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4의 게시물 표시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주일 예배 설교 준비를 하면서 고민한다 .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준비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과 함께 하심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국회의원에게는 면책특권이라는 것이 있다 . 국회 내에서 직무상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밖에서 민사 , 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특권을 말한다 . 그러니 가끔은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나 시중에 돌고 있는 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발언하기도 한다 .   그런데 목사들 가운데도 마치 면책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 강대상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아주 교만한 자들로 변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 이러한 자들의 생각은 강단에서는 어떠한 말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   그러나 그렇지 않다 . 욥기 42:7 절에 “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 라는 말씀이 있다 .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 빌닷 , 소발이 있다 . 그들은 욥이 고난을 당하였을 때에 함께 하였던 자들이었다 . 세 친구들은 욥에게 하나님의 뜻이라 하면서 위로를 하였다 .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라고 전하였지만 사실은 자기들의 생각을 전하였다 . 그들은 욥에게 한 말이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용서의 번제를 드려야 했다 .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 그리고 양심에 화인 맞은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 . 거짓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을 향하여 ‘ 거짓 목사 ’ 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삶을 살도록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몇 주 전에 교황이 방한을 하였었다 . 그 후에 기독교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 그 중에 웃기는 소리가 기독교계에도 교황과 같은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발언이다 . 기독교는 인물이 없어서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종하였기 때문이다 .   믿음은 신자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인하여 자리를 잡게 된다 .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을 수 있다 . 마치 나무와 같이 성장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든든한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은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자들은 그분을 통하여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된다 .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인하여 넉넉한 삶을 살면서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된다 . 이것은 그리스도를 순종하며 교제할 때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참으로 복되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랑 위에 서 있을 때에만 흔들림이 없이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 . 이것은 이론적인 생각이 아니다 .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움직이게 하시는 성령의 함께 하심이다 .   우리 주님은 신자들 안에 계신다 . 그래서 주님이 행하신 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셨다 .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알리셨다는 것이다 . 아버지의 성품은 이웃을 위하여 섬기는 사랑이요 자비와 긍휼이다 .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이요 , 아버지가 택하여 보내신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쳤다 .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 그리하면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인 것을 인정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   신자들 안에는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 .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 . 그것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베풀 때에 역사하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오늘날 세상의 매스컴이 교회에 대하여 말들을 많이 한다 . 그런데 교회는 그들의 눈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 볼 수밖에 없다 . 만일 교회가 세상의 눈으로 이해가 되고 평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문제를 앉고 있는 것이 된다 .   교회는 신비한 곳이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을 믿는다 .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그래서 우리 주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다 . 그래서 그분은 사람이시지만 신성을 갖고 계신다 .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 그러므로 교회는 신성한 곳이 된다 .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권세로 다스리는 곳이 된다는 말이다 .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도덕적인 행실은 이 땅에 계실 때에 보여 주셨던 것들을 따르게 되는 곳이다 .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막 10:43-44) 이것이 교회의 도덕적인 통치의 원리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자들이 존귀함을 받고 ,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됨을 나타내는 곳이다 . 이것이 우리 주님의 통치의 원리이다 . 그런데 교회가 만물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 즉 낮아지고 섬기는 자의 원리를 세상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 위함이다 .   이미 이것은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 20:28 라고 하셨다 .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죽으셨다고만 하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주여 이제도 그들이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신자들에게 믿음이란 ?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하나님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믿어도 되는 것인가 ? 절대로 아니다 .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하셨던 일 , 약속하신 것들 , 그리고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   이것에 대하여 잘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의 말씀이 있다 . 행 4:23 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를 고쳐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다 . 그리고 심문을 받게 된다 . 그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알고 풀어 주면서 위협을 한다 .   “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 고 하며 풀어 주었다 .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동료에게 다가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전한다 . 함께 모인 자들은 한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   여기에서 우리들을 당황케 하는 기도를 한다 . 함께 기도하는 자들은 이와 같은 핍박이 당연히 있음을 알고 있었다 . 왜냐하면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세상의 군왕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배척할 것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   그들의 기도는 이렇다 . 천지의 대 주제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군왕들을 통하여 핍박이 있음을 계시하셨고 주님의 다시 오시는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이 있음을 알리셨다 .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핍박 속에서도 “ 주여 이제도 그들이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행 4:29-30) 하였다 .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지는 가운데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하며 늘 주님께 동행하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   그런데 만일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명문학교가 있고 , 좋은 가문이 있다 . 그것을 따지는 이유는 그 안에 좋은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 전통은 세월이 지나오면서 축척의 힘이라 할 수 있다 . 그래서 사도 바울도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전통학파인 가말리엘 출신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자랑한 적이 있다 .   오늘날 신자들도 믿음에 관한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 그런데 진지하게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경건서적이나 주석책을 살펴서 얻은 것 보다는 여기서 듣고 저기서 들어 얻은 것들이다 . 그러다보니 믿음에 대한 통일성과 일관성이 부족하다 .   신자들은 자기가 하는 말의 근거가 성경의 말씀이어야 한다 . 하지만 오늘날의 신자들은 누구누구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 아니 내가 아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더라하며 말싸움을 하는 현실에 있다 .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다 .   이름이 알려진 목사님의 설교는 신자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다 . 그러다보니 생각이 없는 목사는 그대로 카피를 하여 전하게 된다 . 그런데 문제는 잘못 해석되어진 것까지도 그대로 전하는데 있다 .   같은 성경본문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교파별로는 같은 교리와 사상을 갖고 있다 . 그렇다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교리와 사상으로 잘 해석하여 전달을 하되 회중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선택과 설교자의 인격으로 설교를 하면 된다 . 이것이 설교자가 하는 일이다 .   그래서 전통신학교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이다 .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축척된 힘이 있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의 이단들의 특징이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신학교리를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 교리를 배우고 성경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 그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에 골조와 같은 것이다 .   인터넷을 통하여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실제로 눈으로도 확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요즘은 교회가 교회를 보고 놀라고 , 교인이 교인을 보고 놀라는 시대가 되었다 . 왜냐하면 교회라고 하는데 서로 다른 방향과 목적을 바라보고 있고 교인들도 신앙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보니 교회를 이상한 집단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   데살로니가 후서 2:13 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행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 “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 라고 하였다 .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처음부터 거룩함과 진리로 하였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성령께서 거룩하시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삼위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구속사역이다 .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거룩함을 향하여 가야하고 진리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야 한다 . 만일 거룩함을 잃은 신자들이 되면 과거 종교사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였던 십자군이 되는 것이다 .   오늘날 이 땅에 있는 교회나 신자들은 십자군들과 다름이 없다 . 그 이유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 업적과 실적을 중요시 하는 교회일수록 거룩함을 찾기가 힘들다 .   교회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의 변화를 받은 자들을 모아 거룩을 가르치는 곳이다 . 즉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여야함을 말한다 . 그분의 공의와 정의 ,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배우는 곳이다 .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일들은 그와 같은 성품으로 하여야 한다 .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가 선교와 전도를 나가서 그분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 신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고 본을 보여주셨다 . 그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목회자들은 주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을 만난다 . 그런데 가끔 황당하게 하는 자들이 있다 . 소위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자들이다 .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회가 정한 예배에 참석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새벽예배나 기도회에 참석도 하지 않는다 .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영줄을 붙잡고 있다고 한다 . 그래서 목사의 설교나 말씀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교만함이다 . 이러한 말을 하니 평신도들은 물론이고 목회자들도 찔끔거리고 놀라서 할 말을 못한다 .   그러나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나 사도들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다 .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셨고 ,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를 받으신다 . 이것이 기도의 원리이다 . 이것을 무시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계획하시고 집행하신 것은 영광을 받으시고 영화롭게 되시기 위함이다 .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찬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추인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야 한다 . 그분이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 그래서 기도의 시작은 찬양과 감사이다 .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 그리고 더 간구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말씀을 통한 회개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 회개를 통한 믿음과 사랑이 생김으로 인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 .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기도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니다 .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는 기도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 믿음이 임하여 회개하고 , 믿음으로 인하여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받으신다 . 즉 말씀을 통한 깨달음과 회개를 통한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   이것이 성경의 진술인데 소위 기도의 사람들이라는 자들은 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지난주 대한민국은 참으로 떠들썩하였다 . 교황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교황의 몸짓과 말에 감동을 하였다 . 그런 반면에 기독교회들은 멍한 상태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왜 우리들에게는 겸손하고 청렴한 지도가가 없나 하였고 , 왜 축복의 말을 전하여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였던 시간들이었다 .   축복은 복을 빌어주는 말이다 . 그런데 이런 축복의 선포가 매 주일마다 선포되고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은 바로 축도이다 . 삼위하나님의 복을 선포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은혜 , 아버지의 사랑 , 성령의 교통을 확인시키고 성도 각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   은혜가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깨달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 속에 인식되고 또 그런 다음에야 성령의 진정한 교통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 신자들은 삼위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다 .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후 13:13)   신자들은 복의 원천이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인하여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 아들과 아버지를 통하여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누리게 된다 . 예배 시간에 축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내주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 우리 안에 이미 삼위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 이러한 진리를 모르고 있으니 교황이 빌어주는 행위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 사람을 통하여 받는 복보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오는 복이 얼마나 큰지를 확인하여야 한다 .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리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 즉 내 안에 주인이 성령님이셔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삼위하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신자들을 거룩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개혁 ( 改革 ) 은 체제나 제도를 새롭게 고쳐나가는 것을 말한다 . 반면에 혁명 ( 革命 ) 은 이전의 권위나 방식을 단번에 뒤집는 일을 말한다 . ( 한컴 사전에서 참고하였음 ) 오늘날 교회 안에는 복잡다양한 일들이 많다 . 이민교회도 세대교체가 이미 시작되었다 .   새로운 후임자를 세워서 성공적으로 안착을 한 교회가 있는 반면에 복잡한 갈등 속에 있는 교회도 있다 . 갈등의 대부분은 전임목사님과 후임목사님의 주도권 싸움에서 온다 . 전임목사님의 생각은 그동안 쌓아온 토대 위에 후임자의 공적이 쌓기를 바란다 .   그러나 후임목사님은 전임목사님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 그래서 외치는 것이 교회개혁이다 . 그런데 개혁이 아닌 혁명이 되면 참으로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 .   전임목사님과 후임목사님과 갈등을 겪고 있는 교회를 보면 명분상으로는 교회가 새시대에 맞게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며 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혁명에 가깝다 .   전임목사님의 권위와 그분이 이루었던 공적을 싹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 그래야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아니 정권을 잡았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 일 것이다 . 인사 및 재정을 손에 넣어야 권력의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   이러한 갈등을 잘 풀 수 있는 성경의 말씀이 있다 .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이다 .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갈 때가 이르자 엘리사에게 안수를 한다 . 두 사람은 요단으로 갔다 .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니 물이 이리 저리로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갔다 .   그리고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소원하는 것을 말하라 한다 . 그러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말한다 . “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 라며 소원하였다 . 잠시 후 두 사람은 함께 길을 가는데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