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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왕상 5:5) 왕상 5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하는 이유와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성전 건축을 하는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는데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차별을 하기 위함이다. 이방신을 우상은 동네 가까이에 있으며 사람들이 편리한 때에 찾을 수 있는 곳에 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과정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최고의 재료를 준비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한다. 그 준비 기간이 삼 년 동안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에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었다”(왕상 5:4) 이스라엘 땅에 평화를 주시므로 이제 성전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의 직분을 감당하는 초기와 후반부에는 차이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처음에는 여호와의 말씀에 잘 순종하다가 나중에는 불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평과 원수들이 없게 해 주셨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주변의 나라들이 대적을 하기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왕상 11:14)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함께 하셨다. 왜냐하면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택한 백성들을 만나 주시기 위함이다.   본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신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전이 건축되는 과정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 4:25) 왕상 4장에서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 내각과 지방행정 그리고 문화 교육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다. 다윗 왕 때에는 전쟁에 온 힘을 쏟았다면 솔로몬 왕은 평화기를 맞이하여 편 정책들이다. 그래서 나라의 관료를 소개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이 먼저 나오고 군사령관은 위에 나온다. 또 지방 장관을 두어 왕과 왕실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게 하였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통하여 얻은 땅에서 번성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포도나무는 풍성함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의 번영을 왕궁에서 일하는 관료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음식의 양으로 부요함을 소개한다. “솔로문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고르요”(왕상 4:22). 한 고르는 230L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에 대하여 소개를 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와 질서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어서 주변 나라에서도 배움을 얻고자 찾아 왔다.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왕상 4:34) 이것을 솔로몬의 영광이라 한다. 왜 이렇게 영화와 부귀를 소개하고 있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크기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2).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 왕의 지혜와 부요함이 백성들에게 은혜와 평화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왕으로 있는 나라가 얼마나 더 부요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솔로몬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그의 부요함에는 생명이 없는 것이라 합니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왕상 3:28) 본문에서는 솔로몬이 여호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분위기가 전쟁이 끝 난후라 백성들의 평화와 번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많은 재판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이 분별하는 지혜이다. 즉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꿈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게 구하라’ 하신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한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이제 솔로몬은 선악을 분별하는 재판을 한다. 그것이 두 여자가 왕에게 나와 각각 내 아들은 산 것이고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있다. 그러자 솔로몬은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고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고”(왕상 3:24), 둘로 나누라 한다. 이 때에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왕상 3:26). 왕의 판결은 아이를 죽이지 말고 그 여인에게 주라고 하는 여인이 친엄마임을 결정한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하매”(왕상 3:27) 이 판결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왕상 3:28).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그 속에 있었다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이제 다윗도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가야한다. 왕상 2장의 말씀은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의 말을 하고 있다. 먼저는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켜 행할 것을 분부하고 그 다음은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할 자와 벌을 받아야 할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백성들을 돌보아야 한다. 왜 그렇게 하여야 하는가 하면 인간이 만든 법은 불완전하고 자칫 소수의 권력층을 위한 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선하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그런즉 통치하는 자나 통치를 받는 자가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같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는 지혜롭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사람에게 들어와 하나님의 뜻과 같이 되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결국에 지혜롭다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같아서 형통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형통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기에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당부를 하고 있다. 중요함을 반복하기 위하여 율법, 계명, 법률 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윗에게 선행을 하였던 사람들을 솔로몬에게 계속 부탁을 한다. 그러나 대적하였던 자들에게는 칼로 심판을 하라 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보응의 원리가 작용함을 알게 한다. 특히 요압에게는 엄중한 벌을 내리라 한다. 그는 아브넬과 아마사와 압살롬을 살인하였다. 그래서 내린 벌이 그가 백발이 되었지만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왕상 2: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세상의 선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선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들이나 동일한 방법으로 택하셨다. 택하신 목적은 약한 자들을 통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세상의 지혜나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택함을 받은 자들을 통하여 알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7상)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 지식이 내 안에 들어와 깨닫게 되면 지혜가 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굽게 창조한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곧게 할 수 없다. 이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길을 정하셨는데 누구나 죽게 된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둘째 사망이 있다.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망의 자리를 피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있는 자들은 그분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있는데 우리들의 행한 대로 보응의 심판을 받는다.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선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기의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다. 그래서 이웃의 것을 빼앗고 미워한다. 그렇게 행하면 그 행한 대로 보응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자들을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의의 심판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우리들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유를 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것도 세상에 알리는데 우리들을 통해서 알린다. 또한 불순종하였을 때는 징벌을 받는 것도 우리들을 통하여 알리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를 세상에 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순종하면 복을 불순종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이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 44:26) 시편 44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간구하는 시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가운데 있다. 애굽에서 베풀어 주셨던 그 능력을 나타내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는지 그리고 그 백성들은 왜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지를 확인하려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실 때는 가장 작은 민족이었다. 그 작은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려 하시는데 목적이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어떻게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려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함으로이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그리고 그를 미워하고 그의 명령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당장 보응하는 벌을 주심을 세상에 알게 하려 함이다.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10)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헌신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들은 물질로 부요함을 누리자 하나님을 찾는 일이나 말씀을 듣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타락한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때리고 돌로 치려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목적하심을 포기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열심히 이루신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전하기 위하여 서신을 보낸다. 그래서 히 11장에서 믿음의 증인들을 소개를 하는데 그들은 온갖 종류의 고난을 당하였음을 소개하였다. 그 선조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면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일들이 우리를 통하여 증거를 나타내신다. 그 증거라 함은 말씀으로 거룩한 자가 되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채찍질하며 사랑하는 것과 같다. 자식을 위하여 몸에 좋은 보약을 준비하였는데 만일 먹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징계가 필요하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너희가 피곤하더라도 너희 발로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에서의 사례를 들어서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하며 권면하고 있다. 의와 평강의 열매라 함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에 펼쳐지게 된다.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히 12:27)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는 일을 믿는 것이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그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그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왕상 1:5) 왕상 1장에는 다윗이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날 때가 됨으로 인한 사건이다.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아도니야의 음모와 솔로몬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내용이다. 다윗은 나이가 들어 몸이 따스하지 않아 수종을 드는 젊은 여인 수넴 여자 아비삭이 필요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다. 왕은 그때까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자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 그는 왕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다. 서열상으로도 첫째가 된다. 암논, 길르압,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그 다음이 아도니야이다. 그뿐만 아니라 용모도 뛰어나고 부모에게 꾸중을 들은 일이 없는 자이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 1:6) 그리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왕상 1:7) 이들은 종교적,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아도니야를 따른 것이다. 이들의 결국은 칼에 죽임을 당하고 추방을 당한다. 왜 이런 결과를 당할 수밖에 없을까? 답은 하나님 율법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율법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정한 자가 된다고 하였다.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신 17:15) 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다윗과 왕위 계승을 상의한 적도 없다. 오히려 왕에게 알리지 않고 추종자들과 함께 하여 왕위에 오르려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후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왕권을 임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반면에 솔로몬에게는 하나님께서 왕이 될 것을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 24:1) 삼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후에 재앙이 내려서 백성 가운데 죽은 자가 칠만 명이나 된다. 이 재앙에 다윗의 교만으로 인하여 된 것이라 하는데 자세히 살피면 전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격동하게 하셨는데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에 유혹케 하셔서 인구 조사를 하게 하신 것이다. 재앙으로 백성들이 죽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과 세바가 반역을 할 때에 다윗을 대적하였었다. 다윗을 대적하였다함은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 사건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인정 하에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군사적인 목적과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 죄가 된다. 합법적인 인구 조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속전을 내게 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 30:12) 그러나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하면서 여호와께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징계의 벌로 인하여 삼일 동안 전염병이 돌아 칠만 명이 죽게 된 것이다. 다윗의 잘못된 생각은 전쟁의 승리를 여호와의 도움으로 얻으려 하지 않고 강화된 군사력과 왕권에서 얻으려 하였다. 다윗은 자기의 세력과 영광스러운 번영을 확인하여 자랑하려 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군사력을 더 의지한 죄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의 범죄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제 일 계명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더 사랑하면 같은 범죄를 짓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삼하 23장은 다윗의 선지자적 찬양의 시이다. 그의 말년에 성령에 감동되어 메시야를 통하여 세워질 영원한 언약을 찬양하고 있다. 메시야 왕국이 세워지는데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고 그 일에 증인을 세워서 모든 족속을 구원하는 것이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그 일을 하시는데 죄사함을 받은 증인들을 세워서 이루시겠다고 한다. 우리들이 증인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하였던 육백 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용감한 자 삼십 칠 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압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브넬과 압살롬과 아마사를 살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윗의 군대장관으로 있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욕심과 시기로 사람을 죽인자이다.   다윗 왕국이 세워지는데 함께 한 자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였던 제자들의 이름도 기록이 되어 있고, 초대교회에 헌신한 사람들의 이름도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각 교회마다 연혁이 있다. 교회가 세워지고 헌신 봉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그 기록에는 상과 벌에 해당하는 것들이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본인에게 영광이면서 후손들에게도 자랑 거리입니다. 어떤 믿음으로 어떤 섬김으로 기록을 남기실 것입니까?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자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나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선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삼하 22:22-23) 삼하 22장의 말씀은 시편 18편의 시이다. 이 시는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다윗 언약을 맺은 후이다. 왜냐하면 이후에 일어났던 범죄한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도는 법이다. 법인데 하나님의 뜻과 성품이 담겨있다. 그래서 법도와 규례라 하는 것이다. 다윗이 복을 받은 이유가 있다. 먼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였기 때문이다. 즉 보응의 상급을 받은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삼하 22:21) 성령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복 주시는 방식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고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함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다”(삼하 22:26-27).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욱 더 큰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승리는 그의 용맹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켰기 때문이다.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 주의 자비가 임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더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복을 주신다. 반면에 사악한 자에게는 자비나 완전함을 주시지 않으신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지옥으로 갑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지옥에는 가지 않게 되었지만 상급을 받는 일은 남아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을 하면 선하고 온전한 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반면에 불순종하면 징계의 채찍을 가하십니다. 정신 차리게 하여 순종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공의로운 길을 갔을 때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본문의 말씀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진지함을 말씀하고 있다. 회개는 간단히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모든 생각과 온 몸을 뒤틀어 짜내며 자기 성찰을 하여야 한다. 회개에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다. 그리고 지난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백하여야 한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이방 땅에서 아버지 없이 살았던 시간들을 분하게 여겼다. 만일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를 계속 먹는다면 두려움의 날이 점점 가까이 오게 될 것이다. 그때에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게 된다. 이제는 열심을 다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아버지를 만난 탕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9) 품에 안겨 회개를 하였다. 이것이 회개의 참 모습이다. 다시 아버지의 품안에 안겨야 한다. 다시 정리를 하면 회개는 단지 죄송합니다가 아니다. 깊이 생각을 하고 마음과 몸을 돌이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옴을 말한다. 그렇게 하였을 때에 “그 일에 대하여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하) 깨끗한 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탕자는 아버지를 떠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려면 그가 하였던 것처럼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셀프시대여서 그런지 자신의 죄도 스스로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죄 용서를 받은 자는 확연히 드러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방 땅에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와 있으며, 아버지의 아들로의 신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시편의 저자는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은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그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요단 땅에 있다. 그곳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이전에 함께 성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렸던 자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며 조롱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헤르몬 산과 미살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와 파도 물결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깨달았다. 그래서 스스로 질문을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시 42:5상)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위에 역사하심을 깨달았다. 낮에는 모든 생물을 자라게 하며 풍성케 함과 밤에는 그 감사로 인한 찬양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우상숭배자들이 조롱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여도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조롱으로 인하여 그는 깊은 낙심 가운데 있었지만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하) 한다.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깊은 근심을 주시는 것은 신앙이 성숙한 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근심에는 두 가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근심인데 사망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시려면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 하여야 합니다. 대충하시면 만나실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날마다 자신의 몸을 쳐서 말씀에 복종한다고 하였습니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따려는 열심히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