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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출 35:22)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출 35:22)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성막을 지으라 하셨다. 성막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산위에서 본대로 말씀하신대로 성막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성막을 짓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쓸 모든 것이 필요하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출 35:21)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되 마음이 감동된 자와 자원하는 자가 드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자가 드렸음을 말한다. 자원하는 자가 드맀다고 함은 자발적으로 아낌없이 드렸고 감사함으로 드렸다. 그들의 감사함은 애굽에서 종이었는데 하나님의 구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에 대한 감사이다. 성막을 짓는데 자원하며 기쁜 마음으로 드린 자들의 행위는 이러하다. 자기를 치장하기 보다는 성막을 단장하는 것을 더 귀히 여기므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드린 것이다. 그들이 드린 것들은 자기 몸을 아름답게 단장하기 위하여 걸치는 것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동된 자들은 자신보다 더 성막을 사랑하였다. 또한 집에서 귀하게 여기는 물품들도 가져왔다. 즉 자신의 집을 아름답게 치장하기보다는 성전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귀한 것들을 가져온 것이다.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출 35:25) 택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에도 자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하여 액수나 강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돌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출 3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돌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출 34:1)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을 준비하시고 십계명을 써 주셨다. 그런데 모세가 돌판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백성들이 우상 앞에서 춤추며 뛰어 노는 모습을 보고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졌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길 네가 돌판 둘을 준비하여 올라 오라 하신다. 돌 판을 깨뜨린 모세에게 다시 십계명을 친히 써 주신다. 여호와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십계명의 말씀을 다시 써 주시면서 약속의 말씀을 거듭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출 34장의 말씀은 앞 장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다시 이르신 것이다. 여호와는 질투하신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하며, 우상을 섬기지 말고, 삼대 절기를 반드시 지키라 하셨다. 이스라엘의 이십 세 이상 된 자들은 삼대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야 한다. 그러면 이방 나라들이 침략을 해 올 수 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땅을 지키실 것이라 하셨다. “내가 이방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출 34:24)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

모세가 항상 장막을 위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 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위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 33:7) 여호와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명하여 성막의 기구들을 만들라 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아직 성막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이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진 밖에 장막을 치고 회막이라 이름하였다. 그곳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한다. “사람이 자가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한 장면이다. 즉 모세가 중보자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금송아지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분노하셨다. 그래서 모세에게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백성들을 데리고 여기를 떠나라 하신다(출 33:1).  이 말씀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는 것이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한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그러면서 더 강하게 요구를 한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과 함께 가시지 않을 것이면 올려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5) 이러한 모세의 요구에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모세에게 약속을 하신다. 즉 약속의 하나님으로서 구원을 물에서 건진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의 모든 선함을 걸고 맹세하노니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 주셨는데 얼굴을 보여 주면 모세가 죽으므로 등을 보여

하나님의 지혜이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이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러므로 선하심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 전지전능하심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쉽게 땅끝까지 이르게 하실수 있다. 또 모든 사람들을 직접 구원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을 취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와 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임하게 하면 더 큰 혼란과 교만이 따르기 때문이다. 전도라는 방식에는 이러한 것이 숨겨있다. 복음은 누군가에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외부에서 들어온 말씀으로 인하여 구원이 임함을 알게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다음은 들은 말씀에 순종을 하여 따라야 한다. 순종이라 함은 자발적인 선택이다. 즉 자신의 지식이나 잘남을 버리고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수동적 믿음이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믿으며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는 다른 자랑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여야 한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전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전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현인들의 철학으로 십자가 구원의 비밀을 밝히거나 임하게 할 수 없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령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2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하나님의 구원을 이웃에게 이르게 하는 것을 전도라 한다. 전도에는 현장을 방문하여 복음을전하기도 하면 서신으로도 전화로도 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이르러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의 내용에는 죽은 자가 살아난 부활의 능력을 전한다. 그래서 백성들을 미혹하며 혼란을 초래하는 자로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감옥에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어 설교나 성경공부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서신을 통하여 각 교회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옥중서신이라 한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다. 이 서신서들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 옥중서신으로 전하여지는 말씀들은 바울의 담대함으로 기록이 되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20) 무슨 말씀인가하면 바울은 자신이 이제 로마 정권에 의하여 처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차피 죽을 몸인데 무엇이 두렵냐는 것이다. 그래서 무기와 폭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로마정권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찬양하며, 모든 나라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라 하였다. 그의 나라와 능력이 택한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날 것임을 밝혔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는 복음은 어느 것들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쓰여진 서신서가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외치시면 사망을 이기신 권능과 모든 고난을 이기신 능력이 함께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로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로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복음이란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하려 하시는가? 복음을 좋은 소식이라 한다. 좋은 소식이란 하나님의 의를 죄인들에게 은혜로 거져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은 사람들만이 거룩한 백성이 되어 인격적으로 살 수 있다. 거룩한 백성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의 본성으로 살게 되면 시기와 질투와 살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다. 개인과 개인들간에 싸움이나 집단과 집단들간에 싸움이나 나라와 나라들간에 싸움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살아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방땅에 목숨을 걸고 전도하였던 것이다. 개인의 종말이나 세상의 종말이 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로 나뉘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으라 전도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자신의 저주를 받더라도 그들이 구원을 받아야 함을 외쳤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출 32: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출 32:2)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난 후에 우상에게 절하여 예배를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는 심히 분노하신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 그들이 우상 숭배의 자리로 나가게 된 것은 모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두 돌판을 받기 위하여 산 위로 올라간지 사십 일에 가까이 왔다. 그들의 믿음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 자신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신 신이라 믿으면서도 모세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닌 유한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이다. 나는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이라 믿으면서 기도하는 문제가 오랫동안 해결이 안 되면 엉뚱한 짓을 한다. 엉뚱한 짓이라 함은 하나님의 성막을 위하여 가지고 나온 금을 우상을 만든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출 32:2) 이스라엘 백성이나 의심이 많은 신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여호와를 믿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더 이상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것을 우상에게 바치는 어리석음이다. 또한 여기서 경계하여야 할 것이 있다. 우상숭배는 사람들이 가장 귀하여 여기는 것을 빼앗아 우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여자들과 자녀들이 귀하게 여기며 소중히 간직한 것이 금으로된 귀고리이며 금 고리이다.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었는데 그 방식은 오늘날에도 똑같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단에 빠진 성도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 재산과 가족과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출 31:3)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막의 기구를 만드는데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셨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출 31:2) 훌은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에 산위에서 모세의 팔을 들어 올린 자이다. 그의 손자가 브살렐이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불렀다함은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브살렐을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였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일꾼들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던 성령이다. 하나님의 영이 일하심에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데 몸 밖에서이다. 그래서 사울 왕 같은 경우에는 임하였다가 떠나셨다. 그러나 신약의 오순절 강림일 날에 임하신 성령은 택함을 받은 자들의 몸 안에서 임재하신다. 그리고는 떠나지 아니하신다. 성령이 택함을 받은 자들 안에 거하심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채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들은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가 넘친다. 지혜라 함은 발명과 창조의 능력이 되고, 총명은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며, 지식은 경험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능력이며, 재주는 이상의 능력을 실제로 발휘할 수 있는 종합적인 기술을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그런데 만일 말씀에 불순종하면 이방인이 머리가 되고 이스라엘은 꼬리가 될 것을 경고하셨다. “그는 네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그에게 꾸어주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신 28:4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 말씀안에 그분의 지혜와 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깨닫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출 30: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출 30: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구조사를 할 때에 이십 세 이상된 남자의 수를 세어야 한다. 그런데 이십 세 이상된 사람들은 생명의 속전으로 반 세겔을 내어야 한다. 생명의 속전으로 드린다고 함은 이전에는 애굽에서 종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인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다. 그런데 만일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으면 즉 감사하지 않으면 진노를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생명의 속전을 드릴 때에 성소 세겔로 반 세겔이다. 그 당시에는 세겔의 단위가 세 종류가 있었다. 일반 세겔은 은 11.4g이고, 왕실 게겔은 일반 세겔의 두 배였고, 성전 세겔은 9.7이다.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한 것이다. 그리고 바친 세겔은 성막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생명의 속전을 드릴 때에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반 세겔을 내라 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내려지며 또한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하게 그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이 생명의 속전으로 성막이 세워진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신다 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출 30:1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의 속전을 바쳐서 성막 봉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생명의 속전을 바쳤다고 함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음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