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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창문 넘어 보이는 집에 검고 몸집이 아주 큰 개가 있다. 그런데 이 개가 아침마다 짖기 시작하면 두 시간 이상을 계속 짖어 된다. 오전 8시에 시작이 되면 10시가 지나야 멎는다. 나에게는 커다란 소음으로 다가와 고민을 하였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저렇게 계속 짖어 되면 나중에는 목이 상하여 짖지도 못할 것 같았고, 무슨 불만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내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기도이다. 매일 아침 새벽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지만, 열심과 간절함에 있어서는 부끄러움이 든다. 우리의 삶에서도 여러 가지의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심과 간절함을 드리고 있다. 이것은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취하여야 할 자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지존자로 계신다. 모든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에게 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교회에도 새벽예배에 많은 분이 참석은 아니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간절함으로 나오고 있다. 자녀의 구원의 문제로, 사랑하는 사위의 건강의 문제로, 늦게나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기쁨으로 나오시는 분, 건강을 위하여 먹었던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 또한 섭섭함으로 인하여 나오지 않는 분들의 기도 제목이 곧 나의 기도제목이다. 목회를 하다보면 기도의 제목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우둔한 머리로 이른 새벽에 일일이 기억하면서 기도제목을 열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는 이른 새벽에 기도를 드릴 때에 준비를 하여 나갔다고 한다. 일일이 기도의 제목을 기록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뢴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가 없는 자들이다. 구원의 은혜가 임하여야 사람의 구실도 할 수 있고,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코메디나 스포츠의 감동이주는 기쁨은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만일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배신하고 나를 이유 없이 또는 근거 없는 거짓말로 인신을 공격한다면 억울함과 분함이 극에 달한다. 성경 속에서 인물가운데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여 지은 시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시를 저주의 시라고 한다. 저주의 시를 살펴보면 그 내용을 과연 성경에 기록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그런데 그 시를 다윗이 썼다는 것이다. 다윗은 얼울함을 당하고 있지만 악인을 직접 찾아가서 분을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분함과 악인이 어떻게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내용을 간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거짓으로 증거를 한다면 당장에 그 사람을 찾아내고 물리적인 공격이나 말로 분함을 퍼 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보여준 올바른 신앙은 악인의 심판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호소하고 있다. 또한 악인을 향한 저주의 내용도 이미 신명기에서 불순종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의 약속을 근거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작정하시고 계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고 있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들을 성실히 실행하시고 계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의인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 향한 약속도 신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인들은 더욱 놀라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순종의 축복의 약속으로 알고 기억하고 있지만 불순종의 저주의 약속이 더 많은 분량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불순종의 내용으로 인하여 생긴 결과이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의 저주의 내용이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가는데 그대로 이루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약속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다윗이 저주의 시를 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저주의 약속이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다윗의 계속되는 시를 보면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더 더욱이 아내를 사랑하는데, 그 당연함이 더 깊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예식장에서 듣는 주례사의 내용 가운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을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을 하겠냐는 서약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남편들은 이 범위를 넘어서 더 깊은 사랑을 하라고 하신다. 이 세상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의 몸을 늘 청결하게 유지한다. 물론 육체의 몸의 청결함과 영혼의 청결함을 말한다. 남편이 자기 영혼의 청결함을 유지함 같이 아내의 영혼의 죄까지 씻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남편들은 육체의 정욕을 아무데서나 해결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영적인 문제에서도 정결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 남편들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 제사장은 자신의 죄문제도 책임을 지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집안 식구들의 신앙의 상태를 날마다 점검을 하여야 한다. 즉 영적인 죄가 가정에 침임을 하지 못하도록 파수꾼으로서의 존재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을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훨씬 더 많다. 건강한 교회와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남자들의 믿음이 더 강해져야 한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이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교회를 주심같이 남편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한다. 십자가의 사랑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아주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다.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고 계신다. 그리스도인의 남편은 아내의 사랑을 받음으로 인하여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헌신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을 하여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어제 밤부터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고 있다. 새벽 예배를 나가기 위하여 문을 나서니 쓰레기통이 뒤구르고 있고 뒤뜰 대문도 열려져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도 불고 있다. 나뭇가지들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데, 그 흔들림이 마치 바람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것 같은 모습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는데,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고 하늘에서 오신 선생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자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 나라를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을 여쭈어 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다 큰 사람이 어떻게 다시 엄마의 배속으로 들어 갈 수 있냐고 반문을 하고 있다. 다시 예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신다. 성령께서 일을 하시는데 바람처럼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나간 소리는 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고 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데, 전적으로 성령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간다는 중생의 교리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택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 은혜를 너희에게 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다. 이 말씀을 광야에서 불뱀에게 죽게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끝에 달린 놋뱀을 보고 구원을 얻은 것처럼, 인자가 나무 위에 달려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의 은혜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그 은혜가 임하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우리 교회에 일곱 살 된 ‘한나‘라는 여자 아이가 있다. '한나'가 매주 수요일 예배에 아빠의 손을 잡고 참석을 한다. 그리고는 설교시간에 중요한 내용을 메모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글로 적는다. 놀라운 것은 아주 핵심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제게 와서 확인을 받았었다. 그런데 어제는 확인과 함께 싸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나'의 아빠는 아주 믿음이 좋은 분이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을 한다. 엄격한 장로님의 가정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은 '한나' 아빠는 딸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 같다 성경에도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한나가 등장을 하는 것이다. 한나가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한 나라의 일군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인 것이다.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는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 사무엘을 낳았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왕정정치를 세우는 일을 하였다. 초대왕 사울을 기름 부어 세웠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은 사사이다. 하나님은 작정하신 일을 하시는데, 초월적인 방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칙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한나의 기도 사건이 등장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는데 한 여인의 기도로 시작이 되고, 그 여인을 하나님께서 시험하고 연단을 시켜서 믿음으로 키우겠다는 고백을 받으시고 아이를 주셨다. 이 사람도 써보고 급하면 저 사람도 써보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으로 인하여 아이가 자라고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다. 한나의 믿음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이해하였다. 그 시대에 많은 어린 아이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한나는 아들을 주시

돈을 사랑함이

우리의 후대들에게 하나님을 전하여야 하는데 이 문제가 만만하지 않다. 시편의 기자들은 자신이 체험한 신앙을 혼자만이 알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것이어서 세계만방에 알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거에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다들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지금 은혜를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양하고 있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현실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고 규칙이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말씀을 근거하여 해석하고 명령하신대로 따른다. 그러나 오늘의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도 않고, 아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고 있다. 만일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다툼이 시작이 되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말씀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결국에는 경찰을 부른다. 그리고는 경찰의 지시를 따라 행동을 한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가 사회에 보여 주는 모습이다. 이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법과 명령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충고하기 시작하였다. 너희들 똑바로 살라고 한다. 그리고는 교회는 세상을 행하여 할 말을 잃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누가 보고 있는가? 우리들의 자식들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본 것이다. 우리의 부모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보다 더 두려운 것이 경찰이라는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식들도 우리들에게 충고를 하고 있다. 왜 엄마 아빠는 싸우면서 교회를 다니야고 나무란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함은 전적으로 부모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몇 해 전에 경제대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부요함은 나 자신을 위함이다. 그저 나 하나만 즐겁고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돈이 많은 신자들은 돈을 어떻게 사용을 하여야 하는가? 신자들은 물질이 주는 부요함과 자유함으로 덕을 세워야 한다. 신자의 부요함이 가난한 자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신자의 믿음 없는 생각과 행동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다른 신자가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신자의 신앙의 기준은 사랑에 두고 있다. 즉 사랑으로 덕을 쌓아야 한다.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우선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위한 과대한 소비와 지출을 삼가야 한다. 고급 자동차가 있다고 해도 자랑하려고 일부러 교회에 몰고 와서는 아니 된다. 이와 같은 행동은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부요한 자가 가난한 자에 이웃임으로 인하여 가난한 자에게 고통이 더해질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웃이 아니라면 시험은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말을 할 적마다 증권이 어떠하고 한국의 땅이 얼마만큼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 역시도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행위이다. 진정한 부자는 돈을 쓰면서 덕을 세우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모임이 있을 때에 선한 목적과 뜻으로 밥값을 내는 것이다. 세상의 부자들은 돈은 많다고 자랑은 하는데 모임에서 밥값을 지불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다. 그러나 부요한 신자는 기쁜 마음으로 먼저 내려고 한다. 그와 같은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가 좋아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난해지셔서 우리를 부요한 자, 즉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세상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요즘에 하는 싸움이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내 것이 옳고 네 것이 틀리다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가 주장하는 것에 올바르게 인식을 하고 바르게 행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제는 극우, 극좌가 서로 사상이나 개념으로 대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확인하고 시험을 하고 있다. 즉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이비‘라는 것은 멀리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진짜가 아닌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가까이 가서 봐야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즉 가짜로 인하여 이용을 당하거나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이 어느 특정인을 향한 거침없는 뒷조사이다. 과거의 모든 기록과 전력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이다. 그들 말로는 검증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사실은 죽여서 매장을 시키는 행위이다. 속고 속이는 세상이다 보니 그럴 만도 한데, 어디 흠이나 티가 없는 자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행위는 모두를 죽이고 함께 죽자는 생각이다.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기독교인척하면서 조용히 들어와 다른 사상을 전하거나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이 있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침투하는 자들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교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도 이러한 자들은 더 경건하고 겸손한 척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일부러 하는 겸손을 주의하라고 골로새교회에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는 자를 다시 보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단들이 이와 같은 전략을 쓰기 때문이다. 이단들이 쓰는 전략이 기독교인들이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행함에 관한 것이다. 신자들이 실생활에서 믿음에 순종하는 행함이 없음을 알고 들어와 다른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려 한다.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을 보았던 베드로가 있다. 그는 주님이 오라 명하시면 물위를 걸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하며 나무라셨다. 그렇다면 믿음은 물위를 걷는 데만 쓰는 것인가?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있지만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있다. 기독교의 신앙의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므로 인하여 나타나는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세상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산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과 수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시듯 주시는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크기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꺼내기 위함이다. 즉 죄 속에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 이 길은 하늘 아버지가 원하시는 길이라 하였다. 또한 이 일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자신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고 선을 베풀며 유익을 전하는 자이다. 이와 같은 사랑을 잘 실행하는 자를 믿음이 좋은 자라고 한다. 모세나 바울의 믿음이나 신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로 모범적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민족이 우상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 행위를 하여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백성을 다 죽이고 모세를 통하여 다시 시작을 하시겠다고 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을 한다. 하나님께서 펴신 팔과 큰 손으로 건진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죽으면 이방나라에게 웃음거리가 되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참 기이한 일도 많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린 요셉에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가는 사건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미리 보내신 것이라 한다. 요셉은 감옥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는데, 순종할 때까지 받았다.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서 연단을 시키신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물론이고 혼이 쇠사슬에 묶일 정도로 괴로운 날을 보냈다. 그 과정이 훗 날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에 자리에 오를 때에 앞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칠 년의 풍년 뒤에 칠 년의 흉년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요셉에게는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요셉은 애굽의 왕인 바로에게 신임을 얻게 되고,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식구 66명이 애굽으로 들어와 정착을 하게 된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을 피하여 다닐 수밖에 없는 힘이 없는 민족이었다. 그러한 민족이 애굽 땅에 거하면서 짧은 시간에 강대국이 되는 것이다. 요셉의 식구를 포함하여 70명의 인구가 어떻게 400년 동안에 장정 60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 약소한 민족을 곡식이 풍성한 나라에 정착을 하면서 강대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시기하고 미워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애굽으로 보내신다. 이 일의 근거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즉 조상들과의 약속을 이루시는데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일반의 법칙을 넘는 초월의 법칙이다. 장정 60만 명을 만드시는데, 뚝 딱하시고 어른 60만 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로 태어나 어른이 된 60만 명인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나라의 힘이다. 그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가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사자가 있는 곳에는 다른 동물들은 살지 않는가하는 문제이다. 사자가 다른 동물들을 잡아서 포식을 하므로 멸종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가만히 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동물들을 먹이시고 새롭게 창조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각 동물들을 모양대로 만드시고 특성을 주셨다. 사자는 낮에 움직이어 먹이를 찾게 하시고 또 다른 동물들은 사람이나 사자가 집으로 굴속으로 들어가면 밤에 나와 움직이게 만드신 것이다. 아이다호 사막을 가보면 낮에는 평온하고 고요하다. 동물들의 모습이라곤 사람들이 키우는 소들뿐이다. 그러나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리면 상황이 달라진다. 각종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반짝이는 눈동자까지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쉬게끔 자연의 질서를 만드셨다. 또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동물들에게는 밤에 활동을 하게 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하신다. 이것뿐만 아니라 저 깊은 바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따라 고래도 살고 우리가 좋아하는 랍스터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그저 대충 명령하시고 뚝딱하고 지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를 하시되 각 종의 짐승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시고 창조하시므로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너무 많다고 찬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으로 지으신 것들이 땅 위에와 지면과 공중에 나는 것과 바다 속에 있는 것까지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지금도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관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들이 죽어 썩어서 먼지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다고 한다. 그러하므로 인하여 그 종류가 멸종되지 아니하고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좋은 믿음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맨토가 필요하다. 맨토는 믿음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증거하거나 지킬 수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은 직접 체험하였던 일들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은 처음에는 개인의 구원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이방의 세계와 나중에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내 영혼이 찬양을 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찬양을 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은 하나님의 찬양을 포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유한적인 삶을 사는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한적인 인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은 인간과 맺은 사랑의 언약 때문이라 한다. 다윗은 삶에 있어서 커다란 실수가 있었지만, 모세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실 때에 스스로 본인을 소개하셨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하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 그러나 긍휼과 자비가 많으시기 때문에 자주 경책하지 않으시고 또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고 하셨다. 또 노를 영원히 품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벌을 내리시지만 우리의 죄값보다는 적게 내리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놀랄 정도로 극진히 존경한다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긍휼을 입은 자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가 경험한 일들을 자세히 소개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나 질병으로 인하여 고생을 할 때에 고침을 받았고, 죄값으로 사망의 자리로 가야 하지만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고, 짧은 인생을 살지만 하나

아이다호 사막에서 어두움과 추위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시편을 읽다가 보면 저자가 어두움과 두려움에 떨면서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면서 저자의 마음은 구원을 확신하는 말씀과 도움을 주실 하나님을 찬양으로 이어진다. 나는 어제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을 아이다호 사막에서 경험을 하였다. 월요일 아침 일찍 다음 날 새벽예배의 말씀을 준비를 다하고 창밖을 보니 날씨가 마치 봄 날씨처럼 따스하고 하늘이 파란색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하였다. 둘 만가서 즐기기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속히 함께 갈 수 있는 분들께 전화를 드렸다. 그래서 한분의 권사님과 한분의 집사님이 동행을 하게 되었다. 아이다호 주의 수도인 보이지에서 북쪽으로 55번 프리웨이를 타고 올라가면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너무 많이 있다. 그래서 사막으로 되어있는 산을 넘어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햄버거 집에서 햄버거로 식사를 하고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마치 경치는 알프스나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위에 눈으로 덮여 있다. 가까이에는 사막의 풀들과 함께 검은 소, 흰 소들이 풀을 뜯고, 새들은 자유로이 들판을 날고 있다. 또 온천도 있고 약수물도 있는 곳이다. 갖고 있던 지도를 보니 북쪽으로 올라가서 오른 쪽으로 가면 다시 55번 프리웨이를 만나면 남쪽으로 내려오면 될 것 같아서 갖고 있었던 GPS를 사용하였다. 나는 GPS를 똑순이라 부르고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그동안 잘 안내해 주었기 때문이다. 비포장도로를 달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가 미국에 와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십 여분을 달리니 똑순이의 명령이 우회전을 하라는 것이다. 지시에 따라 산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달리니 눈길이 시작이 되었고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었다. 산을 넘어가면 될 것 같아서 약 4 마일 길을 조심을 하며 올라갔다, 눈길이지만 오른 쪽으로는 가파른 언덕길이라 조심을 하여야 했다. 그런데 눈길에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문뜩 생각이 나는 것이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무엇을 어떻게 믿는가에 관심이 가게 된다. 즉 어떠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으면 다원주의 종교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동조할 수 있게 된다. 다원주의 종교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이 각 종교마다 각기 다르다고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성경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문서화된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을 찾아 가기 위하여 이와 같은 계시와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근에 주신 내용이기 때문에 더 신뢰와 확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 믿는다는 것은 말씀 속에서 나타내시고 약속하는 것들을 잘 알아야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물질의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는 그 물질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도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누가 밥상을 차려주어야 식사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계시며 혼자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은 끝까지 지키신다. 즉 변함이나 변덕이 없으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약속을 실현시키시고 지금도 이루어가시고 있다. 또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다. 제한이 없으셔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그러시면서 택함을 받은 우리에게는 아주 가까이 계신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리고 아버지가 하시는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선택하여야 한다

요즘 한국의 정치판은 한 치 앞도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불안하다. 전쟁에서 쓰는 총만 없을 뿐이지 거짓말과 언어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다. 그런데 더 불안하게 하는 것이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나라의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동안 정치판에서 인기가 있었던 사람은 국민들에게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사람이었다. 언론이 통제되던 시절에 거침없이 정부를 향하여 직격탄을 날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독재의 정권이 물러나자 이런 사람들은 시들해졌다.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가 바뀌면서 각가지의 좋은 이름의 정부라고 상징을 내 걸었다. 그래도 별로 신통하게 달라지는 것이 없자. 이번에는 사람을 바꾸자고 하여 늙은이는 생각이 구시대의 것을 발상한다고 하여 젊은이들로 바꾸자고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그런데도 변화된 것이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분위기가 보복의 정치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동안 현정부로 부터 설움과 탄압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복을 확실하게하고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입을 가진 자가 본인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선택하여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것이 정치인들의 실력이다. 선거 때가 되면 지방색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소리 치다가 당선이 되면 지역색을 가진 사람끼리 어울린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일은 한다고 하면서, 많은 시간을 자기와 주변 인물들의 이권개입에 더 시간을 보낸다. 나라의 법을 결정하는 일에는 잘 빠지고, 설령 참석을 하더라도 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또 선거철만 되면 난리를 친다. 나라와 국민 걱정은 자기 혼자 다 했다고 한다. 자기가 아니면 나라가 곤란하게 된다고 한다. 정치판은 이렇다고 치더라도 선택을 하는 국민들은 누가 당선이 되도 상관이 없다. 그저 나에게 유익이 되는 돈봉투나 좋은 자리를 약속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선을 시키겠다는 의지를 불사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실력이다. 세상이 자랑하고 교묘하게 속이는 술수이다. 그런데 알면서

아이다호에는 온천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집사님 내외분과 우리 내외와 함께 온천을 가기로 한 날이다. 온천은 땅 속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 아이다호에서는 온천을 아주 쉽게 갈 수가 있다. 사막 여러 곳에서 샘처럼 뜨거운 물이 솟아 올라오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시냇가에서 목욕을 하듯이 온천을 즐길 수가 있다. 그래서 주인이 없는 노천탕도 있다. 내가 가본 온천은 일반 대중 수영장과 같다. 넓은 풀에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 놓은 곳이다. 물론 야외 시설이다. 그래서 수영복을 입고 풀 안으로 들어가는데 추운 겨울에 즐기는 재미가 더 있는 것 같다. 머리를 차가운 공기를 접하게 되고 몸은 뜨거운 물속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몇 시간을 즐겨도 지치지를 않는다. 수영을 하거나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여도 된다. 남전도회 회장 집사님이 저희 부부를 위로 차원에서 헌신을 하시는 것이기에 감사한 마음이다. 온천을 간다고 생각을 하니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이 생각이 났다. 그 교회 교인들의 믿음의 상태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하다고 하였다. 라오디게아 지방에서 나오는 물은 광물질이 많이 섞여 있는 물로 인하여 물에서 냄새가 났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차갑게 하여 마시거나 뜨겁게 끓여서 먹어야 했다. 만일 미지근한 물을 입 안에 삼키면 광물질로 인한 냄새가 역겨워서 다시 뱉어야 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상태가 교만함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 부요한 자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 자들이다.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근심이 없다고 해서 부요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부요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이 가난하지 않았고 죄에 대해서는 애통해 하지 않았다. 또한 의에 주리고 영혼의 갈증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권고하고 있다. 다시 말씀으로 연단을 받을 것을,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는 것을 힘써서 알라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온천을 가면서 뜨거운 믿음과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기쁨이 있는 일이다. 그래서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라고 하고, 핏줄의 인연은 아니지만 같은 직장을 다니거나 한 집에 살게 되면 한 솥 밥을 먹는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식사를 누구와 어디에서 하느냐에 따라서 먹는 기쁨은 배가 되고 분위기로 고급스러워지고 대화의 내용도 격조가 높게 된다. 또한 오래 동안 서먹서먹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과도 밥을 같이 먹게 되면 친근감이 생기고 식탁 위의 대화 가운데 푸근한 덕담이나 훈훈한 인심으로 인하여 닫혀있던 마음이 열리게 된다. 교회에서도 예배 후에 정성껏 준비하여온 음식으로 친교를 나눈다. 그런데 이 친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음식 자체의 질이나 양으로 인하여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는 다른데 있다. 친교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믿음과 신앙고백이 근거가 되어 친교가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날 친교의 음식을 가장 맛있고 기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예배를 드린 사람이다. 즉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다. 그런데 간혹 신자 가운데서도 예배보다는 친교에 더 신경을 쓰고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것이 구약의 제사법이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제사를 흠향하시면 제사장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 그러니 음식의 맛이 얼마나 좋았겠는가가 상상이 가는 것이다. 고민하였던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새롭게 되어 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기쁨인데, 그 위에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기쁨이 배나 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땅에 살면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교회에서 예배 후에 먹는 것이다. 밥이 설고 타서 단내가 나도 괜찮고, 국은 싱겁거나 짜도 그래도 맛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집에서 그와 같은 음식을 준다면 아마도

내가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이유

어제 저녁에 교회 청년들과 교제를 나누며 제 46회 슈퍼볼 결승전 경기인 뉴욕 자이언트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경기를 보았다. 그리고 매년 2월 첫째 주에 열리는 슈퍼볼을 빠지지 않고 보고 있다. 처음에는 미식축구의 룰을 몰라서 재미가 없었는데 계속해서 보다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룰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합리적인 게임을 운영방식이다. 게임을 보면 선수들이나 감독들이 심판들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것이 없다. 심판들이 판정을 할 때는 독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심판이 합의된 내용을 결정하여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장내 스피커를 통하여 알린다. 그리고 그 판결에 불복할 경우에는 팀의 감독들은 양말 안에 감추었던 빨간 flag를 운동장 안으로 던져서 의사  표시를 한다. 그러면 심판들은 다시 비디오 판독실로 가서 느린 화면으로 다시보고 판결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게임운영으로 인하여 선수들이나 감독들은 석연찮은 판정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오직 게임에 집중을 하게 한다. 또한 현대의 과학의 문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감독이나 선수들이 무선통신으로 서로 작전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팀 선수들의 구성을 보면 크고 덩치가 있는 선수로부터 아주 작고 몸무게가 가벼운 선수 모두가 있다는 것이다. 선수들은 자기가 맡은 일만 잘하면 된다. 쿼터백의 지시를 받고 달리고 공을 받는 것은 오랜 훈련과 약속에 의한 것들이다. 각 작전마다 선수들이 맡은 일들이 있다. 그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만 팀의 승리가 가능하다. 즉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팀워크를 강조하는 게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도 미식축구의 운영 방식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한다. 독재자의 횡포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사를 개진하고 그 의견이 틀렸을 경우에는 심판도 자존심과 위엄을 버리고 잘못을 인정하고 올바른 판결을 하고 모든 사람이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성전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오래 전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이다. 남자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의 수가 약 천 명 정도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났던 사람과 계속적인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경조사에 서로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아마도 조금은 다를 것이라 생각이 든다. 같은 반의 학생의 수가 전보다는 적고, 전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적인 만남이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이나 SNS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누구를 만나는가가 참 중요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좋은 가르침을 받게 되고, 좋은 부모를 만나면 사랑과 훌륭한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문제 전부를 해결 받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한다. 죄사함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감을 물론이고, 현재의 삶에서도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죄로 인하여 어두운 앞날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두운 앞날을 우리의 손으로 준비를 하여야 하는 수고가 있다. 그러나 이 수고로 열심히 준비를 하여도 결국은 허무함만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앞날을 준비하고 준비하였는데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기에 더 허무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 허무함을 달래기 위하여 술이라도 마셔야 한다. 술을 마시는 것은 괴로운 생각이 나지 않도록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선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된다. 죽어도 더 좋은 것으로 덧입어서 새로운 자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앞날을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면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가면 되는 것이다. 오늘도 거룩한 주일이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믿음을 확인하였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배우고 따르기로 다짐하고 온 것이다. 즉 내일의 삶을 주님의 손에 맡기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진노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세일 산을 38년 동안이나 돌고 다시 가데스 바네아로 왔다. 이제 하나님께서 광야 2세대들에게 명령을 하신다. 너희 부모의 세대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하신다. 불순종한 백성이 광야에서 죽는데 38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제 가나안을 향하여 올라가라 하신다. 그러시면서 에돔과 모압 족속과는 싸우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의 땅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가는 길에 마실 물이 필요하면 땅을 구하여 샘을 파라고 하셨다. 즉 침략자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땅을 들어가는데 예의를 지키라 하신다.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받은 백성들에게도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광야 1세대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에 발이 부르트거나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즉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가는 길에 다투지 말라 하신 것은, 네 것이 아닌 것을 힘으로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감사하며 살라는 교훈이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처음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때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을 받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다른 모든 나라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가나안을 들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처럼 온유함과 사랑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당한 일을 할 때에 겸손하여야 한다. 즉 목에 힘을 빼라는 것이다. 목에 힘이 들어가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없게 되는 것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요즘 TV에서 들려주는 세상의 이야기는 상식을 넘어서 괴변에 가까운 이야기들이다. 소위 가지고 있는 입으로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길목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금품을 빼앗던 건달들도 버젓이 회사를 운영하거나 영악한 지능으로 현시대에 적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민족의 지도자들은 나름대로 철학과 사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욕심을 내세운 정권챙취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즉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관리하는 공적인 자금이 있다. 이것을 저들은 주인 없는 돈이라고 한다. 또 정부 산하에 있는 기관의 장급 자리들이 수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이기심이 모인 집단들이 힘을 합쳐서 철밥통을 차지하려 날마다 싸우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개인이 희생이 되더라도 따르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다. 또한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때로는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스스로 나라를 걱정하고 미래를 생각한다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나라가 건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든 더러운 것들과 악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흘러 하수처리장으로 가듯이 가야한다. 이스라엘 나라는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패망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는 것인데,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이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이방의 우상을 섬겼고, 제사장과 지도자들은 돈을 받고 제사를 드려주고 불공정한 판결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서민들은 장사를 하면서 저울과 되박을 속이는 짓을 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이 백성을 미워하여 심판을 하시기로 하여 이방의 나라의 손을 빌렸다. 진노의 심판은 하시지만 진멸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하여 포로로 잡혀가게 하여 종살이를 하게 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은혜이며 감사한 일인지를 알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집트에서 축구 경기를 하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도대체 축구가 무엇이기에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축구는 단지 사람의 신체의 발을 주로 사용하며, 둔한 발로 정확함과 힘을 나타내는 경기가 아닌가? 이것이 사람의 전체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나라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무오한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을 엉뚱한 것에 건다. 높은 곳에서 끈 하나에 의지하여 떨어지는 일에 생명을 건다는 것은 생명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땅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면 사람에게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미한 죽음을 개죽음이라 한다. 생각 없이 이리저리 날뛰다가 죽는 죽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심히 아름답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한 모든 피조물들의 습성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그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에 사람이 가장 먼저 지은 죄가 살인이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죄인이므로 이제 죄를 다스리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가서 쳐 죽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벨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로 타락한 모든 인간에게는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자극을 받게 되면 결국에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축구경기를 하기 전에 신사적인 플레이를 하자고 선서도 하고 악수도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이 되면 야유와 욕설과 고의적인 폭행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죄로 타락한 인간들에게서 당연하게 나오는 성품이다.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는 조절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이 많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선택한 이유는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의 나라가 되기 위함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살 때에 풍성한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패망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제사장의 나라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신 교회가 이제 그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 가지의 징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례가, 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었을 때에 행하는 권징이 있다. 이것이 없다면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먼저 구원이 이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인간이 왜 타락을 하였는지, 구원은 왜 필요한지를 전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내용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삼위일체의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를 모른다면 아주 심각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교리의 부재가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설교는 많이 변질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전하려 하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성이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전하는데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면 목사는 그 때부터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기자가 타인에게 듣는 가장 치욕적인 언사가 시나리오를 쓰냐는 조롱이다. 사건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실의 내용, 그것을 확인하는 증인들의 이야기를 전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대로 보도를 한다면 더 큰 문제를 발생하게 된다. 결국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역사적인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먼저 성경 말씀 본문의 핵심적인 사상을 파악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