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람은 어떠한 환경이 다가오더라도 살게끔 되는 것 같다. 어제는 San Francisco 시내를 돌아 봤다. 언덕 위에 지은 집들을 보고 놀랐다. 언덕도 보통 언덕이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동차가 올라가고 또한 파킹까지 한다는 것이다.
 
마치 놀이동산에서 즐길 수 있는 긴장감과 공포감이 느꼈다. 그런데 그런 집들이 언덕마다 지어졌고, 집값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San Francisco에 관광을 오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서 보고 체험하여 보고 가야 한다.
 
사실 이 언덕 위에 지어진 집들에 대해서는 이미 주변에 있는 친지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듣기는 들었지만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체험을 하니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신자들의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관념이나 사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며, 그 역사를 주관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되 미리 계시함으로 이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십자가의 구속사이다. 오실 메시야 오신 메시야,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야의 말씀이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증거이다. 순종과 불순종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신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심으로 오늘 신자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속에 등장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은혜로서 같은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믿음은 눈으로 보고, 듣고, 만져본 바 된 것이다. 그러니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 전하듯 전하면 아니 된다. 올바른 신자라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전하여야 한다.
 
이전에는 San Francisco의 언덕 위의 집들에 대해서 설마 그 정도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언덕을 차를 몰고 올라 가보니 머리카락이 삐죽 설 정도였다. 언덕을 올라 갈 때는 마치 차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 가려할 때는 언덕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언덕이 조금 경사가 있다하는 곳은 다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두렵지도 않았고, 오히려 스릴이 있었다. San Francisco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재미로 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사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아직도 살고 있지 않은가?
 
신자들은 신자들만의 가치관을 갖고 산다. 다른 교훈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기쁨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것이 자랑이요 기쁨이다. 그리고 매일 체험하며 살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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