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2의 게시물 표시

남편들아

오늘부터 우리교회에서는 삼일 동안 아버지학교가 열린다. 하고자 하는 이유는 저희교회뿐만 아니라 이곳 보이시지역에 아버지들의 권위와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다. 세상이 바뀌고 바뀌어서 아버지의 권위와 역할도 많이 변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그동안 유행하였던 유머 가운데 간 큰 남자 시리즈는 모두 아내에게 겁 없이 행동하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을 허락하셨을 때는 그렇지 않다. 산업혁명의 발달과 물질주의로 인하여 아버지들은 돈을 벌어서 오는 일을 담당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정의 살림을 돌보는 일이나 자녀교육은 아내의 몫이 되었다. 세상은 유행에 따라 변하다 보니 자꾸만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신선한 것을 바라기 때문에 오래된 생각과 낙후된 행정도 변화를 요구하여 나이에 비해 일찍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와 보니 남편의 역할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하다. 그러다 보니 아내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변화하는 세대에 대항하여 아버지의 지위와 역할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버지의 지위이다.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즉 제사장의 역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고 말씀을 전하여 주고 해석하여 주어야 한다.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파수꾼으로서의 책임도 있다. 죄로부터의 경계도 하여야 하고, 만약 죄를 지은 자가 있다면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아버지 학교는 아내의 비위나 맞추며 닭 살스럽게 애정행각을 하는 사랑 고백의 자리가 아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과 책임을 깨닫는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라”(엡 5:25)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어제 차창 넘어 보니 길 가에 개나리가 피었다. 노란색은 우리에게 밝은 느낌과 산뜻함과 따스함을 전해 준다. 추웠던 겨울을 지나 이제 따스한 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자연의 몸짓이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개나리는 봄이 왔음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기 때문에 영춘화라고도 한다. 이제 움츠렸던 나무들도 기지개를 켜고 푸른 잎을 낼 것이다. 개나리는 잎보다 먼저 꽃이 피고 잎이 나온다. 꽃이 지고 나면 푸른 잎과 나무만 보아서는 개나리인지 알 수가 없다. 개나리는 봄이 왔다는 것을 노란 꽃으로 세상에 알리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는 조용히 나무 사이에 묻히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먼저 온 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세례요한이다. 그의 임무는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시는 것을 알리는 일이었다.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고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였던 자이다. 그리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는 조용히 떠났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리며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이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분이 오심으로 인하여 공의의 심판이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되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개나리가 노란 꽃을 핌으로 인하여 봄이 오는 것을 세상에 알리듯이 우리들의 삶과 믿음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알려야 한다. 공의의 심판이 있음을 알고 있다면 말과 행위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죄의 심판과 공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또한 천국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로서 이미 이 땅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본 자들이다. 그 기쁨으로 사는 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예비하는 자의 삶인 것이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만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찬양하고 확신 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 모래사막에서 외로이 밤을 지새우며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위험으로부터 보호와 인도를 받은 자가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나를 지켜주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사상이나 개념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므로 내가 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래서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내게 없으면 샘을 낸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믿음에 있어서는 그렇게 시샘을 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다.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아브라함 그러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이 엄청나게 큰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에게 임한 구원의 믿음이나 우리들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도 찾아 가셨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 즉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하여 주신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셨다. 사용하신 방법이 이방인을 만나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순종을 하면 복이 임하는 것이고, 거부를 하게 되면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전도의 사명과 특권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의 전도의 행위를 통해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과 구원은 들음에서 남으로 전도를 하는 것에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이것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게 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기도를 하고 있다. 가지고 있지만 확인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늘 빈궁한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 120편의 저자는 악인들과 함께 사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여기서 악인들이라 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힘으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도록 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가 아닌 것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반대의 사상을 세상 정신이라 한다. 세상 정신이라 함은 인간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한계가 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세상에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게 된다. 그러면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역사의 주인이 되신다.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하심을 따라 우주와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인간의 욕심과 야망이 역사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데 있다. 자기의 생각대로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표현으로는 야망이고 성경적 표현은 육체의 정욕이라 한다.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을 말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자기가 역사의 주인이 되어 보겠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 역시 세월이 지나면 아침에 핀 풀과 같이 시들어져 지고 말 것이다. 즉 생명의 한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시들고 썩어질 것에 썩지 않을 것을 덧입고 사는 사람들이다. 즉 육체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미리 알고 있다. 그래서 신자들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더라고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위하여 배불리 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신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들의 우상은 자기들의 배를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산다. 늘 깨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 이와 같은 가치관의 차이로 인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낚시터에서 일어나는 해프닝 가운데 우리가 빤히 알면서도 웃고 넘어가야할 이들이 있다. 그물 안에 잡혀있는 고기는 요만한데, 방금 전에 놓친 고기는 이따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낚시꾼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이유인즉슨 그 물고기를 놓친 사람이외에는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하는 사람 마음대로 이야기를 해도 확인을 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일어난다. 자기가 옛날에 다른 사람들 잘 돌보아 주어서 지금 그 사람이 유능한 정치인이 됐고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기한테 꼼짝도 못하고 심지어 자기 가방을 들고 다닌 사람이라고 한다. 이렇게 허풍을 떠는 사람이 제 주변에도 여러 명이 있다. 그 말 속에는 자기 자랑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을 짓밟고 내가 올라서려는 야비한 생각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였는데 지금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이미 성공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 채우려는 욕심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난다. 신자의 부족함을 유명한 목사님의 책이나 설교를 들은 것으로 대변하려는 것이다.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는 그 분의 신앙고백의 내용이며 삶이다. 즉 그 목사님의 것이다. 그 목사님의 삶대로 따라 사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체험한 이야기이다. 사실적인 체험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언제인가부터 신앙 간증이 소설이 되고 시나리오가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꿈이 계시가 되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와 묵시를 어떠한 때에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셨는지를 확인하고 그 내용들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때에는 신자들의 이야기가 신앙 간증을 빙자한 허풍과 유세를 떤다. 즉 본인 밖에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 자랑을 한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죄의 성품을 가진 인간은 남의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 하고 사실보다는 더 부풀려서 전한다. 나의 이야기보다는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 단편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를 하면 괜찮은데 내 생각을 더해서 전한다. 그것이 점점 더 커지게 되면 유언비어가 된다.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사실과 전달과정에서 오류가 발생을 하기 때문이다. 즉 전달과정에서 사실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잘 듣지 않고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언비어가 나중에는 불신을 조성하게 되고 누군가가 피해를 보게 되어 있다. 유언비어를 특정 집단에서 고의적으로 퍼트려 반사이익을 얻으려 한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떤 후보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또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려 주가를 조작하여 목돈을 챙기기도 한 사람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엉터리로 예언을 하여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로 하였다. 교회에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교회 안에는 소문이 더 풍성하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을 하면 해결을 하는데 아주 어려움을 겪는다. 소문의 당사자는 사실적인 일이라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면 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이야기에 어느 누가 사실이라고 용서를 빌 사람은 없다. 그러다 보면 소문은 더 퍼지게 되고 당사자는 정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래서 신자들은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분명하게 전달을 하여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는 자리에 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성경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분명하고 또박또박 말을 하여 상대방이 무슨 말인지를 듣게 하여야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알아야 하고 상대방도 들을 수 있어야 하

만일 누가 말하려면

우리 속담 가운데 ‘철들자 망령'이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사람답게 살지 못하다가 변화되어 사람답게 살만 하니까 이제는 정신이 돌아가 사람답게 살지 못함을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말 속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제 구실을 못할 때에 하는 욕이 사람이하인 동물로 비유하여 동물의 이름으로 부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동물의 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새끼라는 단어를 붙인다. 우리는 성장을 하면서 이와 같은 욕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 왜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분노를 느낄 때에 동물을 비유하여 욕을 하는지 몰랐었다. 개나 고양이 들이 꼬리를 흔들면서 반기는 사람이 있다. 아무나 반기거나 좋아 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먹이를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목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을 동물로 비유하는 것은 동물들이 하는 것처럼 하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그래서 먹을 것을 보면 으르렁 거린다. 상대를 죽이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쫒은 다음에야 먹이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자와 약자로 구분이 된다. 자기의 영역과 힘을 자랑하기 위하여 포효를 한다든가 나무에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사람들의 세계는 어떠한가? 동물들이 나타내는 힘과 영욕을 나타내기 위하여 소위 '뻥'이라는 것을 펼친다. 뻥치는 사람들의 특징은 과거의 이야기를 잘한다. 내가 옛날에 어떠했고 이러한 사람이라고 자랑을 한다. 그런데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것이 큰 사건이어서 신문에 난적도 없고, 가문에 자랑이 되어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보통 남자들의 뻥이 많은 이야기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모 정당 대표가 지역 국회의원 후보 결정을 위한 여론 경선에서 부정이 개입되어 사퇴 압력을 받았었다. 부정이 개입이 되었지만 본인이 직접 가담을 하지 않았기에 사퇴할 수 없다고 하다가 결국에는 후보 사퇴를 했다. 그 대표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똑바로 살라고 악을 쓰며 소리 소리를 외쳤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그런 일을 당하자 입장이 바뀌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대표가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신뢰를 잃게 되었다. 우리들도 그와 같은 존재이다. 남을 향하여는 법과 잣대로 심판을 하지만 정작 내 일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너그럽다. 그래서 남이 외도를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된다. 인간의 교만함은 내가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터 문제가 시작이 된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을 하는 근거가 내가 정한 법에 의해서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가 각각의 법들이 충돌을 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자존감으로 형성이 된다. 자존감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초가 되는 개인적 가치와 능력에 대해 느끼는 감각이며,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자기의 위신이나 위엄이나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올바른 사회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의 가치관이 먼저 잘 정립이 되어야 한다. 즉 어떠한 내용물로 채워지는가에 중요성이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참된 가치를 추구하여야 한다. 먼저는 개인이 혼자서 스스로 독립을 하며 더 나아가 다른 이웃에게 도움과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였다. 다른 이웃과의 만남과 공동체의 삶이 있기에 각 자가 먼저 채워야 할 것이 자존감과 자존심이다. 인간이 가장 두렵게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즉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산업혁명의 발달로 인하여 우리는 직접 창을 들고 산이나 들에 나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등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대한민국이 잘 살고 모든 면에서 발전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해외에 살고 있는 교포들에게도 관심이 많음을 이곳 아이다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아이다호는 미국 내에서 적은 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도 아이다호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한다. 그런데 아이다호주 전체에 한인이 약 천 오백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대한민국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 조그마한 아이다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이다호 운전면허 시험 문제가 한국어로도 출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필기시험만 보고 합격을 하면 실기시험은 치루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불과 이삼십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러한 일들이 결정되고 시행되는데 있어서 수고하시는 분들이 있다. 한국에서 파견된 영사님들이 일선에서 아이다호 주정부 관계자들을 만나서 협상을 한 결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교포들의 민원문제도 순회업무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 한국 여권 갱신이나 병역의 관련된 것이나 행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다. 어제 시애틀 영사관에서 오신 영사님과 행정직원의 수고로 인하여 아이다호 보이시에 사시는 교포 삼 십여 분이 혜택을 누렸다. 이곳에서 시애틀까지 거리는 500mile이 넘는 거리이다. 차로는 9시간 정도를 달려가야 하는 거리이다. 영사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상담이 이루어 졌다. 또한 불편한 민원도 건의를 하였다. 영사님은 모든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자세히 답변을 주셨다. 오셨던 모든 분들이 흡족한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과거에 권위적이던 행정 관료들이 현장을 직접 찾아와 교포들의 어려움과 현실의 문제를 함께 나누는 모습 속에 대한민국이 변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다호뿐만이 아니라 시애틀 인근에 있는 여러 주들을 찾아 간다고 한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교인들 가운데 목사를 걱정하게 하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즉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다는 뜻이다. 자기의 마음이 내키면 하나님을 만나러 오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마치 교회에 나오는 것이 목사를 위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과거에 신앙생활을 하여 직분도 받고 중직이었던 교인들이 교회를 출석하지 않기에 심방을 하여 대화를 나누면 목사를 당황하게 하는 말들이 참 많이 있다. 교회에 출석을 안 하는 이유가 교인들 간의 감정싸움이나 목사와의 관계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에 가기 싫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말을 그대로 풀이를 하면 그동안 사람을 보고 교회에 출석을 했다는 것이다. 좀 더 심각하게 표현을 한다면 구원의 기초가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을 안다면 그와 같은 행실을 할 수가 없다. 구원을 얻어 영생의 생명수를 마신 자라면 생명수가 공급이 아니 되면 심한 영적 갈증으로 인하여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생명수를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생명수를 마셔 본적이 있는가를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교회를 떠난 자들에게 설교 시간이 짧다거나 성경공부를 적게 하여 떠났다고 불평하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다. 떠난 이유가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로 인한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직분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불리어 지고 있다. 즉 교회는 출석하지 않아도 중직자의 직분으로 불림을 받고 싶은 것이다. 성경 말씀 가운데 믿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다. 구약의 사건들이 우리들에게 본이 되며 우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공부나 설교나 성경의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 본문에 대한 사건에 대한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시애틀의 날씨는 해양성 기후로서 온화하며 습기가 많다. 동쪽에 있는 캐스캐이드 산맥의 봉우리에는 더 많은 비와 눈이 내린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캐스캐이드 산맥이 가로 막고 있으면서 동쪽의 찬 기운과 부디 치면서 비가 내리는 것이다. 특히 요즘 날씨는 예측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산맥 정상에는 많은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미국 동부에 살다가 서부로 오니 기후의 변화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아이다호는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에 기온이 내려가 가장 춥다. 그리고 낮에 해가 나면 자동차 안에서는 히터를 끄고 심지어는 에어컨을 켜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심지어는 20도 정도이다. 시애틀 지역에 비가 오면 캐시캐이드 산맥 정상에는 눈이 온다. 내가 시애틀에 도착한 날부터 계속 비가 왔다. 심지어는 눈보라가 치기도 했다. 일기예보는 주말까지 비가 계속 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민이 생겼다. 캐시캐이드 산맥을 넘어 가는 일이었다. 목요일의 일정은 시애틀 영사관을 들려서 아버지학교 관계자들과 목사님들을 만나기로 하였었다. 영사관을 방문하기 위하여 다운타운에 도착했을 때에는 우산이 바람에 날아갈 정도로 세차게 비바람이 불었다. 다행이 온도는 50도 이상이기에 오후의 일정을 취소하기로 하고 아이다호로 행하기로 했다. 시애틀에 도착을 하여 나흘 동안 해를 구경도 못함은 물론이고 햇볕도 구경도 못했다. 비가 여름 장마 비처럼 계속 내리고 있다. 뉴욕에서 오신 김 목사님이 내가 타고 가야할 고속도로 90번까지 올라 오셔서 점심식사와 커피를 마시며 뉴욕에서 즐거웠던 일을 기억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둘러 차를 몰고 캐스캐이드 산맥을 향하여 올라갔다. 다행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옆에는 지난밤에 내린 눈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산맥 정상을 향하여 올라 갈수록 비는 더 내렸고 앞차가 뿜어내는 물보라로 인하여 시야를 확보가 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눈이 내리지 않는 것으로 인하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대부분의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풍성한 대접을 받는다. 여러 모양으로 사랑과 정성으로 베풀어 주신다. 나도 예외일 수는 없어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저에게는 곤란한 것이 있다. 아내의 머리를 하러 미장원을 가면 함께 간다. 아내가 파마를 하는 동안에 책을 읽거나 잠을 청하곤 한다. 미용실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저에게 머리를 다듬거나 정리를 하여 준다고 호의를 베푸신다. 괜찮다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의자에 앉게 된다. 나는 아무데에서나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라 단골 이발소가 있다. 조금 손질만 한다는 친절에 거절할 수가 없다. 만일 거절을 하게 되면 섭섭한 마음으로 인하여 서로 간에 거리감이 조성되기에 가급적이면 청에 응하곤 한다. 그런데 조금만 손질을 한다고 하였지만,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면 잠시 후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여야 한다. 헤어스타일이 요즘 아이돌 그룹에서 뜨고 있는 유행으로 깎은 것이다. 거기에다 무스나 스타일링 젤을 바르고 삐죽삐죽 세우기도 한다. 속마음은 속았다는 분노의 감정이 솟아오르지만 그래도 좋은 척하며 웃음 띤 얼굴은 한다. 그러나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뉴욕에서 아이다호로 사역지를 옮겨 왔다. 권사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시골 감자 밭만 있는 곳으로 목회를 하러가는 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는 미용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미용실 주인에게 목사님이 시골로 목회를 하러 가시니 한두 달 정도 미용실에 가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깎아 달라고 부탁을 하신다. 그래서 아니라고 했지만 미용사는 권사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여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군인 같은 머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저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다. 목사가 되니 헤어스타일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짧게 깎은 머리로 인하여 뒷목과 뒤통수가 봄바람에 시려서 다시 겨울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고 있다. 이번 시애틀 방문에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래도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결심과 결단이라는 단어가 있다. 결심은 무엇을 하려고 마음을 정하여 다짐 또는 그 마음을 말하며, 결단은 결정적으로 판단하거나 단정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결정하게 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나 상태가 잘못되었을 때에 한다. 인생이 삶에 있어서 무의미한 것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삭발도 하고 단식도 한다. 즉 중요한 결정에 따른 마음의 굳은 결정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도 결심이나 결단을 하면 굳은 의지를 외적으로 잘 표현을 한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을 외적으로 나타내어 마음이 다시 변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도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경각심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서의 생각이나 삶을 청산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내가 믿고 있는 성경의 말씀이나 교리를 더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말씀과 교리를 지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권위를 세우고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권위에 순복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가 된다. 믿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결심과 결단은 권위 앞에서 순복이다. 즉 더 이상 나의 주장이나 욕심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일에 대표적으로 실패한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자기의 생각과 욕심으로 살았다. 즉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분부나 명령을 따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주일날에는 모두가 거룩한 신자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육일 동안의 삶에서는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세워야 하는데 그곳이 세상이다. 세상 사람은 자기의 권위로 살지만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지키며 살아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애굽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었다. 물론 출애굽 할 당시에 이십 세 이상 된 자들이다. 그들이 죽는 광경을 본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후손들에게 당부를 한다. 너희가 어렸을 때에 보았던 일들을 자손들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을 낸 것들 불 뱀에 물려 죽었던 일들이다. 하나님이 왜 이런 기적을 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내 말을 잘 들으면 내 소유가 되겠고, 거룩한 백성이 되며, 제사장에 나라가 되어 하나님을 이방에 알리는 일을 담당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복이 심지도 않은 포도와 감람나무의 열매를 먹고 짓지도 않은 집을 얻어 살게 된다는 약속이다. 이 복을 계속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그들이 보았던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았고 자기의 자랑으로 살았다. 그래서 자기의 욕심으로 살기 위해서 만든 것이 우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겨서 많은 것을 얻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이방신을 섬기게 되면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진멸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멸망을 당하였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온 것은 모두가 느끼는 일이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의 믿음을 이어갈 세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주일학교 교육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이것은 주일학교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책임인 것이다. 우리들이 자녀의 믿음을 책임져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지만, 우리 자녀들과의 대화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다. 모든 것이 내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지난 닷 새 동안 총 1,700mile을 자동차로 운전을 하며 다녀왔다. 힘들고 어려운 여행이었다. 노회참석을 위하여 벤쿠버로 가는 동안에도 눈보라가 심하게 쳤다. 하루 밤을 자는 동안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고, 다시 시애틀로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이상하게도 내가 가는 곳 마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것이다. 시애틀에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비가 종일토록 세차게 내린 적이 없다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다호에 도착을 하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는데 답장이 오기를 제가 비를 몰고 다녀서 사람들에게는 불편하였지만 나무들에게는 기쁨이 되었을 것이라는 재미있는 답장을 어느 목사님이 주었다. 그래서 다시 답장을 하기를 성령의 은혜를 내리게 하는 목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의 부탁을 했다. 그렇다 나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렇게 답장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목사가 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것은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신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졌다. 그러니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올바르게 전하면 그 말씀이 살아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확한 뜻과 계시를 전하면 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를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해석을 하여야 한다. 오늘의 이단은 성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경의 해석의 문제점이 있다.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을 하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사단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성경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용을 잘못한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저를 위하여 기도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미국 동부지역에 오래 살다가 이곳 서부지역으로 와보니 같은 미국 땅이지만 다른 것이 너무 많다. 동부 쪽의 땅은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갔다면, 서부의 자연은 자연 그대로인 것 같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는 흔적을 느낄 수가 없다. 어제는 아이다호를 떠나서 시애틀에 도착을 하였다. 겹겹이 둘러 서 있는 산들을 넘고 또 넘고, 강을 끼고 달리고 달려서 약 600마일을 왔다. 떠나오기 전에 교회 집사님의 충고가 생각이 났다. 체인을 준비하여 가라는 것이다. 산의 언덕을 올라가면 눈이 내리고 있었고, 고속도로 곳곳에 체인을 감는 장소가 지정되어 있었고 또 산을 내려오면 체인을 풀 수 있도록 넒은 장소도 있었다. 또 어느 곳에서는 바람을 이용한 풍력발전소가 있었고, 바람을 막기 위하여 들판에 나무를 심은 것도 보았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때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의 생각은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자연이 태초 이레에 줄 곳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를 지키며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숙연함을 주었다. 오레곤 포트랜드를 가까이 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봄비 치고는 너무도 세차게 많이 내렸다. 마치 여름 장마비 같았다. 시애틀에 오니 비는 더 오고 교통 체증도 심하였다. 아이다호에는 높은 빌딩이 없다. 제일 높은 빌딩이 20층이다. 시애틀의 다운타운을 지나니 대도시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휘발유 값도 갤런 당 50센트 이상 비싸다. 그래도 한국 분들이 많아서 좋다. 한인 타운에 도착을 하여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미장원이었다. 안식구의 머리 파마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주인 집사님에게 2년 동안 풀리지 않는 파마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다. 안식구가 파마를 하는 동안에 시애틀에 있는 목사님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하시던 박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미장원으로 오셔서 반가운 마음으로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오래 전에 미국의 신문이 실었던 내용 가운데 한국에서 반미를 외치며 미 대사관을 향하여 화염병을 던지는 사진을 소개하였다. 돌을 던지며 화염병을 던지는 학생들 가운데 미국에서 만든 유명 메이커의 상표가 붙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미 대사관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다는 이유이다. 요즘도 한국의 청년들이 미국에서 건너간 아이 폰, 아이패드, 애플 컴퓨터를 쓰면서도 미국을 싫어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반미를 외치는 정치인들 가운데도 자식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고 한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우리는 정확히는 알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반미를 가르치며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인격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옳고 틀린 것을 분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어떻게 성장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치관을 키워 준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치고 친북을 주장하는 선생들은 참으로 묘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전하는 북한이 그렇게 좋다면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살면 된다. 그런데 그들을 가서 살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공교육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한다. 공립학교에 자식을 마음 놓고 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사탄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인간은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죄의 성품으로는 선한 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선한 길로 안내할 수도 없다. 사람들을 속여서 모두를 패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을 섞어서 전통과 규례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과 규례를 전하는 일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가 자랑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또한 너무나 귀한 것을 얻었을 때도 자랑을 한다. 그런데 남들 모두가 가지고 있고 희귀가치가 없는 것을 자랑을 할 때는 잘난체가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자랑하여야 하는가? 만일 기독교인이 권력이나 명예나 부를 자랑한다면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는 만들 수도 없다. 세상이 만들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는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며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얻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망이다. 사망이 종착역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사망을 지나서 새생명을 얻는 부활이다. 새생명을 얻은 자는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돈으로도 아니 되고 학별로도 잘남으로도 아니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랑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땅은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땅을 주신 것은 충만함을 주신 것이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사람들은 도시로 몰리기 시작을 하였고, 과학과 기계술의 발달로 인하여 농사를 짓는데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아서 농촌을 떠났다. 우리가 인류첨단의 우주 산업의 일을 하여 얻은 소득으로도 결국은 땅에서 나는 것을 사기 위함이다. 땅이 가지고 있는 석유, 광물자원, 곡식을 자라게 하는 영양분, 지하수 등을 거론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 이 땅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풍요함을 누리며 살라고 하셨다. 인간은 땅과 깊은 관계가 있다.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죽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흙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살 수 있다. 흙은 우리가 심은 대로 결과를 나타낸다. 콩을 심으면 콩을 주고, 많이 심으면 많이 주고, 적게 심으면 적게 준다. 뿌린 대로 거두고 수고한 대로 얻는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이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의 씨를 심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얻게 되고, 육체의 것들을 뿌린 자들에게는 성령을 거슬리는 일을 하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심술을 부리고 잘난 체하고 싸우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그 결과는 분당과 분열이다. 교회가 지켜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된 것을 한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고 자랑을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교회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도 아니고 정의를 사수하기 위해서 모인 곳도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 되게 하여 준 것을 지키는 곳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없으면 교회는 혼란스럽다.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자랑을 들어주지 않으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이 신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 달라져서는 아니 된다. 삶이 힘이 들고 세상만사 다 귀찮을 때에는 오늘 당장 주님이 오시라고 난리 난리를 친다. 또 형편이 좋아지면 주님이 천천히 오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지금도 신실하시게 진행을 하시고 계시다. 그래서 아버지가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때를 ‘아버지의 때를 따라’라는 표현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때를 따라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오시는 그 날도 아버지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이 세상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고 나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무모한 기도는 내 마음대로 역사를 바꾸겠다는 교만함이다. 내 뜻으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내 뜻대로 살겠으니 하나님은 능력이나 공급하여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부르기 전에 나타나지도 말라고 한다. 그러다가 내가 필요하여 찾으면 빨리 달려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주인은 누구이며, 나의 삶의 주인은 누가 되는 것인가? 내 생각대로 믿다가 예수님이 빨리 아니 오시니깐, 성질 급한 이단들이 집단 자살을 한 사건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신자들은 아버지의 때가 이를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아버지의 때까지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가 되었다. 거룩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거룩한 자가 되어서 주님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에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교회가 있고,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교회가 있다. 건강한 교회는 교회 안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을 하고 복에 복을 더 받는다고 하면서 모든 걱정 근심의 문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요즘 방송을 보면 국회의원 총선을 위한 각 당의 후보자를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탈락자들은 강하게 반발을 하고 있다. 인사의 규정이 잘못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나라의 살림을 위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뽑는다. 그런데 대표적인 기준이 과거에 한 탕 안 해 먹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는 그 자리에 가기만 하면 무지하게 해 먹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세상이 음흉하고 타락을 하다가 보니 국회의원의 자격도 바뀌고 있다. 자고로 국회의원은 국민들이 고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정의가 지켜지는 법을 만들고 정책을 심의하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관의 자격은 지식과 지혜가 많은 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과 무능력하지만 깨끗한 사람으로 채운다면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에도 직분자들을 뽑는 때가 있다. 그래서 후보자의 자격을 정하고 교인들이 직접 뽑는다. 직분자의 후보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나 선거 때가 되면 사람들이 갑자기 후해지기 시작한다. 즉 그동안 안 하던 일들이 벌어진다. 갑자기 자기 집에 초대를 한다든지, 어떤 모임에 기부금도 선뜻 내어 놓고 사랑이 아주 많은 사람처럼 행세를 한다. 민주주의 선거 방식이 비밀 투표에 다수를 얻는 사람이 당선이 된다. 교회도 이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나중에 원망을 하지 않기 위함이다. 즉 누구의 책임이라고 뒤집어씌우지 못하게 함이다. 그래서 순간 사람들의 마음을 뺏으면 많은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이 지금껏 통하여 왔기에 교회가 직분자 선출을 하면 진통에 몸살을 앓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잘하여야 한다. 먼저 모든 사람에게 원망을 듣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동이나 말을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한 아내의 남편으로 정절을 지키며 가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잘 가르치고 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작하지 말라

학생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또는 운동선수가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기초 체력이 튼튼해야 한다. 우리들의 믿음도 기초가 든든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일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얻는 체험적인 교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에서 제 1계명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네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때에야 다른 신의 필요 없음을 알게 된다. 즉 나에게는 하나님 한분으로만 족하다는 고백이다. 만일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다른 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이면 모든 것이 족하다는 믿음의 지식이 있음으로 인하여 제 1계명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며,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 살아 있다.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면서 제 2계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어서 말 못하는 신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죽은 신을 표현하는 것이 우상이 된다. 살아있는 자를 위하여 동상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야 한다. 그 지식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지식까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창조하시고 인간과 함께 무엇을 하시기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실수는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생각을 하여, 하나님은 능력을 가지고 계신데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종교의식을 통하여 얻으려 하는 행위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기독교 교인들은 참 잘 삐진다. 그 삐지는 이유도 다양하다. 모든 것이 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되지를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도 삐지지 않을 일에 기독교 교인들은 삐진다. 자기가 제일 잘 났는데 몰라주거나 자기가 없는데서 어떤 일에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 극치에 달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기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없다는 남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심보가 있다. 교인들과 대화를 하다가 보면 동정을 받으려하고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인정을 해 달라는 일이 참 많다. 그런데 이런 일은 거절을 할 수 없게끔 식사를 마련하거나 선물을 준 후에 있다. 그러니 목사가 이런 일을 몇 번만 당하고 나면 스스로 웅덩이 빠져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누구의 편을 함부로 들어줄 수가 없게 된다. 세상의 어느 집단에서도 없는 것이 기독교의 공동체에는 있다. 그것은 섬김이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세상의 집단은 다수의 힘이나 돈의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가려한다. 또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큰 사람이라 존경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들이다. 나를 이웃보다 낮추는 자들이다.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종의 모습으로 낮은 자들을 위하여 찾아 오셨다. 즉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낮아지기는커녕 교회를 오래 다니면 교만이 점점 높아져 하늘을 찌르는 것이다. 하찮은 것을 트집을 잡아서 분위기를 흐리고 성질을 내어서 공동체의 화평을 깨는 사람들이다. 그리고는 그 일로 인하여 관심을 얻으려 한다. 계속해서 불평이 이어진다. 누구누구는 전화도 아니 하고, 목사는 심방도 안 온다고 온 동네방네에 전화를 한다. 그리고는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더 소리를 높인다. 상황이 더 진전되면 목사는 사랑이 없는 목회자가 되고 만다. 이러한 일을 누가하느냐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목회를 하다가 가장 난감한 것이 좋은 일 하려고 회의하다가 싸우는 일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좋은데 자기의 방법이 제일 잘 났다는 것이다. 신자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 자기의 주장은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또박 또박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손사래를 치거나 얼굴을 찡그리고, 다리를 꼬고 비스듬이 앉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리를 떠나 돌아앉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만일 세상의 모임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물 컵이 머리로 날아올 것을 예상하고 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비인격적인 행위는 아주 야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의 질서는 지킨다. 그러다가 선을 넘게 되면 주먹이 날아오기 때문에 눈치를 살피며 자기의 몸을 지킨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품위를 귀하게 생각하기에 물리적인 방법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물리적인 폭력을 빼고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한다. 언어의 폭력이 가장 난무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 물론 더러운 욕설을 빼지만 상스러운 것을 비유하는 단어와 상대를 비하하는 상징적인 것을 아주 잘 사용한다. 교회는 일이나 행사 자체에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일이나 행사를 통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고 하나가 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과정을 가야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에는 아홉 가지의 성품이 있다. 그런 반면에 육체의 일은 하나 됨을 파괴하는 것이다. 성내고 큰 소리를 냄으로 인하여 온유함이 사라지게 하고, 편을 가르고 분당을 짓고, 거짓말을 퍼트리는 것들이다. 그래서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서 가장 먼저 하여야 할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것을 먼저 지켜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서 선교, 교육, 전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와 하나 되었음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오늘은 삼일절이다. 초등학교 학생들 백 명에게 애국가를 써보라고 했더니 4절까지 쓴 학생은 하나도 없었고 64명은 1절은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중에 18명은 백지로 냈다는 신문의 기사를 보았다. 참으로 암담한 현실이다. 국가의 역사적 민족의식이 없다는 것은 나라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유대인들이 참 대단한 민족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역사적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민족의 아픈 역사를 지금도 기억하면서 금식을 하며 지키고 있다. 그 이유는 다시는 그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과거의 아픔을 아예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삼천 오백년 전의 일들을 기억하며 지금도 절기가 되면 의식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철저히 가르쳐서 꼭 지키도록 하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하나님의 행하신 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홍해를 건넌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사건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기억하여야 할 사건은 유월절 사건이다. 어린 양을 문 앞에서 잡고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므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고,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시작됨으로 인하여 가야할 방향인 가나안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사는 아주 느긋하게 비스듬이 누워서 먹는다. 그러나 유월절 음식은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붙잡고 서서 급히 먹어야 했다. 목적지를 향하여 나가는 긴박함이 있는 것이다. 홍해 바다 속을 보여 줌이 아니고, 광야에 구름을 보기 위함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목적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이적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적을 통하여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임을 알게 하고 섭리와 이치를 통하여 모든 만물 위에 계시는 지존자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하시므로 인하여 이방의 나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하였다