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가끔 기독교의 소식을 다루는 지면에서 믿음을 지키는 몇 대째 집안 그러면서 3,4대를 이어오는 목사 집안 또는 장로 집안이라며 자랑을 한다. 참 부러운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조상들을 생각해 본다. 아쉬움이 스쳐지나 간다. 그런데 생각이 여기서 끝이 나면 안 된다. 누군가가 시작을 하였기에 이어져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 인한 축복으로 통로로 인하여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 두 아들들이 있다. 아버지가 믿었던 그 하나님을 자식들도 손자들도 믿었던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내가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나로 인하여 믿음이 이어질 수도 있고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내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에 죽어도 좋은데 그리스도의 복음과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바울의 고난을 통하여 교인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고난 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말씀 가운데 바울사도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돌로 맞기도 하고, 태장으로 맞고, 뱀에 물리기도 하는 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또 고난의 자리로 가겠다는 것이 바울의 뜻이다. 바울이 고난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쳤다고 증거한다.
오늘 나의 모습이 후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며 고난을 감수하였던 아버지나 할아버지로 기억에 남게 할 것인가, 아니면 믿기는 하였는데 별 기억이 없는 분들이었다고 남길 것인가, 아니면 교회와 믿음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일에는 악착같이 살았던 사람으로 남길 것인가, 이러한 결정을 하는데 이 일의 결정이 오늘을 어떻게 사는가에 결과가 나타난다.
나의 아버지가 장로님이신데 나도 장로님이 되어서 몇 대를 이어가는 장로의 가문으로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장로가 되어 장로가문을 시작하게 할 것인가,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여야할 문제이다. 바울이 신자들을 위하여 할 말이 많게 믿을 증거를 많이 만든 것과 같이, 내가 후손들을 위하여 할 말이 많게 자랑과 자긍심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 안에 이러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교회 일에는 소극적인데, 세상일에는 악착같이 하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후손들을 위한 것이고 주님을 위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믿는 자라면 오히려 세상의 일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복음을 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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