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돈을 쉽게 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유명 상표를 도용하는 것이다. 상품의 재질이나 디자인이 뒤떨어지면서 세련미도 없지만 유명 상표를 붙여서 사람들을 속이고 쉽게 이익을 챙기는 방법이다. 즉 가치가 없는 것인데 유명상표를 붙이므로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거룩함을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경우가 있다.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기독교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볼 수 있다. 학교교육과 병원시설, 복지시설 등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또한 성경공부와 읽기를 통하여 한글을 깨우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는 기독교는 이상한 집단이라고 놀림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거룩함을 지키거나 세울 수 없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곳이나 잘난 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믿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의 생활 가운데서도 이와 같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 구제, 금식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것들을 누구 앞에서 하는가에 따라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다고 하지만 실수를 한다. 하나님 앞에 나간다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들고 가는 것과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내는 경우이다.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만 자랑스럽게 드렸고,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자랑을 열거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나 반면에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하며 자랑할 것이 없어 하나님의 것을 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으로 드리는 것을 원하셨고, 제물만 자랑하며 드렸던 제사는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어머니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자신을 잉태하였기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상한 심령을 내어 놓고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상한 심령을 들고 나아오는 자와 죄의 용서를 구하러 오는 자를 향하여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찐 송아지나 헌금 봉투가 두툼하게 하여 나가면 당당해 진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를 자랑하러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필요함을 구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의 잘남을 과시하였던 자이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였던 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는 교회의 목사들이 바리새인의 종교의식의 행위를 강조하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종교적인 행위만을 강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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