도교회에 다투는 자들이 있었다. 저들을 바라보며 온유한 마음을 갖는 자가 화평케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함에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 즉 갈등을 해결하는 자(peace maker)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은 이러한 자들이게 노벨평화상을 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화목의 가치는 전혀 다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한다. 이제 성탄절이 다가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는 평화라 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하나님의 성육신 하심이 이 땅에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과 대적하는 자를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주신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5)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가 회평케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7) 하나님께서 주신 성육신의 은혜를 알아야 하고 그 은혜를 이웃에게 알리는 자가 화평케 하는 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아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간다. 즉 하나님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을 통하여 세상에 알리시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세상에 펼칩니다. 그 일을 하셔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 사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바울은 목회자 디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목회에 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먼저는 나라의 위정자들의 권력에 순복하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나라의 왕들을 주관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범사에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들 대하라 한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종이나 노예처럼 굴복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므로 인한 겸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심을 알게 되면 감사와 사랑과 용서를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디도도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받았다.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는 어리석은 자이었으며 불순종하였고 악독과 투기를 일삼고 가증스러운 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롭게 태어난 자로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즉 하나님의 의로움, 거룩함, 모든 선함이 담겨있는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라는 것이다.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에 하나님을 세상에 알림을 말한다. 여호와의 명령과 말씀에 대하여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거나 토론을 하지 말라 한다. 만일 이러한 일이 생기면 헛된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아니하는 자들 즉 이단들에게는 상대하지 말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러한 자들은 자기의 의견을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4)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계시를 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며 나타나신다. 이스라엘이라 부르심은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 그리고는 야곱아 야곱아 부르신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창 46:2) 야곱이라 부르심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4)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애굽 땅으로 내려가는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 그래서 그곳에서도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된다.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하여 식량 걱정이 없는 고센 땅에서 자손이 번성하게 하신다. 그리고 야곱의 후손의 이름들이 소개된다. 야곱과 아내들과 자식들과 손자들 그리고 요셉의 처와 두 아들을 포함하여 칠십 명이 된다. 사백 년이 지난 후에는 이십세 이상된 남자의 수가 약 육십 만명이나 된다. 이제 이방나라와 견주어 볼 때에 큰 민족이 되자 출애굽을 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주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

  “하 나님이 큰 구원 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주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당신들이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임을 말한다. 요셉은 형들을 만난 기쁨이 있지만 반면에 형들에게는 과거의 일로 인하여 두려움이 가득하다. 요셉은 형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셨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더 나아가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려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즉 믿음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주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7) 앞으로도 흉년이 오 년이나 남았으므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 땅으로 이주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를 주관하사 운송 수단을 사용하게 하시며 좋은 땅에 거하도록 허락한다.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창 45:18) 이스라엘(야곱)은 요셉이 보낸 선물과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되어 기뻐한다. 죽기 전에 요셉을 보리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네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창 45:28) 잃은 아들을 찾았을 때의 아버지의 기쁨이다. 즉 집 떠나 멀리 이방 나라로 갔던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이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4)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총리에 자리에 오른 것은 택한 민족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함인 것을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을 것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심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창 44: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심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창 44:32) 요셉이 사랑하는 아우 베냐민을 곁에 두기 위하여 은잔으로 형제들을 시험한다. 청지기에게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속에 몰래 넣으라 시킨다. 형제들이 떠난 후에 요셉은 다시 청지기에게 이르기를 요셉의 잔을 찾기 위하여 자루를 풀게 한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잔이 나왔다.  요셉은 이 잔을 가지고 간 사람은 내 종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한다.  그러자 유다가 나서서 간절한 호소를 한다. 자신이 베냐민 대신 죄짐을 지겠다고 한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 44:33) 만일 베냐민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고통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창 44:31) 그 아들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없어지고 남은 아들임으로 만일 그 아들 마저 잃으면 아버지의 기쁨과 소망이 사라지게 됨으로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한다. 유다는 아버지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속의 은혜이다. 은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와서 종이 되어야 하지만 유다가 스스로 종이 되어서 베냐민을 풀려 나게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이다. 죄로 인하여 사망과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유다는 아버지의 기쁨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아버지를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 43: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 43:9) 다시 식량이 떨어져 애굽으로 내려가야할 상황이 되었다. 애굽에 가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막내인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 야곱은 르우벤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둘째 시므온은 애굽 감옥에 갇혀 있고, 레위는 폭력을 휘두른 잘못이 있고, 유다가 이 일에 나선다. 유다는 동생 요셉이 형제들에게 잔인하게 살해 당하는 것을 막은 자이었다. “유다가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창 37:26) 베냐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 담보가 되겠다고 한다. 이것을 속량이라 하는 것이다. 즉 유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구속사 전면에 주도적인 인물이 되면서 출애굽과 왕정시대를 거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에 이른다. 유다가 아버지에게 설득하기를 여호와께서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 야곱은 유다의 말에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기로 한다. 아버지가 준비한 선물과 지난 번 곡식을 살 때 자루속에 있었던 돈도 함께 하여 요셉에게 갔다.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을 볼 수 있다. 형제들이 요셉의 청지기들에게 곡식 값이 자루속에 있었음을 이야기 하자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의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 한다. “그가 이르되 두려위 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창 43:23) 마침내 요셉은 베냐민과 형들을 만난다. 엄마 없이 자란 베냐민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며 형들보다 다섯 배나 되는 음식을 준다. 사랑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1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1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셨다. 즉 죄인들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면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것을 죄사함을 위한 기도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골방에서 행하는 은밀한 기도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기도하던 자들이 바리새인이다. 저들은 기도를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데서 하였다. 왜 그런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기도는 진실하게 하여야 한다. 마음 속에 깊은 죄까지 고아하여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마귀는 깊은 은밀한 죄를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때문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따라 실수할 수 있는 것이 통성기도이다. 자신의 방언이나 큰 소리의 외침이 사람에게 들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은밀한 죄를 큰 소리로 이웃이 들으라고 외치면서 기도를 할 수는 없다.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죄에서 구원을 받은 증거이다. 그런데 마귀는 뜨거운 기도와 냉냉한 기도로 주장을 한다. 뜨거운 기도란 자신의 혈기와 카타르시스(감정처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냉냉한 기도라는 단어는 없다. 기도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따라야 한다. 자신의 흥이나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여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구하여야 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통성기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마음이라 할 때에는 지적이고 지혜와 감성과 의지가 함께 하여 결정을 하는 곳으로 인격이라 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청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하여야 한다. 즉 부패된 마음을 고치기 전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미련한 마음과 상실한 마음으로 부패의 상태를 나타낸다. 미련한 마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구속하는 것을 싫어 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리고 상실한 마음은 정신적으로 부패되고 타락된 마음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였으니”(롬 1:28) 이러한 마음은 만물보다 더 부패한 마음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 17:9) 이러한 마음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 그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부패되고 상실한 마음을 고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할례라 한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상한 마음을 새롭게 고침을 받아 정직하고 신실된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자는 삶의 목표가 있다. 날마다 아버지와 교제를 하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달리말하면 아버지 앞에서 서지 않는 것이 죄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음이 미련하고 부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모든 선함을 듣으며 행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며 선하다. 그래서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주셨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어 영광을 받으시려 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것을 그레데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명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교리가 빛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 2:10) 그레데 사람들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거짓말하는 자들이며 이웃들에게 악한 짐승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교인이라 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꾸짖어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권면이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딛 2:13)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은혜에는 행위 언약이 함께 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라면 반드시 그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말씀을 따라 행하셔야 합니다. 만일 행함이 없으면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창 42: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창 42:13)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하므로 인하여 야곱의 집에도 식량이 떨어졌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야곱이 듣고 아들들에게 사오라 한다. 그리하여 열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한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때에 자신 꿈을 꾸었던 일이 생각이 난다.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 절을 하였던 장면이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 37:7) 요셉은 막내인 베냐민이 보고 싶어서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고 간다. 형들은 자신들은 정탐꾼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 아버지에게서 열두 아들이 나왔음을 말한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창 42:13) 삼일 동안 형들을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며 제안을 한다.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하는데 인질로 한 사람을 남기라 한다. 형제들이 서로 의논하여 시므온이 인질로 잡히기로 하고 자루에 곡식을 담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곡식 자루를 확인하여 보니 곡식 값을 치룬 돈이 그대로 있음을 보고 두려워한다. 집으로 돌아온 형들은 아버지 이삭에게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한다. 시므온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는 것은 자신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이라 한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창 42:3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버지가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애굽으로 보내는 아픔을 보았습니다. 여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창 41: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창 41:32)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세상의 왕들을 주관하심을 창세기 41장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왕이 두 번이나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흉하고 파리한 암소 일곱이 살진 암소 일곱을 먹었고, 충실한 이삭 일곱이 동풍에 마른 이삭 일곱에 삼키는 것이다. 이 꿈을 술 맡은 관원장의 소개로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서게 된다. 요셉은 이 꿈은 하나님께서 해석을 하는 것이니 편안히 들으시면 된다고 한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6) 또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뢰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창 41:25) 꿈 해석은 칠 년 동안 풍년이 오고 이후 칠 년 동안 흉년이 들게 된다.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풍년의 해 동안 나라의 감독관들을 두어 거둔 곡식의 1/5을 거두라 한다. 그러면 흉년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는 요셉을 명철한 자로 인정을 하고 총리의 자리에 앉힌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9) 그리고 요셉을 왕족으로 인정하여 제사장 가문의 딸 가운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다. 애굽의 왕들은 대개 왕비를 제사장 가문에서 택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은 지난 날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잊게 하셨다하여 첫째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고,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였다하여 에브라임이라 하였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은혜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고난의 길을 통하여 믿음과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다. 어

친위 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창 40:4)

 “친위 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창 40:4)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즉 그분의 열심과 의지로 시작을 하여 끝을 내신다. 그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로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는 약속하신 여호와께서는 일을 하고 계신다. 바로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범죄하여 친위 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에 갇힌다. 그곳에는 요셉이 있는 곳이다. 친위 대장은 두 관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요셉에게 수종들게 한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두 관원이 꿈을 꾼다. 술 맡은 관원의 꿈은 나무에 세 가지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는데 손에 바로의 잔이 있어서 즙을 짜서 왕에게 드리는 꿈이었다. 떡 굽는 자의 꿈은 관원의 머리 위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흰 떡 세 광주리가 있는데 새들이 와서 먹은 것이다. 요셉의 꿈은 해석은 삼일이 지나면 바로 왕의 생일인데 술 맡은 관원은 전직을 회복하고, 떡 굽는 자는 매달려 죽게 된다는 것이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전직이 회복이 되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나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 40:23)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이가 삼십 세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요셉의 나이는 아직 삼십 세가 아닌 이십 팔세 이었다. 그래서 이 년을 감옥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이 있고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게 되고 꿈 해석을 위하여 술 맡은 관원장의 소개로 요셉이 왕 앞에 서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것을 요셉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친히 일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택한 자 요셉을 감옥에 가두시고 지혜와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여러분!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갔더니 친위대장 보디발이 이스마엘 사람들의 손에서 그를 샀다. 이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음으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모난 성격을 종이 되게 하여 고치신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창 39:4)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확인시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것이 복을 받는다. 보디발은 요셉을 신임하여 그의 모든 소유를 다 맡기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요셉은 그녀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옷을 벗고 도망친다. 그러나 그녀는 거짓말로 요셉을 남편에게 말한다. 당신이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에게 동침하고자 하였다. 그러니 그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요셉은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창 39:20) 그곳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이 은혜를 받게 되었다. 간수장은 옥중 죄수와 그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기었다. 여호와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요셉을 통하여 이루시는데 그를 감옥에 긷히게 하신다. 요셉은 감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심을 알고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지 않았다. 그 억울함을 당하고 있지만 여호와께서 형통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은 조건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요셉이 종이었을 때에도 감옥의 죄수이었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1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은 자라면 그것을 행함으로 드러내야 한다. 먼저 신자가 받은 구원의 크기가 얼마한가를 알아야 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왕에게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와 이웃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던 종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이 무례한 종의 잘못은 무엇인가? 자신이 탕감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함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죄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들은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리로 나간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 복을 받는 방식이 이러하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이렇게 행하게 되면 주의 눈은 의인을 행하시고 의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행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긍휼을 베풀고 낮아지며 섬기는 자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여호와의 약속으로는 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불쌍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함을 기억하여야 된다. 왜 이러한 것들을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지를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성품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우리말 성경에서는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이여,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복이 임하였고 행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십자가의 사랑을 지식으로 알아야 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 3:18)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는데 있다.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아야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팔복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타나는 믿음의 덕목이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많이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에 이렇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무슨 말인가 하면 여호와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은혜를 베푸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복을 받기 위해서 여호와께서 먼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게는 이미 긍휼하심이 은혜가 임하였다. 그래서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고 여호와께 나가야 복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복을 받고 싶은 데로 이웃에게 먼저 행하시고 하나님께 나가셔야 합니다. 죄 용서를 받으러 나가실 때도 먼저 이웃을 용서하셔야 됩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을 방문하였다가 디도를 남겨두고 떠났다. 남겨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는데 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5) 초대교회 당시 장로들은 설교, 교훈, 치리, 훈련 등 교회의 성숙을 위해 여러 가지 필요한 봉사를 감당하였다. 그래서 장로의 자격을 제시하고 있다. 장로의 도덕적 인격이나 신앙생활에서 타인에게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하고, 결혼 생활이 성적 문란함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장로의 자녀들도 믿는 자들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타인을 무시하지 않는 자이어야 하고, 더러운 거래를 하지 말아야 하고, 여행 중인 자를 잘 대접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기준을 따라 행동하여야 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미쁜 말씀을 가르치고 가르친대로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교훈을 행하므로 인하여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뿐만 아니라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바로 책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그 당시 그레데 교인들 가운데는 복종하지 아니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전해 내려오는 속담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딛 1:12) 그래서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을 엄히 꾸짖으라 한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딛 1:13)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함이 없는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창세기 38장에서는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이 애굽 친위대장 보디발에 팔려간 사건에 대한 관심이 있는 가운데 있었다. 사건의 내용은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엘, 둘째는 오난, 세 째는 셀라이다. 엘이 다말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그를 죽이셨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창 38:7) 엘에게는 자식이 없으므로 둘째인 오난을 형수에게로 들어가 아들을 낳으라 한다. 이것을 계대법이라 한다. 즉 둘째의 씨로 아들을 낳았지만 형의 아들이 되에 대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오난은 형의 대를 잇는 것이 싫어서 다말의 관계에서 질외사정을 한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창 38:9) 이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오난도 죽이신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창 38:10) 이제 셋째가 남았는데 이 아들이 죽을까 하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다. 셀라가 아직어리므로 성장한 후에 다말에게도 들여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유다의 아내인 수아의 딸이 죽었다. 친구들의 위로를 받고 딤나에 깎는 자에게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이 길거리의 여자로 변신을 하여 유다와 동침을 한다. 동침을 하는 조건으로 양의 새끼를 주기로 하고 새끼를 받을 때까지 유다의 도장과 지팡이를 담보로 잡는다. 다말은 임신을 하게 되고 동네 사람들에게 행음을 한 여인이라 하여 유다가 돌에 쳐 죽이라 한다. 그때에 나에게 임신을 하게 한 사람이 담보물을 꺼내 놓으며 유다임을 밝힌다. 그러자 유다는 정직하게 시인을 한다. 그리고 다말은 쌍둥이를 낳고 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