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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시 36:10) 오늘은 교회 설립 감사 주일이다. 교회를 설명할 때에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하나님의 집이라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며 머리가 되며,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고 한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운행하심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교회에는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래서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제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데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야 한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그러므로 예배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는 말씀을 따라야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약속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함으로 인하여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이제껏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만일 보게 되면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 그 영광이 신자들에게 말씀으로 임한다. 어떻게 임하는가 하면 예배를 드릴 때에 말씀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함은 그분의 성품이 내게 임함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많이 안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함을 말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히 7:1) 히브리서 7장에서는 멜기세덱을 설명하면서 영원한 대제사장의 우월함을 증거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연합한 왕들을 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드린다. 멜기세덱의 이름을 번역하면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이다. 이사야서에서 장차 나실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사 9:6). 즉 자신의 의를 통하여 공의가 넘치는 나라를 다스리실 것과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신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탄생이나 외적인 족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명령을 받은 것과 닮았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함을 말한다.   십일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십일조는 제사장만 받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은 레위가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아론과 후손들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레위 후손의 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함을 증거한다. 그 증거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이다. 즉 레위 지파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멜기세덱에 있었음을 말한다. 또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줌으로 더 우월함을 증거하고 있다. 계속해서 멜기세덱의 우월함을 전한다. 이번에는 죽어야 하는 아론의 후손이 복을 빌어주는 것과 영원한 멜기세덱에 복을 빌어주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아론의 후손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사장의 직분과 율법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백성을 온전케 할 수 없다면 멜기세덱을 통한 제사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삼상 28:18) 삼상 28장에서는 아기스 왕이 다윗에게 사울과의 전쟁에 함께 나갈 것을 권한다. 그러자 다윗은 흔쾌히 승낙을 한다. 만일 전쟁에 함께 하면은 다윗을 아기스의 머리를 맡은 자로 삼겠다고 약속을 한다. 이제 전쟁이 시작이 되어 블레셋 군대는 수넴에 진 치고 이스라엘 군대는 길보아에 진 쳤다. 그런데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마음이 떨리고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제사장을 통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힘썼지만 그분의 응답은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난 방법이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변장을 하고 부당을 찾아 갔는데 사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 당시 무당들은 사울을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 이수라엘 땅에 있던 무당들을 다 쫓아내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무당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사 사무엘이 사울에게 나타난다. 사울은 급박한 상황을 말하면서 도움을 청한다. 사무엘의 대답이다.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삼상 28:18) 불순종하는 사울에게 오히려 진노의 심판이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말렉을 진멸하는 일에 힘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사탄이라 한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16). 이 사탄과의 싸움을 이스라엘에게 맡기시고 또한 우리들에게도 맡기신 것이다.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하나님의 것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군사로 싸우는 것이다. 우리들의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악한 영의 세력과 싸움을 하여야 한다. 무슨 말인가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삼상 27:1) 다윗은 이스라엘 땅에서 숨을 곳이 없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울에게 알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다지파 사람들마저도 밀고를 하였다. 그래서 사울에 손에 죽느니 차라리 블레셋 땅으로 피신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을 반가이 맞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울과 다윗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알았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오면 사울과의 싸움에서 유리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아기스 왕에 내준 그일라 지역에서 일 년 사 개월 동안을 머무른다. 그 동안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사 사울과 그의 아들이 죽는다. 그런 후에 다윗은 다시 유대지역으로 돌아온다. 다윗의 왕국은 하나님이 세우신다. 삼상 27장에서 31장까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다윗의 왕국이 세워지게 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하여 사울을 죽이려 애를 쓰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나라가 세워지는데 다윗은 무엇을 하였는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과 싸움을 하였는데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16)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영적인 전투를 한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마귀들과 싸움을 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한 마귀들과 싸워서 거짓과 악함을 물리쳐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들의 믿음생활에는 여러 가지의 것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일이 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들과 싸움도 하여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거짓으로 만드는 간교함이 있어서 깨어있지 않으면 꾀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10)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왔다. 사울과 함께 하는 군사 삼천 명은 늘 피곤하였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면 전쟁을 치루어야 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윗을 추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피곤에 지친 사울 일행은 광야에 널브러져 잠을 자고 있다. 사울은 진영 가운데서 창은 머리 곁에 두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다윗과 헷 사람 아히멜렉과 아비새가 다가간다. 그때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꽃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삼상 26:8). 이번에는 아비새가 사울을 창으로 단 번에 찔러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삼상 26:9), 누구든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윗은 모든 심판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자신도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며 살아야 하고 아비새도 말씀에 순종하여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다윗은 이번에도 여호와께 판단과 심판을 하실 것을 믿고 있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10). 다윗에 말한 대로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삼상 31:6). 사울은 다윗에게 죽지 않았다. 다윗에 부하에게도 죽은 것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21) 하였다. 결국에는 블레셋 군인의 활에 부상을 당하고 칼 위에 몸을 엎드리어 스스로 자결을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려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려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5:26) 다윗의 삶 가운데서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를 번하였던 사건이다. 갈멜에 나발이라는 자가 살고 있는데 심히 부한 자로서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를 천 마리 갖고 있다. 그가 양털을 깎는다 하여 다윗이 그의 소년들을 보내어서 먹을 것을 얻으려 하였다. 유목민에게는 양털 깎는 날이 농민들이 추수하는 날과 같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잔치 분위기가 되어 이웃에게도 음식을 나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소년들에게 심한 모욕을 주며 빈손으로 돌려보낸다. 그러자 다윗은 함께 하는 자들 가운데 사백 명을 이끌고 나발의 집으로 가서 남자들을 모두 죽일 것을 명령한다. 그때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히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에게로 나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본문의 말씀이다. 다윗이 치명적인 범죄를 범하려 했던 것은 자신의 손으로 심판을 하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아비가일을 보내어서 범죄를 막았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비가일은 알았던 것이다. 왕이 되셔야 하는데 친히 심판을 하여 백성들을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25:33) 하며 아비가일을 칭찬한다. 이후에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고 나발은 온 몸이 굳어 십일 후에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는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범죄하지 못하도록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어떠한 것으로 도와주실까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택함을 받은 자들의 범죄를 막으려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죄에 대하여 경계를 갖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 종교의식을 치루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다르다. 종교의식은 예식에 참여함으로 신의 신성함이 임하였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죽음과 부활이다.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들의 원죄가 사함을 받아서 산 자가 되었다. 부활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 수 있음을 말한다. 즉 부활의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거룩한 자가 되고 선한 자가 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분은 어떻게 선한 분이 되신 것일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제는 잘못되게 가르쳐도 안 되고 잘못 배워도 안 된다. 예배만 드리면 거룩하여진다는 것은 그릇된 믿음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만날 수 있다. 왜 교회 안에 질서가 없는가? 예배만 드리면 거룩해 진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거룩한 자를 자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것이다. 거룩하다고 하는데 거룩한 행위는 없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거룩한 것이고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거룩하여지고 선함을 나타날 때는 오직 말씀에 순종할 때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것은 헛된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네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하나님의 명령과 뜻하심을 따라 봉사와 구제를 하여야 됩니다. 만일 몸이 부서져라 봉사를 하고 거액에 돈을 구제헌금으로 드려도 하나님의 계명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35:24)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피난길에 있다. 그와 일행이 엔게디 동굴 안에 숨어 있을 때에 마침 사울이 용변을 보러 굴 안으로 들어왔다. 다윗은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이 무방비 상태이어서 칼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그와 함께 하는 일행들이 하는 말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윗에게 넘긴 날이다 하며 사울을 죽일 것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겉옷만 벤다. 다윗이 이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목적하심이 있기에 사울을 쓰신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심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하는 육백 명은 사울에게 원한이 있다. 사울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고, 과다한 세금 징수로 인하여 빚진 자가 되었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다윗과 함께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악한 왕인 사울을 물러나게 하고 다윗의 정권을 세워 공의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기만 하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또한 그들의 묵은 감정과 아픔을 해결 받을 수 있다. 이제 다윗은 더 깊은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사울로부터는 생명을 지켜야 하고, 함께 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픈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 되셔서 판단을 하여 달라는 것이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을 하시며 나의 송사를 맡아 달라는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6)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이 된다. 지금 히브리서의 저자는 서신의 수신자들이 듣는 일에 익숙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못함을 깨닫게 한다.   믿음생활을 오래 하였다면 다른 이들에게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믿음의 초보의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초보란 기초적인 교리를 말한다. 아직도 기초적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우유병에 젖을 먹는 어린아이로, 단단한 음식을 즐기는 어른이라 표현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정상적인 언어구사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함이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비유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직을 하늘 지성소에서 담당하고 계심을 알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영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서 영적 수준이 높음을 말한다. 믿음에 초보에 해당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둘째는, 세례에 관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죄씻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구분이다. 그리고 안수는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데 있다. 세 번째는,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교리이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함을 말하는데 현세에서도 복을 받는가 아니면 마지막 때가 이르러야 복을 받는가에 대한 영적분별력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완전한 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제 배도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다.   “한 번 빛을 받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서 세상의 빛이 되었으며,   “하늘의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내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내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러 엔게디 광야로 왔다. 동굴 안에서 용변을 해결하고 있을 때에 다윗의 부하들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라 하며 원수를 갚으라 한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겉옷을 베었다.   다윗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원수에 대한 보복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알았고,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죽이지 않았음을 증거로 남기게 한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에게 소리쳐 이르기를 내 손에는 악이나 죄과가 없음을 알린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삼상 24:16). 이 말은 들은 사울은 울음을 터트린다. 사울은 감정이 북받쳐서 우는 것이지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 추적하는 일은 계속된다. 죄악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치 언덕을 내려오는 제동장치가 고장 난 기차와 같다. 결국에는 사망에 자리에 이르러 파괴가 되어야 끝이 나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탐심이 이끄는 욕망은 끝장을 봐야 한다. 그것은 육체의 욕정을 생기면 해소하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죄의 시작은 탐심으로 시작이 되며, 탐심은 우상숭배의 죄이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분을 내지 않고 음욕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 함은 미움의 법칙이 사랑의 법칙으로 바뀌었고, 음욕을 마음에 품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사울이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삼상 23:26) 삼상 23장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나는 시기와 장소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알게 한다. 다윗이 생포될 위기에 처한 순간이 본장에서 두 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여 주신다. 또한 다윗은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를 한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 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지방의 그일라를 침입하여 추수물을 탈취하는 소식을 듣게 된다. 여호와께 물으니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신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반대를 하자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께 물어서 확신을 얻는다. 그일라를 구원하여 주었더니 어떤 자가 사울에게 다윗이 이곳에 있음을 알린다. 다윗 일행은 성 안에 갇힌 자들이 된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또 묻는다.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 일행을 사울에 손에 넘기고 사울이 내려올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급하게 갈 곳을 정하지 않고 흩어진다.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삼상 23:13) 다윗 일행은 마온 광야 황무지에 도착을 한다. 이 소식을 사울이 듣고 내려온다. 산을 두고 사울과 다윗의 일행이 긴장 상태에 있다.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삼상 23:26)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에 하나님께서 시기와 장소를 주관하사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신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추적하는 일을 멈추고 돌아가게 된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