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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런던 올림픽 유도경기에서 판정번복 사건 이후에 김 재범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그의 인터뷰 내용은 ‘4 년 전에는 죽기 살기로 했더니 실패하여서 이번에는 죽기로만 했다 ’ 고 한다 . 올림픽을 가기 전부터 온몸에 부상이 심하여 의사조차도 출전을 만류하였다고 한다 . 그러자 김 재범 선수는 부상당한 몸을 6 개월만 버티어서 올림픽에서 메달만 따면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고 하였다 .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영광과 감사를 올리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   김 재범 선수가 인터뷰를 할 때에 온 몸이 전율이 흘렀다 . 죽기 살기로 했을 때는 은메달을 땄는데 , 죽기로만 했더니 금메달을 땄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이어서 익숙하였는데 왠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 목사들이 목회사역을 하면서 죽기 살기로 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 그런데 죽기로만 할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   그래서 사도바울의 고백을 살펴보니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다 . 죽기 살기가 아니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죽을 것과 살 것을 생각하는 것은 두 마음을 소유한 자이다 . 두 가지의 뜻을 두고 하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 오직 한 방향 , 한 길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   두 마음을 가진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아니다 . 마음이 청결하여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 신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기쁨이다 . 올림픽에 출전을 하였으면 메달을 목에 걸어야 한다 . 목에 금사슬을 거는 것은 명예를 상징한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고난과 영광에 참예한 자들이다 . 죽으나 사나 주님의 것이다 . 죽어도 주님의 품에 , 살아 있으면 주님의 이름을 전하므로 영광을 드린다 . 그러니 두려워 할 것이 없다 . 그러므로 죽기로만 하여야 한다 .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지금 런던 올림픽이 시작됐는데 편파판정과 판정번복으로 한국선수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 또한 밤잠을 미루며 응원을 하고 있는 국민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 TV 화면에 심판들이 청색기를 올렸다가 심판위원장에게 무슨 말을 듣고는 다시 백색기가 올라갔다 . 세계의 모든 여론들이 한마디씩 거들자 급기야 심판을 보았던 심판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있고 , 또는 더 이상 로봇이 되기 싫다는 발언을 하였다는 보도가 있다 .   심판들은 권위자의 말을 따랐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자 ,  도리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 심판은 공정하여야 한다 . 경기에 적용되는 규칙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 돈이 개입이 되면 더 이상 공정한 심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   한국에도 몇 년 전부터 프로 경기에 승부를 조작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 금품으로 심판을 매수하기도 하고 , 감독은 돈 받고 일부러 져주기도 하고 , 심지어는 선수들이 직접 가담하기도 하였다 . 그런데 이것은 프로 경기이다 . 승패의 영향에 따라 상금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올림픽게임은 순수한 아마추어들이 참가하는 경기라 한다 . 그런데 지난 시간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 미국은 농구에서 러시아를 이기지 못하게 되자 프로팀 선수들도 참가할 수 있게 법을 바꾸었다 . 또한 야구도 이번 대회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 채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말들이 있다 . 우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과 편파판정이 가장 많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의 메이저 리그 선수들이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   그러니 순수한 스포츠 정신이라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 전 세계 지구촌의 축제라고 한다 . 모든 사람들이 4 년 마다 한 곳에 모여 축제를 하다고 한다 . 그러면서 올림픽은 참가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 그러나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양심과 법은 간 곳이 없고 불신만을 초래하고 있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깨끗한 집과 더러운 집의 차이는 쓰레기가 쓰레기통에 담겨져 있느냐 아니면 너부러져 있느냐의 차이이다 . 어느 집이나 쓰레기가 있다 .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서 상황과 결과가 달라진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 그 복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즉 청결하게 된다는 것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듯 마음의 죄를 잘 해결하여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은 죄를 짓게 되면 죄 용서를 받아야 한다 .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를 미련한 자라고 한다 . 미련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를 지배하고 구속한다고 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 그런데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에게 상실한 마음을 주었다 . 저들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살라는 것이다 . 저들의 생각대로 산다는 것은 모든 불의와 살인과 시기이다 .   미련한 자들은 상실한 마음대로 살면 마지막 날에 진노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오히려 새 땅과 새 하늘이 펼쳐지는 천국을 맞이하게 된다 .   인간의 미련한 마음과 상실한 마음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 하얀 빨래를 더 하얗게 하기 위하여 양잿물로 삶아도 지워지지 않고 , 아무리 좋은 세제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는 흰 털 같이 깨끗하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 바라보되 정직한 행실과 청결한 마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 그래서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것이다 .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의로움을 받게 된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생각하는 자가 아니다 . 교회 안에는 일부러 꾸미는 겸손한 자들이 있고 , 율법주의자들이 있다 .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모든 사람들은 돈을 좋아한다 . 그런데 적당히 먹고 살만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족한 줄로 생각하며 살라 한다 . 돈을 너무 많이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 . 그리고 스스로 근심하는 자리에 빠지게 되고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는 자가 된다 .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평안과 기쁨이 보장되어 있었다 . 그러나 그들은 돈을 좋아하기 시작하였다 . 돈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일들이 생겼다 . 땅을 사서 웅덩이를 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가지 않았다 . 그 이유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오히려 비를 구하는 기도하는 자들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그 지역 원주민이 농사를 짓던 방식을 도입하였다 . 그리고 지역 토속신인 우상 앞에서 절도 하였다 .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대로 되는 듯싶었다 . 그러나 질투의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재앙을 내리신다 . 웅덩이 고인 물을 썩게 하였다 .   토속신을 섬기며 농사를 짓고 있는 백성들에게 가뭄을 내리셨다 . 가뭄을 통하여 거짓 선지자의 제사와 참 선지자의 제사를 구별하였다 . 하나님만이 비와 구름과 바람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게 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또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범죄를 저지른 백성이었다 .   웅덩이를 파던 백성들은 다시는 하나님을 안 보고 살 것처럼 교만하였다 .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 궁핍하였을 때는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말씀에 순종도 잘 하였다 . 그러다 돈을 모으게 되자 마음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였다 . 교만함이 사람에게는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하늘을 찌를 정도이다 . 교회에 한 번 나온 것을 대단한 위세를 떤다 .   차라리 돈이 없었더라면 하면서 사람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 차라리 로토에 당첨되지 않았더라면 가정도 지키고 죽지도 않았을 터인데 하며 시작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일만 스승이 있지만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하였다 . 이 말씀은 목회자들을 향한 것이다 . 목회자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 선생과 아비의 차이이다 . 선생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만 하면 된다 . 그러나 아비는 사랑으로 관심을 갖고 늘 함께 한다 .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극진하다 . 자식이 아비보다 더 잘 되길 바란다 . 그래서 자식을 이용하거나 자식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 그리고 자식이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늘 본인 걱정보다는 자식을 걱정한다 .   아비는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자식의 끼니를 걱정한다 .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식을 먼저 생각한다 . 왜 그러느냐 하면 아비가 낳았기 때문이다 . 그 아이가 나오기 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품고 있었다 .   사도바울은 목회를 아비의 심정으로 하였다 . 전도 여행 속에 교회를 개척하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며 눈물의 기도로 신자들이 되었다 . 그러니 그들을 향한 사랑이 남달랐다 . 바울은 자기가 낳았다고 하였다 . 그래서 바울의 사랑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거짓선지자에게 유혹을 받았을 때도 직접 방문을 하여 혼을 내주고 싶었지만 대신 디도를 보내고 고린도교회를 걱정하며 근심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고린도교회를 걱정하느라고 복음의 문이 열렸어도 근심으로 인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 또한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각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   이와 같은 일은 아비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 아버지는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걱정하신다 . 사도 바울은 아비로서 교인들을 사랑한 것이다 .   요즘은 아비같은 목회자가 많지 않다 . 그리고 신자들도 아비같은 목회자를 싫어한다 . 신자들이 좋아 하는 목회자는 아비같은 목회자가 아닌 이웃집에 사는 아저씨처럼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다 . 옆

이는 너희가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대한민국은 언제부터인가 억지떼만 쓰면 요구 사항을 들어 주게 되었다 . 소위 땡강을 잘 부리면 나라 돈을 잘 타먹게 된 것이다 . 그런 문화가 발달을 하다가 보니 전국 곳곳에서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주먹을 쥐고 비장한 모습으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이것을 소통이라 한다 . 이미 자기들이 정한 방법으로 결과를 얻기 위한 대화이다 .   이와 같은 실수를 기독교인도 쉽게 할 수 있다 . 신자들이 하는 기도가 그렇다 . 기도의 내용은 개인의 억울함이나 분함이다 . 이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기도는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의 용서이다 .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은 같겠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   신자들 가운데도 소위 땡강을 부리는 자들이 있다 .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다 . 이미 자기가 정한 방식과 결과를 달라는 것이다 .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한다 . 즉 하나님의 의가 내 생각과 삶에 적용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   이렇게 무지한 자들의 요구는 다양하다 . 로토 복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첨이 되게 하여 주시고 , 내가 산 주식이 폭등하게 해 달라고 하며 , 실력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빽으로 일류 대학에 붙게 해 달라고 하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 .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높이는 곳이다 . 또한 하늘에서 약속한 것들이 실현되고 세워질 때이다 . 나를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투기나 육체를 위한 욕망 , 탐욕이 가득한 것들이나 이것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능욕하는 자라 하였다 . 기도를 하러 하나님 앞에 나갈 때도 생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사람들은 좋은 옷으로 치장하여 멋있고 아름답게 보인다 .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 그런데 각 사람마다 걱정과 고민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다 . 속사정을 들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아픔을 알 수 없다 . 그런데 죄지은 인생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 . 죄를 짓기 전에는 사람끼리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 죄를 지은 이후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 그래서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시작하여 나뭇잎으로 가리기 시작했다 .   죄라는 것을 쉽게 설명을 하고자 하면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자기의 뜻을 펼치려 한다 . 이와 같은 마음을 같게 되면 교만한 자가 된다 .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흔히 하는 말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는데 누군들 속이지 못하겠냐는 것이다 .   아버지를 떠나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 탕자의 마음이다 . 아버지의 집에서 순종하며 살기 싫다는 것이다 .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버지 앞에서 교만이다 . 그러나 그 교만이 깨져야 한다 . 춥고 배고프고 몸에 병이 나면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방탕이라 한다 . 아버지 없이 목적 없이 세상을 산다는 뜻이다 .   우리는 탕자의 형인 맏아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의 반응에 불만을 토로한다 . 왜 살찐 송아지를 동생에게만 잡아 주냐는 것이다 . 그러자 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진다 . 나의 것이 다 너의 것이다 . 네가 하는 일이 나의 유업을 잇는 일이라는 것이다 . 맏아들도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 나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   형과 동생의 갈등은 아버지를 떠난 것이 문제였고 ,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