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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위선과 정죄 ’ 는 다르다 . 위선은 겉으로만 착한 척하는 것이고 , 정죄는 타인의 죄를 단정하고 나무라는 행위이다 .   신자들은 정죄하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 행할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위선에 대해서는 죄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성경의 가르침은 말과 행실이 같아야 하고 ,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 즉 , 안이 선하면 행실로 선한 것이 나오고 안이 부패되었으면 악한 것이 행실로 나타난다고 한다 .   솔직한 사람이란 겉과 속이 같음을 의미한다 . 겉을 보면 속이 보이고 , 말을 들으면 행실이 기대되는 사람이다 .   많은 사람들은 웃으면서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지만 마음에는 칼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 그래서 어떻게 보면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 있다 .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겉만 착한 사람들이 있다 . 속안에는 타인을 정죄하고 시기 , 질투 , 미움이 가득하지만 겉모양은 천사인 사람들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함은 그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다 . 신자 안에 성령이 임재하셔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 .   그런데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함은 우리가 행할 때에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주의 계명을 범하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신다 . 그러므로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를 하여야 한다 .   위선은 겉과 속이 다름을 말한다 .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으면서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을 위선이라 하는 것이다 .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마 15:8)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람의 느낌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유혹이다 . ‘ Temptation’ 이다 . 이것은 사탄이 조종하는 무기이다 .   유혹을 통하여 육체의 자랑 , 안목의 자랑 , 이생의 자랑을 충동질한다 . 이러한 감정은 다른 이에 대한 대적의 관계일 때에 나타난다 .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분노와 시기로 나타나고 , 내가 우월하면 교만으로 나타난다 . 결국에는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의 마음을 품게 한다 .   유혹이라는 단어가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으로는 긍정적인 생각이다 .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결국에는 나의 인생과 삶을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 그러니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이러한 것들을 물리칠 수 있게 하신다 . 즉 ,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함은 죄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함이 된다 .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육체의 자랑 , 안목의 자랑 , 이생의 자랑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말이다 .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요일 2:16)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

사람들은 돈을 좋아한다 . 그리고 돈을 많이 갖고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한다 . 과연 그럴까 ?   그 말이 사실이라면 돈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 아니다 오히려 화를 부르는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무기가 되며 , 게임이기도 한다 .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끼 양식을 먹을 수 있는 귀한 것이기도 한다 .   그렇다면 우리가 돈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어떤 느낌이나 감정 때문인 것이다 .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 큰 병에 걸려도 안전하다는 생각 , 놀러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놀러가고 싶고 , 남에게 빌리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   그런데 이러한 느낌이나 감정을 돈으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평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   주님이 권능을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의식주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   돈은 열심히 모으고 있는데 몸은 더 지치고 피곤하다 . 그러다가 몸 관리를 못하면 결국에는 병원비로 다 날리고 만다 .   사람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욕구가 있고 ,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고 ,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고 , 자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한다 .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셨다 . 그리고 그분은 아브람을 따라다니시면서 지켜주신다 . 그런데 나에게는 임재하셔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창 12: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사들이 정말 조심하여야 할 것이 있다 . 그것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 지나친 충성과 헌신을 강조하다가 보면 오히려 득보다 손실이 많다 .   몸이 다 망가질 정도로 일을 하여 교회에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한다 .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가 ? 그것은 삯군 목사가 자기의 배를 채우려하는 거짓말이다 .   못된 목사들 때문에 마치 하나님은 돈을 아주 좋아하시는 분으로 만들고 만다 . 돈만 좋아하시는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키는 짓을 목사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 . 그러시면서 낮에 일하고 밤에는 쉬라고 낮과 밤을 주셨다 .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이나 짐승들까지도 쉬게 하셨다 .   하나님의 축복은 창조의 질서와 약속의 범위 안에서다 . 그 범위를 벗어나면 오히려 허물에 해당이 된다 .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신다 .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하면 안타까워하시며 불쌍히 여기신다 .   목사들은 주님의 양들을 이와 같은 마음으로 봐라보아야 한다 . 좋은 생명의 꼴을 먹이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잘 자라게 하여야 한다 .   무례한 각종 헌금을 작정케 하여 노동의 그늘에서 허덕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 신자들의 영과 육이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시 23:2)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모르는 자이다 . 즉 ,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   탕자는 이방나라에서 방탕한 생활을 동경하였다 .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이방나라에 가서 마음껏 즐겼다 .   그러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도 마음껏 먹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다 . 아버지 집의 종들도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탕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였다함을 전하려는데 메시지의 초점이 있다 .   우리들의 삶이 그렇다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 이것이 어리석은 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슬퍼하시는 것인가로 확인을 하여야 한다 .   우리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의 마음이 이러하다 . 자식이 몸을 망쳐가며 돈벌이를 한다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이러한 마음을 갖고 계신다 .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적당히 하여야 한다 .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효도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믿음이다 .   “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눅 15:17)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신자들 가운데에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 . 외부인과 접촉을 하지 않고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 죄를 짓지 않았다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죄는 이것이다 . 그의 백성들은 왕이신 하나님과 말씀으로 언약을 맺었다 . 그러므로 그 약속의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이다 .   신자들에게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하면 5 분이면 다 끝난다 . 본인의 죄나 가족과 친지들을 위한 기도를 해도 5 분을 넘길 수 없다 .   신자는 각각 받은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 . 그 분량을 채워야 한다 . 만일 부족한 상태가 되면 죄가 되는 것이다 . 즉 , 예배와 찬송과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   장로 , 권사 , 안수집사가 되었으면 그 믿음의 분량을 채워 맡은바 책임을 다 하여야 한다 . 그런데 부족한 상태로 있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 교회의 장로와 권사로 있으면서 언약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 또한 약속의 말씀을 배우려 하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 그저 입을 벌려 구하는 것은 돈만 달라고 한다 .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 언약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그 말씀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거나 , 그 말씀의 분량까지 채우지 못한 것을 죄라 하는 것이다 . 즉 , 부족한 상태를 죄라 하는 것이다 .   “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롬 12: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스갯 이야기가 있다 . 어느 권사님이 집안에 문제가 생겨 점쟁이를 찾아 갔다고 한다 .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 안에는 모시는 신이 내가 모시는 신보다 더 크시기 때문에 점괴를 봐 줄 수 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 그래서 그 권사님은 다음 날부터 새벽예배에 열심히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하였다 . 성전에 나아와 제물을 드리며 제사는 열심히 드렸지만 막상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이방신 앞에 나아가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 주일날 헌금을 드리며 예배는 드리지만 정작 어려운 문제를 맞이하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돈의 힘을 의지하고 친지나 친구에게 먼저 상의를 한다 .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분노하신다 . 택한 백성들과 피의 제사를 통하여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 환난 날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 설상 잘못하였더라도 회개의 자리로 나오면 용서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   회개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 말씀대로 지키며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는 내가 중심이 되어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한다 .   왜 그러는가 하면 ,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 오늘의 신자들 가운데도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여호와 하나님 , 약속의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믿음이다 .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삼으시며 약속하셨다 . 아들까지 주셨는데 그 어떠한 것인들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 .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시 50:15)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 과대망상 ’ 이란 , 현재의 상태를 크게 과장해서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십계명은 모든 인류가 지켜야할 도덕법이다 . 그 가운데에 거짓증거하지 말고 비방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 .   이것을 아예 대 놓고 무시하는 곳이 신자들의 모임이다 . 달리 말하면 과대망상 환자들이 모인 곳 같다 . 무엇이든지 부풀려 말을 해야 통한다 .   설교의 말씀에도 성경에 기록된 진실된 말씀으로 전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 좀 뻥을 치고 부풀려야 좋아하니 거짓을 섞을 수밖에 없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갈하셨다 . “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 막 8:15) 고 말씀하셨다 .   즉 , 바리새인의 뻥과 헤롯의 뻥을 조심하고 하나님 말씀에 섞지 말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미 고린도교회에서는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   사도바울이 떠난 후에 거짓교사들이 들어왔다 .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의 뻥을 섞어 설교를 하였다 . 그래서 교인들이 거짓교사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 바울을 거짓교사라고 공격을 한 것이다 .   그런데 오늘 날에도 다를 바가 없다 . 성경 말씀에 무엇인가를 섞어야 좋아한다 . 그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이단이 된다 . 그러니 적당히 타협을 하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는 목사들이 있다 .   설교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하여야함을 명심하여야 한다 .   “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 고후 4:2)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악에게 지지 않는다함은 악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영적전쟁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지만 완전한 승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결정이 난다 .   악이 신자들을 결단코 이길 수는 없다 . 악이 신자에게 다가오는 방법은 유혹과 의심이다 . 그러므로 악에게 지지 않는다는 것은 유혹과 의심이 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   악이 신자의 마음에 들어오면 악한 생각 , 살인 , 간음 , 음란과 도둑질 ,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 이것은 십계명의 정신과 정반대된 것이다 .   악한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된다 .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살인 , 간음 , 음란과 도둑질 , 거짓 증언과 비방으로 나타난다 .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죽여도 되고 , 여인들은 성적욕구를 채우는 존재로 , 유익을 위해서라면 도둑질 , 거짓증언과 비방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이러한 자들의 언행은 이러하다 . 내 입 가지고 내가 말하고 싶은대로 말하고 ,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왜 참견을 하냐고 한다 . 악에 지배를 받고 있는 자의 특징이다 .   유혹과 의심을 경계하여야 한다 . 유혹은 아름다움과 멋진 품위 속에 숨겨졌음을 알아야 한다 . 즉 , 겉과 속이 다르다 . 이것을 예의라고 한다 . 그러나 신자들은 겉과 속이 같다 .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 마음이 결정대로 행동을 한다 .   “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마 15:1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 라고 고백을 하였다 .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 사망이 목자인 자 ‘ 들이 있다는 것이다 .   시 49 편의 내용이다 . 저들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 하는 자들이다 . 그래서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한다 . 그리고 자기 이름으로 소유된 것을 좋아한다 .   저들은 지혜있는 자도 죽고 , 어리석은 자도 죽고 , 무지한 자도 죽는 것을 보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   “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 시 49:12) 사람은 귀한 존재이지만 오래 장구하지 못하며 짐승과 같이 죽는다 .   죽음 이후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 천국과 지옥이다 . 또한 생명과 사망이라 한다 .   시편의 저자가 뭇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본심이다 . 사망의 길로 가는 자들에게 외치고 있다 .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이고 , 저들이 소유하였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게 된다 . 즉 , 재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   우리 주님께서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마 16:26)   지혜있는 자는 영생을 얻는 속량의 값을 예수 그리스도가 지불하셨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 그렇다면 영생을 얻은 자는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한 것을 얻은 자이다 .   영생의 가치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물질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 .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에는 성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왕을 다스릴 때는 헤르몬 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으로 찬양을 한다 .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신다고 한다 . 내 안에 주인이 되셨음을 말한다 . 주인이 되셨다함은 나는 하인이 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 이것은 임재에 대한 논리적인 표현이다 .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제 , 교통이라는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우리들의 믿음의 상태는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 것은 확실히 맞다 . 그러나 그분과 교제나 교통이 없다는 것이다 .   교재를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 .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함은 이미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가르침을 듣는다함을 말하는 것이다 . 만일 직접 계시를 받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신사도운동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자의적인 생각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 즉 , 구약의 율법을 다시 말씀하신 것이 된다 .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은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임재는 분명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 왕과 백성으로 , 주인과 하인으로 수직적 상하복종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 . 그리고 경외와 순종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배는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억하며 드리는 예배에 이와 같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 . 혹시 예배에 우리가 주인이 아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   “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 시 48:1)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육체를 고달프게 하면 정신이 안정이 된다고 한다 . 이것을 이단 종교들은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   안찰기도라는 것이 한동안 유행을 했었다 . 기도하면서 손으로 기도받는 자를 두드린다 . 두드리는 강도가 장난이 아니다 . 그렇게 되면 몸의 질병이 주는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된다 . 몸의 질병이 주는 고통을 느끼지 못함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떠들었던 것이다 .   구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위하여 고행을 한다 . 말 그대로 육체의 힘이 다 빠지게 되면 정신이 고요해진다 . 그러면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 하나님께서 우리와 연합을 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게 하셨다 . 즉 , 사람으로 오시게 한 것이다 .   기독교의 연합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연합을 하신 것이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인 것이다 . 그분의 생각과 마음에 연합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된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은 찬 455 장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 후렴부분이다 . ‘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 를 소망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야 한다 . 이 역사하심은 성령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 그러면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 있게 된다 .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능력과 교리를 따르는 것이다 .   “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