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1의 게시물 표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돈을 쉽게 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유명 상표를 도용하는 것이다. 상품의 재질이나 디자인이 뒤떨어지면서 세련미도 없지만 유명 상표를 붙여서 사람들을 속이고 쉽게 이익을 챙기는 방법이다. 즉 가치가 없는 것인데 유명상표를 붙이므로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거룩함을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경우가 있다.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기독교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볼 수 있다. 학교교육과 병원시설, 복지시설 등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또한 성경공부와 읽기를 통하여 한글을 깨우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는 기독교는 이상한 집단이라고 놀림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거룩함을 지키거나 세울 수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곳이나 잘난 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믿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의 생활 가운데서도 이와 같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 구제, 금식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것들을 누구 앞에서 하는가에 따라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다고 하지만 실수를 한다. 하나님 앞에 나간다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들고 가는 것과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경우이다.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만 자랑스럽게 드렸고,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자랑을 열거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나 반면에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하며 자랑할 것이 없어 하나님의 것을 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으로 드리는 것을 원하셨고, 제물만 자랑하며 드렸던 제사는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어머니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자신을 잉태하였기 때문에 죄인으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사람들은 돈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도 돈을 좋아한다. 돈의 출처는 모르지만 교회만 통하면 거룩한 돈이 된다. 그러면서 쓰이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까지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분별된 것으로 드려야 하는데, 이 분별이라는 것이 새로운 지폐로 만든 새돈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는 출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교회의 헌금은 돈세탁하는 것으로 되고 만다. 우리가 생각하여야할 것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 가운데에서 만일 카지노에서 행운으로 얻은 돈이나, 나라에 낼 세금을 탈세하여 만든 돈, 또는 종업원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얻은 돈의 일부를 드리는 헌금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에 대한 고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것이 근거가 되어 드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감사하여, 그 감사를 기억하며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도박장에서도, 탈세의 현장에서도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에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일을 도왔냐는 것이다. 곁단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분별력이 없이 받은 것으로 인하여 목사나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즉 요즘 교회가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개같이 벌어서 정성껏 바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돈으로 먹고 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기억하며 드리는 예물을 기뻐하신다. 교회가 아무런 돈이나 다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예물에 속지 않으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말씀하셨다. 나는 공의의 재판장이다. 내가 너희를 심판을 할 것인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너희가 내 앞에 나와서 재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물이 마치 네 것 인양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편의 말씀 가운데 구원은 그 값이 엄청나서 돈으로 살수가 없고, 돈으로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만들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도 그들의 재물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데, 저들의 생각에는 저들이 이룬 기업과 거처가 영원히 이를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하였다. 어리석은 자들이 생각은 이 땅 위에 집을 짓고 영원히 대를 이을 것이라고 하고, 그 땅을 자기의 이름으로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여,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한 임무를 부여 받은 자들이다. 책임을 부여 받은 자들이 그 땅을 자기의 이름으로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짐승과 같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다가 떠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것을 잠시 빌려 쓰고 떠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원리를 모르고 사는 자들이 가는 길은, 구원 받은 자들이 기뻐하는 진노의 심판인 멸망의 길이라 한다. 저들은 마치 사망이라는 목자를 따라가는 양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저들의 집에 영광이 더하여 질 때에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떠나갈 때에 가져가는 것도 없고 가는 길이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야 하는 것을 알기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다. 즉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서 감사하고, 가족이 있어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있어서, 따스한 집이 있어서,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어서 기쁜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의 이름에 영광을 더하며 사람들로부터 축하받는 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례요한의 태어남부터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기도하다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당시 제사장은 24반열이 있었는데 사가랴는 아비야의 반열에 속하여서, 그 해의 대속죄일에 드리는 제사의식 가운데 향단에 분향을 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분향을 한 후에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것이다.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와야 하는데 그 엘리야를 보내달라는 기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엘리야를 너의 아내인 엘리사벳이 낳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일은 너의 기쁨도 되고 모든 백성의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운 백성들을 세우는 일을 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가랴는 이 일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는 이 일을 사가랴에게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냈다 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 일의 증거로 사가랴를 말을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고, 그 증거로 벙어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벙어리가 되었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면 이 일을 당한 사가랴는 어떻게 기쁨으로 감당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가랴는 구약의 말씀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는 기쁨으로 감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일하는데서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시는 일을 믿는 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을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사가랴 뿐만이 아니라,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도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이 임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우리가 식사기도를 할 때 보면,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이란 단어가 등장을 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육의 양식은 날마다 세 번씩 먹어야 하지만, 영의 양식은 가끔씩 먹어도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배가 고파서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없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며 시험을 하였다. 배가 부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가나안까지 순종하는가를 시험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죽은 것이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데 걸린 시간이 40년이 걸린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없이 육의 양식만을 먹은 사람들의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배가 부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로 행하지 않았기에 광야에서 죽은 것이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이 말씀은 영의 양식, 육의 양식을 나누며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영의 양식의 중요성이 더 큰 것임을 강조하려 한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마귀의 요구는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확인시키는 사건이 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으로 지나가실 때에 우물가에 여인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는 동안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을 다녀오게 된다. 제자들은 구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니 예수님은 내게는 다른 양식이 있다고 하여 제자들을 놀라게 하셨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양식을 먹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인데, 썩어져가는 육을 위한 양식과 영생을 위한 양식인데 어떤 것에 우선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보면 구원 받은 백성들이 시온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장면은 너무도 감격적이고 영광스럽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그 기쁨이 우리의 현실의 삶까지 연결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즉 신앙인에게는 현실의 문제와 현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현실은 늘 기쁘고 평안한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구원의 영광의 자리인 시온산까지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하나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들을 택하시고 하시려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를 거룩하게 세우려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거룩하고 흠이나 티나 주름이 없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우리도 거룩하게 만드려 하신다. 그런데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에 환난과 박해를 동원하여 사용하신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예수를 믿음으로 인한 핍박과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말씀에 환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 자랑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환난과 핍박이 이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환난과 핍박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환난과 핍박이 옴으로 인하여 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에 안식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러고 환난과 핍박을 주었던 자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으로 갚아 주신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환난과 핍박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 환난과 핍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우리의 지혜와 판단력 부족과 욕심으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허영과 허망된 것을 위하여 무리한 투자와 은행 대출 할부금 상환으로 오는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분명히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을 속이려 한다. 나의 허망된 욕심에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다. 무엇보다도 감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감사를 찬양하는데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다. 이러한 찬양은 구원을 받은 자라면 당연한 것인데, 이것이 혼자 있을 때는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여러 명이 함께 있을 때는 가능한데, 혼자 있을 때는 기쁨이 솟아오르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것일까 생각해 보려 한다. 구원이 내게 어떻게 임하였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시편의 기자들처럼 손뼉을 치며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임한다. 이와 같은 선택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을 로마서 9장에서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 자들을 야곱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음으로 인한 것이다. 야곱은 그의 형인 에서와 쌍둥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선택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인 리브가에게도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셨다.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하여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대로 피조물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또한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이었던 바로에게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셨다. 이 일을 통하여 그 당시 주변에 있는 국가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셨다. 즉 교만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임하여 야곱의 후손으로서 야곱의 영광에 참예한 자가 되었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우리가 기도나 찬양을 하면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방문하셔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61장의 1-2절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대로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의 뜻과 성취하시는 방법을 모르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는 예수님이 어느 동네에서 어떻게 태어나실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어느 지방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할 것인가도 계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예수를 믿은 것이다. 즉 성경해석에 있어서 사람의 생각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서 읽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제 감사절 절기가 성탄절 절기로 이어지게 된다. 거리의 상점들이나 백화점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고 케롤이 울려 퍼지게 된다. 이때에 누구보다도 가슴이 설레 이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견고하고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는데, 이 나라가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면서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이 예수님이 아기로 오시면서 시작이 되면서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선지자들의 계시와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하여 증명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성육신하시기 위하여 유대민족을 사용하신 것이다. 유대민족을 사용하셨다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인류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심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의 여러 민족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삼으시고 그의 나라를 세워 가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한 자가 된 것이고,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구약성경을 읽다가 보면, 조금은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들이 있는데, 전쟁에 나가서 포로로 잡아온 여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더 읽어보면 포로 된 여인의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의 의복을 벗기고 집에 살게 하면서 한 달 동안 시간을 주라는 것이다. 한 달 동안 시간을 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복을 보고 듣게 하여 지난날 삶이 어리석음을 깨달아 백성들과 아버지를 위하여 애곡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는 시간으로 준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들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왕들은 아내를 맞이하면서 여인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함께 가져와 섬길 수 있는 산당을 만들어 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었다. 그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임한다는 예표가 있는 것이다. 유대왕국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지만, 그러나 그들이 섬기던 신이나 또는 세상의 자랑과 힘은 연속적인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로서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상을 가진 가치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 하던 자들에게 나를 따르기 전에 먼저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다. 즉 구원을 받기 이전의 가치관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세상의 가치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하려 하는 것이다. 그 가치관의 다름은 세상 사람들은 장례식에 참여하여 슬픔에 잠겨 곡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오히려 부활신앙에 의지하여 더 기뻐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미래를 위하여 땅에 쌓아두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하늘에 쌓는 것이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보든 이방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면서, 또한 과거 삶의 가치관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며 얼마만큼의 믿음인가를 생각하고 확인을 해 보아야 한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현현하시는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펴신 팔과 크신 손으로 역사하시고, 가나안 땅에 살던 여러 부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곳에 살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부족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 손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음을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죄사함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오심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현현하심이 자주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음은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지시한 말씀을 불순종하여 사랑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앗수르와 바벨론이었다. 저들에 의하여 도시가 멸망을 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믿음이 좋은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근거로 하여 간절한 외침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찾아와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의 내용은 너의 자손과 씨를 통하여 견고한 터 위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되지 않음을 믿은 것이다. 그러니 주의 얼굴을 비추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

너희는 먼저

너희는 먼저 아이다호에 와서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이다. 2011년은 나 개인적으로나 목회적으로나 가정으로나 여러 가지 일들이 참 많았다. 신앙인으로서 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감사의 내용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화로움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세상의 자랑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감사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근거가 되어,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확증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따라 심고 거두고,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심으로 인하여 농작물이 자라고 결실을 맺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누구보다도 더 열심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부지런하여야 한다. 게으른 자에게는 풍요로움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씨를 준비하고 동녘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열심히 사는 자에게는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이제 다가올 내년에는 무엇을 뿌릴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경에서 말씀하셨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 안에는 영원한 생명과 거룩한 의가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창조의 본래의 목적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의존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아야 산다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