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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II

잡곡밥에 된장국과 반찬 세 가지로 차려진 밥상의 가격이 천원이라고 한다 . 아무리 계산을 하여 남는 장사가 아니라 밑지는 장사이다 . 여기에 점포 월세와 전기 , 수도 세금까지 지불을 하면 ,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 그래도 주인은 고집스럽게 2 년 동안이나 장사를 하였다 .   배고프고 식사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 그런데 천원을 받는 이유가 있었다 . 먹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먹으라는 뜻이다 . 무료 급식소를 가면 당당함을 주장하지 못하지만 , 밥값 천원을 내면 기를 펴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천원의 식당이 운영될 수 있는 데는 , 보이지 않는 후원자들이 있었다 . 작은 것들이지만 정성껏 도와주는 자들이다 . 그들을 찾아가 사실을 확인하지만 그들은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 자기들은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   그동안 천원의 식당을 운영하시던 분이 건강이 안 좋아서 일 년 동안이나 문을 닫았었다 . 그런데 식당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 전 주인의 뜻을 따라 밥상을 차릴 것이라 한다 . 이 사연을 TV 에서 보는 동안에 가슴이 뭉클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   하나님이 죄인이나 신자들이게 값없이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 . 그런데 은혜는 마음에 주입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고 행동을 유발하게 한다 . 이것을 교리적인 설명으로 유효적인 부르심이라 한다 .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한 자에게는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함이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이유가 선하고 거룩한 자가 되어 선한행실을 하기 위함이다 . 그러니 참된 은혜를 받은 자는 선한 행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의 선한 행실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   사람이 움직이고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건강하여야 한다 . 신자들에게도 선한 행실을 하기 위해서는 참된 은혜를 받아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터넷이 널리 퍼져 편리한 것이 많다 . 그러다보니 얼굴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익명으로 대화하는 공간까지 생겨났다 . 크리스천 모임에 대하여 말을 하고자 한다 .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면 즉각 응징에 들어간다 . 그런데 정죄와 비판의 수준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 거룩한 말씀을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입은 자들은 겸손하다 . 겸손이라 함은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서 겸손한 것을 말한다 . 인간이라는 존재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과 신자가 알고 있는 사랑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 그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처럼 , 마치 하나님과 동등한 자처럼 행하면 마귀가 되는 것이다 . 귀신도 하나님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께 겸손한 자가 아니다 .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하려 하였던 자이다 .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이다 .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이루시게 위하여 일을 하실 때에 겸손을 나타내셨다 .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게 때문이다 .   그러므로 겸손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이다 .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이다 . 이 겸손의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   겸손은 하나님을 아는 사랑의 열매이다 . 열매가 없는 자는 귀신과 같은 자이다 . 귀신도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 그러나 두려움에 대한 순종이 없다 . 언행이 일치가 안 되는 자가 마귀이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 법 없이도 살 사람 ’ ‘ 천국에 가야할 사람 ’ 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 왜냐하면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었다 .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 심지어 배척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 배척하는 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   저들은 자기들의 수고와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러나 능동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지칠 정도가 되었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 또한 율법을 지키고 깨달을수록 오히려 죄가 더 드러나게 됨으로 인하여 마음의 짐은 점점 무거워지게 되었다 .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너희가 스스로 고생과 수고를 하여도 쉼을 얻지 못한다 .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 “ 쉼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야 한다 .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라고 하셨다 .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아 , 나를 부인하면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한다 . 나를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라 영접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구세주로 고백을 하라 .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 너희를 위한 것이다 .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을 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너희의 것이 된다 . 이것을 너희에게 주러 내가 이 세상에 왔노라 . 그러니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하셨다 .   내 멍에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 그리고 내 안으로 들어오면 내가 너희의 죄의 짐을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흔히들 인생사가 먹고사는 문제라고 한다 .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에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갈등이 있다 . 좋아서 만나는 사람이 있고 , 어쩔 수 없어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을 하면 보기 싫은 사람은 안 보면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   인생사의 갈등의 문제가 꼭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어야 생기지 않는다 . 그 가운데 하나가 시기하는 것이다 . 나보다 똑똑해도 안 되고 , 나보다 더 부요해도 아니 된다 . 나보다 잘나고 , 나보다 더 잘살면 배가 아프고 질투가 난다 .   그래서 아내가 동창회를 다녀오면 기분이 좋지 않다 . 그리고 불똥이 집식구들에게 특히 남편에게 향하게 된다 . 이유인즉 옛날에는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못생겼었는데 지금은 신수가 훤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사람의 질투는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제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온유한 마음을 나타내어야 한다 .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하여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 아들보다 귀한 것은 없다 . 아들을 내어 주시고 죄인들의 죄값을 치루신 것이다 . 이 십자가의 사랑을 안다면 질투를 생각할 수가 없다 .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한 근원에서 나왔다 . 즉 십자가의 사랑이다 .   십자가의 사랑은 죄인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같은 사랑을 갖고 있다 . 같은 사랑을 갖고 있는데 시기와 질투는 생각할 수 없다 .   인생사의 문제는 내 생각으로 역사를 만들려 하는데 있다 . 이것을 축소하면 공동체에서 , 친구들 간에 ,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이루려 하니 , 내 마음에서 생기는 불편과 분노가 생기게 된다 .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 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갈등의 속을 들여다보면 ‘ 무언가에 대하여 쓸쓸함 ’ 때문이다 . 나를 위하여 , 나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의 상황은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남으로 인한 섭섭함이다 . 이러한 이야기가 신문 지상에 가득차 있다 .   간절한 사랑했던 이가 쓸쓸함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기고 , 신뢰가 깨진 가족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 목사들 간에 생긴 분쟁의 이야기가 있다 .   개인은 각 자의 개성을 갖고 있지만 ,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 개인의 인격체를 세우기 위한 자존감 , 자존심을 갖고 있다 . 개인이라는 존재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지녀야 하고 또한 다른 이에게도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   그런데 특히 쓸쓸함을 많이 느끼거나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자들이다 .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되어 가야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내 목소리가 커야 한다 .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귄위에 대한 순종이다 . 부모의 명령에 순복하는 것이다 . 부모가 어린 아이를 훈계할 때에 ‘ 하라 ‘ '말라 ’ 를 가르친다 . 아직 이성적인 판단이 없을 때이다 . 이것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 시절 때에 배우게 된다 .   그런데 놀라운 것이 , 이 권위를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권위에 대한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은 귄위에 대하여 배움이 있어야 한다 .   권위에 대하여 배움이 있으면 ,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 그리고 사람이 어떠한 존재를 인지를 알 수 있다 . 그렇게 되면 ‘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를 해결할 수 있다 .   사람이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 . 부패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 . 오직 선하신 하나님만이 인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어제는 켈리포니아주에 있는 Carmel Beach 를 다녀왔다 . 그곳에서 다람쥐를 보았다 . 모래 숲에서 살고 있는 다람쥐인데 어린아이들이 던져 주는 빵조각에 경계심을 풀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 그것도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왔다 .   자연에서 야생으로 살아야할 다람쥐가 모래밭 숲속에서 살고 있다 . 그곳에는 다람쥐가 좋아하는 도토리나 열매가 없는 곳이다 . 다람쥐가 먹는 것은 빵부스러기이다 . 야생 다람쥐의 모양은 갖고 있었으나 근성은 잃어버린 것이다 .   Carmel Beach 는 관광지이다 . 그러다보니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많다가 보니 일어난 일이다 . 다람쥐는 도토리나 각종 열매를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빵을 받아먹기 시작을 한 것이다 . 이 모습을 보면서 신자들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하였다 .   성경 말씀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음을 책망하고 있다 . 외모로는 신자로서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 직분의 호칭도 있고 , 정장 양복에 성경책도 손에 쥐고 있거나 차 안에 유리창 앞에 놓여 있고 , 예배도 참석하고 있다 .   그런데 신자로서의 근성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 신자는 무엇으로 살고 ,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 신자가 먹어야할 영적인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 먹는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 다람쥐의 먹이는 사람이 주는 빵조각이 아니다 . 다람쥐가 , 다람쥐가 되기 위해서는 도토리를 먹어야 한다 .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다 . 먼저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를 위함이다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 아들에는 맏아들과 탕자와 같은 두 부류가 있다 .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일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 . 그러면 아버지의 것이 맏아들의 것이 된다 .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탕자처럼 기도를 하고 있다 . 건강과 돈을 주시면 멀리 떠나서 내 마음대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람은 어떠한 환경이 다가오더라도 살게끔 되는 것 같다 . 어제는 San Francisco 시내를 돌아 봤다 . 언덕 위에 지은 집들을 보고 놀랐다 . 언덕도 보통 언덕이 아니다 . 더 놀라운 것은 자동차가 올라가고 또한 파킹까지 한다는 것이다 .   마치 놀이동산에서 즐길 수 있는 긴장감과 공포감이 느꼈다 . 그런데 그런 집들이 언덕마다 지어졌고 , 집값은 만만치 않다 . 그리고 San Francisco 에 관광을 오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서 보고 체험하여 보고 가야 한다 .   사실 이 언덕 위에 지어진 집들에 대해서는 이미 주변에 있는 친지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 듣기는 들었지만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 그런데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체험을 하니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   신자들의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 성경은 관념이나 사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 역사적인 사실이며 , 그 역사를 주관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를 주관하신다 .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되 미리 계시함으로 이루신다 .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십자가의 구속사이다 . 오실 메시야 오신 메시야 ,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야의 말씀이다 .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증거이다 . 순종과 불순종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결과에 대한 것이다 . 그러니 신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 동일하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심으로 오늘 신자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 속에 등장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다 . 왜냐하면 동일한 은혜로서 같은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신자들의 믿음은 눈으로 보고 , 듣고 , 만져본 바 된 것이다 . 그러니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 전하듯 전하면 아니 된다 . 올바른 신자라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전하여야 한다 .   이전에는 San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를 안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 예수를 잘 못 믿는 것도 큰 문제이다 . 왜냐하면 가짜 예수를 전하는 곳도 많고 , 자칭 예수라 하는 자들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 이전에는 교주에게 맹신을 강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 오히려 성경의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을 한다 .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도 잠깐 의문을 가졌었다 . 그는 회개의 세례를 받고 메시야를 맞이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불의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 그래서 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질문을 하였다 .   예수님이 당신이 오실 그이가 맞습니까 ?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 예수님의 대답은 이사야의 글에서 말씀하셨다 . 메시야가 오면 포로된 자들이 자유를 얻고 병자와 눈 먼 자가 고침을 받을 것이다 . 그리고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으니 듣고 본 것을 세례요한에게 전하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셨다 .   지금도 예수를 믿되 자신의 생각과 고집으로 믿는 자들이 많다 . 내가 생각하는 예수를 이럴 것이라 한다 . 이러한 것들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신자들은 신앙고백을 한다 . 신자들이 믿는 예수는 동정녀 몸에서 태어난 분이어야 한다 . 즉 처녀에게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땅에는 자칭 예수라 하는 자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짜이다 . 그리고 신자들이 믿고 있는 예수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 가짜들은 이미 이 땅에 와 있다고 주장을 한다 .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되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고 죄인과 의인을 구별한다 .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미 오신 초림의 때 에와 다시 오실 재림의 때가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다 . 초림의 때에는 구원을 받을 때이다 . 그리고 재림의 때는 심판이다 .   이러한 것이 성경의 말씀 속에서 확연하게 증거로 나타나자 , 더 심한 가짜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