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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음을 일상의 삶에서 나타내야 한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이스라엘을 통제하였다.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운반하는데 있어서 로마군인이 유대인에게 명령을 하면 물품을 옮겨야 했다. 옮겨야 하는 거리를 법적으로 오 리로 정한 것이다. 강대국 로마는 법적 통제로 오 리로 정하였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자비로 십 리를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즉 법적인 통치가 강한 것이냐 아니면 사랑의 통치가 강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법의 제도 아래에서 통제력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있는 자들은 법의 통제력을 넘어서 자비를 베풀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은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힘과 대조가 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의 정권의 힘보다 더 큼을 말한다. 사랑의 실천이 정권의 힘보다 더 크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6) 십자가의 사랑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섬기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어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하나님의 사랑의 힘은 세상 정권의 법이나 총이나 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총과 칼을 이기기 위하여는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온유라 함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겸손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와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힘은 어느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다 나은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외편도 돌여대라고 한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를 하여 그대로 행하면 더 큰 일이 일어난다. 즉 분노하여 반항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하는가?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심판권이 나에게는 없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으로 자신이 심판을 하거나 보복하지 않아도 됨을 말한다. 그리고 자녀가 되어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진노의 심판이 있음을 지각함에서 나오는 여유이다. 이와 같은 지식의 믿음이 있으면 이웃을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우리는 이웃을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을 받은 자가 되어 용서와 사랑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분노하는 자 앞에서 맞서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참으로 들어 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은 의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경쟁과 보복으로 이웃을 대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섬김으로 기다림으로 함께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즉 사랑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반드시 사랑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이러한 사랑을 믿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43)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되어 있다.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랑은 자신의 잘남으로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르다. 즉 사랑이 필요한 쪽에서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권리는 받는 자에게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질문이 이러하다. 강도 당한 자에게 누가 이웃이냐는 것이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갈 때에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런데 제사장도 피하여 갔고 레위인도 그곳을 피하여 갔지만 여행 중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치료하여 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이 사건에서 사랑과 자비가 등장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필요한 자에게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가 펼쳐진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의와 하나님의 의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시작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그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에 있었던 죄인들에게 임하였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함은 저들과 함께 친구를 삼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십자가의 구원이 임하게 하기 위하여 선행을 하여야 함을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여야 바리새인의 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확인 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십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38)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 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에 차이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은 자들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보복과 힘의 원리를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이것에 대한 비유가 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 질문을 하기를 몇 번까지 용서를 하여야 하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하였다. 그러면서 천국은 이와 같다고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종이 일만 달란트를 빚지므로 인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아야 한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빛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7) 왜 탕감을 하여 주었을까? 그 종이 감옥에서 풀려나면 가족들과 함께 사람답게 살게 하여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의는 보복과 힘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므로 사랑을 베풀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아와 용서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대제사장의 직분은 아론의 후손이 담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직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명하고 세워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세우셨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시면 그대로 세워짐을 말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로 고난 가운데에 계실 때에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죽기까지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왕 같은 대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아론의 후손의 대제사장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의 영원한 대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온전히 완성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이다. 사망을 부활로 이기시고 대제사장의 직분을 축하하러 오신 평강의 왕으로서의 직분이다. 믿는 자에게 시험이 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갖고 계시는 지위와 권능을 알게 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을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 보좌로 나갈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완전한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얻으신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너희를 구원해 낸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구원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 법적인 의무가 있음을 주지시기키 위함이다.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의 권위와 심판주의 위엄으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속주의 사랑으로서 주심을 유의하여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기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 즉 애굽에 살면서 섬겼던 신들을 마음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잘못된 종교적 심성이 결탁되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오히려 하나님과 거리를 더 멀게 한다. 섬기지 말라 함은 그것에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함은, 이름에는 한 개인의 품성과 속성 및 인격이 담겨 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밝히실 때에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즉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언약을 명명하는 자와 피명명자 간에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하여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이스라엘을 소유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밝히시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시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됨을 말씀하셨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출 6:7)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따르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음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인하여 그분과 우리들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구원하신 분이 되시고 나는 그의 구원을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출 19:4)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출 19:4)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삼개월이 되던 때에 시내 광야에 장막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께서 불러서 산에 올라가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이미 모세에게 약속을 하셨다. 즉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실 때에 반드시 너와 함께 할 것이며 이곳에 다시 돌아와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게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그 약속이 성취가 되어 모세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게 된다. 즉 여호와의 율법을 주시기 전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였음과 구원하신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의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아주 귀중한 소유물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세상 열방 민족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백성이 되겠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과 열방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심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그 특권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이 특권은 영적으로 이스라엘에 된 하나님 나라의 성도(교회)들에게 주어졌다.  거룩한 백성이라 함은 다른 열방 민족들과 구별이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의 뜻을 수행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의를 얻고자 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는 장로들을 불러 묻는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제히 응답을 하여 언약의 관계를 수립하는 계약법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쌍방의 동의 하에 맺어지는 언약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출 18:10)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출 18:10) 출애굽기 18장에서는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과 이스라엘에 행정조직을 만들어 준다. 모세가 애굽에서 있었던 열 가지 재앙와 홍해를 건넌 사건, 쓴 물을 달게 만들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는 것, 반석을 쳐서 물을 터트린 르비딤 사건, 아멜렉과 전쟁에 승리한 것을 장인에게 들려 준 것이다. 이드로는 애굽 사람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그 앞에서 떡을 먹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한 것이다. 이것은 이방 제사장이었던 이드로가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지존자이심을 깨달았음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이십세 이상된 사람의 수가 육십만명이 넘었다. 그런데 혼자서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모세에게 지도자를 세울 것과 행정조직을 세우게 한다. 지도자의 조건으로는 세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거짓됨이 없는 진실한 자, 재물에 청렴 결백한 자이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출 18:21) 그리고 행정조직을 정비한 까닭은 이스라엘에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민족이 이동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전쟁시에는 군사조직으로 명령을 전달하며 질서를 유지하려는데 필요한 것이다. 재판에 하는데 있어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고 어려운 것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각부장들이 재판하게 하였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더라”(출 18:26) 각부장들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이므로 상식과 양심에 따라 심판을 하였다. 이후에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따라서 재판을 하였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 17:7) 여호와를 섬기는 믿음이 단 번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이후에 점진적으로 자라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들어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에 대한 과정이다. 달리 말하면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고 쓴 물을 단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마실 물이 없었다. 그래도 또 다시 모세와 다투고 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로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치라 한다. 그리하였더니 반석에서 물이 나왔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즉 우리 중에 함께 하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험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함께 하심을 알게 하기 위하여 아멜렉을 들어 전쟁을 치루게 하신다. 전쟁을 어떻게 이기는가로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군사 훈련을 받지 않았다. 노예로서 벽돌 만드는 일을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전쟁을 하여야 한다. 승리의 방법이 여호수아는 사람을 택하여 전쟁에 나가고 모세는 지팡이를 잡고 산 꼭대기에 올라가 여호와께 기도를 하는 것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멜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출 17:9) 모세의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멜렉이 이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멜렉이 이기더니”(출 17:11)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데 전쟁을 통하여서입니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