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자만이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애통한 자는 복이 있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였다. 슬프고 애통하다는 것은 외부에서부터 내 안으로 들어와 그 내용 자체가 슬픈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 한다. 그렇다면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슬플 수가 있는지 그리고 애통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고 생각을 한다. 과연 그럴까 하며 생각을 하면 고개가 까우뚱 해진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기 전에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이었고, 세상학문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던 자이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깨달은 것이 세상의 것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데는 필요 없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견고하여야 하고, 바울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더욱 빛이 나야 맞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세상의 것들을 쓰레기와 같이 여겼다고 한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것들이 더 경고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마음이 새롭게 창조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한 자로 서 있다. 과거에 내가 자랑하였던 것이 모두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므로 인하여 지난 세월을 허송세월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과거의 것을 자랑하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간다고 외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마음을 새롭게 고치셔서 나의 마음을 정직한 마음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았다 함은 마음이 정직한 마음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새로워짐으로 인하여 과거의 죄악된 마음으로 죄를 지으며 죄에게 억매여 있었던 것이 억울하며, 만일 아직도 죄에게 사로 잡혀 일을 것을 생각하면 애간장이 녹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죄에는 연약한 자이다. 구원을 받았다고 완전한 자가 된 것은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믿음을 가진 자이다.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죄를 짓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갖고 나오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좋아 하신다. 너희의 죄문제를 들고 나와라 그러면 내가 상담해 주고 위로해 주겠다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니 주일날에 예배를 드리러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우리들이 지은 죄와 우리의 상한 심령을 들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애통한 자로 있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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