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홍수가 나면 사방으로 물이 넘치지만 장작 마실 물은 없다. 또한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의 기근은 마실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 하였다. 마지막 때에 교회가 감당하여야할 사명을 다시 챙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고 있지만 각 자의 소신대로 믿는 믿음으로 나가고 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나간다. 듣는 말씀에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며,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려 하시는지를 배워야 한다.
공을 세워야 복을 받는 신앙은 무속신앙이다. 신자이면서도 무속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저들은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에는 시기와 질투로 한다. 그 일을 내가 빼앗아 복을 받고야 말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자들이 있는 교회는 늘 다툼과 시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의 영을 보내시어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을 거룩한 자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부름을 받은 자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그래서 성령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는 중생의 사역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하여 성화의 길을 가게 하신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데 개인을 따로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에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과‘를 믿고 있다.
성령께서 신자들 사이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말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의 성도들은 머리의 지체가 된다. 지체에는 각 부분이 있고, 각 마디가 있다.
신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각 부분으로 각 마디로서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신자 혼자로는 거룩함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목사들에 의해서 다른 복음이 전해졌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설교 시간에 교인들을 웃기지 못하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언론 지상에 인터뷰까지 하였다. 웃기는 것이 위로이고 화평을 주는 거란다. 그런데 웃기는 소리이다.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위로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미 우리들을 위하여 외아들, 독생자 예수를 내어 주셨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은혜를 올바로 알면 모든 은혜와 위로가 그 속에 다 있는 것이다.
어리석고 믿음이 작은 자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가서 십자가의 사랑 이외의 것을 달라고 땡강을 부리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믿음이 큰 자라하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나 이민교회의 현실이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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