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43)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되어 있다.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랑은 자신의 잘남으로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르다. 즉 사랑이 필요한 쪽에서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권리는 받는 자에게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질문이 이러하다. 강도 당한 자에게 누가 이웃이냐는 것이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갈 때에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런데 제사장도 피하여 갔고 레위인도 그곳을 피하여 갔지만 여행 중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치료하여 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이 사건에서 사랑과 자비가 등장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필요한 자에게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가 펼쳐진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의와 하나님의 의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시작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그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과 대적의 관계에 있었던 죄인들에게 임하였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함은 저들과 함께 친구를 삼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십자가의 구원이 임하게 하기 위하여 선행을 하여야 함을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여야 바리새인의 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확인 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원수와 죄인을 찾아온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거하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엘파소열린문장로교회 장용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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