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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8)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이러한 윤리와 도덕을 갖고 살아야 함을 말씀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는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비판하며 정죄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비판한 것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라 하셨고,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다고 하였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그리고 거룩한 복음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 하셨다. 저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설명하여 보지만 오히려 화를 내며 물어 뜯는다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가?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였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의 것을 구하였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하나님의 의로 사는 자들은 아버지의 것을 구하여야 한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8) 아버지의 약속을 구하여야 한다. 비판을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 하시려니와”(마 6:14) 만일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니라”(마 6:15)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은혜를 베풀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푼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죄에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즉 구원의 은혜에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 말씀 앞에 산 자가 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다. 화목하게 된 증거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아버지께서 내가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에는 사랑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라”(요일 4:16)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죄가운데 있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긍휼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부활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해야할 일이 있다. 하나님과 사랑으로 화목하게 된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러 갈 때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가야한다. 내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사랑을 아는 자로서 화목함을 드러내야 한다. 화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며 오래 참으심과 같이 우리들도 이웃에 대하여 오래참으며 전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새 약속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다. 이루시는 방법은 십자가에 죽으심인데 그 죽으심은 구약의 제사법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을 희생제물, 화목제물, 속죄제물, 속건제물로 소개하고 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속건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속건제는 어떠한 때에 드리는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속건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또는 부과된 죄값을 만족시켜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데 목적이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레 5:15)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는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 주는 은혜가 있다. 그리고 죄인들의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은 아론의 후손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사는 모세의 제사법과는 다른 것이며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며 완전한 제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약의 제사법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는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레10:6)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레10:6)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정하신 법도를 따라 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향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하며 정한 불인 번제단의 불로 옮겨야 한다. 그러나 두 아들은 다른 불을 담아다가 여호와 앞에 분향을 하였다. 그 결과 두 아들이 죽었다. 모세는 죽은 두 사람을 진영 밖으로 매고 나가라 지시하였다. 두 형제를 잃은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사람이 감정이 격하여지면 돌출행동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슬픔으로 인하여 제사장의 의복을 입는 것과 직부를 거부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것이다. 나실인의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둘째 독주를 마시지 말고,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슬퍼하는 그들에게 너희는 여호와께로부터 관유를 부음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형제 죽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 직무를 감당하여야 한다. 그리고 슬프다고 독주를 마시고 성막에 들어가지 말라 한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레 10:9)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한 자가 됨으로 인하여 정결법에 따라 의식을 행한 후에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레 10:7)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남은 것들을 제단 곁에서와 정결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다. 여호와 앞에서 중재자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

아론에게 이르되 속죄제를 위하여 흠없는 송아지를 가져오고 번제를 위하여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 드리고”(레 9:2)

  “아론에게 이르되 속죄제를 위하여 흠없는 송아지를 가져오고 번제를 위하여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 드리고”(레 9:2) 제사장 위임식을 칠일 동안 거행하고 팔일째 되는 날이다. 이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할 일은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한다. 번제를 드림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과 희생을 드리는 것이고, 속죄제는 자신들의 죄를 사함을 받아야 한다. 죄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화목제이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제사 제도 및 대제사장의 중재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그림자로서 새언약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단회적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필요함은 율법 아래서 동물로 인한 속죄의 제사가 죄를 온전히 없에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아론의 속죄제 제물로 흠없는 송아지를 드리는 이유는 이전에 큰 죄를 범하였는데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일깨워 줌으로 겸손히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죄악의 담을 헐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제사를 드리러 나가는 자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용서와 회개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약의 제사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 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레 8:9)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 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레 8:9)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 위임식을 한다. 위임식이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제사 예물을 드리도록 손에 무엇인가를 채워주는 의식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로 제사장을 성별하는 의식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호와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성별되기 위하여 제물을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는 특수한 제사를 말한다.  위임식은 성막이 완성이 되어 지시하신 성막제도를 시행하는 것이다. 그 지시에 따라 필요한 준비물이 열거된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아론의 직계 자손이어야만 된다. 의복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만든 제사장의 공식 복장이다. 의복은 일곱 가지(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 금패)이며 성물로 되어 있다. 관유는 제사장이나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직을 위임할 때와 성전 기구들에 발라 그것들을 정결하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특별히 제조된 기름으로 감람 기름에 몰약 육계 창포 계피 들의 향품을 섞어 만든 거룩한 기름이다. 수송아지는 제사장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 제물로 사용되었다. “모세가 또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속죄제의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레 8:14) 숫양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는 헌신과 충성을 나타내는 번제용 제물로 드리고, 또 다른 한 마리는 화평과 친교를 나타내는 화목제 제물로 각각 사용하였다. 그리고 무교병 한 광주리는 번제와 더불어 드려지는 감사의 소제 예물로 사용되었다. 결국 제사장 위임식은 속죄와 헌신, 화평과 감사가 어우러진 아론 자손의 성별식이었다. 제사장의 위임식은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고 공개적으로 엄숙히 진행시킴으로서 제사장직분이 신적기원과 권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레 7:1)

  “속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는 지극히 거룩하니”(레 7:1) 속건제를 드리는 일을 중심으로 제사장의 임무와 몫을 다시 보충 설명하고 있다. 모든 제사 제물은 세상적인 목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졌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좇아 거룩한 것 곧 성물로 간주되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화제로 올려지는 부분과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지는 부분을 일컬어 거룩한 지성물이라 한다. 속건제의 희생제물은 흠 없는 수양으로서 두 서너 세겔 이상의 가치가 나가는 것으로 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배상의 성격을 지닌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생 제물의 피는 하나님께 보임으로서 제물 드리는 자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상을 예표한다. 제물 가운데 여호와께 불로 태워드리는 것은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힌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이다. 기름은 힘을 공급하는 근원이 된다. 기름을 드린다고 함은 인간의 힘의 근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지성물이란 희생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진 것으로 아론과 그 자손의 남자들만 이 성막의 거룩한 곳, 곧 회막뜰에서 먹어야 한다. 만일 아론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부정하며 더럽게 된 자는 먹을 수 없다. 신자들이 성찬 예식을 거행할 때도 자기를 살피어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8) 제사를 드릴 때에 제사장의 몫이 없는 경우도 있다. 번제로 드리는 제사와 속죄제 가운데 제사장이 드리는 것과 온 회중의 죄사함을 받는 제사는 다 불로 태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물의 남은 것을 제사장에게 준 것은 그들의 생계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주어진 몫이라할 지라도 거룩한 곳, 곧 회막뜰에서만 먹어야 했다. 상번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는 헌신과 봉사를 결심하고 자원하여 드리는 개인적인 특별번제이다. 반면에 사람의 번제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특별 번제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오늘 설교의 내용은 들보를 빼내는 것과 구원의 은혜로 채우는 것이다. 들보란 바리새인의 의로서 자신의 자랑과 유익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야 하고 이웃을 이용하여 욕심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이웃을 섬기며 덕을 세우는 일을 한다. 즉 성령의 역사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늘 부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판단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부정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격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딤전 6:4) 그러므로 악한 자리에 악이 있고, 비판하는데 악이 있고, 뒤에서 속닥이는 것도 악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교회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면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 철천지 원수가 된다. 철천지란 한이 쌓이고 쌓여서 하늘을 뚫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이루기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러하다. 이웃에게 선물을 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나 색깔로 한다. 즉 이것은 자신의 것에 이웃을 예속시키려는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이 만나려는 사람들까지 통제를 하려는 생각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게 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이웃을 자신에게 종속당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이웃이 자신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순간에 떠나간다. 이 때부터 철저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비판의 무서움은 비판한 것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건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왜 그런가하면 비판을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한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4) 비판하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눈속의 들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믿음으로 채워야 된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바리새인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비교하여 말씀하고 있다. 즉 바리새인의 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여야 자신의 의가 드러나는 의이다. 자신의 의를 들보라 하는 것이다. 들보를 빼내지 않으면 외식하는 자가 된다. 왜 그런가하면 사람은 알고 있다고 해서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 비판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말로만 하지 행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달리 말하면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수반되지 않는다함을 말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선을 알고 있는데도 늘 악에게 지는 존재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라”(롬 8:2)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과한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리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제사법을 주신 것은 택함을 받은 백성들과 화목과 교제하기 위함이다. 또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서 말씀을 듣고 화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를 들고 나아가 화목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을 수 없다. 즉 범죄함으로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 이것에 대한 증거로 다윗이 범한 죄를 소개한다. 남편이 있는 여인과 동침을 하였을 때는 죽이라 하였다. 또한 고의로 살인한 자를 죽이라 하였다. 즉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이 치열한 곳으로 보내어 전사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죄는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드려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오셔서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시가 다윗의 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인하여 우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히 10:21) 이렇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어 깨끗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또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신다. 이렇게 약속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